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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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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미국의 정치인이자 변호사로 미국 하원의 제49대 연방하원의장을 지냈다.
2. 생애[편집]
판사 출신 아버지와 교사 출신 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폴리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이라는 가족의 배경 덕분에 가톨릭 신자로 자랐다.
이후 곤자가 대학을 나온 후 워싱턴 대학교에서 로스쿨을 졸업한 뒤 변호사가 되었다. 이후 본인이 태어나고 자라난 스포캔 카운티 검찰청 부검사, 이후 곤자가 대학교에서 법학을 가르치는 등 활동하다가 1961년 민주당 헨리 잭슨 연방 상원의원의 제의를 받아 참모진에 합류해 워싱턴 D.C.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하게 됐다.
1964년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서 고향인 스포캔을 포함하는 워싱턴 5구에 출마, 지역구를 22년간 지켜왔던 공화당의 월트 호런 의원을 꺾고 당선되면서 선출직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1995년, 30년만에 연방 하원의원 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워싱턴 D.C.를 주무대로 활동하다 2년 뒤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주일미국대사로 임명되어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취임한 2001년까지 직을 유지했다. 그리고 이게 폴리의 마지막 공직 생활이 되었다.
2.1. 하원의장 시절[편집]
1989년 6월, 짐 라이트 연방 하원의장이 부패 문제로 의회 윤리위원회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사임하게 되자 하원 다수당 원내대표였던 폴리가 유력한 후임 의장으로 거론되었다. 결국 6월 6일 있었던 하원의장 선거에서 공화당의 로버트 H. 미셀 원내대표를 251 대 164로 손쉽게 누르고 승리해 제49대 하원의장에 취임했다.#
임기 초반을 공화당의 조지 H. W. 부시 대통령과 함께 하게 됐는데 레이건 이래로 공화당 정부가 경시하던 대기청정법, 장애인 보호 강화를 담은 장애인법 및 장애인 교육법을 하원에서 적극적으로 통과시키면서 부시 행정부를 압박했다. 특히 1990년에는 개인 소득세 인상과 공제 범위를 제한하는 내용을 담은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2년전 대선에서 세금 인상은 절대 없다고 확약[1] 해 지지를 받았던 부시가 별다른 반발 없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공약 파기 논란이 벌어졌고[2] 이것이 1992년 대선에서 부시의 발목을 잡게 된다.
1992년 대선에서 빌 클린턴이 승리하고 이듬해 1월 취임하면서부터는 역할을 바꿔 정부 정책을 강력하게 뒷받침했는데 특히 가족 문제 및 의료 문제로 직원이 휴가를 요청할 때 최소 무급 휴가를 부여하도록 의무화한 가족 및 의료휴가법, NAFTA 인준, 총기 구매자에 대한 조사 및 대기기간을 의무화한 브래디법, 그리고 성소수자들의 군 복무를 보장 Don't ask, don't tell 정책 등을 줄줄이 입법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행복한 시기가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기간은 불과 2년을 넘지 않았다. 1994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의 법조인 출신 신인 조지 네더컷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1862년 이후 132년만에 처음으로 연방하원의장이 선거에서 낙선하고 만것이다.
연방 단위 선출직에 대해서 임기 제한을 시도하던 워싱턴 주정부에 반대해 1991년 소송을 제기해 승리한 바 있는데, 공화당의 네더컷 후보가 이를 저격하면서 자신은 당선되면 3선을 초과해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3] 결국 세대교체론을 이겨내지 못하고 패배를 망연자실하게 받아들인 후, "민주당과 공화당은 하원에서 대통령과 함께 여러 국가문제를 해결했으며, 특히 오늘날 진실로 필요한 것이다."라며 낙선 소감을 밝혔다.#
톰 폴리의 낙선 이후 워싱턴 5구는 공화당의 강세가 뚜렷해졌고, 민주당 후보는 득표율 45%를 넘기지 못했다.
2.2. 사망[편집]
버락 오바마를 다시 한번 대선 후보로 선출한 2012년 민주당 전당대회에 워싱턴 대표로 모습을 나타내는 등 건강한듯 보였으나 이후 뇌졸중과 폐렴으로 인해 간병을 받다가 2013년 10월 18일, 향년 84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3. 선거 이력[편집]
4. 여담[편집]
- 처음 당선되어 의회에 입성한 1964년부터 1994년 선거에서 정치 신인에게 패해 충격적으로 낙선할 때까지 30년간 민주당이 하원에서 다수당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원한 다수당 의원이라는 별명이 있다.
[1] "Read my lips: no new taxes" (내 입술을 읽으세요, 더이상 새로운 세금은 없습니다.)라는 구절로 유명하다.[2] 사실 부시 대통령으로서는 별 방법이 없었다. 연방 상·하원을 민주당이 모두 장악한 상태이기도 했고, 걸프전의 영향으로 예상밖 경기 침체가 시작되면서 세수 추계가 완전히 예상을 벗어나 본인이 주장한 재정 균형을 위해서는 세금 인상을 받아들여야만 했다.[3] 하지만 이후 네더컷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연방 하원의원 5선까지 한 후,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나가 패하면서 정치 행보를 마감했다.[4] 회기 중 연방하원의장 취임[5] 1862년 이후 132년만에 연방하원의장 낙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