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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덕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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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임시정부 국기.svg
[ 여성 독립 운동가 ]

강원신강혜원공백순권기옥권애라
김경화김덕세김도연김마리아김란사
김순애김알렉산드라김자혜김점순김정숙
김조이김향화김효숙남자현동풍신
민영주박계남박신애박원희박자혜
박차정박현숙방원희부덕량부춘화
신마실라신순호신의경신정숙심영신
안경신안영희양방매어윤희연미당
오건해오광심오희영유관순유순희
윤용자윤희순이병희이신애이의순
이혜련이효정이희경장매성장선희
전수산전월순정정화조마리아조순옥
조신성조화벽주세죽지복영차경신
차미리사차보석최선화최용신최정숙
홍애시덕황마리아황애시덕


본관제주 부씨[1]
출생1911년 11월 5일
전라남도 제주군 구좌면 하도리
(現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2] 1700번지)
사망1939년[3] 10월 4일 (향년 27세)
상훈건국포장 추서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파일:하도강습소 제1회 졸업기념 사진.jpg
하도강습소 제1회 졸업기념 사진. 두 번째 줄 오른쪽으로 두 번째가 부덕량.

대한민국독립유공자, 해녀.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1911년 11월 5일 전라남도 제주군 구좌면 하도리(現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1700번지)에서 아버지 부계준(夫啓俊, 1860 ~ 1935. 2. 23)과 어머니 평택 임씨(1861 ~ 1921. 4. 18)[4]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해녀로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당시 제주에는 관제조합인 해녀어업조합의 부정으로 해녀들이 극심한 피해를 보고 있었다. 이에 그녀를 비롯한 제주도 해녀들은 자생적으로 해녀회를 조직하고 부당한 해녀어업조합에 맞서 나갔는데, 이는 곧 시위투쟁으로 발전하였고 특히 구좌면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다.

1932년 1월 7일 및 12일 구좌면 세화리 장터에서는 부덕량의 주도 하에 1천여 명의 해녀들이 세화주재소의 저지를 뚫고 호미와 비창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시위가 끝난 후 같은 달 24일경, 그녀는 일본 경찰이 제주도 출신 민족운동가들을 체포하려는 것을 몸으로 맞서 저지하려다가 체포되었고, 제주도경찰서 유치장에 투옥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32년 6월 17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출옥했으나, 그 뒤 고문 후유증으로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졌고 이는 폐병으로 이어졌다. 결국 1939년 10월 4일 별세했다. 향년 27세.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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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열공계(悅公系) 18세. 제주부씨족보 권2 204쪽~206쪽에는 누락되어 있다.[2] 인근의 상도리·세화리·평대리와 함께 제주 부씨 집성촌이며, 부좌현 전 국회의원과 독립유공자 부승림·부춘화도 이 마을 출신이다.[3]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참조. 제주해녀박물관 앞에 있는 부덕량의 동상에는 1937년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4] 임행신(林行信)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