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2014년 4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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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체 인양 및 화물칸 차량 블랙박스 복구 등을 통해 조금 더 자세하고 객관적으로 분석된 내용은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선체 기울기에 정리되어 있다.
8시 10분경에 제주해경이 세월호와의 연락이 두절되었다고 학교에 통보했다는 보도가 나왔으나, 제주해경은 목포해경으로부터 통보받은 9시경에야 최초로 사실을 인지했다고 해명했다. 저런 해프닝이 생긴 것은 제주도에만 있는 자치경찰 때문인데, 수학여행단 버스를 운전할 기사가 음주운전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나가있던 김모 자치순경이 도착할 시간이 되어도 도착하지 않아 학교로 전화를 걸었는데, 학교가 자치경찰이라는 제도를 몰라 벌어진 일.
해경은 안산단원고등학교 학생 최덕하 군이 사고 신고를 한 게 8시 58분이었다고 발표했는데, 4월 22일에 공개된 녹취록에 따르면 실제 학생이 신고 전화를 한 건 8시 52분이었다. 전화를 받은 전남소방본부 상황실에서 선박 조난 업무를 전담하는 해경 상황실을 연결해 3자 통화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통화가 끝난지 2분이 지난 8시 58분에야 정식으로 해경 상황실에 신고가 접수되었다. # 그 후로 전남소방본부에 같은 내용의 신고 전화가 23개나 더 들어왔으며(#), 경찰에도 신고 전화가 들어왔다고 한다(#). 참고로 이 학생은 4월 24일에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참고로 4월 28일에 4반 박수현(사망) 군의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던 동영상이 공개되었는데 이 동영상은 사고 최초 신고 시간 무렵부터 약 15분 정도를 휴대폰으로 촬영한 것이다. #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선실 승무원 박지영(사망) 씨가 무전기로 9시부터 9시 30분 사이에 10여차례에 걸쳐서 승객들의 퇴선여부에 대해서 물었으나 조타실에서 답이 없었다고 한다. 구조 헬기가 도착하는 것을 확인한 후에 박씨가 자신의 판단으로 승객들을 대피시켰다고 한다.# 박씨의 올바른 판단이 없었으면 피해규모가 훨씬 커질 수도 있었던 상황.
세월호 침몰 이후에도 구조시도는 계속 되었으나, 사고해역이 소위 맹골 수도로 불리는, 8kn(단위는 노트. 약 15km/h)에 달할 정도로 조류가 매우 센 곳인데다가[6] , 수중 시야는 20cm[7] 밖에 안되며, 사고해역의 수심은 45~50m로 깊은 편이고 깊은 수심의 진입을 위해 필수적인 감압장치를 갖춘 구조선 청해진함과 평택함은 각각 남해와 서해에서 작전중이었기에 17일 새벽에야 도착 가능한 상태였다. 이미 천안함 피격사건 당시 희생자가 발생한 경험이 있는 상황에서 만조가 되기 전까지 잠수부들의 진입은 불가능했다.
4월 17일 01시부터 조류 흐름이 잠잠해지는 정조 시간대가 시작되기에, 해경은 그 시점부터 조명탄 100발을 실은 공군 CN-235 수송기 6대를 동원하여 추가적인 야간 수색을 시도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17일 아침부터 진도지역에 비바람이 강하게 불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기에 쉽지 않을 것으로 예측되었다.[8]
한편 서울특별시에서는 16일 박원순 시장 주재로 긴급 지원대책 회의를 열고 서울시 소방재난본부 소속 소방헬기 2대, 전문 잠수부 8명, 특수보조인력 2명, 항공요원 6명을 파견하기로 밝혔다. #
사고 당시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와 세월호, 근처에 있던 상선들과 화물선들의 교신 내용이 4월 20일에 공개되었다. 교신 녹취록. 교신 내용에 등장하는 주요 선박들은 아래와 같다.
1. 타임라인[편집]
선체 인양 및 화물칸 차량 블랙박스 복구 등을 통해 조금 더 자세하고 객관적으로 분석된 내용은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선체 기울기에 정리되어 있다.
2. 상세[편집]
8시 10분경에 제주해경이 세월호와의 연락이 두절되었다고 학교에 통보했다는 보도가 나왔으나, 제주해경은 목포해경으로부터 통보받은 9시경에야 최초로 사실을 인지했다고 해명했다. 저런 해프닝이 생긴 것은 제주도에만 있는 자치경찰 때문인데, 수학여행단 버스를 운전할 기사가 음주운전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나가있던 김모 자치순경이 도착할 시간이 되어도 도착하지 않아 학교로 전화를 걸었는데, 학교가 자치경찰이라는 제도를 몰라 벌어진 일.
해경은 안산단원고등학교 학생 최덕하 군이 사고 신고를 한 게 8시 58분이었다고 발표했는데, 4월 22일에 공개된 녹취록에 따르면 실제 학생이 신고 전화를 한 건 8시 52분이었다. 전화를 받은 전남소방본부 상황실에서 선박 조난 업무를 전담하는 해경 상황실을 연결해 3자 통화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통화가 끝난지 2분이 지난 8시 58분에야 정식으로 해경 상황실에 신고가 접수되었다. # 그 후로 전남소방본부에 같은 내용의 신고 전화가 23개나 더 들어왔으며(#), 경찰에도 신고 전화가 들어왔다고 한다(#). 참고로 이 학생은 4월 24일에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참고로 4월 28일에 4반 박수현(사망) 군의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던 동영상이 공개되었는데 이 동영상은 사고 최초 신고 시간 무렵부터 약 15분 정도를 휴대폰으로 촬영한 것이다. #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선실 승무원 박지영(사망) 씨가 무전기로 9시부터 9시 30분 사이에 10여차례에 걸쳐서 승객들의 퇴선여부에 대해서 물었으나 조타실에서 답이 없었다고 한다. 구조 헬기가 도착하는 것을 확인한 후에 박씨가 자신의 판단으로 승객들을 대피시켰다고 한다.# 박씨의 올바른 판단이 없었으면 피해규모가 훨씬 커질 수도 있었던 상황.
세월호 침몰 이후에도 구조시도는 계속 되었으나, 사고해역이 소위 맹골 수도로 불리는, 8kn(단위는 노트. 약 15km/h)에 달할 정도로 조류가 매우 센 곳인데다가[6] , 수중 시야는 20cm[7] 밖에 안되며, 사고해역의 수심은 45~50m로 깊은 편이고 깊은 수심의 진입을 위해 필수적인 감압장치를 갖춘 구조선 청해진함과 평택함은 각각 남해와 서해에서 작전중이었기에 17일 새벽에야 도착 가능한 상태였다. 이미 천안함 피격사건 당시 희생자가 발생한 경험이 있는 상황에서 만조가 되기 전까지 잠수부들의 진입은 불가능했다.
4월 17일 01시부터 조류 흐름이 잠잠해지는 정조 시간대가 시작되기에, 해경은 그 시점부터 조명탄 100발을 실은 공군 CN-235 수송기 6대를 동원하여 추가적인 야간 수색을 시도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17일 아침부터 진도지역에 비바람이 강하게 불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기에 쉽지 않을 것으로 예측되었다.[8]
한편 서울특별시에서는 16일 박원순 시장 주재로 긴급 지원대책 회의를 열고 서울시 소방재난본부 소속 소방헬기 2대, 전문 잠수부 8명, 특수보조인력 2명, 항공요원 6명을 파견하기로 밝혔다. #
사고 당시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와 세월호, 근처에 있던 상선들과 화물선들의 교신 내용이 4월 20일에 공개되었다. 교신 녹취록. 교신 내용에 등장하는 주요 선박들은 아래와 같다.
- DOOLA ACE(유조선, 길이 101m, 폭 15m) - 세월호가 있는 곳에 가장 먼저 온 배.
- YING XIANG(화물선, 길이 84m, 폭 13m, 캄보디아 선적의 중국 배) - 이 배와 교신할 때는 영어를 사용했다.
- 전남707(급수선, 전라남도 소속) - 교신 내용에선 별로 등장하지 않는데, 선장 이모 씨 등 선박직 승무원 7명를 구조한 게 이 배라고 한다. #
- 진도아리랑(행정선, 길이 20m, 폭 5m, 진도군이 2010년에 취역시킨 행정선)
- 드래곤에이스11(화학물질운반선) - 세월호에게 가장 가깝게 접근한 배.
- 드래곤스타(시멘트 운반선, 길이 116m, 폭 19m) - 연락을 받은 선박들 중 가장 먼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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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세월호가 '정박', 즉 가만히 서 있었다는 어민의 증언은 것은 선내 CCTV와 승객들이 남긴 영상과 증언, 관제 레이더 기록 등을 종합해보면 사실이 아닌 단순 착각이나 기억의 왜곡일 가능성이 높다. 위의 모든 자료들은 세월호가 사고 직전까지 계속 속력을 내며 운항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2] 여러 생존자들의 증언을 종합할 때, 대략 오전 7시~8시 30분경부터 세월호는 계속 흔들리고 기울어지는 등 이미 불안정하게 운항하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3] 외방경사란 선체가 회전할 때 회전 방향의 반대쪽으로 경사가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배를 급하게 돌릴 수록 반대편으로의 기울기도 더 커진다.출처[4] 이후 인터뷰에 따르면 이때 다른 학생 한명과 손을 잡고 탈출하고 있었으나, 손을 놓쳤다고 한다. 박군은 이때를 회상하며 그때 어떻게 해봤으면 좋았을 거라고 하면서 아쉬워했다.[5] 초기에는 20대 남성으로 알려졌으나, 추후 정정.[6] 어느 정도로 빠른 것인지 비교하자면, 한강이 여름 홍수때 가장 물살이 빠를 때도 시속 6km에 불과하다. 서산만 간척사업 때, 물막이 공사 막바지 에 이르러 6400m는 막았는데 나머지 270m에는 도저히 방조제를 쌓을 수 없었다. 8m/s(28.8km/h, 15.5kn)의 물살이 이를 가로막았던 것이다. 30T 트럭이 집채만한 바위를 쉴새없이 갖다 부었는데도 쌓이기는 커녕 물살에 쓸려나가기 일쑤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온 것이 유조선으로 물길을 막는 소위 '정주영공법'이다. 이런 변칙적인 방법을 써야 할 정도였으니 빠른 조류의 위력을 알 만하다.# 그래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2014년 3월 박태환이 세운 자유형 100m 한국 신기록이 48.42초인데 이걸 속도로 환산하면 약 7.5km/h이다. 박태환이 전력질주해도 평소 속도로 뒤로 떠내려가는 상황. 그런데 일각에서는 이를 참고해 풍랑이 심하니 배를 묶어 파도를 막자는 그야말로 삼국지의 적벽대전에서나 나올 아이디어를 진지하게 설파하는 사람도 있다. 바다 한가운데를 배 몇 대가 방파제를 할 수 있을지는 당신의 상상에 맡긴다.#[7] 이 글을 보는 당신의 한 뼘 정도 길이에 불과하다![8] 사고 학생 가족들이 사고 현장에 직접 방문하여 17일 01시부터 수색을 재개한다고 하자 사고 학생 가족들은 조류 상황을 알지 못하고 거세게 항의하는 영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