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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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의 국호에 관한 설명.
2. 설명[편집]
태조 이성계는 즉위 후 즉위 교서를 통해 '나라 이름은 이전대로 고려(高麗)라 한다'고 밝히고, 명나라를 정벌하려던 고려 왕조와는 다르게 명나라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겉으로는 제후국으로서 명나라에 새 나라의 개국과 태조의 즉위를 알리는 내용의 사절을 보낸다. 이때 명은 새 나라의 국호는 무엇으로 고쳤는지를 되묻는데, 이에 조선은 백관을 도당에 모아두고 국호를 논의해 고려라는 국호를 고집하는 대신 이성계의 고향인 '화령(和寧)'과 고대에 존재하였던 국가명인 '조선(朝鮮)' 중에 하나를 택하여 달라고 청하고, 명이 '조선'을 택하여[1] 국호가 확정되었다. 조선이란 국호의 유래는 고조선[2] 에서 나왔으며 조선이라는 국호는 이후 4세기경에 다시 나타나게 되는데 <진서(晋書)>에서는 선비족 모용부의 군주인 모용외가 조선공(朝鮮公)이 되었고 이를 모용황이 계승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모용외의 조상은 단석괴인데 이 단석괴는 고구려의 고주몽처럼 햇빛에 의한 회임이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세월이 다시 흘러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나라에서는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인 보장왕을 '요동주도독 조선왕'(遼東州都督 朝鮮王)으로 일방적으로 책봉하여 고구려부흥운동을 무마하려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평양~요동 일대 지역의 이름으로 조선이 계속 거론되는 것은 그만큼 조선이 고조선에서 유래한 유구한 지명이었다는 것을 뜻한다.지난번에 천한 사신[賤介]이 돌아오매 특별히 천자의 명령이 내리심을 받았사온데, 나라 이름을 마땅히 고쳐야 될 것임을 지시하여 빨리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명하였으니, 신(臣)은 나라 사람들과 더불어 감격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간절히 생각하옵건대, 옛날 기자(箕子)의 시대에 있어서도 이미 조선(朝鮮)이란 칭호가 있었으므로, 이에 아뢰어 진술(陳述)하여 감히 천자께서 들어주시기를 청했는데, 유음(兪音)이 곧 내리시니 특별한 은혜가 더욱 치우쳤습니다. 이윽고 백성을 다스리라는 말로써 경계하시고, 또 후사(後嗣)를 번성하게 하라는 말로써 권장하시니, 깊이 마음속에 느껴서 분골쇄신(粉骨碎身)이 되더라도 보답하기 어렵겠습니다. 이것이 대개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천하를 다스리면서 만리(萬里) 밖의 일을 환하게 보시어, 신(臣)이 부지런히 힘써 조심함을 살피시고, 신이 성실하여 딴마음이 없음을 어여삐 여기시어, 이에 소방(小邦)으로 하여금 새 국호(國號)를 얻게 했던 것입니다. 신은 삼가 마땅히 번병(藩屛)이 되어 더욱 직공(職貢)의 바침을 조심하고, 자나 깨나 항상 천자에게 강녕(康寧)하시라는 축원에 간절하겠습니다."
3. 고조선과의 관련성[편집]
왜 멸망한 지 1500년이나 된[3] "조선"이란 명칭을 가져온 것일까? 여기에는 고려의 정통성에 대항하려는 신 왕조 개창 세력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왕건의 고려 왕조는 옛 고구려의 정통을 이었음을 표방했다. 물론 고려에 구 신라 6두품 세력들이 대거 참여하고 신라의 팔관회를 계속 국가 중요행사를 했으며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이 신라계인 것을 보면 알듯이 시간이 갈 수록 그 정체성은 좀 달라졌고 몽골의 침입 이후로는 더 민족적 지역적 자긍심을 키우기 위해 고조선을 뿌리로 여기는 경향이 강해졌다. 하지만 어쨌든 나라 이름부터가 그 흔적이라 할 수 있고 조선은 그 고려를 무너뜨리고 건설된 만큼, 고려에 대항해 조선을 건국했던 이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울어진 운동장 상태를 극복해기 위해, 또 고려의 정통성에 대항하기 위해 고구려와는 다른 "정통성"을 찾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비슷한 예로 고려시대의 반란자들은 자주 고구려,[4]신라, 백제의 "정통성"을 끌어다 붙여서 고려에 대항하려 했었다. 하지만 신라나 백제는 이미 그 왕조가 자리 잡았던 "연고지"에서나 상징성을 가질 뿐, 이들이 멸망한 지 수백 년이 지난 1392년 시점에서 전국적인 정통성으로 끌어올리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5][6] 그래서 아예 판을 엎어버리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어차피 고구려에 기반한 기존의 정통성의 흐름 내에서는 이성계와 그 일파들은 논리적으로 이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고조선 역시 요녕성, 길림성, 한반도 북부를 점유했고, 경기도와 강원도 중부 이하 한반도 남부 일대는 진국(국가)으로 불려지는 국가들이 위치해있어서 영유권 밖이었기 때문에 백제나 신라와 별반 다르지 않지만, 기자가 와서 주나라의 책봉을 받은 기자조선의 존재 때문이다. 또한 고조선은 연대상으로 최초의 한국계 국가라는 점에 있어서도 백제와 신라에 비해 써먹기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 또한 준왕이 남하하면서 진국을 세웠다는 전승이 있고, 고조선의 후계국으로 추정되는 건마국이나 목지국 통치 영역은 타 소국에 비해 컸다고는 해도 오늘날의 시군 몇 개를 묶어놓은 수준에 불과했지만 마한의 맹주로써 권위는 있었기에 한반도 남반부 전역에 영향을 끼쳤던지라 한반도 남부도 포괄이 가능했다.[7]
4. 화령 관련[편집]
성조(聖朝, 이성계)께서 천명을 받아 화령과 조선으로써 명나라에 주청하니 이에 황제가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였다. 무릇 화령의 뜻은 일찍이 듣지 못하였다. 영락제가 북방을 정벌한 것은 아로태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한 것이니, 화령은 원나라의 옛 땅이다. 원나라의 위소(危素)는 "원 태조(칭기즈칸)가 창업한 땅이라 하여 《화령지(和寧誌)》를 지었으니, 족히 그 증거를 삼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가 오랑캐의 지명으로 국호를 주청할 리는 없을 듯하다. 《동사(東史)》를 상고하건대, 고려 우왕(禑王) 9년에 태조가 변방을 안정시킬 계책을 올린 가운데, "동쪽 경계에 있는 화령의 땅은 도내(道內)에서 가장 땅이 넓고 풍요합니다."라고 한 말이 있다. 그 다음 해에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화령부(和寧府)에 오매, 임언충(任彥忠)을 파견하여 간곡히 효유하여 보냈는데, 길이 막혀 반년을 머물렀으니, 대개 화령은 쌍성(雙城)에서 요동(遼東)의 개원부(開原府)로 직통하는 요충지이다. 그러니 그 땅은 실로 성조가 창업한 땅으로서 이른바 '적전(赤田)'이 이곳이니, 국호를 화령으로 주청한 것은 혹 이 연유가 아니겠는가? - 성호사설 권15, 화령.
이익의 성호사설 등에서는 이 화령, 조선 간택 요청 사건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하였다. 이익의 의견대로 태조와 백관들이 일개 지명에 불과한 화령을 국호로 삼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며, 이미 조선으로 하기로 결정은 났는데 명나라에게 그대로 '통보'해 버리면 명나라 입장에선 불쾌할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버리는 카드로 화령을 넣었다는 것. 앞서 말한 대로 화령은 카라코룸(화림, 和林)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명나라에선 절대 선택할 리가 없는 국호였다.[8] 말하자면 일종의 결재용 2안 내지는 버리는 카드가 아니었을까. 게다가 카라코룸을 고려하지 않아도, '화령'이란 국호는 지역명에 불과해 국호로서의 정통성이나 당위성이 부족한 데다, 요동 정벌을 불러왔던 접경 지역인 철령 지역의 이름을 명나라가 국호를 허락하기는 힘들다.[9] 이래저래 처음부터 조선으로 새 국호를 낙점하고 명에 사실상 보기가 하나밖에 없는 '선택지'를 제안했다는 것이다.[10]
조선 외에 청구(靑丘/靑邱 - 푸른 언덕), 소방(小邦 - 소국이란 의미)이란 표현을 쓰기도 했지만 이것들은 일종의 별칭으로 공식 국명은 엄연히 '조선'이었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당나라가 망한뒤에도 일본이 한동안 중국을 가리켜 당이라 부른것이나 일본이 일본이란 국호를 공식적으로 채택했었음에도 중국과 조선에서는 여전히 왜국이라고 계속 부른것과 비슷하게 조선을 계속 고려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5. 개화기 이후[편집]
조선이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항구를 열기 시작하면서, 당시 국왕이었던 고종은 미국에 보내던 국서에서도 보이듯 조선의 명칭을 '대조선(Tah-Chosun)'으로 해외에 홍보하려 했다. # 하지만 이를 진지하게 따르는 서방 국가는 없었으며, 그냥 '고려'에 해당하는 Korea로 부르는 경우가 절대다수였다. 이는 훗날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