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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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文
(? ~ 1105)
1. 개요[편집]
고려의 인물. 자는 의덕(懿德), 시호는 정간(貞簡). 초계현 출신이다.
2. 생애[편집]
아버지 정배걸이 노년에 본 자식으로,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죽어 유복자로 태어났다. 정문은 15세~16세 되던 해에 벌써 경험 많은 노인처럼 총명했다. 국자감시에 응시해서 「군위민천부(君爲民天賦)」를 지었는데, 문종이 이를 듣고 칭찬하고 감탄했다.
과거에 급제하고 비서랑이 된 정문은 당시 국원공에 오른 선종의 종친부에서 녹사를 지냈다. 1083년 순종이 죽고 국원공이 왕으로 즉위하니 정문은 직한림원 겸사문조교로 발탁되고 또 우습유로 전임됐다. 그러나 대간의 간언으로 전중내급사 지제고로 고쳐 임명됐다. 정문이 대간으로 임명되지 못한 것은 정문의 외조부가 수주(水州) 처인부곡(處仁部曲)[1] 출신이었기 때문인데, 부곡 출신에 대한 차별이 엿보이는 대목이다.物如憔悴, 我則施雨露之恩,
만물이 초췌해지면, 나는 곧 비와 이슬 같은 은혜를 베풀 것이고,
俗若頑兇, 我則布雷霆之怒
풍속이 사나우면, 나는 곧 천둥과 번개 같은 노여움을 보일 것이다.
군위민천부(君爲民天賦).
지개성부사로 외직에 나갔다가 개경에 돌아와서 형부원외랑을 지냈다. 숙종 7년(1102)에는 정당문학 관직에 있었는데, 남성시를 감독해 문공유 등을 급제시켰다. 숙종 9년(1104)에는 비서감으로서 추밀원사 최홍사와 함께 북송에 가서 사은하고 조공했다. 당시 받은 사은품들은 따르던 이들에게 모두 나눠줬고 남은 것으로는 서적을 구입해 돌아가니 송나라 사람들의 칭찬을 들었다. 숙종 10년(1105) 6월 형부상서 정당문학 겸 태자빈객으로 임명되고 11월에 검교사공 예부상서가 더해졌다. 그런데 근무중 병으로 쓰러져 여러 사람에게 들려 집으로 옮겨지더니 곧 병으로 죽었다. 숙종은 내의(內醫)를 보내 진찰하도록 했으나 정문이 곧 죽자, 매우 슬퍼하며 특진 좌복야 참지정사에 추증하고 시호를 내린 뒤 관비로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
3. 평가[편집]
정문은 사람됨이 공손하고 검약하며 순박하고 과묵했다. 가계를 관리하지 않아 그 집은 가까스로 비바람을 피할 수 있을 정도였다. 관직에 이르렀을 때는 삼가고 조심했으며, 형조에서 10여년간 종사하며 일찍이 함부로 사람의 죄를 내고 들임이 없었다.[2]
『고려사』 권95, 정문 열전.
4. 가족관계[편집]
정문은 호부시랑을 지낸 김의선(金義先)의 딸[3] 과 결혼해 세 아들을 뒀다.
5. 여담[편집]
- 정문은 일찍이 왕의 서경 행차를 호종했는데, 서경에 기자의 사당을 건립할 것을 요청한 일이 있다. 숙종 7년(1102) 예부에서 기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낼 것을 청하는데, 아마 이 즈음의 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사당은 도중에 실전됐는지 한참 뒤인 충숙왕 때와 공민왕 때 다시 평양부에 기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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