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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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가수, 프로듀서, 기업인. JYP엔터테인먼트의 설립자 겸 대표 프로듀서이다. 현역에서 활동하는 올라운더이다.
발군의 춤실력과 끼로 유명하며, 딴따라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되는 댄스 가수이기도 하다. 실제로 딴따라의 인식과 이미지 자체를 바꾼 장본인이기도 하다.[32]
현재 JYP엔터테인먼트의 주식 15.67%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2023년 7월 주식시장에서 시가 기준으로 7,000억원에 달한다. 박진영은 과거에는 JYP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사였지만 현재는 아니다. 그러나 사내 등기이사로서 경영상 법적인 책임을 지는 위치에 있으며 여전히 본사의 대표적인 프로듀서[33] 로서 아티스트 및 프로덕션, 영업 업무를 맡는다. 특히 회사 내 신인 아티스트 런칭 때는 최종 결정 권한을 맡고 있다.
영문 활동명로는 J.Y. Park 혹은 '진영 박'의 알파벳 이니셜인 JYP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프로듀서로서는 필명인 J.Y. Park "The Asiansoul''이라는 이름을 쓴다.
2. 생애[편집]
1990년대에는 가수였고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음원 저작권 수입 1위를 기록한 작곡가이기도 하다. LP, 카세트테이프, CD, 다운로드 & 스트리밍까지 음원시장의 변화를 전부 겪어본 가수이기도 하며[34] 본인의 노래 <살아있네>에서도 언급했다.
2.1. 데뷔 전[편집]
1971년 12월 13일 서울특별시 성동구[35] 중곡동(現 광진구 중곡동)에서 아버지 박명노, 어머니 윤임자 사이에서 1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적지는 전라북도 군산시 대야면 보덕리.[36]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이 많고 해보고 싶은 것은 다 해보는 '사고뭉치‘였단다.
친정어머니가[37]
서울대 사대 출신으로 제가 다니던 학교(한양여고) 교사셨어요. 저도 진영이처럼 음악·미술을 좋아하고 달리기를 잘했지만 그런 끼를 발현할 기회가 없었죠. 늘 가르마를 곱게 타서 옆에 핀을 예쁘게 꽂고 엄마와 함께 등교를 했어요. 학교에 도착해 엄마와 헤어지고 나면 얼른 핀을 빼서 뒷주머니에 꽂는 정도가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탈이었죠. 말하자면 저는 ‘억눌린 박진영’이었던 거예요(웃음). 그래서 ‘내 아이는 반드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시키고, 중요한 일은 스스로 선택하게끔 하겠다’고 다짐했어요.진영이가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이었는데 제가 밥을 하려고 쌀을 씻으면 뒤뚱뒤뚱 걸어와서 춤추는 시늉을 하며 좋아하는 거예요. 진영이가 즐거워하니까 저도 신이 나서 쌀이 으깨지도록 씻곤 했죠
아이큐가 153이에요. 피아노도 누나가 배울 때 조금씩 배웠는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초등학교 다닐 때 전교생 앞에서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했죠.
아버지는 군자금(용돈)을 대고, 저는 밥을 해 먹였어요. 우리 집에 오면 과자도 많고 밥도 잘 해 먹이니까 항상 친구들이 모여들었죠. 진영이가 어릴 때부터 사교성이 좋고 친구들을 끌고 다녔던 게 그 영향이 아니었나 싶어요.
진영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인데 학교에서 연락이 왔어요. 지금 학년에서는 더 배울 게 없으므로 월반을 시키는 게 어떻겠느냐고요. 저희가 학교에 찾아가서 사정한 것도 아니에요. 학교 측에서 아이의 능력을 파악해 시간 낭비 하지 않게끔 해준 거죠. 계속 그 학년에 머물렀더라면 지루해서 공부에 싫증 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점은 미국식 교육의 장점이라고 봐요
어머니 《윤임자》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 직장이 해외 지사로 발령이 나면서 온 가족이 약 2년 반 동안 미국 뉴욕에서 생활했다.# 이때부터 춤에 재능을 보여서 흑인들과 댄스 배틀을 해도 1등을 했다고 한다. 이때의 미국 생활은 박진영으로 하여금 영어를 배우고 마이클 잭슨, 스티비 원더, 스모키 로빈슨을 비롯한 흑인 음악의 매력에 빠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은 미국에 비해 학교 생활이 자유롭지 못하니까 그것 때문에 힘들어 했어요. 특히 아이 몸집이 큰 편이라 책상과 붙어 있는 의자에 몸을 구겨 넣는 게 괴로웠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진영이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으면 제가 클럽에 데려다주고 실컷 춤을 추게 했어요. 대신 술, 담배는 절대 안 된다고 했죠. 그러곤 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약속한 시간에 맞춰 아이가 나오면 다시 차에 태워 집에 데려 오곤 했어요.
아버지 《박명노》
중학교 시절 성적표를 보면 학업 성적이 매우 우수했다. 대부분 '수'이고 극히 일부만 '우'였다. 우등상 수상, 평균 94점, 전교과 우수라고 적힌 것이 눈에 띈다. 담임교사의 평가도 명랑 쾌활, 진취적, 적극적이라고 써있다.#
그 후 박진영은 더욱 음악에 빠져들었고 부모님은 자식의 뜻을 존중해 현재의 "딴따라" 박진영이 탄생했다. 여기에는 아주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는데, 박진영이 고교 시절 음악과 춤에 한창 빠져있던 시기에 부모님과 거래를 하게 된다. 학교 수업 마치고 2시간만 클럽에서 마음껏 춤을 추게 해달라고 간청하자 부모님이 대신 그 이후의 시간은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승낙한다. 이에 박진영은 하교 후 클럽에서 2시간은 그야말로 미친듯이 춤에 몰입하지만 정확히 2시간이 지나면 클럽을 나와 아버지의 차를 타고 인근 독서실에 가서 밤샘을 하면서 공부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진영이가 했던 일 가운데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2007년 상반신 누드를 공개했을 때예요.[38]
저희도 놀랐고, 집안 어른들도 전화하셔서 난리가 났죠. 그래서 진영이를 불러서 물어봤더니 ‘엄마 우리나라는 아직도 남녀가 불평등 해. 달리기를 한다고 치면 남자는 그냥 뛰는데 여자는 눈을 가리고 뛰는 것과 같아. 그걸 바로 잡으려면 성에 대한 고정관념부터 허물어야 해. 나는 그걸 바로 잡기 위해 몸으로 시위를 하는 거야’라고 하더라고요. 구구절절 다 옳은 말인데 제가 무슨 말을 더 하겠어요.사고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이 쳤어요. 오죽하면 진영 아빠가 ‘사고 처리 반장’이겠어요. 늘 조마조마하고 사람 노릇 못하면 어떡하나 애타는 심정이었죠. 그런데 본성이 착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는 않았고, 좀 잘못된 길로 간다 싶어도 참고 기다리면 신기하게도 스스로 알아서 제 자리로 돌아왔어요.
고3 때 시험 공부를 한다며 친구와 도서관에 간다고 나갔는데, 늦은 밤까지 돌아오지 않는 거예요. 제가 찾으러 나갔죠. 그런데 웬걸, 그 밤중에 4차선 아스팔트 위에서 친구와 춤 삼매경에 빠져 있는 거예요. 한데 그 표정이 굉장히 행복해 보였어요. 몰래 숨죽여 지켜보면서 ‘진영이는 저 길이 아니면 안 되겠구나’란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 진영이가 가수로 사업가로 성공한 것도 좋지만 그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해하는 게 부모로선 가장 뿌듯해요.
어머니 《윤임자》
연세대학교 지질학과 90학번이며, 보통 알려진 1994년보다 2년 전인 1992년 '박진영과 신세대'[39] 로 대학 재학 중에 데뷔했지만 이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이 시기부터 작곡가 김형석의 밑으로 들어가 2년 간 온갖 수발을 들며[40] 작곡의 A부터 Z까지 모두 배워오는 등 본격적인 창작의 밑거름을 다지기 시작한다.[41][42]
연세대학교 이과대학 3반 과방에서 1991년-92년 지질학과 MT 앨범을 뒤져보면 박진영이 나온 사진도 한 장 있다.[43] 가수로 데뷔한 뒤 경기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입학했다가 학업성적이 우수하고 성실하며, 학습 의지가 높아 교수 추천을 받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 편입했다.
2.2. 1990년대[편집]
대중들에겐 잘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솔로 데뷔해 히트한 1994년보다 2년 전인 1992년 대학 재학 중에 '박진영과 신세대'라는 이름의 그룹으로 먼저 데뷔했다. 멜론에도 음원이 없을 정도로 희귀한 앨범이지만 2022년 누군가가 전체 수록곡을 유튜브에 올렸다. 디시인사이드 포스트. 이후의 JYP 스타일은 아니고, 김수철이 프로듀싱해서 김수철의 느낌이 많이 나는 음반이다. 이 음반에 수록된 '떠도는 시간'은 2년 후인 1994년 KBS 2TV 주말 드라마 남자는 외로워에 삽입된 동명 곡으로 리메이크 되며 리메이크곡인 '나도야 간다'는 2002년 김수철 리메이크 음반에서 김수철이 이 음반에 실린 버전으로 다시 부르기도 했다. 3번째 트랙에 실린 '돌아보면'은 박진영이 작사/작곡했는데 1995년 '풍요 속의 빈곤'으로 알려진 가수 김부용이 다시 리메이크해서 불렀다.
허나 그룹은 망했고, 아마도 비슷한 시기 90년대 초 라인음향 연습생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구준엽, 강원래, 김송과 함께 김건모 1집 백댄서와 코러스 하던 시절도 이때쯤으로 보인다. 이 시절 박진영은 유창한 영어 실력과 댄스로 회사 눈에 들었는지 박미경, 강원래랑[44] 함께 일명 '프리스타일(가칭)'이란 팀으로 데뷔조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45] 당시 회사에서 각자 개성이 너무 강한 셋을 함께 묶을 컨셉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 결국 팀이 깨지면서 데뷔가 무산되었다. 이때 회사는 박미경을 솔로 가수로 데뷔시키는 걸로 계획을 변경하고 홍일점 멤버를 김송으로 바꿨는데, 박진영이 회사 측에 "우리 팀은 미경이 누나가 아니면 안된다"고 항의했다가 잘려서 회사를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박진영 왈 회사에서 부르길래 데뷔하나 싶어 부푼 기대를 안고 갔는데 팀이 깨졌다며 사실상의 해고 통보를 받았고, 이때 나오면서 길을 걷는데 자기 인생 중 가장 절망스러웠던 날이었다고 한다. 한편 이미 솔로 데뷔가 확정됐던 박미경은 데뷔 준비 중이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보니 친한 동생이던 박진영이 소속사에서 이렇게 제명된 사실을 훗날에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이 시기쯤 작곡가 김형석의 밑으로 들어가 2년 반 동안 수발을 들며[46] 작곡의 A부터 Z까지 모두 배워오는 등 본격적인 창작의 밑거름을 다지기 시작했으니 마냥 우울하기만 한 시절은 아니었다. 이때 김형석이 돈도 안받고, 프로듀서 보조 조수라곤 하지만 사실상 술 친구하면서 작곡, 프로듀싱 공부를 시켜주었기 때문에 박진영은 지금도 김형석을 은인이라고 존겅한다. 이때 김형석 지인 중 한명이 박진영 재능 있다고 미래의 경쟁자 만들지 말라며 그만 가르쳐주라는 말도 했다는데 김형석은 자기가 더 열심히 하면 된다고 쿨하게 씹고 다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훗날 김형석이 예능프로 일타강사에서 말하길 보통 곡 써오는 애들 보면 작곡만 해오는 경우가 많은데, 박진영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작사까지 꾸준히 해오는걸 보면서 특이한 애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때 배운걸 기록한 노트만 100권 분량 정도라고.
가수가 되기 위해 이 소속사 저 소속사 다니며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들려줬지만 번번히 독특한 체형[47] 과 마스크 때문에 거절을 당했다. 그런데 이때 오디션을 보러 다니던 회사 중 한 곳이 바로 SM엔터테인먼트였다.[48] 계속 오디션에서 떨어지는 걸 보다 못한 클론의 구준엽이 박진영을 직접 이수만과 만나게 해서 오디션을 보게 해 줬지만 결국 떨어졌다고 한다.
이때의 일화가 유명한데, 박진영이 본인의 자작곡 날 떠나지마로 오디션을 보고 난 뒤 이수만이 한숨을 쉬면서 "아.. 뭔가 좀 아쉽네. 좀 아닌거 같다" 라고 퇴짜를 놓으면서도 실력 자체는 인정했는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잠깐만!" 이라고 불러세우더니 "너 그 곡만 안 팔래?" 라고 물어봤다고 한다. 결국, 화가 난 박진영은 그 말에 울컥해서 "안 팔아요!" 라고 소리치고 오디션장을 나와버렸다. 지금도 박진영은 그 오디션에서 탈락한 날이 본인의 인생에서 가장 슬픈 날이었다고 회상한다.[49]
그런데 이 일화가 유명해지자, 훗날 이수만이 직접 밝히길 그 이후로 노래와 함께 같이 데뷔를 고려해보려고 했으나[50] 나중에 이수만은 보아의 유투브 채널에 출연해서 "내가 안 뽑은게 아니다" 라고 해명하면서 "세상에 오디션을 한 번만 보러오는 사람이 어디 있냐? 박진영은 본인이 다시 안 온 것이다. 지금이라도 오디션을 다시 보러 오면 내가 받아줄 의향이 있다." 라고 농담을 하였다.[51] 여담이지만, 박진영의 외숙부인 윤장배 전북대 농업생명과학대학 동물소재공학과 교수는 서울대의 락밴드 샌드페블즈의 창립 멤버로 그 다음 2기가 되는 이수만으로서는 박진영을 선배 조카로 볼 수 있다.
그러던 중, 작곡가 김형석이 소속된 기획사의[52] 오디션에 뽑히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김형석은 원래 발라드 곡이었던 날 떠나지마를 댄스 곡으로 편곡하자는 제안을 했고 이를 받아들인 박진영은 데뷔를 위해 절치부심으로 준비한다.
1994년 9월, 박진영은 솔로로 가요계에 혜성같이 데뷔한다. 박진영이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기 전에 '날 떠나지마'는 광고음악으로 대중들에게 먼저 입소문을 탔는데, 이 노래가 삽입된 광고가 오리온 센스민트 광고였고, 이 CF에 등장하는 배우가 바로 당시 신인이었던 정우성이었다. 영상. 때문에 이 CF를 보고 많은 소녀팬들이 잘생긴 외모에 춤과 노래까지 만능인 슈퍼스타의 탄생에 가슴 설레여했으나 막상 데뷔 무대에 올라온 박진영을 보고 실망 혹은 경악(...)했다는 후일담도 있다.[53] 어쨌든 그의 춤과 노래는 가요계에 신선한 충격을 몰고 왔으며[54] , SBS TV가요 20에서 비닐바지를 입고 나와 노래를 부른 영상이 있는데, 이 당시 방송 시간이 저녁 식사 시간이라 시청자들에게 여러가지로 말이 나오기도 했다. 당시 엉덩이춤은 대중에게 남자의 섹시코드를 거의 한국 대중음악 사상 최초로 강조했던 충격적인 안무로 기억된다. 결국 인기에 힘입어 1995년 3월 1일부터 8일까지 음악프로에서 4번의 1위를 수상했으며 후속곡으로 활동한 너의 뒤에서도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55][56]
그의 1집은 1995년까지 47만 장의 음반 판매량을 달성했다. 1995년 2집에서는 청혼가를 타이틀곡으로 해서 활동했으며 그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 , R.ef 등 초대형 가수가 많았음에도 가요톱텐에서는 1위를 차지했고 다른 가요프로그램에서도 1위 후보까지 오르면서 계속된 인기를 구가했다. 특히 후속곡인 '엘리베이터'는 묘한 분위기의 가사나 이소라와 함께 찍은 뮤직비디오의 성적인 분위기가 당대 쇼크를 불러왔지만 당시 경향신문이 '한국의 타이슨'이라는 별칭을 붙였을 정도로 청장년층에선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박진영은 연예인 외모의 잣대가 심한 시기였는데도 불구하고 섹시스타의 이미지, 명문 연세대 재학생이라는 그의 학벌과 조리있는 말투 덕분에 뇌섹남의 이미지, 거기다 자신의 외모로 맘껏 농담하고 즐길 줄 아는 여유까지 겸비해 정말 외모 빼곤[57] (...) 크게 아쉬울게 없는 남자였다. 그리고 특유의 긴 팔은 흐느적거리는 춤선과도 잘 어우러졌고, 그룹도 아닌 솔로 가수가 무대를 장악하는 실력도 있었다.
1997년 3집을 발표해서 <그녀는 예뻤다>로 다시 정상을 밟는다. 해외 진출 실패 후 한물 간거 아니냐는 우려를 잠식시킨 히트곡이다. 조규찬의 코러스가 화제가 된 곡으로, 이 곡 하나만으로도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앨범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썸머 징글벨>, <난> 등이 연달아 히트를 쳤다.
1997년 박진영은 자신의 음반기획사 '태영 기획'을 설립했고 이것이 JYP의 시작이 되었다. 태영기획의 첫 가수는 바로 진주로, 김형석과 함께 프로듀싱해 데뷔시켰다. 진주는 데뷔곡 <난 괜찮아>로 데뷔하자마자 인기 가수가 되면서, 프로듀서로서 매우 좋은 첫 성과를 남기게 되었다. 1호 가수였던 킵식스가 대실패해 한동안 빚까지 져야했던 양현석과는 은근히 대조적이다.
1998년 4집 <허니>, 5집 <Kiss Me>등의 히트곡을 계속 내면서 가수로서 성공했고 싱어송라이터로서도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신승훈은 모 라디오 프로에서, 요즘 동요풍의 노래가 많은데, 박진영씨가 이런 복고풍의 디스코 음악으로 컴백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이 시기쯤 타 소속사의 여가수들과 외부 협업도 꽤 작업했는데 엄정화의 초대, 임상아의 저 바다가 날 막겠어, 인순이의 또. 베이비복스의 Get Up[58] 등이 있다.
2001년 발매한 6집 《Game》도 'Swing Baby', '난 여자가 있는데' 등의 히트곡을 배출하며 흥행에 성공했으나 이후 6년여 간 음반 발매는 멈추었다.
2.3. 2000년대[편집]
프로듀서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시절. 2000년대에는 본인의 음악 활동보다는 프로듀서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 당시 현 하이브의 의장인 방시혁과 콤비로 수많은 노래를 작업했으며 특히 공익근무요원으로 낮에는 주차딱지를 끊고 밤에는 앨범 작업을 하며 1달에 10곡을 만들어내는 워커홀릭 시기였다고 한다. 1990년대 말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한 god가 '국민 그룹'이라고 불릴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59] , 박지윤이 박진영의 프로듀싱을 받으며 '성인식'으로 큰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도 2000년대 초반이다. 2001년 자신의 7년간의 뮤지션 활동을 정리하는 6집 <Game>을 발매한 이후에는 팬들에게 기약 없는 이별을 선언하고 6년 동안 앨범을 발매하지 않았다. 2001년에는 태영기획의 상호를 JYP엔터테인먼트로 바꾸었고, 2002년 1월에는 음악 활동으로 모은 전재산 20억을 털어 이후 17년간 사용하게 되는 JYP 청담동 사옥을 구입했고 이곳에서 많은 스타 가수들이 탄생했다.
2002년 JYP는 총 3팀의 신인 가수를 데뷔시켰다. 첫 타자는 비로, 데뷔곡인 <나쁜 남자>의 반응은 심심했으나 후속곡인 '안녕이란 말 대신'이 히트하며 가요 프로그램 1위에 올랐다. 별의 경우도 '12월 32일'이나 '안부'같은 곡이 상당히 인기를 얻는다. 보컬 그룹으로 결성한 노을의 경우 당시 SK텔레콤에서 런칭한 모바일 서비스 June을 통해 데뷔시켰으며, 이 때문에 '최초의 모바일 가수' 라는 타이틀로 홍보했다. 물론 당시만 하더라도 피쳐폰의 인터넷 접속은 제한적이었던 만큼 현재 스마트폰 시대의 '모바일' 문화와는 거리가 먼 편이긴 하지만... 노을의 경우 푸쉬에 비해 크게 인기를 얻었다고 보기는 애매하지만 나름의 인지도 정도는 얻는데 성공한 편. 2005년에 데뷔앨범이 나온 임정희는 데뷔 전 기대치에 비해 조금 아쉬운 결과를 얻는다. 다만 데뷔곡인 'Music is my life' 자체는 많이 알려진 편이다.
2003년 송대관이 유행가를 부를때 독특한 발걸음이 특징인 전용 안무를 직접 짜줬다. 링크, 링크 2 2002년 SBS 가요대전 시상식에서 우연히 만난 송대관이 자신의 신곡 안무를 짜달라고 대기실에서 즉석으로 부탁했고, 이에 박진영이 간단한 동작을 만들어준 것이라고 한다.
2000년대 후반에는 본격적으로 아이돌 그룹들을 데뷔시키기 시작한다. 2000년대 후반 JYP는 경영상 변화를 맞는데, 이전에 인기를 끌었던 god와 원투, 노을, 량현량하 등이 활동을 잠정 중단하거나 활동이 뜸해지고 박지윤이나 비와 별, 한나 등 솔로 가수들이 타 기획사로 이적하면서 회사가 나름 위태로웠던 시기였다. 그러나 2007년 2월, JYP 최초의 걸그룹인 원더걸스를 데뷔시키고 6개월 뒤 나온 Tell Me는 대한민국에 UCC 열풍과 후크송 열풍을 몰고 온 데다 현재 불고 있는 걸그룹 열풍의 시발점이라고 할 만큼 크게 히트했다. 이때 원더걸스는 가요계 시장의 판도를 바꿨다고 할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고 연이어 'So Hot'과 'Nobody'까지 연이어 대히트를 시킨다.2008년엔 2PM과 2AM이 데뷔한다. 2PM 역시 남성적인 매력을 뽐내며 정상급 보이그룹의 반열에 오른다. 대부분의 곡을 박진영이 프로듀싱한 만큼 프로듀서로서의 역량이 빛을 발하는 시기였다.
거기에 2007년, 6년만에 발표한 본인의 7집 《Back To Stage》도 나름 인기를 얻는다. '니가 사는 그 집'이 독특한 안무와 인상적인 가사를 기반으로 인기를 끌었고, 음악적으로도 인정받아서 흑인 음악 전문 웹진 리드머에서 꼽은 2007년 올해의 알앤비 앨범으로 꼽히기도 했다.[60] 선예와 함께 부른 <대낮에 한 이별> 도 너의 뒤에서와 함께 박진영의 대표적인 발라드 곡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다만 본격적으로 '미국병'에 걸리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미국 진출의 시작은 2003년으로, 직전 해 가수 세 팀을 데뷔시키고 원투까지 만족스러운 성적을 거두자 더 이상 국내에서는 이룰 게 없다고 생각해 미국 시장[61] 을 노린 것이라고 했다. 미국에서도 프로듀서로서 활동을 시도하며 여러 아티스트들과 작업을 하기도 하고 JYP의 미국 지부를 설립해서 소속 연습생들의 미국 데뷔를 추진하기도 했다. 다만 성과는 좋지 않았던 편이다. 특히 2008년에 국내에서 인기가 최절정기에 다달은 원더걸스를 미국으로 데려가 활동하게 하는 바람에 국내 활동이 올스탑되고 멤버가 교체되는 내홍까지 겪게 된 것은 원더걸스 팬덤을 넘어 모든 사람들에게 지탄받는 부분이다. 좋게보자면 훗날 JYP출신 아티스트들의 해외 활동에 밑거름이 된 시행착오로 볼 수도 있겠지만, 어찌됐든 최고의 시점에 국내 활동 기회를 놓치고 내리막길을 타버린 원더걸스의 팬들에게는 아쉬움이 없을 수가 없다. 정리하자면, 2000년대는 주로 프로듀서로 활동하며 여러 가수들을 정상에 올려놓거나 못해도 중박은 치는 등 상당히 성공적인 성과를 얻었으나, 그것을 기반으로 무리한 도전을 했다가 쓰디쓴 실패를 맛 본 시기라 할 수 있다.
2.4. 2010년대[편집]
가수 활동은 기타 일들이 바쁘기도 하고 나이나 시대상 등을 반영했는지 정규앨범은 내지 않고 미니앨범 및 싱글앨범으로 주로 활동중이다. '너뿐이야(2012)', '놀만큼 놀아봤어(2013)' 등이 그렇다. 가수로서의 티켓 파워도 좋은 편인데, 2007년부터 2013년까지 그의 단독 콘서트 '나쁜 파티' 전국투어는 매회 매진을 기록했으며, 콘서트 내용도 수위가 높은 편이지만 짜임새 있는 구성과 박진영의 끼로 무대를 사로잡는다고 한다.[62]
2015년 4월, 래퍼 제시와 함께 '어머님이 누구니'라는 싱글을 발매했다.노래 가사가 재미있고 풍자와 유머를 담아서 각종 패러디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015년 5월부터 7월까지 걸그룹 TWICE 멤버 선발을 위한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SIXTEEN의 단독 심사위원을 맡았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2015년 7월, 무한도전의 2015 영동고속도로 가요제에 가수로 참가했다. 여기서 유재석과 같이 작업하게 되었다. 원래 유재석은 밴드 혁오를 파트너로 선정했으나, 박진영이 이의를 제기하여 유재석을 자신의 파트너로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무도 가요제 최고의 수확은 무한도전내 공인 진상 제왕인 정형돈을 능가하는 진상과 앙탈, 징징이었다. 5부에서 무대에 쓸 효과들을 놓고 게임을 하는데 남성 듀오 그룹명 대기에서 수와진의 발음이 나빠 소화제, 소화기 등으로 들려서 무효 처리될 상황이 되자 울먹이는 목소리까지 더해진 전대미문의 앙탈을 부린 끝에 게임을 한번 더해서 다른 팀에게도 폭죽을 제공 하기로 했다. 형돈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8월에는 원더걸스의 I Feel You의 피처링을 맡기도 했다.[63]
박진영이 워낙 예능 출연이 적다 보니 이런 면이 있는지 알려지지 않았어서 더욱 충격이었으며 또한 객관식 퀴즈를 하는데 정준하가 12번을 찍고 이에 유재석은 보기가 11번까지라고 말하고 이때는 마지막 보기가 정답이라 다음 타자 박진영은 다 차려진 밥상을 먹기만 하면 되는데 난데없이 정답을 1번이라고 해서 파트너 재석과 쩜오 명수를 비롯한 출연진들에게 비난을 한 바가지로 들었다. 그리고 미국식 흥을 가진 자신은 110 BPM 정도의 느릿한 곡을 원하는데 한국식 흥인 재석은 최소 130BPM은 넘길것을 요청하고 이에 첫곡 밤밤밤을 치우고 5번의 시도끝에 110베이스 라인에 130 멜로디를 추가한 I'm so sexy를 만들었다. 전체적인 평은 흥겹고 무난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6년 4월 신곡 '살아있네'를 발매하면서 자신의 가수 생활을 총망라했다. 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를 거치고 가수에서 기획사 사장까지 박진영을 스스로 되돌아보는 자전적인 패러디를 했는데,[64] CEO의 명성에 가려진 박진영의 음악인생을 돌아볼만한 싱글이다. 몇몇 수록곡을 암시하는 장면(엘리베이터)도 있고 무엇보다도 압권은 비닐바지였다. 10월 17일 아이오아이의 마지막 앨범 'Miss me?'의 타이틀곡 '너무너무너무'의 프로듀싱을 맡았다. 음악, 안무, 의상, 뮤직비디오등 전방위에 걸쳐 모든 부분을 직접 제작했다.
2017년에는 5월 15일 컴백하는 TWICE의 앨범인 SIGNAL의 타이틀곡 SIGNAL을 프로듀싱, 동년 12월 11일에 발매된 Merry & Happy의 Merry & Happy 작사를 맡았다. 2018년에는 4윌 9일 컴백하는 TWICE의 앨범인 What is Love?의 타이틀곡 What is Love?를 작사, 작곡했으며 2018년 9월 12일에 발매된 TWICE 일본 음반 정규 앨범 BDZ의 BDZ를 작사, 작곡했다. 2019년 2월 7일, 소니 뮤직과의 합작으로 2020년 11월 데뷔를 목표로 한 일본인 중심의 걸그룹 런칭계획인 <Nizi Project>를 진행한다고 말했다. 일본어 기사 프로젝트 진행을 위해 일본어도 공부했다고 하는데, 유창한 수준은 아니더라도 의사소통에는 문제없는 수준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 <Nizi Project> 방송은 2020년 당시 코로나 상황과 겹쳐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이때 만들어진 그룹 NiziU도 성공하게 된다.
2019년 하반기에는 자신이 작사, 작곡한 ITZY의 ICY와 TWICE의 Feel Special을 연달아 히트시켰다.
2019년 12월, 1일 FEVER (Feat. 수퍼비, BIBI)를 발매했다. 조여정이 뮤직비디오에 특별 출연했다 경쾌한 리듬이 인상적이었다.
2.5. 2020년대[편집]
2020년 8월 12일, 선미와 함께 싱글 When We Disco를 발매했다. 이걸로 광고까지 찍었으니 나름 성공적인 활동을 한 셈이다.
2020년 12월 31일, 나로 바꾸자 (Feat. 비)를 발매했다.정말 처음으로 비와 활동을 했는데 아침마당에도 나가고 아는형님에도 나가며, 활발한 활동을 했다.
2021년 4월 30일, ITZY의 4집 미니앨범 GUESS WHO의 타이틀곡 '마.피.아 In the morning'에 작사, 작곡, 편곡으로 참여했다. 팬들 사이에선 평이 좋지 않았지만, 그나마 마.피.아가 후중독으로 차트 상위권까지 올라간 뒤에는 비판이 좀 잠잠해졌다. 전반적으론 비트는 좋으니 랩 작사만 하지 말라는 평이 많았다.
2021년 6윌 9일, TWICE의 앨범인 Taste of Love의 타이틀곡 Alcohol-Free를 단독으로 작사, 작곡하였으며 편곡으로도 참여하였다.
2022년 11월 30일 ITZY가 CHESHIRE로 컴백하였는데 타이틀곡은 전에 작곡가, 작사가들에게 의뢰해서 만들었다가 박진영이 따로 빼서 골라두었던 곡이었다고 한다. SNEAKERS 이후 4개월 반만이라서 홍보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2022년 11월 21일,Groove Back (Feat. 개코)를 발매했다.그루브 백 챌린지를 유행시켰다.
2022년 12월 22일부터 25일까지 3년만에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였고, 2023년 1월에는 일본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2023년 7월 NMIXX 싱글 3집 A Midsummer NMIXX's Dream에서 타이틀곡 Party O'Clock 작사와 작곡에 참여하여 오랜만에 호평을 받았다.
2023년 8월에는 TWICE 지효의 솔로 미니 1집 ZONE이 발매되었는데 앨범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렸으며 타이틀곡 Killin' Me Good 의 작사와 편곡에 참여했다.
2023년 11월, SNS에서 유행 중인 슬릭백을 박진영도 추고 직원들 반응이 괜찮자 SNS에 올렸는데, 사실 슬릭백과는 거리가 먼 동작이라 네티즌들에게 '누군가는 진실을 말해줘야 한다', '직원들이 간신이다', '회사 생활 잘하네' 등의 소릴 듣기도 했다.# 화제가 되어서인지 JYP 소속/출신 가수들까지 몇몇이 와서 지못미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3. 음반[편집]
자세한 내용은 박진영/음반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평가[편집]
자세한 내용은 박진영/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종교관/우주관[편집]
자서전에 따르면 중학생까지는 개신교 신자였으나 개신교의 교리인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사람을 어떻게 이분법으로 딱 나누어 지옥에 보내기도 하고 천국에 보내기도 하는지 회의감이 들어 교회를 떠나 종교를 잊고 살았다고 한다.
2010년대에 들어 인간이 왜 사는지, 그리고 신은 있는지, 자신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 우주의 진리 대해 고뇌하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매주 7일 중 하루의 시간은 반드시 공부의 시간을 가졌는데, 빅뱅 이론 및 양자역학 등 물리학과, 생물학 관련 서적부터 탐독하기 시작했고, 나아가 그리스도교, 불교, 이슬람 등 온갖 종교 서적을 탐독했다.[65][66]
그러다 답을 찾기 위해 결국 2012년 봄부터 여름까지 몇 달간 아브라함계 종교들의 발상지인 이스라엘로 떠났다.[67] 이스라엘로 떠났을 때 그는 거의 모든 문명기기를 갖고 가지 않았으며, 세상과 거의 단절된 채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전 세계에서 대박을 쳤을 때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68]
2013년 9월 14일자 라디오 스타에 출연해서 '창조설', '지적설계'에 대해 얘기 했다(자막은 '지적설교'라고 잘못 나옴). 세상의 진리를 찾기 위해 물리학과 창조설, 진화론을 모두 공부했다고 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아니라고 밝혔다.[69] 다만 당장은 특정할 수 없는 창조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다 2017년 4월 이후 개신교로 회심하게 되었다.
그런데 재혼한 현재 부인이 구원파의 교주인 유병언의 조카임이 밝혀지자 박진영도 구원파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2018년 디스패치의 보도에 의해 촉발된 구원파 논란에 관해 자신은 기독교 신자는 맞지만 구원파 등 어느 종파에도 묶여있지 않은 초교파임을 밝히며 아내 친척의 종교와 자신은 무관하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파의 특징인 '구원받은 날짜'를 밝힌 것, 성경만 정독했다는 말과 다르게 성경에 나오지 않은 '7년 대환란' 용어의 사용 등 때문에 구원파라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다만 이를 구원파로 의심하는 건 악의적인 해석이라는 의견도 있다. '7년 대환란'이라는 용어도 구원파적인 묵시록 맥락이 아니라. 유대인은 지금 기독교인과 다르다는 내용으로만 쓰였다. 간증글은 구원파가 아닌 일반 개신교의 '내 힘이 아닌 예수의 복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메시지다. 박진영의 글이 특별히 구원파적이지는 않다는 것. 다만 아래 '강의 사이트'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첫열매'의 웹사이트에 나온 신앙고백#을 보면 '거듭남은 취소될 수 없다'라는 명제와 영문 성경으로서 '킹제임스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여 해당 성경을 이용하는 부분은 기성 개신교회와 차이가 있다. 각각 구원파 계열 이단의 불가역적 구원론과 성경침례교의 주장을 대변한다. 특히 불가역적 구원론 중 특히나 이단성이 뚜렷한 유병언 계열의 '회개도 필요없다' 까지는 아니지만, 기성 개신교의 스펙트럼 안에 들어오기는 어려워보인다. 물론, 기성 개신교회가 진리를 독점하는 것은 아니지만 박진영과 '첫열매'는 통상적인 개신교의 신학을 따르지는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개신교의 일부로서 이해할지 여부에 관점차이가 존재할 수 있다.
2023년 11월 23일을 기준으로 위에서 문제된 신앙고백 페이지는 사라졌고, 지금은 '첫열매들' 웹페이지의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페이지https://firstfruitskr.org/shopinfo/believe_in.html가 그 대체물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르면 종전의 의혹들은 어느정도 해소된 것으로 보이는데, 구원파가 불가역적 구원론을 교묘하게 바꾸어 극단적으로 주장할뿐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명제는 전통적인 장로교에서도 믿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이며 개정된 웹페이지에서는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주장을 하고 있고, 바뀐 웹페이지를 기준으로 '킹제임스성경'만의 권위를 인정해야한다는 주장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킹제임스성경이 특별히 다른 번역본에 비하여 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이미 반박된 견해이다[70] .
자신의 깨달음을 정리한 자서전인 '무엇을 위해 살죠?'를 2020년 8월 15일 출판했다.
2020년 10월 유튜브에 첫열매들이라는 채널을 개설해 2022년 1월 29일부터 성경 강의 영상을 올리고 있는 것이 2022년 6월 17일에서야 알려졌다. #1 #2
5.1. 뇌구조[편집]
박진영은 현재 양자역학 공부에 심취해있다고 한다. 양자역학은 원자 수준 규모의 미시세계에 적용되는 물리학인데도 불구하고[71] , 공부를 하다보면 궁극에는 우주와 나의 존재 및 본질에 대해 철학적 고민을 불러일으키는 측면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때문에 양자역학이라는 자연과학을 인문학적으로 오독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가령 코펜하겐 해석[72] 을 잘못 적용해 인간은 한 곳에 고정된 채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주 어느 곳에서든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든가, 관측에 의해 상태가 결정되니 우리의 마음이 모든 법칙을 초월한다든가 하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다.[73][74] 아무래도 박진영 역시 양자역학에 대한 이러한 인문학적 오해 때문에, 존재와 절대자, 행복, 우리가 왜 사는지 등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의 해답을 양자역학에서 찾으려 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박진영이 지질학을 전공한 이과 출신이기 때문에 물리학을 오독할 우려는 없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역사학도 문과니까 역사학 전공자는 문학에 대해서도 잘 알 것이라는 주장이나 다름 없다. 양자역학의 함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련된 수학에 대한 지식이 어지간한 수학 전공자 뺨치는 높은 수준으로 필요하며, 이는 물리학 전공자라도 학부과정 만으로는 벅찬 일이다. 이과 출신이라고는 해도 지질학을 전공한 박진영의 물리학에 대한 식견은 물리학 비전공자와 별반 차이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힐링캠프를 비롯하여 그 동안 여러 프로그램에서 박진영이 한 발언을 종합해볼 때 왜 사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다가 과연 신이 있는지, 우주는 왜 그리고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등 우주와 생명의 기원 및 근본원리에 대해서까지 관심이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도 뇌 혈관이 기형이라고 아는 형님에서 밝혔다. 과거 건강검진을 받았을 때 밝혀진 사실인데 좌뇌로 가는 경동맥이 없고 우뇌로 가는 경동맥만 있다고. 다행히 우뇌측 경동맥이 2배 커서 피가 우뇌를 거쳐 좌뇌로 간다고 한다.
6. 취향[편집]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팬으로 유명하다. 잭슨의 Off the Wall이 자신의 첫 음악의 출발점이라고 할 정도이다.
성내동 사옥에 가보면 프린스, 베이비페이스! 유재하, 마이클 잭슨, 휘트니 휴스턴의 앨범이 걸려있고 바비 브라운, 팀벌랜드 휘트니 휴스턴 제임스 브라운 프린스 방이 있다. 박진영은 어려서부터 AFKN에서 방영하던 소울트레인을 보면서 흑인 음악을 접해왔고 실제로 흑인 음악 덕후이다. 프린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추모글도 인스타에 올렸었다.
예전에 미국 활동을 하면서 친분을 쌓은 미국 가수, 연예인이 많다. 릭 윤과 친하고, 아웃캐스트 빅보이, 알 켈리, 윌스미스, 메이즈, 패리스힐튼, 오마리온, 어셔, 퍼프대디, 타이리스, 데보라콕스, 3LW, LMNT 등과 친분이 있다.
BPM이 120을 넘는 음악을 정말 싫어한다. 이유는 자신은 미국식 흑인 소울의 음악을 좋아하고 그 계통 음악들은 BPM이 느리기 때문. 무도 가요제에서도 흥겹고 빠른 음악을 선호하는 유재석이 BPM을 최소 120은 넘겨야 한다니까 질색팔색을 했다. 그래서 130처럼 들리는 110짜리 음악을 만들 정도. 그런 것치고는 《살아있네》가 155 BPM이라 의문을 자아냈는데 '살아있네'로 컴백할 때 출연한 주간 아이돌에서 120을 넘겨도 자신의 흥에 맞는 음악이면 문제없다고 답했다. 155 정도의 높은 BPM이면 절반인 77.5BPM으로 그루브를 타면 되기 때문에 그런 듯. 사실 흑인 소울도 조금씩 BPM이 올라오긴 했지만... 또한 EDM을 극도로 싫어한다. 일렉트로닉 음악 자체는 신스팝이나 일렉트로-팝의 형태로 잘 구사하지만 빌드-드랍으로 된 EDM 형태의 곡은 선보인 적이 없다.[75]
텔미의 안무는 아예 원더우먼의 동작(정확히는 팔로 총알을 막아내는 동작)에서 그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고양이상을 좋아한다. 박지윤, 안소희 페이가 그의 취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 후배 그룹들인 TWICE와 ITZY 역시 박진영이 선호하는 외모인 다현과 예지가 발탁되었다. NMIXX에서도 규진이 고양이상 포지션을 이어받았다. 원더걸스의 노래에도 섹시한 내 눈은 고소영, 아름다운 다리는 좀 하지원이라는 박진영 작사 노랫말 가사가 나온다. 공교롭게도 고양이상의 섹시한 스타일을 선호한다고 할 수 있다.
주먹을 쥐고 턱을 받치는 자세를 정말 좋아한다. 녕긔
7. 특징[편집]
자세한 내용은 박진영 관련 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시그니처 사운드[편집]
- 박진영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것들 중 하나로 본인이 작곡한 몇몇 노래에 'JYP~'라는 시그니처 사운드를 들을 수 있다.
9. 뮤직비디오[편집]
- 가끔씩 여러 가수들의 뮤직비디오에 카메오로 출연을 한다.
10. 방송 활동[편집]
11. 수상 경력[편집]
12. 기타 활동[편집]
자세한 내용은 박진영/활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3. 인터뷰[편집]
A. 사실 청출어람이 돼야 좋은 거지. 그러도록 더 노력해야지.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사실 좋지 않다. 내 인생의 많은 시간을 다른 아이돌을 가르치고 기르는데 썼기 때문이다.
Q. 역시 JYP 최고 아티스트는 박진영이다?
A. 3년 전에 결심한 것이 있다. 가수 생활은 60세 때 춤하고 노래를 가장 잘할 수 있게 보여주자. 또, 회사는 그 당시 봤더니 1,2위 다투는 회사가 시가 총액 1조를 못 넘었다. 1조를 넘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매출, 영업이익 시뮬레이션도 했다. 그 결과, 지금 상태로는 못 넘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미국에서 유일하게 얻은 거라곤 미국 음반사의 구조를 다 알게 됐다는 것이다. 유니버설, 소니뮤직, 워너 등 대량 생산 체계가 어떻게 가능한지 알게 됐다. 그 다음부터는 박진영이 없는 회사를 만들자고 결심했다. 처음에는 무지하게 당황했다. 원래 뭐든지 내가 결정했는데 그렇지 않으니 말도 안 되는 뮤직비디오나 결과물이 나왔다. 3년의 시행착오를 거쳐 이제야 시스템이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외부작곡가 노래도 시도하고, 그 사이에 30명이 넘는 작곡가를 키웠다. 내 영향력을 최소화하는데 주력했다. 그게 좋은 결과가 되는 것이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 시스템이 거의 맞았다.
Q. 최근 JYP 시스템이 박진영 중심에서 벗어나고 개방적으로 변하고 있다.
A. 우리는 항상 확률이 없으면 내보내는 시스템을 가진 회사다. 다른 회사에 비해서 굉장히 많이 내보낸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음악적인 방향이 안 맞거나 생활 태도가 안 맞거나. 그래서 항상 내보낼 준비를 한다. 성적이 중간 밑으로 떨어지면 연습을 못 나오게 한다. 연습생 친구들의 인생도 중요하니까 다시 돌아갈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한다. 데뷔시킬 자신이 없으면 얼른 내보낸다. 모두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 딸들인데 붙잡을 수 없다. 아닐 때는 바로바로 내보낼 준비를 시킨다.
Q. JYP 연습생 출신 가수들이 가요계에 많다.
A. 우선, 레이블을 10개 만드는 게 목표다. AQE, 빅히트라는 레이블로 시행착오를 겪었다. 아직 아이돌로 레이블로 하는 것은 어렵다. 뮤지션 위주의 레이블을 만들면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스튜디오 J’를 만들고 지소울과 피프틴앤드를 넣었다. 지소울은 데뷔를 잘했고, 피프틴앤드는 수익률이 좋았다. 이런 식으로 10개가 넘는 레이블을 운영하는 노하우를 개발하고 있다. 내가 죽어도 잘될 회사를 만들고 싶다. 스티브 잡스가 죽고 주가가 반토막 나는 것을 보고 내가 없는 회사를 어떻게든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1,2위를 다툴 때는 그 실험을 못하는데 우리가 뒤쳐지니 뭐든지 할 수 있겠더라.
Q. 앞으로 목표가 있다면?(2015년 텐아시아의 인터뷰)
A. 사업적인 건 꿈 꿀 때만 재미있어요. 제가 참여하는 회의는 A&R 회의뿐이에요. 크리에이티브한 모임인데, 전 그 멤버의 15분의 1에 불과하죠. 저 말고 14명을 어떻게 뽑을지에 오랜 시간을 썼어요. 그리고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회사 사장과 2시간 정도 얘기를 하는게 경영의 다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무대에 선다는 건, 육체적인 쾌락의 끝이에요. 사업은 제정신에 하는 거고, 무대는 환각상태라고 보면 되죠.
Q. 경영은 싫고, 무대 위에 설 때가 제일 좋다고 했는데 이런 얘기를 할 때도 기분이 참 좋아보여요?(2015년 중앙일보 인터뷰)
A.친구들을 볼 때는 건강함을 최고의 가치로 보는데, 저는 노래를 아무리 잘하고 춤을 아무리 잘 춰도 밝고 맑고 건강하지 않으면 못 하겠어요. 그런 친구들의 꿈을 왜 굳이 이뤄줘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이 행복한 게 좋아요. 실력과 인성, 둘 중 하나가 부족하면 최대한 공존하게끔 도와주는데 제 꿈은 둘다 갖춘 친구들을 보는 것이죠.
Q.소속가수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A.최고로 존경한다. 그 다음은 남보원 백남봉 윤문식 선생님. 10년 전 공 여사님 공연을 보러갔는데 2시간 동안 노래하다 연기하다 자유자재로 넘나드는데 와 이게 딴따라고 광대구나 싶더라. 저 역시도 광대이길 원한다.
Q. 공옥진 여사를 존경한다고 하던데 그런가?
A. 난 사장님, 대표로 안불린다. 회사에서 제 공식 호칭은 박진영씨다. 위로 올라가는 것에 대한 공포가 크다. 외로울까봐 그렇다기보다 광대짓을 못할까봐, 제가 남을 울리고 웃기는 능력이 떨어질까봐 두려워서다.
Q.한 회사의 대표를 만만하게 보기란 쉽지 않다.
A. 프로듀서 할 때는 옆에 있는 사람들 쓰러진다. 까탈스럽고 이틀씩 밤새고 그러니까. 또 확실히 날라리가 맞는데 공부도 좋아한다. 요즘 1주일에 하루는 다른 공부한다. 세상과 인간은 누가 왜 만들었는지 알고 싶다. 결론적으로는 재밌는 사람같다.진지하면서도 바보같기도 해야 재미잖나.
Q.박진영은 어떤 사람인가?(2012년 노컷뉴스 인터뷰)
14. 논란 및 사건 사고[편집]
자세한 내용은 박진영/논란 및 사건 사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5. 여담[편집]
자세한 내용은 박진영/여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