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프리츠 텍트마이어

덤프버전 :

파일:Fritz Tegtmeier.png
제2차 세계 대전 전투기 에이스 일람
[ 펼치기 · 접기 ]



프리츠 텍트마이어(Fritz Tegtmeier : 1917. 7. 30~1999. 4. 8)

1. 자대 배치와 사고
2. 독소전에서 활약
3. 사병에서 장교로
4. 제트전투기를 몰다
5. 서훈



1. 자대 배치와 사고[편집]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격추수 146대를 기록한 에이스 파일럿 프리츠 텍트마이어 중위는 곡엽기사철십자 훈장이 주어질 예정이었으나 대전 말기의 혼란 때문에 수상하지 못하였다. 베스트팔렌주의 준데른(Sundern)에서 태어난 그는 비행병 계급을 달고 1940년 10월에 제54전투항공단 예하의 제2비행중대의 말단 편대원으로 배속되면서 자신의 전투기 파일럿 경력을 열어나갔다. 자대에 도착한지 얼마 안된 11월 17일에 타고 있던 메서슈미트 전투기의 엔진에 불이 붙은 채로 아슬아슬하게 불시착시켜 부상을 입었지만, 다행히도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2. 독소전에서 활약[편집]


부상에서 회복한 텍트마이어가 원대로 복귀한 것은 이듬해 봄이었다.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이 발동되면서 대소련전에 참가한 비행병 텍트마이어는 첫날에 자신의 첫 전과를 올렸다. 그 후 격추수가 7대에 도달한 9월 10일에는 타고 있던 Bf 109가 우군기인 Bf 110과 공중 충돌을 일으켰고, 간신히 낙하산으로 탈출했지만 또다시 중상을 입고 말았다. 거의 7개월간을 병원에서 보낸 그는 다시 해가 바뀐 1942년 4월에 전선으로 복귀했고, 이번에는 제1비행대에 배속되었다. 1942년말까지 그의 격추수는 29대까지 늘어나 있었다. 1943년 1월 23일에는 37대째, 그리고 5월 3일에는 53번째 승리를 거두는 등 텍트마이어는 이번에야말로 큰 사고 없이 순조롭게 자신의 스코어를 늘려났다. 그 후, 예비 전투비행단의 비행 교관 임무를 잠시 맡았다가 9월에 다시 전선으로 돌아왔다.



3. 사병에서 장교로[편집]


제54전투항공단 제3비행대에 배속된 텍트마이어 상사는 11월까지 75대의 격추수를 헤아리게 되어 어엿한 엑스페아텐 파일럿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1944년 3월 28일에는 99번째 적기 격추를 기념이라도 하듯이 기사철십자장을 수여받게 되었다. 4월 20일에는 드디어 소위로 승진해 장교가 된 텍트마이어는 5월 3일에 100대째를 돌파했다. 그는 독일 공군에서 71번째로 꼬리날개에 센튜리 마크를 그려 넣은 베테랑 에이스가 되었다. 그는 10월부터는 제3비행중대장에 취임해 중대원을 이끌게 된다.



4. 제트전투기를 몰다[편집]


1944년말까지, 그의 격추수는 139대에 도달했다. 1945년 3월부터 프리츠 텍트마이어는 제트 전투기 Me 262의 기종 전환 훈련을 받기 위해 JG 7로 전속을 갔고 그곳에서 패전을 맞을 때까지 146번의 승리를 기록하게 된다. 이 기록을 쌓기 위해 그는 503회의 실전 출격을 거듭해야만 했다.


5. 서훈[편집]


2급 철십자 훈장 / 1급 철십자 훈장
공군 명예컵 (1942년 10월 5일)
독일 황금십자장 (1943년 1월 23일)
기사철십자 훈장 (1944년 3월 28일)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4 12:35:11에 나무위키 프리츠 텍트마이어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