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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틴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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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어: Zbrodnia katyńska[1]
러시아어: Катынский расстрел[2]
독일어: Massaker von Katyn, Massenmord, Massanerschießungen von Katyn (Katyn)
영어: Katyn Forest Massacre
카틴 숲의 학살
1. 개요[편집]
카틴 학살은 1940년 4월 3일부터 약 2개월 동안 소련의 NKVD가 스몰렌스크 근방 카틴 숲(Katyn Forest)을 비롯한 소련 서부 일대에 수용된 폴란드 제2공화국의 엘리트 2만 1,768명을 학살한 사건을 일컫는다. 사건의 명칭은 카틴 학살이지만, 실제로는 소련 서부 전역의 포로 수용소에서 학살이 벌어졌으며, 최초로 집단 매장지가 발견된 카틴 숲의 명칭을 따서 카틴 학살이란 이름이 붙었다.
2. 전개[편집]
2.1. 폴란드 침공과 폴란드 포로의 수용[편집]
1939년 8월 23일 나치 독일과 소련의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었고 일주일 뒤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발발한 후 폴란드는 두 국가에 분할 점령되었다. 당시 소련군에 사로잡힌 폴란드 포로는 25만 명 정도였다. 병사들은 대부분 즉시 석방되었지만 폴란드군 장교와 부사관 수만 명은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수용된 이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짐승 같은 대우를 받으며 고통을 받았다. 이후 소련군은 포로 관리를 대숙청으로 악명 높은 NKVD에게 넘겨주었다.
2.2. 1940년 4~6월 폴란드 포로의 학살[편집]
NKVD는 1년간 포로와의 개별 인터뷰를 통해 개별 포로의 성향을 파악했다. 이후 NKVD의 수장 라브렌티 베리야는 1940년 3월 5일 반소적이거나 소련에 비협조적인 자들은 소련의 안보에 위험하니 즉시 제거하자고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의견을 상신했고 스탈린이 이를 승인함으로써 학살이 최종 결정되었다.
이후 폴란드군 포로들을 재분류하여 포로 2만 5,736명(1명 제외 전원 남성)을 카틴 숲을 비롯한 다른 지역으로 끌고 갔고 NKVD는 미리 암매장하려고 파 둔 여러 곳에서 이들 중 22,000여 명을 1940년 4월부터 5월까지 총살했다. 총살당한 이들 중 8,000여 명은 소련의 폴란드 침공 당시 소련에 포로로 잡힌 폴란드 장교였으며, 6,000여 명은 폴란드 경찰, 나머지는 폴란드 지식인이었다. 카틴에서만 4,400여 명, 민스크에서 3,870명, 하르코프에서 3,800여 명, 메드노예(Mednoye)[3] 에서 6,300여 명이 학살당했다. 이외에 키예프와 헤르손에서도 학살이 벌어졌다.
카틴에서만 제독 1명, 장군 2명, 육군 대령 24명, 해군 대령 17명, 중령 79명, 소령 258명, 대위 654명, 하사관 3,420명, 군종 신부 7명이 학살당했다. 또한 200여 명이 넘는 조종사와 대학교수 20명, 변호사, 기술자, 교사 수백여 명, 난민 131명, 대지주 3명 등도 학살당했다. 카틴 이외에도 민스크, 하르코프, 메드노예 등지에서 학살된 장교들의 숫자까지 합치면 장성급 인사만 14명이 학살당했다. 학살 피해자 중 8%는 폴란드 유대인이었다. 이러한 학살의 현장에서 막판 분류 작업으로 살아남은 천하의 행운아는 395명에 불과했다. 야니나 안토니나 레반도프스카(Janina Antonina Lewandowska, 1908 ~ 1940) 육군 중위를 제외하고 살해된 사람은 전부 남성이었다. 학살이 끝난 후 NKVD는 불도저로 이러한 시신을 흙으로 덮어 버려 사실을 은폐했고 그대로 모든 비극이 묻히는 듯했다.
공식적인 명칭은 "카틴 학살"이지만 실제로는 스몰렌스크 부근의 카틴에서만 학살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카틴에서 죽은 사람들은 코젤스크 수용소에서 나왔고, 오스타시코프 수용소의 포로들은 모스크바 북부의 칼리닌 부근에서 학살되었으며 스타로벨스크 수용소의 포로들은 하리코프 부근에서 학살되었다. 카틴 숲에서 학살의 흔적이 최초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카틴 학살로 알려졌을 따름이다. 또한 장교들뿐만 아니라 부사관들도 죽었는데 사망자 숫자로는 부사관 계층이 제일 많이 죽었다. "계급각성"이 이루어지 않는다고 판정한 노동자와 농민 출신 병사 250명도 학살되었다고 인정된다.
집단학살 현장에서 발견된 폴란드 육군 장교의 견장과 지폐
2.3. 바르바로사 작전 직후 소련의 추가 학살[편집]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이 소련을 전면 침공하자, 소련의 국경 경비대와 NKVD은 서부에 산재한 수용소의 재소자들을 대거 학살했다. 베리야는 원래 서부의 재소자들을 소련 내지로 이송하려고 했으나 독일의 진격 속도가 상상을 초월하자 24일 소련 서부의 모든 정치범을 사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에 북으로는 탈린에서 남으로는 하리코프에 이르기까지, 소련 서부의 각 수용소에서 수백~수천여 명의 재소자들이 학살되었다. 이 학살로 살해된 사람은 1939년 소련이 병합한 폴란드 동부에서만 2만여 명에 달했고, 1939년 이전에도 소련령이었던 지역에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가장 많은 피해자가 발생한 곳은 우크라이나 서부의 대도시인 리비우로 이곳에서만 최소 3,500명이 학살되었다.
카틴 학살과 달리 1941년에 벌어진 학살은 소련 정권의 반대파로 여겨진 자들을 제거하는 것이었으므로 비폴란드인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한 학자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인이 희생자의 70%를 차지한 것으로 추정된다.관련 글
2.4. 발견[편집]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자 영국에 있던 폴란드 망명정부는 소련과 협력하여 독일군에게 저항하기를 합의하고, 폴란드군 포로를 망명정부의 병력으로 활용할 테니 보내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폴란드군 포로들은 도망쳐서 찾을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500여 명만 영국으로 갔을 뿐 소련이 수용했다고 추정한 포로 수천~수만 명의 행방이 묘연했다. 물론 폴란드 인민군 등 공산 계열 폴란드군에 편입된 병력도 적지 않았지만 아예 행방불명 상태가 된 포로가 상당히 많았음이 문제였다. 그 와중에 이들의 행방을 묻는 폴란드 망명정부에게 스탈린은 "죄다 만주로 도망가 버렸다."고 대답했다.
이후 1943년 2월 18일, 독일군은 스몰렌스크에서 10마일 떨어진 카틴 숲에서 4,000여 명이 살해당하여 암매장된 사실을 발견했다.[4] 이 사체들이 입은 복장의 형태, 그리고 실종자들의 명단을 찾아본 결과 이들은 폴란드군 장교, 지식인, 교사, 지역 유지, 경찰, 가톨릭 사제, 가톨릭 수도자 등 폴란드 핵심층들[5] 인 것으로 밝혀졌다. 보고를 받은 독일 중부집단군의 정보장교 루돌프 크리스토프 폰 게르스도르프(Rudolf Christoph Freiherr von Gersdorff)는 국제적인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고 직감하여 카틴 학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상신, 보고를 받은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반소 선전에 사용하여 연합국의 공동보조를 균열시킬 목적으로 4월 9일 사건의 전면적인 조사를 명령했다. 가짜 증거라도 만들어서 소련을 매도해야 할 판인데 진짜 학살 증거가 나왔으니 당연한 일.[6]
1939년 스위스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발급된 폴란드 의사 지그문트 스워닌스키(Zygmunt Słoniński) 박사의 여권. 폴란드 육군 예비역 군의 소령이기도 했던 그는 소련군에 체포되어 1년 후 총살당했다.
독일의 안내를 받아 학살 현장의 묘지를 방문한 비시 프랑스 수뇌부.
본래 독일은 폴란드 적십자사와 접촉하여 사건을 공표할 예정이었으나, 예기치 않게 4월 13일부터 세계 각국에서 학살에 관한 보도가 빗발쳤다. 이후 독일의 베를린 방송도 카틴 학살에 관한 정보를 공식적으로 보도했다. 이틀 후 소련은 독일의 주장에 반박하고, 오히려 '1941년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포로들을 학살한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이들에 따르면 1941년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이 스몰렌스크 인근에서 작업에 동원된 폴란드인들을 붙잡아 살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로가 스몰렌스크에 있었다는 설명은 폴란드에 전달된 적이 없었고, 때문에 처음에는 학살을 반신반의하던 폴란드 망명정부도 소련에 대한 의혹을 갖게 되었다. 이미 발굴된 시신 250구를 조사한 적십자사는 시신이 폴란드 포로임을 확인하고 이들이 1940년 3월에서 4월에 걸쳐 살해된 것으로 추정했다. 실제로는 1940년 4월부터 6월까지 학살이 벌어졌으니 비교적 정확하게 시기를 파악한 것이다.
이런 류의 신변 바꾸기는 학살 진상규명에서 흔히 있는 이야기인데 난징 대학살 부인론자들이 수두룩하게 나오는 중국인 시체 사진을 두고 '국민당군이 후퇴하면서 자국 민간인을 처형하고 버린 시체'라고 주장한다든가 6.25 전쟁 당시 좌-우의 학살 증거를 모두 '상대방에서 학살한 후 우리가 한 짓으로 조작했다.'고 주장했던 일처럼 사례를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2.5. 연합군의 묵인[편집]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 사건을 듣고 조사관을 파견하여 소련군이 저지른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나, 당시 같은 연합국 측인 소련과 미국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를 기밀로 처리했다.[7] 이는 영국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특히 영국은 미국보다도 먼저 통신감청 및 암호 해독을 통해 독일의 매장지 발견 직후 카틴 학살의 실체를 어느 정도는 먼저 접할 수 있었다.[8] 하지만 나치 독일에 맞서기 위해서는 소련과의 협력이 필요했기에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는 폴란드 망명정부의 수장인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장군에게 행방불명자에 대한 개입을 중단하라고 권고했다.
사실을 확인한 폴란드 망명정부는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에 카틴 숲의 집단 매장지를 조사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며 실종된 폴란드군들이 어디로 갔는지를 소련에 공식적으로 요구하였으나, 소련은 1943년 폴란드 망명정부와의 국교를 단절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어차피 거짓말을 해 봐야 먹히지 않을 게 분명하며 진실을 말하면 아무리 사정이 절실해도 자국 포로 수만 명을 학살한 국가와는 동맹을 유지할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잘 아니 아예 관계를 끊어버린 것이다.
이쯤 되자 다른 나라들도 어느 정도 사건의 진상에 대한 냄새를 맡게 되었다. 영국은 이러한 소련의 국교 단절에 불쾌함을 느꼈으며 미국 또한 대독일전을 같이 수행하는 폴란드 망명정부에 대한 소련의 태도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때문에 이는 테헤란 회담과 얄타 회담을 거치면서 소련-폴란드 간 국경선 확정 문제로 불거지기도 한다. 그러나 일단 나치를 먼저 때려잡고 나서 나중에 책임을 묻자는 의견이 대세가 되어 일단 침묵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3. 전쟁 이후[편집]
3.1. 냉전기 연구[편집]
카틴 학살이 드러났을 때부터 소련의 사법기관들은 나치 독일에 카틴 숲 학살의 책임을 전가했다. 독소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5년 12월 28일부터 이듬해 1월 4일까지 레닌그라드의 소련 군사 법원은 7명의 독일 국방군 병사들을 재판했다. 그들 중 한 명인 아르노 뒤레(Arno Dürre)는 민간인들을 기관총으로 다수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는데, 그는 카틴에서 폴란드 포로 1만 5천~2만 명을 매장하는데 참여했다고 "자백"했다. 이 자백으로 그는 15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아 사형만은 면했다. 하지만 그의 자백은 너무나도 엉터리여서, 심지어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참여한 소련 검사들마저 그의 증언을 이용하지 않았다. 후일 뒤레는 자신이 조사관에게 고문을 당해서 억지로 자백했다며 이전의 증언을 취소했다.
바르샤바로 환도한 폴란드 임시정부는 폴란드계 소련인들로[9] 구성한 위성국이었기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으며 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한 사람들은 감옥으로 끌려가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갖은 불이익을 받았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며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당정군에서도 민족주의적인 공산주의자가 득세했고 1970년대부터 폴란드 인민정부는 카틴 사건에 대해서 여러 차례에 걸쳐 재조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이르러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장군과 폴란드 인민정부는 진상 재조사를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이는 야루젤스키 장군이 1939년 당시 소련에 합병된 폴란드 동부 출신으로 굴라크에서 시력이 손상될 정도로 중노동에 시달리면서 부모를 잃는 등의 고역을 치른 경험이 있었던 것과도 관계가 있다고 여겨진다.[10]
서방 역시 더 이상 침묵할 필요가 없었고 더욱이 냉전이 시작되면서 소련의 악행을 선전하는 것은 체제 경쟁에 큰 도움이 되는 행위였으므로 바로 정밀 조사에 착수했다. 1952년 미국 의회는 카틴 숲의 학살은 소련의 책임이라는 결론을 냈으며 1970년에 영국은 카틴 숲 학살 피해자를 위한 기념비를 건립하려고 하여 소련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1958~1961년 KGB 의장을 지낸 알렉산드르 셸레핀(Александр Шелепин)은 1959년 3월 3일 흐루쇼프에게 카틴 학살의 진상을 은폐하기 위해 폴란드인 피살자 2만 1,857명에 대한 정보를 비롯해 사건과 관련된 문서들을 파기하자는 내용의 메모를 보냈다. 이 제안 자체는 실현되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3월 3일 흐루쇼프에게 보낸 그 메모가 보존되어 훗날 카틴 학살의 증거물 중 하나로 공개되었다.
3.2. 1991년 소련 해체 이후[편집]
소련의 대혼란기인 1989년과 1990년에 소련 학자들이 카틴 학살 사건과 관련된 문서[11] 를 찾아냈는데 결국 1990년 4월 13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NKVD에 의한 포로 학살을 공식 시인하였다. 1990년부터 2004년까지 소련 검찰과 러시아 검찰[12] 이 벌인 수사에서도 소련 정부가 카틴 학살을 벌인 사실이 밝혀졌으며, 특히 소련 붕괴 후인 1992년 학살 명령이 담긴 스탈린과 흐루쇼프 등의 서명이 들어간 다량의 관련 문서들이 기밀 해제되었다. 2010년 11월에는 러시아 연방 국가두마에서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의 관리들이 학살을 명령했다는 결의안을 채택하여 학살에 대한 소련의 책임을 재확인했다. 2011년 러시아 정부는 카틴 학살과 관련된 사건 파일 11권을 폴란드에게 제공했다.[13] 그리고 2012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미국 쪽 문서의 기밀 해제 지시를 내렸다. 따라서 카틴 학살은 분명히 소련 정부가 벌인 학살이란 사실이 명백해졌다.[14]
그러나 현재의 러시아 정부는 카틴 숲 학살에 대해 '이는 NKVD에 의해 자행된 일이지만 이를 라브렌티 베리야 등 NKVD 쪽이 미리 계획하고 제안, 실행한 점을 들어 현재 러시아에 국가적인 책임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어 아직까지 폴란드와 러시아 간 외교적 마찰의 원인이 되고 있다. 물론 러시아가 소련의 계승국이고 당시 소련의 통치자가 이오시프 스탈린이었으며 그가 학살의 최고 책임자임을 고려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15]
폴란드가 MD에 가입하네 마네 하는 입장을 보이자 결국 러시아에서도 폴란드를 달래기 위해 블라디미르 푸틴이 카틴 학살 추모에 참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후술하는 영화 '카틴'을 방송사들마다 방영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2010년 카틴 학살 70주년을 추모하기 위해 스몰렌스크로 가던 레흐 카친스키 폴란드 당시 대통령 및 각료들이 탄 Tu-154 여객기가 스몰렌스크 공항 근방에 추락해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16] 조종사 과실[17] 및 공항 시설 미비[18] 로 인한 관제 실수[19] 가 원인이지만 폴란드의 카친스키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손을 썼다는 음모론도 떠돌았다. 그래서 러시아에서는 폴란드에 반러 감정이 확산될까 봐 가진 능력을 총동원해 사고를 수습했다. 원인이 좀 말이 되지 않았는지 폴란드 측에서 재조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블랙박스가 복원되자 카친스키 대통령과 폴란드 수뇌부의 자업자득에 가까운 상황이었다는 게 밝혀졌는데 우선 기장이 착륙할 상황이 아니니 회항해야겠다고 요청하자 폴란드 공군사령관 안제이 브와시크가 직접 조종실까지 들어와서는 조종사를 갈궈서 착륙을 강행할 것을 요구했으며 그 이전에도 카친스키 대통령은 조지아를 방문할 때도 회항하려는 조종사에게 착륙을 요구했으나 안전상의 이유로 조종사가 착륙을 거부해 대체공항을 찾아가게 되자 명령불복종 혐의로 조종사를 검찰 조사에 넘겨 버린 전적까지 있었기에 조종사가 러시아 측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짙은 안개 속에서 무리하게 착륙을 시도하다가 추락해 몰살당했다는 게 밝혀졌다. 결국 권위주의 때문에 메뉴얼을 지키지 않아서 터진 인재였던 것. 자세한 건 폴란드 공군 Tu-154 추락사고 문서 참조. 문제는 잊혀질만한 듯 싶더니 2022년부터 폴란드 측에서 러시아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다.
이 사건을 다룬 2007년작 폴란드 영화 '카틴(Katyn)'도 있다. 2010년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한 폴란드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 부부가 후원했다고 한다. 비행기 추락 사고 이후 러시아측은 애도를 표하고 애도 기간 동안 이 영화를 황금시간대에 TV를 통하여 방영하였다. 참고로 감독은 '재와 다이아몬드'의 감독인 안제이 바이다이며 감독의 아버지인 야쿠프 바이다(Jakub Wajda)가 카틴 학살 때 피살됐다고 한다. 한국어 더빙도 되어 KBS 명화극장으로 방영한 바 있다.
만화 고르고13에도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가 있다.
4. 여담[편집]
- 당시 폴란드 장교의 처형을 담당한 바실리 미하일로비치 블로힌(Василий Михайлович Блохин, 1895–1955) NKVD 소령은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사형집행자'로 기록되었다.# 1930년대 스탈린의 '대숙청' 당시 혼자서 수만 명을 죽였다고 알려진 그는 카틴 숲에서도 28일간 6천여 명을 총살했다고 추정된다. 깃털 모자를 쓰고 도살업자처럼 가죽으로 된 긴 앞치마, 팔꿈치까지 오는 장갑 등 특유의 복장을 갖추고 모스크바에서 공수한 독일제 발터 모델 2 권총(저위력 호신용 탄종인 .25ACP를 사용한다)으로 처형자의 두개골 아래를 쏘았다. 블로힌은 워낙 일을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했기 때문에 평균 3분마다 한 명을 살해했다고 한다.# 이 덕분에 블로힌 소령은 소장 계급까지 진급해 장군이 되었으나 훗날 천벌을 받았는지 스탈린 사후 베리야가 처형되고 니키타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 정책이 시작된 다음 권고사직당한 뒤 술에 절어 지내다가 스탈린이 죽은 지 2년 만인 1955년에 공식적으로 '자살'했다.
- 사실 소련의 이와 같은 학살은 폴란드만이 아니라 소비에트 연방 초창기에 연방으로 억지로 통합한 나라 대다수에서 흔하게 벌어진 일이었다. 또한 소련의 본진인 러시아 본토에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탄압당하거나 대숙청 당시에 처형당한 사람만 수십만명에 넘어갔을 지경이니 이들 지역에서는 뻔할 뻔자이기는 했다. 아르메니아, 조지아, 타지키스탄 등 각지에서 좌우파를 따지지 않고 반소적인 이념이나 주장을 하던 많은 지식인들을 끌고 가 불문곡직으로 전원 사살, 암매장했다. 문제는 카틴 학살처럼 크게 알려지지도 못하고 기록조차 없어 아직도 그들이 어디에 묻혔는지 도통 모르는 사건이 허다하다는 점이다. 그나마 타지키스탄은 우연히 한 나무꾼이 당시 타지키스탄 내 지도자들을 학살하는 현장을 목격하곤 수십여 년 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자식들에게 그 장소를 이야기했고 소련이 무너진 다음에야 그 자식들이 이 사실을 알렸다. 타지키스탄 정부는 그 장소를 파낸 끝에 학살된 지도자들의 유골과 유품들을 찾아냈고 이 장소를 성지화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그들을 기리는데, 아직도 이렇게 묻혀진 곳을 찾지 못해 아쉬워하는 다른 옛 소련 가맹국들에게 부러움을 받고 있다. 그 밖에 키르기스스탄도 일부 학살 현장이 이전부터 알려져서 독립하자마자 거길 파내어 1937년에 학살당한 인사들의 시체 137구와 유품을 찾아내기도 했으나, 여기도 상당수의 다른 학살 현장은 알려지지 못했다.
-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획득한 폴란드 포로들은 대략 24만여 명이고 이 중에서 12만여 명은 1939년에서 40년 사이에 석방되거나 자력으로 탈출했다. 나머지 포로들은 포로수용소 열 곳에 분산 수용되었는데, 문제는 적정 수용규모는 실제 포로 수의 절반 정도였던 데다 설비 자체가 극단적으로 열악하여 포로들의 불만이 안 생기려야 안 생길 수가 없었던 것. 당연히 수용소를 관리하는 소련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게 되었고 또한 포로에게 들어가는 보급품도 영 좋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이 스탈린과 NKVD의 실무진들로 하여금 폴란드 장교단에 대한 학살을 결정하는 요인들 중 하나가 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런데 10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핀란드군 포로수용소는 정작 겨울전쟁에서 핀란드군 포로를 고작 1천여 명밖에 잡지 못했고, 그나마도 규모가 가장 작은 수용소에 몰아넣었는데도 여유공간이 남아돌 지경이었다. 결국 딴 생각이 있어서 학살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확실한 사실은 폴란드군 학살 희생자 대부분이 사회 지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는 것. 이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답이 나온다.
- 포로가 된 폴란드 장교들이 모두 "카틴 학살"에서 살해당한 것은 아니며 잡힌 포로 중 절반(약 2만 명)은 소련이 설정한 "심사기준"을 통과하여 살아남았다. 이런 경우는 폴란드 장교들의 성향에 대한 조사 중에서 친소련적(덤으로 반나치는 아닌) 경향을 보인 사람-지그문트 베를링(Zygmunt Berling) 중령이 대표적-이거나 외국의 외교기관에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인 사람들, 내무인민위원회에서 가치가 있다고 인정받은 사람-스타니스와프 스비아니에비치(Stanisław Swianiewicz) 교수가 대표적으로 포로 성향 심사시에 유창한 러시아어로 협조한 것이 심사를 책임진 바실리 자루빈의 눈에 띄어 카틴 숲 부근의 역에 도착했을 때 학살 대열에서 빠져나왔다-들 및 "기타" 분류로서 3개 포로수용소에서 폴란드 포로들의 동향을 은밀히 알려온 사람-최소한 장군 한 명이 이에 속했다-들이다.
- 카틴에서 처형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폴란드군 장병들은 후에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일부는 영국으로 출국하는 것을 허가받아서 폴란드 망명 정부 아래에서 싸우거나[22] 소련군 산하 폴란드군에 합류하여 나치와 싸웠다. 소련은 이들조차 못 믿어서 이 부대에 폴란드계 소련인들을 입대시키는 방법으로 감시했다. 참고로 단순히 감시 목적만은 아니었다. 카틴 학살에서 워낙 많은 폴란드 장교와 부사관들이 죽었기에[23] 이들을 보충할 수가 없어 폴란드계 소련인들을 장교로 꽂아넣은 것. 가장 유명한 사람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폴란드명 콘스탄티 로코소프스키)가 있으며 이외에도 스타니슬라프 포플랍스키(폴란드명 스타니스와프 포프와프스키) 등이 있다.
- 하지만 이 폴란드계 소련인들은 폴란드어를 잘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소련 시민으로 살아서 폴란드인이라기보다는 소련인으로의 정체성이 더 강했기 때문에[20] 폴란드인들의 분노를 더욱 크게 샀다.[21] 폴란드 침공 당시 소련군에 포로가 되었으나 살아남아 후에 친공산 폴란드군을 이끈 지그문트 베를링 장군은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폴란드인들이 나치에 대항하여 일어난 바르샤바 봉기를 지원하려고 했으나 이 봉기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던 스탈린은 베를링 장군을 해임하였다. 어쨌든 이 친공산 폴란드군은 베를린 공방전에도 참가하였고 후에 폴란드 공산 정부가 군을 재건할 때 주축이 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서방 측에서 싸운 폴란드 망명 정부 산하 반공 폴란드군의 장병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영국이나 미국에서 어렵게 살았다.
4.1. 일부 정당 및 유사역사학자들의 왜곡 시도[편집]
일부 극좌 정당이나 유사역사학자들(예: 마리오 소사(Mario Sousa))은 여전히 카틴 학살을 소련이 자행한 사실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 공산당의 청년 조직인 그리스 청년공산주의자(Communist Youth of Greece)가 발행한 Truth and Lies about Socialism이 있다.[24] 이들은 고르바초프와 옐친과 같은 '반스탈린주의자'들과 '서방 학계'만 가해 주체가 소련이라고 주장하고 친소 학계는 인정하지 않는다면서 학살을 부정하거나 긍정론과 부정론을 동등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25]
- 하지만 그리스 공산당의 주장은 수많은 조작과 오류로 점철되어 있다. 예를 들어 Truth and Lies about Socialism에서 독일이 조직한 국제 위원회[26] 의 대표로 언급된 부취(G. Butch)는 그리스 공산당이 작정하고 지어낸 완전히 가공의 인물이다. 실제 독일이 조직한 국제위원회의 명단을 보면 부취라는 인물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리스 공산당은 또한 국제 위원회 중 두 사람(불가리아인 엠 마르코프와 체코인 하젝)은 그 결과가 조작되었고 자신들은 압박과 두려움 때문에 서명을 했다고 증언하면서 위원회를 탈퇴했다고 주장하나, 이 두 사람은 전후 소련의 영향권에 편입된 동구권 국가에서 계속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이다. 영어 표기를 따라가 원 발음이 왜곡된 두 사람의 정확한 이름은 각각 프란티셰크 하예크(František Hájek)과 마르코 마르코프(Марко Марков)인데, 하예크는 1945년 6월 NKVD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심문을 받았다. 하예크는 울며 겨자먹기로 자신의 의견을 번복하고 독일이 카틴 학살을 자행했다고 주장했다.#[27] 마찬가지로 마르코프도 1944년 말 체포되어 독일과 협력했다는 명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마르코프도 별 수 없이 독일이 강요해서 주장했노라고 서면으로 "자백"하여 1945년 2월 무죄 판결을 받았다.[28] 하예크와 마르코프 외에도 헝가리 출신 위원 오르쇼시 페렌츠(Orsós Ferenc) 또한 전후 헝가리 과학 아카데미의 정회원 자격을 박탈당하는 수난을 겪었는데, 그는 소련이 헝가리를 점령하기 전 미리 독일로 도망가서 하예크와 마르코프처럼 물리적인 위해를 당하진 않았다. 반면에, 독일이 조직한 국제 위원회의 위원 중 소련 영향권 밖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단 한 번도 자신의 의견을 철회한 적이 없다.
- Truth and Lies about Socialism은 독소전쟁 당시 독일이 소련을 악선전할 목적으로 카틴 학살을 선전했으니 조작이라고 주장하는데, 당연하지만 역사학자들 중에 독일의 진정한 목적을 무시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학살의 주체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리고 냉전 당시 미국과 영국의 카틴 학살 인정을 두고 무리하게 나치 독일과 결부시키려는 태도를 취하는데, 이것 또한 냉전에서 과거사가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보여줄 수는 있어도 카틴 학살의 주체가 소련이란 것을 부정하는 근거로 사용될 수는 없다.
- Truth and Lies about Socialism은 소위 '나치 변호론자'들의 주장이 1943년의 나치 조사의 발견에 근거를 두며 이것은 전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이며, 반면에 소련이 조직한 부르덴코 위원회(Burdenko Commission)의 주장은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치의 조사는 의심할 수 있으면서 소련의 조사는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은 내로남불이다. 당장 1943년 스몰렌스크 전투로 독일군을 몰아낸 소련군은 그 즉시 카틴 학살을 은폐하려 시도했다.
1943년 가을 소련군은 스몰렌스크 지역에서 독일군을 몰아내자마자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은폐하는 일에 나섰다. 이들은 무덤을 다시 파고 증거를 바꿔놓았다. 이들은 1939년부터 1940년까지 날짜가 적힌 편지를 1941년 날짜가 적힌 편지와 영수증으로 바꿔놓아 나치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되게 만들었다. 이른바 증거가 이렇게 제시되었지만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는 소련 측 설명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가 적십자가 주도하는 독자적 조사 수행을 요구하자, 소련 측은 폴란드 정부 측과 관계를 끊고 이들의 요청은 "조사 코미디"라고 일축했다. 소련은 폴란드인들이 독일 편을 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얄타의 딸들(2022), 캐서린 그레이스 카츠(허승철 譯), 책과 함께(원제: The Daughters of Yalta(2021), Catherine Grace Katz, Mariner Books)
- Truth and Lies about Socialism은 미국 대표단에 참여했던 캐서린 해리먼이 나치 주장처럼 시신이 3년 전에 매장됐던 것이 아니라고 기록했다고 주장한다. 진상은 더 복잡하다. 정작 캐슬린 해리먼은 소련의 스몰렌스크 해방 이후 소련의 일방적인 사건 설명에 매우 깊은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자신이 의학적 지식이 없기 때문에 마지못해 소련의 설명을 받아들였다.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캐슬린은 나치독일군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소련 측 주장을 따져보았다. 캐슬린은 부검 정보를 판단할 의학적 지식이 없어서 의사들 주장의 진위를 판단할 방법이 없었지만, 그들의 말을 객관적인 과학자들의 말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만일 폴란드 장교들이 여름에 처형당했다면 왜 겨울 코트와 긴 속옷을 입고 있었는지가 이상했다. 그러나 소련 측은 늦게는 1941년 여름까지 날짜가 적힌 편지들을 이들의 시신에서 발견했다. 이 증거물은 소련 측이 심어놓았을 수 있지만, 시신에서는 분명히 오래전에 묻힌 듯 썩은 냄새가 났다. 폴란드 장교들이 처형된 방식도 고려해야 했다. 이들은 머리 뒤에 총알을 한 발씩 맞고 처형되었다. 이것은 당시 캐슬린이 "전형적인 독일식"이라고 믿었던 효율성을 보여주었다. 다음 해 여름인 1944년 8월 서방 기자들은 소련군이 폴란드 루블린 외곽에서 발견하고 해방시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마즈다넥Majdanek 집단수용소를 방문하고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그때서야 캐슬린은 독일인들이 집단처형에 훨씬 잔혹한 방법을 썼다는 것을 알았다.
캐슬린이 미국 대사관저인 스파소하우스에 돌아오자 애버럴은 그녀에게 현지에서 본 것과 이러한 관찰을 통해 내릴 수 있는 결론에 대해 보고서를 쓰라고 말했다. “러시아인들이 보여준 증거는 몇 가지 점에서 불완전하고, 그 증거는 형편없이 조합되었으며, 기자들에게 독자적으로 취재하고 확인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쇼가 미리 준비되었음이 명백하다”라고 그녀는 보고서에 썼다. “조사위원회와 증인들이 제공한 증언은 상세했고, 미국 기준으로 보면 너무 사소한 것들이었다. 소련 고위 관료들이 사실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럼에도 폴란드 장교들이 독일군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것이 내 의견이다”라고 그녀는 논지를 전개했다. (후략)
얄타의 딸들(2022), 캐서린 그레이스 카츠(허승철 譯), 책과 함께(원제: The Daughters of Yalta(2021), Catherine Grace Katz, Mariner Books)
- 애초에 마리오 소사는 역사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도 없는 유사역사학자이며, 반스탈린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니키타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욕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카틴 학살 자료들을 대거 파기했다. 또한 고르바초프 집권기 소련은 1990년 부정할 수 없는 직접적인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 소련이 폴란드 장교들을 학살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해으며, 스탈린을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푸틴의 집권기인 2010년에 러시아 국가두마에서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지도부가 학살을 명령했다는 결의안을 채택한 바 있다. 이들에 따르면 푸틴은 순식간에 투철한 반스탈린주의자가 되는 것이며, 국가두마에서 찬성표를 던진 대부분의 러시아 국회의원들도 반스탈린주의자라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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