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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もう、だめだ!
이젠 끝이야!
― 타카하마 마사미 기장의 마지막 외침[6]
1. 개요[편집]
1985년 8월 12일[7] 오후 6시 57분경 도쿄 하네다 공항을 출발하여 오사카로 향하던 일본항공 소속 보잉 747(기체 등록번호 JA8119) 민항기가[8] 도쿄에서 100km 떨어진 군마현 부근의 타카마가하라 산 능선(오스타카노오네, 御巣鷹の尾根)에 추락하여 탑승인원 524명 가운데 520명이 숨진 참사다. 단일 항공기 사고로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항공 사고이며 항공기 탑승객 총 사망 순위로는 세계 2위, 아시아 1위[9] 의 참사이다.[10] [11] 일본항공 자체가 여러 사고로 인해 전일본공수에 밀리던 상황이었는데 이 초대형 사고가 터지자 일본항공은 물론 일본 내 비행기에 대한 인식 자체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렸다.
사고 이후 123편은 당연히 영구 결번되었으며 현재 일본항공의 하네다-오사카 노선에서 121편 다음은 125편이다.[12][13]
2. 사고기[편집]
사고기의 기종은 보잉 747SR-46였다. 보잉 747SR은 보잉 747-100을 일본 국내선용으로 커스터마이징하여 제작된 버전으로, 일본항공과 전일본공수 두 항공사에 의해 운용된 기종이다.
일본 국내선의 막대한 수요를 만족시키고자 일본항공이 보잉에 발주하여 제작된 사양으로[14] , 3시간 미만의 단거리 비행에 알맞게 연료 탑재량을 줄여 이륙 최대 중량을 줄이고 수송량을 극대화시키고 잦은 이착륙 환경에 맞게 일부 구조와 랜딩 기어를 보강한 기종이다. 사고기의 경우 정원이 총 528명이었는데, 원판인 보잉 747-100의 일반적인 3클래스 좌석 배열 정원이 366명인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탑승했는지 알 수 있다.
사고기(기체 등록번호 JA8119)는 1974년 1월에 생산되었는데 1978년 JL115로 운항하던 도중 테일 스트라이크로 기체 후미가 파손되었다. 하지만 이 사고 이후 수리를 부실하게 했는데 이것이 결국 참사의 원인이 되었다.
사고 당일 하네다 국제공항에서 이륙을 시작하는 JA8119의 모습. 오른쪽 아래에 '''85 8 12'' 라고 쓰여 있다.
사고 당일, 사고 편명으로 이륙하는 JA8119의 영상 캡처본. 이 영상은 항공 사고 수사대에도 나온 적이 있다. 실제 이륙 영상[20]
테일 스트라이크 수리 후 추락 사고 전에 이타미 공항에서 찍힌 사진이다. 기체 뒤 끄트머리 부분이 지저분해 보이는 것이 테일 스트라이크의 흔적이다.
사고 당일 다른 노선으로 비행하던 중 탑승객[21] 이 찍은 우측 주익 상단에 새겨진 기체번호.(JA8119)
3. 승무원[편집]
당시 일본항공 123편 승무원 배치도. PUR은 사무장(Purser), AP는 부사무장(Assistant purser), STW는 스튜어디스(Stewardess)를 의미한다.
4. 사고 경과[편집]
4.1. 이륙[편집]
사고 당일은 일본의 추석에 해당하며 일본의 2대 명절로 불리는 오본(お盆) 전날로, 탑승객은 대부분 샐러리맨들과 귀향객, 여행객들이었다. 또 기체는 삿포로 1 왕복[25] , 후쿠오카 1 왕복[26] 비행을 한 후 오사카(이타미)까지 왕복하여 하네다로 돌아온 다음[27] 그날의 비행을 마칠 예정이었다. 이런 까닭에 항공기관사는 오랜 시간 동안 조종실에 탑승하고 있었다(도쿄(하네다)~후쿠오카 왕복편으로 탑승). 부기장은 다른 비행기에서 기장 승격 시험을 마친 다음 123편을 타게 됐고 기장은 그 날 첫 비행이었다.
사고 당시의 123편 비행기 티켓. 이 티켓은 생존자인 카와카미 케이코의 티켓이다.
사고기는 18시 정각에 하네다 국제공항을 이륙하여 56분의 비행을 거쳐 18시 56분, 즉 실제로 비행기가 추락한 시각에 오사카 국제공항에 착륙할 예정이었다. 출발 예정 시간보다 4분 늦은 18시 04분에 지상이동을 시작했으며 18시 12분에 활주로를 이륙했다. 이후 사고가 나기 직전까지 기체의 모든 계기는 정상 작동했다. 연료는 약 3시간을 비행할 수 있는 양이 탑재되었다.
4.2. 사고 발생[편집]
당일 JAL123편은 하네다를 출발한 후 예정대로 비행하고 있었으나 이륙한 지 12분이 지난 18시 24분에 고도 24,000ft(7,315.2m) 상공에 도달한 직후 큰 폭발음이 들리고 후쿠다 히로시(福田 博) 항공기관사(FE)의 계기판엔 R5(오른쪽 5번째)도어의 경고등이 점등되었다. FE는 이 도어가 떨어져 나갔다고 판단하고 조종사에게 알렸고 경고 50초 후에 조종사는 긴급 사태(EMERGENCY)인 '스쿽 7700'[28] 을 발신했다.
사고 직후 비행기가 상하로 요동치며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기장은 긴급 강하를 시도하면서 도쿄 국제공항으로 회항을 요청했다. 당시 도쿄 컨트롤에서는 나고야 공항까지[29] 직선방향으로 72마일(120km)정도 떨어져 나고야에 비상착륙이 가능한지 물어봤지만 기장은 하네다에 착륙해야 한다고 답했다. 아마도 하네다의 활주로가 나고야보다 더 길어서 그나마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때 날아간 것은 R5 도어가 아닌 벌크헤드와 수직 꼬리날개였고 설상가상으로 유압계통까지 같이 파괴되어 조종타면을 움직이는 유압액이 새 버려서[30][31] 조종불능에 빠졌다. 물론 항공기의 유압계통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보통 다중 계통으로 구성하며 747의 유압계통 역시 4개 채널로 구성하지만[32] 123편은 불행하게도 4개가 전부 찢겨나가고 말았다. 보잉 747은 꼬리날개 바로 밑에 모든 유압장치 파이프가 지나가는 구조인데 꼬리날개가 파괴되면서 유압장치 파이프가 같이 날아갔기 때문이다.[33]
조종불능에 빠진 직후 위와 같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조종사들은 플랩과 엔진 4개의 출력을 조정하여 어떻게든 기체를 제어하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한 번 선회를 시도하여 9,000 ft(2,743.2m)를 내려와 13,500 ft(4,114.8m)로 강하한 직후 기체의 불안정성이 증폭되면서 조종사는 결국 관제소에 조종불능을 보고했다. 이후 기체는 약 30분 동안 불안정한 상태로 상승과 하강을 반복했다. 이는 더치 롤, 휴고이드 운동 때문이다. 휴고이드 운동은 조종이 불가능한 기체의 기수가 위로 들리면 고도는 상승하면서 속력은 감소하고 어느 정도 속력이 감소하면 기수는 아래로 떨어지면서 고도는 다시 하강하며, 속력이 붙으면 다시 기체의 기수가 위로 향하는 것을 말한다. 심지어 상하로 휴고이드 운동을 반복하는 상태에서 좌우로 요동치기까지 했는데 수직미익 파괴+유압계통 상실로 비행 안정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몇몇 승객들이 남긴 유서에는 휘갈겨 쓴 글씨가 남았다. 더불어 엔진 출력차와 플랩을 이용한 조향마저 말을 듣지 않으면서 기체는 도쿄 방면 항로를 완전히 이탈하였다.
한편 다급한 상황을 듣고 있던 주일미군 요코타 기지는 123편이 비상착륙을 할 수 있도록 활주로를 비운채 구급차와 소방차들까지 비상대기시켜 놓고 도움을 주려고 하였다. 123편은 엔진 출력을 이용해 우선회를 계속하며 요코타 기지에 착륙하려 시도했으나 그때 불어온 남서풍에 의해 혼슈 내륙의 산악 지대 방향으로 좌선회를 해 버리고 말았다. 항공 기관사의 제안으로 고도를 낮추려 랜딩기어를 내렸으나[34] , 기체는 한 바퀴를 선회하며 되려 필요 이상으로 고도가 낮아졌다. 실속 상태만 간신히 막으며 계속해서 기수가 오르내리는 가운데 방향 조절은 완전히 불가능해졌고 비행기는 항로를 이탈해 하네다와 요코타의 정반대인 북서쪽으로 날아갔다.
최초 이상 발생 약 30분 뒤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승무원들이 몸부림을 쳤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기체는 양력을 완전히 잃고 보잉 747기의 뱅크각 한계를 한참 넘어서 오른쪽으로 쏠려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기체를 안정시키기 위해 예비수단인 전력을 이용해 플랩을 전개했는데 이때 좌측의 플랩은 끝까지 전개되어 양력이 크게 발생한 반면 우측의 플랩은 중간에 고착되어 움직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좌우 양력이 불균형해졌기 때문이었다. 조종사들도 이를 인지하고 급하게 다시 플랩을 넣으려 했지만[35] 때는 이미 늦었다. 6시 56분경, 뒤늦게 기체가 상승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오른쪽 주 날개가 지면과 충돌하고 동시에 기체의 일부분이 뜯겨나갔다.[36] 그 다음 기체 후부가 분리됐다.[37] 그리고 가까스로 잠시 상승했으나 조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기체는 기수를 내리면서 우측으로 회전했다. 마지막으로 123편의 메인동체부는 타카마가하라산의 경사면에 반전하는 형태로 충돌한 후 그대로 폭발하였다. 이때 동체부의 탑승자들은 모두 사망했다.
추락 이후에도 요코타 기지는 계속해서 요코타의 활주로는 비어 있으며 123편에게 언제든 착륙할 수 있다며 무전을 시도했지만 응답은 없었고 도쿄컨트롤도 레이더에서 123편이 사라지자 다급히 요코타 접근관제소와 교신하라며 무전을 시도했지만 응답이 없자 구조대와 자위대에 구조를 요청했고 요코타 기지도 긴급경보를 발령하고 기지에 주둔한 미 공군 C-130과 미 해병대 헬리콥터를 이용해 수색을 시도했다.
4.3. CVR(Cockpit Voice Recorder) 조종실 음성 녹음[편집]
- CAP: 기장 (타카하마 마사미)
- COP: 부기장 (사사키 유타카)
- F/E: 항공기관사 (후쿠다 히로시)
- ACC: 항공 관제센터
- YOK: 요코타 접근 관제소 (주일미군)
- APC: 도쿄 접근 관제센터
- PUR: 기내방송 (사무장)
- PRA: 기내안내방송 (자동)
- COM: 일본항공 본사 운항정보센터[38]
일본 운수성(현 국토교통성)은 비공개 자료였던 본 기체 조종실의 음성 녹음 자료를 1999년 11월에 모두 폐기 처분했다고 발표했는데[39] 누군가가 이를 녹음하여 2000년 8월에 방송국에 공개해서 큰 파장이 일었다.[40]
충격을 받을 수 있으니 주의할 것. 특히 재난 관련 PTSD가 있는 사람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이 음성 기록에 경고음과 충돌음이 나오는 데다 처절한 상황이 그대로 녹음되어 있어 상당히 섬뜩하다.
사고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고 싶다면 항공 사고 수사대나 사상 최악의 참사의 해당 에피소드를 보는 것도 추천한다. 전자는 교신 과정과 기내 상황을 각종 기록을 참고로 하여 극화 형식으로 대단히 급박한 분위기로 표현했고 후자는 타임 테이블 형식으로 상황을 분석하는 데 집중한다.[41]
X-Plane 11로 구현한 비행재연과 위의 CVR 기록, FDR 기록을 모두 덧붙인 영상. 위쪽의 영상들과 달리 조금 더 앞부분의 녹음분을 포함했기 때문에[43] 1분여간 조종사들과 승무원들의 일상대화[44] 및 급감압 이후 객실 방송, R5 카고도어 인근 좌석들의 산소마스크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대화[45] 도쿄컨트롤 주파수 안에서 멀쩡하게 비행을 하는 다른 비행기들[46] , 그리고 123편이 추락하여 레이더에서 사라지자 요코타 주일미군기지와 도쿄컨트롤 관제사가 다급하게 123편을 호출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4.4. 당시 기내의 상황[편집]
사고 당일, 그리고 사고 당시 산소 마스크가 내려온 모습을 찍은 아직까지는 멀쩡했던 일본항공 123편의 마지막 기내 사진이다. 아직까지는 기내의 분위기가 침착해 보인다. 카메라의 필름은 무사히 보존됐으나 정말 안타깝게도 촬영자를 포함한 사진 속의 승객 전원이 사망했다.[47]
18시 24분경, 기내에선 "펑" 하는 충격음이 들린 직후 각 좌석에 산소 마스크가 내려왔으며 "현재 긴급 하강(비상 강하)중입니다. 마스크를 착용해주세요."라는 프리 레코디드 어나운스[48] 가 일본어와 영어로 방송되었다. 승객들은 승무원의 지시에 따라 산소 마스크와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담배를 끄는 등의[49] 비상대책을 행했고 일부 좌석에선 수면에 충돌함을 대비해 구명조끼도 착용하게 하였다. 생존자[50] 의 증언에 따르면 사태가 심각함을 느끼긴 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인지할 수 없었고 이상 발생 직후부터 추락할 때까지도 혼란스러운 기색은 거의 없이 침착히 행동했다고 한다. 18시 30분경 승객들은 마지막임을 직감하고 불안정한 상태의 기체 내에서 필사적으로 종이에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낙하 사고에선 이상 발생에서 수 초~수 분의 여유도 없이 바로 추락하곤 하지만 본 사고에선 30분 동안 비행을 계속했기 때문에 유서를 남길 시간이 있었다.
그 후 충격에 대비하기 위한 '안전 자세[51] '를 취하였다. 기내 방송으로 유아를 동반한 부모와 유아 옆 승객에게 아이를 감싸는 방법, 신변물을 확인하고 예고 없이 착륙할 상황도 있음을 알리는 방송 등이 흘러나왔다.
조종실에선 도쿄 항공 교통 관리부를 통해 몇 번이나 "조종 불능" 신호를 전했다. 하네다 공항 관제에서 123편의 주파수 변경을 지시했으나 조종사들이 비행기의 위치를 파악할 때 사용하는 VOR 수신 안테나는 하필 수직미익 상단에 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미 수직미익과 함께 파괴된 후였고[52] 따라서 비행기의 위치를 알 수 없었다. 하네다 관제는 '사이타마현 쿠마가야(熊谷) 서쪽 25마일'임을 알렸다. 이때 기체는 사이타마현의 오타키촌 부근을 비행하고 있던 상태였다. 나가노현 카와가미촌에 진입할 때즈음 오른쪽으로 선회하여 오스타카 산 방면으로 향했는데 이 부근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사람이 머리 위를 천천히 선회하는 123편을 목격하였다. 목격자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다."고 비행 상황에 대해 증언하였다. 위에 있는 CVR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하네다로의 귀항을 요청했으나 조종 불능 때문에 하네다 공항과 반대 쪽으로 계속 멀어졌다.[53]
조종석에서는 승무원 사이에 산소 마스크를 착용할지 말지 토론하다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로 마지막까지 조종하기로 하였다. 마스크를 착용하면 서로의 목소리가 명확하게 들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기체는 속도와 동시에 엔진의 추진력도 크게 변동하였다. 이미 조종사에 의한 조작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북서쪽 570m 떨어진 계곡 너머 다카마가하라의 산등성이에 동체 후부가 꺾인 채 뒤집힌 상태로 돌격한 동체는 완파되었으나 4명의 생존자는 이 동체 후부의 좌석에 앉아 있었기에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낙하 시 속도는 265노트(시속 490km), 사고 시각은 18시 56분으로 Whoop Whoop Pull Up!과 함께 기장의 마지막 음성과 충격음이 들린 후 추락하고 CVR은 종료되었다.
4.5. 추락[편집]
추락하기 직전 아마추어 사진사가 도쿄도 오쿠타마마치에서 우연히 촬영한 일본항공 123편의 마지막 모습. 보다시피 수직꼬리날개가 통째로 사라졌다.[54]
참사 30주기를 맞아 후지 TV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에서 최초로 공개된 초고화질 컬러 복원 사진[55]
비행기가 추락한 현장
CVR과 FDR의 기록을 토대로 재현한 추락 순간.#
추락 직전 상승하기 위해 엔진 출력을 엄청나게 올린 상태로 지면에 곤두박질쳤기 때문에 추락 시 속도는 약 350kt(시속 650~700 km)였으며 그 충격은 수백 G(중력 가속도)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56] 충돌 과정에서 오른쪽 주날개가 지면에 닿으면서(나무에 부딪혔다는 설도 있다.) 기체 후부가 떨어져 나갔고[57] 여기서 떨어져나간 후부는 꼬리를 따라 떨어져 충격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기적적으로 생존자가 나올 수 있었다. 기체 후부에 탑승했던 사망자들도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하지만 본체는 그대로 산과 충돌하였고 당연히 생존자는 나오지 않았다. 또 본체에 탑승했던 사망자들은 신원 확인도 불가능할 정도로 참혹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충돌 현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일례로 타카하마 마사미(高濱 雅己) 기장의 시신은 완전히 불타 버려 유전자 감식이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었고 확인 가능한 치열 5개만 남은 아래턱뼈로 신원을 겨우 확인했다. 타카하마 마사미 기장의 장녀 요코(洋子)는 녹음본이 공개되기 전까지 15년간 "519명을[58] 희생시켜 놓고는 뻔뻔히도 잘도 살아있구나."라는 전화를 정말 수없이 받았다고 한다.[59][60] 2000년에 녹음본이 공개되고 나서야 마지막까지 기장이 최선을 다했음을 인정받았다. 얄궂게도 이 녹음본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언론에 유출된 것이었다.[61] 참고로 요코는 아버지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지킬 수 없었던 항공 안전에 헌신하겠다는 목표로 현재 아버지가 근무했던 일본항공에 객실 승무원으로 근무 중이다.
5. 늦어진 구조작업[편집]
구조작업이 늦어지고 생존자가 적어진 원인 중 하나는 추락 지점이 군마현[62] 의 남서부 최고 해발고도 2017m[63][64] 의 쿠모토리산 중턱이어서[65] 접근이 매우 어려웠다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8.12 연락회 주도로 참사 장소에 등산로 등이 잘 마련되었지만 참사 당시에는 너무나 험준하고 넓은 산악지대 정중앙이어서 자동차가 지나갈 수 있는 도로조차 근처에 없었고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운 조그마한 마을도 해발고도 2000m인 타카마가하라산 정상 넘어 5km 거리의 나가노현에 위치하며 같은 군마현 내 조그마한 마을이어도 적어도 7km는 벗어나야 나오기 시작하는 등 구조인력이 접근하거나 생존자를 후송하기 지극히 불리했다. 그리하여 추락 후 무려 14시간이 지나서야 구조가 시작되었다. 비행기가 조종불능이 된 후 30여 분 동안 하네다로 돌아가려고 노력하느니 스로틀을 조종해 되도록 구조가 쉬운 평지 지역에서 선회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워하는 의견도 있지만 기타 문단에 후술하였듯, 결국 구조하는 것도 착륙을 할 수 있어야 가능한데 당시 모든 조종면이 먹통이었으니 조종사들도 착륙을 못시키다 추락했고 평지 지역으로 못 간 것도 산악지대로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라 추락을 피하려다가 가게 된 것이기에 무의미한 가정일 따름이다.
추락 당시 비가 내리고 있어 추락한 기체가 2차 폭발을 일으키지 않았고 이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이 추락 현장에서 아직 살아 있었다.[66] 당시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잔해 속에서 죽어가던 희생자들의 비명 소리가 밤새 지속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구조 활동이 시작되는 다음날 9시가 되기 전 승객 상당수는 추운 밤을 견디지 못하고 저체온증으로 숨을 거두었다.[67] 특히 사고 수습 이후의 부검 과정에서 기체 후미의 탑승객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추락 이후 사망했음이 드러났다.[68]
참고로 사고 현장에 처음 도착한 자위대 헬기 조종사가 생존자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보고한 것이 일본 정부가 늑장 구조 작업을 결정한 원인이 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추락 직후에는 살아 있는 사람이 많았고 헬기 소리가 들렸을 때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헬기는 생존자가 없다고 판단해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일본 정부가 사고 수습을 방해했다는 음모론부터 구조 활동 자체가 성실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음모론에 이르기까지 온갖 확인되지 않은 추측성 보도와 여기에 온갖 살을 붙여 재생산된 음모론들이 기승을 부렸다. 이러한 문제는 당시 제기되던 기장 개인에 대한 비난과 함께 이 사건이 일본 사회를 충격에 빠지게 만들었던 대규모적인 항공사고였음을 짐작케 한다.[69] 사고 당시 보도 및 이후 제기된 무수한 음모론 중에서 특히 많은 주목을 받은 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추락 현장에서 방사능이 검출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중성자탄에 의한 테러라는 보도까지 나왔을 정도였으니 신빙성에 대해서는 각자가 판단해라.[70]
- 추락 확인 직후 미 공군의 C-130 수송기가 탐색에 나서 20분만에 기체를 찾아냈으며 탐색 구조 헬기가 2시간 후에 기체 추락 현장에 도착했다. 즉시 가장 가까운 주일미군 기지인 요코타 기지에 경보를 발령했고 주둔 중인 미 해병대는 구조 활동을 시작할 수 있도록 일본 정부에 허가를 요청하였지만 구조 활동은 자위대의 책임이라며 거절하고 탐색 구조 헬기의 이탈을 요구했다. 당시 미군 측의 요청은 '우리가 당장 달려가서 구조를 개시하겠다'가 아닌 '많은 부상자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사태이니 의료반과 헬기를 준비해 두었다'였다는 모양이고 이에 자위대 측은 '감사한다. 대기 바람.'이라고 답했을 뿐이라는데 사고 직후 미군의 헬기가 현장에 도착했던 것도 사실이고 이 헬기가 구조 활동을 개시하기 직전에 상관으로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 또한 사실이라는 당시 구조 헬기 승무원의 증언이 있으며 이 사실에 대해 함구령까지 떨어졌다고 한다.[71]
- 도쿄 국제공항에서 자위대 측에 구조대 파견 요청을 한 것은 비행기가 추락한 후 약 2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유는 '정확한 추락지점이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구조 요청을 낼 수 없다.'였다고. 그나마 123편에 문제가 생겼다는 정보는 추락 이전부터 자위대 측에 전해진 상태였고 덕분에 자위대의 대책 본부는 비교적 빠른 시간에 개설돼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항공 자위대의 탐색 구조 헬기가 추락 후 1시간만에 현장에 도착했지만 해당 헬기의 전문 분야는 해상구조였고 적외선 장비 등의 야간 구조 장비를 탑재하고 있지 않아 생존자를 인지하지 못하고 그대로 철수했다. 덧붙이면 자위대의 제1공정단장이 사고 지점의 야간 강하를 제안했지만 울창한 수목 지대상의 야간 강하는 극도로 위험했기에 기각당했다. 당시 제1공정단장은 정부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독자적으로 부대를 움직였기에 모반의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훗날 좌천되었다.
- 헬기로 추락 지점을 파악한 항공자위대가 육상자위대에 추락지점에 대한 정보를 전했지만 항공자위대와 육상자위대의 지휘 체계가 판이하게 달라 육상자위대가 정확한 추락 지점을 파악하고 도보로 도달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소모하고 말았다. 추락 지점 파악에 민관경이 모두 투입됐지만 서로 추락지점에 대한 정보가 달라 구조대를 혼란에 빠뜨렸을 뿐이었다. 결국 구조대가 도보로 추락 지점에 도착한 때는 추락 후 14시간이 지난 다음날 오전 9시였다.
- 일본 정부는 사고가 난 직후 전원 사망했을 것이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인명 구조보다 사고 기록 수집을 우선시했다. 여기에 상술한 구조대 도달 지연까지 겹치면서 사고 직후 도착한 의료진들은 많은 이들이 쇼크와 추위로 사망했음을 확인했다. 추락한 직후 비가 내려 큰 폭발이 일어나지 않아 의외로 많은 사람이 살아남았으며 상기 항목에도 나오는 생존 승무원 오치아이 유미의 증언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의 신음이 들렸고 한 남자아이와 그의 어머니가 서로를 애타게 부르는 것도 들었다고 한다.
- 구조 활동을 벌였을 당시 뉴스와 신문에 생존자가 7명이라고 보도되었다. 먼저 생존자로 보고된 4명 이외의 다른 3명을 더 구출하였다는 것인데 4인이 생존한 현장에서 200m 급경사를 오른 지점에서 아사히 신문의 사회부 기자가 "지금 막 3명의 생존자 구출! 1명은 들 것이 필요 없을 만큼 건강하며 구조대원에게 안겨 있다."고 무선으로 보고한 것이다. 후지 테레비의 뉴스 레포트(ニュースレポート)에서도 "현장은 참담한 상황입니다. 곧이어 들것에 실린 7, 8세 가량으로 보이는 소년이 실려오고 있습니다."라고 생중계되었다. 그러나 이 추가로 발표된 생존자 3명은 얼마 지나지 않아 미디어에서 온데간데없이 언급이 사라졌다.
- 또한 8월 13일 오전 9시~10경 소방대원이 추락 현장에서 짐승들이 다니는 길을 올라가는 도중에 내려오는 중학생 정도 되는 남자를 포함한 남자 4명의 일행을 만났는데 충격적인 현장에서 내려왔음에도 인사해도 대답 없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수상한 집단이었다는 것이다. 이 남성들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이이즈카 사토시 [飯塚訓]저, '추락 현장, 남겨진 사람들' p119, 5행) 사실 워낙 끔찍한 사고로 수많은 시체들이 실종되었기에 밝혀지지 않은 생존자일 수도 있다. 혹은 지나가던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고 말이 없던 것일 수도 있다. 건장한 성인 남성이라도 시체를 실제로 보면 기겁하며 큰 충격을 받기 마련이다. 특히 이 사고의 시체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불에 타거나 잔해 등에 훼손이 심한 시체들도 많았다.
- 영문 모를 서투른 사고 처리를 두고 자위대가 오인하여 격추했다느니, 무인기와 충돌했다느니, 또는 미국이 알면 좋지 않은 물건을 화물로 싣고 있었다느니 하는 음모론도 나돌았지만 그냥 관료주의로 인한 병폐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6. 생존자[편집]
- 카와카미 케이코(川上慶子, 당시 12세)[73] : 생존자 4명 중 제일 부상의 정도가 약했고 그로 인해 생존자 4명 중에서 가장 언론의 주목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사고 이후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30년이 지난 후에도 외부 언론과 일절 취재를 거부했다. 그래서 대신 사고 당시 야구부 연습 때문에 가족들이랑 홋카이도 여행을 못 간[74] 케이코의 오빠인 카와카미 치하루(川上 千春, 당시 14세)를 30주기를 맞이하여 겨우 취재했다고 한다. 2002년 10월 26일 결혼해서 2004년 6월 첫 출산하고 어머니 카와카미 카즈코(川上 和子, 사고당시 향년 39세)의 뒤를 이어 간호사 일을 했지만 언론 때문에 육아도 어려울 뿐더러 등교 거부를 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게다가 사고 당일인 8월 12일은 희생된 여동생 카와카미 사키코(川上 咲子, 향년 7세)의 생일이라서 더욱 비극적인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 비번 승무원이었던 생존자 오치아이 유미(落合由美, 당시 26세).
7. 희생자[편집]
승무원들이 처절하게 노력하는 동안 승객들은 비행기 구석구석에 유언을 새기고 마지막 사진을 찍어 남겨두었다.
- 카와구치 히로츠구(河口 博次, 향년 52세), 시체 겉옷의 안 주머니에 있는 메모장에 7페이지에 걸쳐 쓰여진 유서.[78] 당시 대학원 재학 중이던 장녀 마리코(河口真理子)는 소식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학업으로 가족과 떨어져 지내던 탓에 닷새가 지나서야 현장에 가서 동생과 함께 아버지의 시신을 확인한 후 수첩을 가져왔다고 증언했다.[79]
- 객실 승무원 중 부사무장 츠시마 유미코(対馬 祐三子, 향년 29세)가 불시착에 대비해 남겼던 메모. 추락하며 미친 듯이 요동치는 비행기 안에서 자신의 목숨조차 부지하기 힘든 극한의 상황에서도 승무원들은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시라이 마리코(白井 まり子, 향년 26세), 비행 시각표의 여백에.
- 무라카미 료헤이(村上 良平, 향년 43세), 회사명이 적힌 봉투에.[80] 불행하게도 무라카미는 원래는 오사카에 갈 일정이 아니었으나 느닷없이 잡힌 출장으로 오사카로 갔다고 한다.이때 장녀인 미키(현재는 결혼해서 '오리타 미키(折田みき)'다)는 2018년 33주기 다큐멘터리에 직접 출연하여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긴 "건강히 지내세요"라는 메시지를 마음에 품고 열심히 살아 왔다고 고백했고 그녀는 사고 이후 국어교사로 근무 중이라고 한다.
- 아버지인 타니구치 마사카츠(谷口 正勝)가 "마치코(まち子, 아이들(아츠시 • 마코토 誠)의 엄마[81] ), 아이들을 부탁해."라는 유서를 남기고 숨지자 장남 아츠시(篤志, 당시 13세)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고 소식으로 병상에 누운 어머니를 대신하여 직접 아버지의 신원을 확인했다. 죽음의 개념조차 다가오지 않을 어린아이가 혼자서 아버지의 시신을 확인 후 충격에 빠져 비틀거리는 모습이 전파를 타고 전국에 생중계되면서 일본 열도를 슬픔에 빠뜨린 바 있다. 훗날 장성한 아츠시는 "아버지는 모두가 생각하는 것처럼 든든하고 근엄한 아버지라기보다는 항상 촐랑대는, 믿음직스럽지 못한 사람이었는데, 그런 아버지가 그 무서운 순간에도 어떻게든 자신들에게 힘을 주려고 가족을 위해서 필사적으로 유서를 남겼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고" 회고했다.
- 당시 9세였던 미야지마 켄(美谷島 健) 군은 고시엔[82] 이 보고 싶어서 오사카의 친척집을 방문하려 혼자 비행기에 탔다가 변을 당했다. 일본항공에서는 당시 어린이 VIP라고 해서 승무원이 현지 공항에서 보호자에게 직접 어린아이를 데려다 주는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켄 군의 어머니 미야지마 쿠니코(美谷島 邦子, 당시 38세) 씨는 도쿄에서 오사카까지 비행기로 1시간 거리인 데다가 친척들이 공항까지 마중을 나와 준다는 이야기에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아이를 혼자 보냈다가 그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이에 혼자 아이를 보냈다는 죄책감, 추락하는 비행기 속에서 아이가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었을지에 대한 자책 등으로 고통에 시달리던 이 여성은 몇 번이나 죽으리라 결심했으나 분명 자신처럼 자책감에 살 희망을 잃어버린 유족들도 많을 것이라 생각하고 용기를 내어 유족들에게 위로 전화를 돌렸고 이것이 후일 '8.12 연락회'(8・12連絡会)라는 유족 모임으로 발전하게 되어 1985년부터 사무국장직을 맡으며 다른 항공사고 희생자 유가족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일본 지역 내 각 학교를 다니며 생명 강사로 활동하는 등 시민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미야지마 쿠니코 트위터) 이 여성은 33주기를 맞은 2018년에 다큐멘터리에 출연하여 비행기가 추락한 오쓰타카 산 속에 위치한 위령비와 희생자들의 묘역, 그리고 8.12연락회의 활동 등을 소개했다.[83]
- 이 사고로 당시 한신 타이거스 구단 사장 나카노 하지무(中埜 肇)도 목숨을 잃었는데 때문에 한신 선수들이 사망한 나카노 사장의 영전에 우승기를 바치자는 일념으로 의지를 불태워 그 해 21년 만에 센트럴리그 우승을 달성한 데 이어 구단 사상 처음으로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했다.[84] 창단 50년만의 첫 우승이자 우승을 눈 앞에 두고 사망한 나카노 사장의 영전에 바친 선물인 셈, 나카노 사장은 구단 사장으로 취임한 후 사망하기 하루 전날까지 경기를 마치고 로커로 돌아오는 선수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격려했고 그의 사고 소식을 접한 선수들의 충격은 아주 컸다고 한다. 사고가 났던 날 선수들이 받은 충격은 다음날 경기로 이어졌고 결국 사고가 났던 다음날 경기부터 일주일 뒤의 경기까지 한신은 모두 패배하면서 6연패에 빠져 버렸다.[85] 또 사고 닷새 뒤 시신 확인 시 그 해가 한신 타이거스 창단 50주년이라 특별히 제작했던 호랑이가 그려진 넥타이 핀을 착용하고 있어 불탄 넥타이 조각으로 신원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86] 아울러 이 사고 이후 일본의 프로 야구 선수들, 특히 모든 팀이 도카이도 - 산요 신칸센 연선에 몰려 있는 센트럴 리그 팀들은[87] 신칸센을 주로 이용해서 원정을 다니게 되었다. 다만 홋카이도와 큐슈 양 끝단에 팀이 있는 퍼시픽리그의 경우[88] 는 불가피하게 비행기를 타야 하는 상황. 또한 오키나와에 경기가 잡히거나 스프링캠프를 떠나는 경우에도 당연히 비행기다.
- 글리코·모리나가 사건으로 협박을 받던 하우스식품 사장 우라카미 이쿠오(浦上 郁夫)도 사건 종결을 알리는 신문 기사를 읽고 오사카 본사와 창업주인 아버지 산소에 사건 종식을 알리러 가던 중 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참고로 하우스 식품은 일본의 가정요리, 특히 거리에서 카레라이스를 시연 및 판매하며 처음 보급한 회사이며 우리가 흔히 아는 전자레인지에 넣어 손 쉽게 요리할 수 있는 '3분요리'의 시초가 하우스 식품이라고 할 수 있다.
- 사고 다섯 달 전부터 이바라키현 츠쿠바시에서[89] 열리고 있었던 1985 츠쿠바 엑스포[90] , 사건 전날 도쿄에서 개최되었던 코믹 마켓을 관람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참가자, 관람객들 중에도 희생자가 많았으며 당시 동인계에서 촉망받던 동인 작가 히모토 코린(緋本 こりん, 본명은 이코마 아야코 生駒隆子)도 목숨을 잃었다.
36세의 젊은 나이로 오사카대학 교수로 취임하여 시냅스, 기억에 관한 연구에서 세계를 선도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고인 사후 1987년 뇌의 가소성과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가노쿠니야 서점에서 책이 발간되었으며 사고 발생 25년 후인 2010년 이와나미 복간 문고에서 복간되었다.
또 일본 브레인 과학 진흥재단에서는 츠카하라 교수의 사후 업적과 공헌을 기리기 위해 '츠카하라 나키아키라 기념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참고로 사고 당시 츠카하라 교수와 위에 상술한 미야지마 켄(美谷島 健) 군은 같은 좌석에 탔다. 미야지마군과 츠카하라 교수 사이에 탔던 여성은 당시 도쿠시마현에 거주했던 노닌 치에코(能仁 千延子, 당시 향년 22세) 씨였다.
- 현역 바이올리니스트 겸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는 혼혈인 유카와 다이아나의 아버지 유카와 아키히사(湯川 昭久, 향년 56세)도 당시 비행기를 탔다가 희생되었는데 사고 발생 한 달 후 1985년 9월 16일 부인 수잔느 베일리는 유복녀 다이아나를 출산했다. 다이아나의 엄마는 남편을 잃은 후 영국 런던으로 돌아가 생전 남편의 뜻이었던 음악가의 길을 따라 딸인 다이아나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 2000년에 데뷔를 시켰다. 다이아나는 유복녀였기 때문에 유카와라는 성을 가질 수 없었지만 영국 법이 바뀐 뒤인 2009년 영국 고등법원 판결로 현재의 이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92] 다이아나는 현재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2009년 8월 12일 자신의 아버지를 비롯한 520명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음반도 제작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의 음악을 듣고 즐거움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7.1. 연예인 희생자[편집]
- '위를 보고 걷자(上を向いて歩こう)'로 아시아인 최초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한 가수 사카모토 큐도 이 사고에 휘말려 43세로 세상을 떠났다. 더욱 안타까운 건 지인의 선거유세차 오사카로 향한 것인데 늘 이용했던 전일본공수의 여객기에 탑승하려 했지만 하필 만석이라 할 수 없이 123편에 탔다가 변을 당했다.
- 타카라즈카 가극단의 67기생, 유키구미의 키타하라 요코(北原遥子)[93] 는 장래가 촉망되던 배우였으나 이 비행기로 오사카에 있는 지인을 만나러 가다가 변을 당했다.
7.2. 한국인 / 한국계 외국인 희생자[편집]
- 한국계 미국인 전옥자(당시 42세)[94] 는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외국인학교를 다니던 아들 크리스토퍼 킴 한가위(당시 16세)[95] 와 스코트 킴 한솔(14세)[96] 를 데리고 남편이자 당시 오사카 중앙일보 판매 위원장이던 김종욱을 만나러 가기 위해 이 비행기를 탔다가 변을 당했다.[97] 사고 당시 남편 김종욱의 이종사촌 형이자 서울특별시청 뒤에 있는 뉴 국제호텔 회장이었던 김유만이 전옥자의 친정 식구들에게 연락을 해서 세 모자가 사고기에 탑승했다고 연락했고 전옥자의 남동생 전유식이 도일하여 세 모자의 죽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김종욱의 식구는 1968년 결혼 후 1972년 미국으로 이민해서 시민권을 획득하고 1977년 귀국하여 외국인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외국인학교 교우 바비킴은 크리스토퍼는 성적이 굉장히 우수했지만 비행기 사고로 비명횡사해 안타깝다고 전했다.
- 한국인 희생자는 3명이다. 안시오(安時燠, 당시 52세), 정순덕(鄭順德, 당시 47세), 이혜경(李惠慶, 당시 21세)이며 안시오 씨는 일본에서 태어나 재일 한국인으로 살다가 사고 발생 10년 전부터 계속 한국을 오가며 송이버섯을 취급하는 식품 수출업을 하였다. 이후 사고 발생 5년 전인 1980년 부인 오공순(당시 나이 32세)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장녀 안희경(당시 4세), 차녀 안연정(당시 3세), 아들 안도영(1세)을 두고 있었으며 송이버섯 수출민 지문 날인 문제로 김포공항을 통해 일본으로 출국하고 오봉을 지내기 위해 오사카의 친척집으로 가던 도중 변을 당했다.
정순덕은 당시 큰딸인 정화(당시 28세)와 일본 도쿄 아카사카에서 의류업을 했다. 실제로 정순덕은 전 영화배우 최지희의 친척인데 일본 도쿄 아카사카에 터를 잡은 최지희의 초청으로 큰 딸과 의류상을 했으며 작은딸 영화(당시 24세)는 한국에서 유치원 교사였다. 정순덕의 여동생 정영순(당시 38세)은 일본에 있던 조카 정화로부터 정순덕이 오사카에 수금하러 지인을 만나러 가는 도중 이같은 변을 당했다고 들으면서 울먹였다고 한다.
이혜경은 도쿄에서 연극을 전공하던 유학생으로 1984년 12월 유학길에 올라 생활하던 중 사고 당일 오사카에 있던 셋째 친언니를 만나러 가다가 변을 당했다. 1985년 9월 귀국 예정이었으나 귀국을 1개월 앞둔 시점이라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국제결혼한 영국인 킴블 매슈즈(キンベル・マッシューズ, Kimbell Matthews)와 니시구치 마사코(西口 昌子) 부부가 신혼여행을 마치고 이 비행기를 탔다가 변을 당해 주위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만석이었던 만큼 외국인 희생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중국인과 독일인 희생자가 각각 1명, 미국인 희생자는 6명. 엄밀히 따지자면 미국인 희생자 6명 중 3명은 한국계이다. 상기한 3명의 한국인과 합하면 한국 혈통의 사망자는 6명이다.[98]
8. 사고 원인[편집]
추락한 항공기는 사고 7년 전인 1978년 6월 2일 오사카 국제공항에 착륙하던 중 테일 스트라이크로 후미가 파손되어 제작사인 보잉에 정비를 의뢰한 기체였다. 비행기의 기압을 유지하는 벌크헤드가 파손되어 일본항공에서 수리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규정대로 하자면 리벳 2줄이 박힌 이중 철판으로 동체와 고정해야 한다.[99] 그러나 보잉의 정비 총 담당자는 수리하면서 규정에는 적혀있지도 않은, 보강판을 두개로 절단하여 고정한다는 이상한 수리법으로 인해 리벳 2줄과 리벳 1줄이 박힌 이중 철판 두 개로 고정하는 꼴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 실런트 한 줄만으로 압력을 지탱해야 한다!
사실 이 수리가 끝나고나서도 사고를 막을 기회가 있었다. 그건 바로 1984년 11월 20일부터 12월 5일까지 사고기는 일본항공으로부터 C정비라고 부르는, 3000시간 이상 비행한 항공기를 대상으로 하는 대형 점검을 받았다. 이미 사고기는 잘못된 수리로 리벳에 균열이 점점 커지고있었는데, 문제는 일본항공 점검자들이 마지막까지 이 균열을 확인하지 못했다. 결국 점검 마지막날까지 이 문제를 찾지 못하고 항공기는 다시 투입되고야말았다. 점검 자체는 보잉사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지만, 마지막까지 문제를 확인하지 못한 일본항공 또한, 책임이 완전히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안전불감증이 나중에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수리 이후 비행을 계속하면서 기압 변화에 따른 금속 피로가 누적되다가 이 벌크헤드가 터져나가자 비행기의 방향 안정성을 유지하는 수직 꼬리날개가 날아가 버렸다. 이때 승강타, 방향 타면을 움직이는 동력을 제공하는 유압 분배기인 토크 박스까지 터져 유압이 새어나갔고 결국 유압과 조종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여담으로 일본의 TBS 테레비에서 이 부실한 수리에 참여한 40여 명의 수리공 중 한 명을 인터뷰했는데 자신들의 수리가 원인이 아니며 그 근거로 사실 이중 철판은 자신들이 수리하기 이전에 애초에 두 장이었다는 말도 안 되는 설명을 해 비난을 받기도 했다.
사실 1978년 테일 스트라이크 때문에 동체가 약간 변형됐는데 수리 후에도 사고 직전까지 캐빈 뒤쪽의 화장실 문이 잘 닫히지 않는다든지, 바람이 새어든다든지 휘파람 소리가 나는 등 결함이 있었다고 한다. 기체가 이미 뒤틀려 생긴 문제로 당연히 정상이 아니고 언젠가는 이 비행기로 사고가 날 것을 암시하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벌크헤드의 위치와 추락하기 전 아마추어 사진가가 찍은 사진에서 123편을 확대한 모습. 검은색 실선은 원래 있어야 하는 꼬리날개의 형상을 그린 것이다. 이걸 보면 수직꼬리날개 전체가 날아간 것을 볼 수 있다.
벌크헤드의 자세한 위치
다만 사고의 주 원인은 벌크헤드 파손이지만 이후 폭발적인 감압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폭발적인 감압이 없었다고 하는 측에서는 조종실 음성 기록을 근거로 산소 마스크를 착용할 여유가 있었음을 지적하지만 폭발적인 감압이 일어났다고 해도 무조건 그 직후 기내의 사람들이 의식을 잃지는 않는다. 보통 이 상태에는 순간적으로 수증기 응결이 일어나므로 감압을 알 수 있으며 자동(수동 가능)으로 산소 마스크가 좌석 근처에서 터져나온다. 이 때문에 아무리 감압이 일어나더라도 의식을 잃기 전 산소 마스크를 쓸 정도의 여유는 있다.
9. 사고 후[편집]
일본 측은 사고 원인 조사 후 보잉을 형사소송법에 따라 고발했으나 기각당했다. 일본항공은 피해자 측에게 총 7억 8천만 엔[100] 을 조의금 명목으로 지급했으며 회장은 퇴임했다. 그리고 115편 테일스트라이크 사건 당시 기장과 일본항공 측의 정비 담당자인 토미나가 히로오와 엔지니어인 타지마 스스무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사실 이들은 보잉에서 수리해 온 기체를 검사해서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죄책감이 들었던 것이지만 위의 사고 원인 문단의 이미지를 보면 알겠지만 중앙의 보강판이 쪼개졌는지 앞에서 봐서는 바로 알 수 없다는 문제가 있어서 이들 입장에서는 약간 억울한 부분도 있다.
또 보잉 측의 정비가 올바르지 못했음이 명백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일본항공은 보잉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소문에 한동안 시달려야 했다. 보잉이 주요 고객인 일본항공을 보호하기 위해 책임을 '뒤집어 썼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항공 사고 수사대에 따르면 당시 일본에서는 일본항공에 책임을 전가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사족으로 이 사고로 인하여 일본항공은 물론이고 일본의 모든 항공업계가 큰 손실을 입었다. 일본 국내선 항공의 수요는 25%나 감소했으며 이마저도 많은 이들이 일본항공 대신 전일본공수로 갈아타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사고 이전에도 일본 항공은 경쟁사인 전일본공수보다 신뢰가 떨어졌고 국내외에서 추락 사고가 많았으며 당장 이 사고로 사망한 사카모토 큐도 원래 일본항공을 신뢰하지 않아 전일본공수의 항공기를 타고 다녔을 정도였다.
1986년 8월 사고 1주기 직전 오스타카산 능선의 추락 현장에는 승혼의 비(昇魂之碑)라는 위령비가 세워졌고구글 지도 동시에 북동쪽 10km 지점 우에노무라에 추모공원도 건립됐다.구글 지도 여기서 매년 유가족과 우에노무라 마을 사람들, 일본항공 사장 등이 참석하는 추모식을 열고 있다.2021년 추모식 기사 2019년 10월 태풍 하기비스로 인해 묘표가 소실되는 등의 피해를 입기도 했고#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영향으로 태풍 피해 재정비가 늦어지거나 추모식 규모가 축소되는 일도 있었으며 해가 갈수록 찾는 유가족의 수도 줄고 있지만 꺼지지 않는 주변의 관심 속에서 추모식의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이 사고의 충격이 워낙 컸던지라 일본항공은 이 사고 이후 현재까지 인명사고를 단 1건도 내지 않고 있다. 다만 원가절감을 이유로 정비를 아웃소싱하는 상태며 이 사고 20주년 기념으로 위령제를 지낸 2005년 8월 12일 후쿠오카에서 호놀룰루로 가던 JALways(JAL 소속의 저가 항공사)의 DC-10이 이륙 직후 엔진 고장으로 화염을 내뿜으며 부품을 시가지에 떨어뜨리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2020년대에도 이 사건과 더불어 한 번 파산한 JAL을 신뢰할 수 없어 전일본공수(ANA)만을 이용하거나 가격이 비싸 ANA를 이용할 수 없을 경우에는 JAL이 아닌 저가 항공사를 사용하는 일본인도 여전히 많다. 그 정도로 일본인들의 기억 속에 큰 충격으로 남은 사건인지라 굳이 항공에 관심이 없는 사고 이후에 태어난 젊은 사람이라도 '123편' 이 사고 하나만은 대부분 안다.
2012년 10월 일본 WOWOW 방송에서 이 사고를 각색해 <능선의 저편에~아버지와 아들의 일본항공 사고>[101] 라는 제목의 2부작 드라마로 방영했다. 이 드라마는 동명의 책을 원작으로 하여 내용을 구성하였는데 큰 줄기인 사건의 내용이나 중요한 에피소드들은 세세하게 사실로 배치하고 주 스토리가 되는 세 가족의 이야기는 가상의 가족으로써 행복한 모습을 극대화 시켰다가 사고 이후 슬픔을 보여줌으로써 내용을 좀 더 극적으로 구성하였다. 쿠니무라 준, 이시다 유리코, 하기와라 마사토, 히로스에 료코, 마츠자카 토리, 칸지야 시호리 등 연기파와 스타 배우들이 총출동하는 화려한 라인업을 보여주었고 드라마 자체도 굉장히 잘 만들어졌다는 평. 2부작임에도 합동분향소와 유가족 대기실 세트장을 크고 그럴 듯하게 잘 만들고 엑스트라들도 아낌없이 투입하여 실제의 우울하고 슬픈 느낌을 잘 살렸다. 또 위에서 언급된 치비 VIP 시스템이나 13살 소년의 현장에서의 실신, 812 유가족 모임 등도 보여주면서 내용 자체에 자연스레 사실을 녹아내리게 하기 위해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음을 느낄 수 있다.
2018년 8월 16일 사고 33주년을 맞아 후지 테레비에서 "8.12 일본 항공 점보기 추락 사고 33주년의 진상"을 방영했다. 1편, 2편, 3편, 4편
10. 예방?[편집]
이 사고 이후 일본항공은 조종사를 모아서 유압과 꼬리날개의 세로방향 안정 기능을 전부 상실한 비행기를 착륙시키는 상황을 훈련했는데 단 한 명도 비행기를 무사히 착륙시키긴커녕 타카하마 기장과 사사키 부기장이 버텼던 32분까지도 버티지 못했다.
참고로 모든 유압을 상실한 기체가 추락하지 않고 착륙이라도 한 경우는 1989년 7월의 유나이티드 항공 232편 사고와 2003년 11월 22일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하는 DHL의 A300 화물기가 이라크 반군의 지대공 미사일에 피격당해 왼편 날개 일부 손상으로 3계통의 유압을 모두 상실한 후 바그다드 국제 공항에 비상 착륙한 두 건뿐이다.[102] 이외에는 미국의 B-52 스트라토포트리스 폭격기도 비행 시험 중 수직 꼬리 날개가 통째로 뜯겨나간 일 정도다. 그나마 이쪽은 유압 계통이 무사해서 제어가 가능한 덕분에 무사히 착륙했다. 각각의 해당 문서 참조.
NASA 드라이든 연구소는 Propulsion Controlled Aircraft(PCA)라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였는데 유압이 상실되었을 때 비행기가 엔진의 출력만을 통하여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하게 해 주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였으나 항공기가 유압이 나갈 확률은 극히 드물다는 이유로 이의 채용은 항공사 자율에 맡겼다. 그리고 이 장비를 장착한 항공사는 한 곳도 없다. 다만 이는 항공업계의 안이함 때문만은 아니고 이 프로그램에 제약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프로그램의 골자는 모든 유압이 나간 상태에서 좌우 엔진 출력으로 선회하고 상승과 하강을 조정하는 것인데 이것은 모든 것이 다 정상인 상황에서 '유압회로만 전멸한 경우'에 쓸 수 있다.[103] 하지만 2003년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일어난 DHL기 SA-7 피격 사고를 볼 때 어느 정도 항공기에 손실이 있어도 엔진 출력만으로 비상착륙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당시 DHL기는 날개가 손상되어 항력이 비대칭적으로 발생했고 연료가 새어 나가 화재가 발생한 상황이었다. [104]
JAL 123편이 유압 계통 완전 소실 후에도 30분이나 비행한 것이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이 때문이다. 만약 비행 균형 유지에 이상을 끼치는 요소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사고 발생 직후 회복 불가능의 회전을 일으켜 즉시 추락했을 것이다. 만약에 이때 추락했으면 그대로 해상에 돌진하였을 것이다.
11. 관련 동영상[편집]
영상1
영상2
후지TV에서 사고 30주기를 맞아 특별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생존자 요시자키 히로코의 발언을 토대로 드라마 형식으로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다. 나무위키에 게재되지 못한 세부적인 내용들도 나온다.
#1, #2[105]
12. 기타[편집]
- 민간 항공 업계에서 1985년은 항공 사건사고의 한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85년은 사상 최대 항공 재난의 해(1985년 12월 13일자 경향신문)[108] 정확히 표현하자면 한 해 동안 전세계에서 대형 항공 사건 사고가 4건[109] 이나 터졌던 해가 1985년이었으며[110] 29년 후 같은 참사[111] 가 반복되었다.[112]
- 개그맨이자 국민 MC 아카시야 산마도 원래 일본항공 123편에 탑승할 예정이었으나 일이 예정보다 일찍 끝나는 바람에 전일본공수로 갈아타서 화를 면했다. 그리고 아카시야 산마는 이 때의 트라우마로 1년 가까이 활동을 중단했으며 이후 도쿄와 오사카를 왕복할 때는 신칸센을 이용하게 되었다. 산마의 좌우명 '生きてるだけで丸儲け(살아있는 것만으로 이득)'는 이때 생겨났고 딸 이마루의 가명도 저 좌우명을 줄여 붙인 것이다.
- 코이즈미 쿄코는 사고 당일 삿포로에서 도쿄로 돌아올 때 본 사건의 사고기였던 JA8119를 탔다고 저녁 음악프로그램에서 스스로 밝혔다. 혹여나 해당 사고기가 먼저 뜯겨나갔다면 자신이 그 피해에 휘말렸을 수 있었던 셈.
- 123편 사고 발생 16년 후인 2001년에 스루가만 상공에서 총합 677명이 탑승해 있던 일본항공 958편과 907편이 니어미스를 겪는 사고가 발생했다. 실제로 충돌했다면 123편은 물론 역사상 최악의 항공 사고인 테네리페 참사까지 뛰어넘는 막대한 희생자가 나와 역대 항공 사고 사망자 수 1위, 3위에 일본항공이 랭크될 뻔 했다. 심지어 907편은 하네다 발 국내선용 보잉 747, 충돌 시 수직꼬리날개가 파괴되어 추락했을 것까지 123편과 일치한다. 게다가 958편의 경우 부산, 대구 지역 거주 탑승객이 많아 대한민국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고였다.[113]
- 테일 스트라이크로 파손된 기체를 제대로 수리하지 않아서 발생한 사고는 이 사고가 터진 지 17년 후에 또 반복되었다. 중화항공 611편 공중분해 사고가 바로 그것인데 1980년 2월 7일 홍콩의 카이탁 국제공항에 착륙하다가 발생한 테일 스트라이크로 파손된 부분을 대충 땜질만 한 채 계속 운항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중화항공 611편 공중분해 사고 문서 참조.
- 산의 날이 지정될 당시 사고가 났던 8월 12일로 정하려 했다가 군마현 측에서 반대하여 8월 11일로 변경됐다.
- 2017년 8월 12일, 도쿄 국제공항에서 출발하여 오사카 국제공항으로 향하던 ANA37편 비행기가 기체 여압장치 이상으로 인해 객실 기압이 급격히 떨어져 긴급 착륙하는 일이 있었다. 링크 이 사고와 날짜, 사고 시각[114] , 비행 경로가 정확히 일치한다. 본 영상 유튜브 댓글창에는 123편의 희생자들이 비행기의 안전추궁으로 항공안전에 경종을 울리고 더더욱 안전한 비행을 원하는 희생자들의 마음이라는 댓글과 우연에는 분수가 있다며 기묘하고 오싹해하는 댓글도 있었다. 영상의 댓글들을 통해 123편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으며 32년이 지난 2017년에도 이 사고가 일본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 만약 사고 기체가 산이 아닌 운 좋게 바다로 미끄러지듯이 착륙을 했다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더라도 520명씩이나 사망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있다. 실제로 허드슨 강의 기적과 같은 사례도 존재한다. 다만 이 사고 기체는 유압 손실로 인해 조종면의 사용이 불가능했고 방향타의 파손으로 방향을 돌리기도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상술된 사고 사례에서는 엔진만 멎었을 뿐 조종면은 모두 정상이었기에 강에 충돌하기까지 섬세한 컨트롤이 가능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게다가 바다에 착륙하는 기술은 상당히 어려우며 이때 사고기가 추락할 때 속도는 시속 600km가 넘었고 조종불능이었으니 이 상태로 바다에 착륙하면 땅에 충돌하는 것과 비슷한 상태며[115] 바다의 특성상 전부 수장되기 때문에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안 나올 확률도 높다. 일례로 에티오피아 항공 961편 납치 사건에서도 기체가 바다에 착수했으나 동체가 부서지는 걸 피할 수 없었으며 많은 사상자를 냈다. 다만 이 사건은 승객들이 너무 이르게 구명조끼를 부풀려서 착수 후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 사망자 확대에 일조하긴 했지만.
- 야후 재팬이나 구글에서 해당 항공기명을 검색하면 사망자 시신의 사진이 모자이크 없이 나온다. 이유는 당시 일본 언론사들이 모자이크를 하지 않고 그대로 방송이나 기사 등을 통해 사진들을 올려 버렸기 때문.[116] 굉장히 충격적이니[117] 심신미약자 등은 해당 홈페이지를 통해 검색하지 않는 것을 권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고 이후 사고 현장의 참혹한 시신들이 그대로 찍힌 사진집이 발매되어서 그 사진집이 출처인 사진들이 많다. 당연히 엄청나게 비난을 받고 절판되었지만 사진이 퍼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 훗날 제34대 육상자위대 육상막료장이 되는 오카베 도시야가 당시 구조활동 제1진의 소대장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2020년 구조대로 참여했던 당시의 처참했던 현장 이야기를 수기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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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기 전문 펼치기 · 접기 (현장의 훼손된 시신에 대한 묘사가 매우 상세하여 혐오감을 줄 수 있으므로 유의)] 특별수기 "오스타카 산" 48시간의 지옥
36년 전 8월 12일 일본 항공의 기체가 오스타카 산에 추락해 520명의 희생됐다. 당시 육상자위대 소대장으로 현장에 갔던 오카베 도시야씨가 48시간의 장렬한 구조 활동을 되돌아봤다.
주간 신초 2020 년 8월 13 · 20 일호
자위대는 8 월에 정기이동이 있어서 12일 주둔지의 대원클럽에서 전입대원의 환영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술도 마셨고 해서 주둔지 밖에 빌린 아파트에 가지 않고 부대 막사에서 자기로 했습니다.
그날 밤 중대 당직간부를 선 사람은 사쿠마 유이치 중사(당시 36세)였습니다. 자기 전에 사쿠마 중사에게 항공기 추락 보고를 받았습니다. (당시)제12사단의 담당 지역에서 난 사고이기에 제1공정 단에 재해 파견 준비 명령이 발표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일단 잤습니다.
그동안 헬기에서 레펠 강하(로프를 사용한 수직 강하)에 의한 신속한 현장 진출의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제1공정단의 차례가 되어, 제12사단에 배속되어 재해 파견이 새벽에 결정되었습니다.
아침 5시 전에 "명령 수령 나팔"이 울리고 영내에 남아 있던 우리는 즉시 출동 준비를 갖추고 집합, 대형 헬기 V-107 여섯 대를 타고 7시 54분, 나라시노에서 출발했습니다. 준비라고 해도 장비는 항상 등에 매고 있었고, 출발 전에 지도와 건빵을 지급받은 정도입니다.
여섯 대의 헬기 중 1번기는 제1공정단 파견부대 지휘관인 보병대장 이하의 "구조부대본부"의 요원이 탔고, 2번기부터 6번기는 각 대원 12명이 탑승했습니다. 12명 중 1명은 의무병이었고, 나는 3번기의 소대장으로 부하 중 10명을 선발했습니다.
소대장인 내 서포트로 평상시 연습에서도 항상 함께 했던 사쿠마 중사를 가장 먼저 지명했습니다. 헬기 조종사들도 어느 때보 다 빠릿하고, 긴장된 공기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현장 "오스타카 능선" 상공에 도착해 하강을 시작했을 때가 8시 48분이었습니다. 우선 1-3번기의 대원이 현장에 내렸고, 4-6번기는 소마가하라 산기슭에서 일단 대기하게 되었습니다. 공수 부대는 지휘관이 "먼저 하강"하는 전통이 있고, 3번기는 내가 리더이기 때문에 먼저 로프를 타고 산 중턱에 내려 섰습니다. 내 다음에 내린 것은 사쿠마 중사입니다.
공수대원에게 레펠 강하는 다반사이지만, 가파른 경사면에 착지한 순간 강렬한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부츠의 뒷면에 척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있었습니다. "뭐지?"라고 생각 발밑을 봤더니 거기에 있던 건 사람의 "귀"였습니다. 사체를 건드린 것을 알고, 바로 "죄송합니다"라고 마음 속으로 사과했습니다.
강하 후 보병대장이 명령을 하달했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생존자 구출"과 "지형 정찰"이었습니다. 2번기의 소대와 함께 생존자를 수색하면서 능선을 올라갔습니다. 저와 2번기의 소대장을 중심으로 좌우 각자 5-10 미터 정도의 간격으로 가로로 퍼져 경사면을 올라가기로 되어있었습니다.
"생존자 발견!"
숨막히는 광경이었습니다. 항공기 연료에 불이 붙어 특이한 냄새가 나고, 바위에는 사람의 내장이 붙어 있었습니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면 또 머리칼이 달린 두피가 나무에 매달려있었습니다. 경사가 심해서 나무 줄기를 붙잡고 오르는데, 나무에 손댄 순간 소름이 끼쳤습니다. 자세히 보니 나무 전체가 피와 살점으로 새빨갛게 물들어있었습니다. 내 뒤를 걸으면서 그 "빨간 나무"를 만져 버린 대원도 "악"하고 소리질렀습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직업을 잘못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지옥과 같은 현장을 목격하고, 나는 "전장의 광경이란 아마 이런 것일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견딜 수 없었고, 나는 이런 일에 맞지 않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부하 앞에서는 티낼 수 없었지만, 그것이 본심이었습니다. 오스타카는 나에게 첫 재해 파견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는 익숙해졌지만, 그런 느낌은 불식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대원 모두가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 생존자가 있을 리가 없다"라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경사면을 오르면 오를수록 멀쩡한 시신도 적어졌습니다. 있는 것은 손과 발 같은 시체의 부분과 살점 피부뿐. 너무 처참한 곳이었습니다. 이런 사고로 도저히 인간이 살아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생존자를 찾지 못한 채 능선을 오르다, 이번에는 다른 방향을 향해 내려 가면서 수색을 계속하려고 했을 때입니다. 무전에서 놀라운 정보가 흘러 왔습니다. "생존자 발견!" 귀를 의심했고, "어?"라고 하며 다른 대원과 얼굴을 마주했습니다.
무선을 보내온 것은 4-6번기에서 내린 그룹이었습니다. 당초 소마가하라에서 대기를 명받은 3번기는 우리보다 1시간 뒤인 9시 45 분에 현장에 와서 하강을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하강 지점에서 능선을 올라간 반면에, 그들은 대대장의 명령에 반대 방향으로 내려 가면서 수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게노사와"라는 산기슭 둘레에서 도보로 올라왔다가 현지 소방단과 마쓰모토 주둔지의 제13연대와 합류했고, 그래서 4명의 생존자를 발견한 것입니다.
능선에 있던 우리는 "강하 지점에 돌아가"라고 지시를 받았습니다. 가파른 산에서 그 지역이 거의 평탄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부근에서 생존자를 헬기에 매달게 되었습니다. 하강 지점으로 잠시 돌아가니, 아래에서 생존자가 들린 채 올라왔습니다. 분명 사고기의 화장실 문 등을 들것으로 써서 옮긴 것 같습니다.
생존자 4명은 그 비참한 현장에서 하룻밤동안 발견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상당히 쇠약해져있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의 소녀(카와카미 케이코씨로 알려짐)에게 "힘내!"라고 말을 걸면 "응응"이라고 수긍 같은 반응을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괜찮아 살 수 있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시간이 길었습니다. 구출용 헬기가 좀처럼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 번 요청하고 있는데 전혀 오지 않았습니다. 보도진의 헬기를 포함하여 많은 항공기가 상공에 날고 있었기 때문에 2차 재해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결국 생존자가 리프팅 지점에 옮겨진 후 헬기에 수용이 완료될 때까지 1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헬기를 기다리는 동안 모두가 좌절하고 그중 현장에 도착한 적십자의 여성 간호사가 엄청난 서슬로 고함쳤습니다. 내 얼굴을 가리켜 지목하며 "만약에 사람들이 죽게 되면 너희들의 탓니까!"라고. 그것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도 어쩔 수 없는거야"라고 하는 기분이었지요.
헬기를 기다리며 현장에서는 호이스트(헬기에서 와이어에 의한 리프팅)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적십자의 의사로부터 "대원이 직접 안고 타는 것이 좋다"고 말해, 자위대의 갈색 담요를 생존자의 몸에 감싸고 있었습니다. 먼저 리프팅 것은 요시 미키코 씨(당시 8세)입니다. 담요로 감싼 채 공수대원이 안고 헬기에 태웠습니다.
다음은 당시 14세였던 카와카미 케이코 씨. 그녀를 옮긴 것이, 나의 친구인 사쿠마 중사였습니다. 1번째와 마찬가지로, 담요로 싸서 준비를 했는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구출된 생존자의 모습을 촬영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어느새 주위에 있던 보도진들이 손을 뻗어 담요를 벗겨 낸 거죠. "무슨 짓이야!"라고 화내는 사이 다른 헬기가 바로 위에 왔고 와이어가 내려왔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사쿠마 중사는 담요 없이 카와카미 씨를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세번째 요시자키 히로코 씨 (미키코 씨의 어머니, 당시 34 세)와 4번째 오치아이 유미 씨(당시 26 세)는 들것에 실린 상태에서 리프팅했습니다. 왜냐하면 안고 올리기에 탈진한 성인은 상당히 무거워 중간에 떨어질 우려도있어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세번째 요시자키 씨의 어머니를 태운 들것이 헬기에서 내려오는 바람을 받고 리프팅 순간에 빙글빙글 회전하고 말았습니다. 대단한 속도로 회전하고, 지금이라도 들것에서 몸이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들었습니다. 나는 바로 밑에서 두 팔을 벌려 "만일 떨어져 버리면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으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만, 이것은 우리의 정말 초보적인 실수였습니다. 본래 들것의 손잡이에 로프를 붙여 들것이 회전하지 않도록 지상 대원이 로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기본적인 일이지만, 역시 괴상한 현장에서 평온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일까요. 그 비상시에 아무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매달아 버렸습니다. 지금도 기억할 때마다 싸늘해집니다. 마지막으로 오치아이 씨를 수용할 때는 제대로 보조 로프를 넣었습니다.
생존자 구출을 마친 것이 13일 13시 29분. 거기에서 다음의 임무를 명받았습니다. 헬기장의 구축입니다. 짐승이 다니는 길조차 없는 가파른 산에 인력과 구조 물자를 신속하게 지원하기 위해선 헬기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상공에서 로프 하강할 수 있었지만 이후의 작업은 헬기를 착륙시키는 것이 필수였습니다.
보병대장이 내게 대형 헬기(V-107)용 하나와 중형 헬기(HU-1H) 용 하나, 합쳐서 두 곳의 헬기장을 구축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우리는 훈련 · 연습 간이 헬기장을 만들지만, 그 때는 가급적 넓고 평탄한 곳을 찾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항공 기체의 날개가 떨어져 있던 근처에 주목했습니다. 그 근처는 비교적 넓고 평평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항공기 사고이기 때문에 사고 원인 규명을 위해 현장 검증도 필요합니다. 마음대로 현장의 상태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에 현장을 관할하는 군마 현경의 책임자를 찾았습니다.
주위에는 많은 경찰관이 있었지만, 거의 다 나가노 현경이거나 경시청 소속이었고 좀처럼 군마 현경의 책임자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간신히 찾아 교섭했더니 시종일관 "안 된다." 어쩔 수 없이 현장 검증이 필요한 곳의 아래 지점으로 결정하고 주변의 나무를 베고 경사면을 굴착하고 깎은 암석과 흙을 아래에 담는 방식으로 중형 헬기용 헬기장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
우리가 헬기장을 만들고 있는 동안에도 속속 사체가 옮겨졌습니다. 이윽고 밤이 되고, 13일 자정에는 헬리포트의 큰 틀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한밤 중에 세세한 마무리 작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날 그 자리에서 쪽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14일 아침 3시경부터 작업을 재개하고 7시경에 헬기장이 완성되었습니다.
"단풍잎"
하지만, 이 쪽잠이 힘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부터 헬기로 이송할 수 있도록, 헬기장 부근에는 시신이 모이고 있었습니다. 그 옆으로 누워 자려고 했지만, 한여름의 더위에 손상된 시신은 죽음의 냄새를 풍겼기에 몇 번이나 깼습니다.
14일에는 완성된 헬기장을 사용하여 아침부터 몇 번이나 헬기가 왕래했고 15시 정도까지 총 121구의 시신을 운반했습니다. 이 숫자에 관해서는 쓰라린 추억이 있습니다. 이날 상급 부대에서 연락 간부가 현장에 왔는데, 헬기장의 운영을 지휘하고 있던 저를 보자마자 "오늘은 몇 구나 날랐지?"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대답이 어려웠습니다.
사체라고 해도, 전신이 있는 것은 적고, 손과 다리만 있는 부분 사체도 많았습니다. 그것을 현장에서 가능한 빨리 옮기기 위해 개별적으로 포장한 부분 시신 등을 함께 담요에 싸서 "한 묶음"으로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121묶음"을 보낸 것이지, " 몇 구?"라고 물어도 모를 것입니다.
그런데 연락 간부는 즉답할 수 없는 나를 보고 "그래도 책임자냐!"라고 질타했습니다. 잠이 부족했던 탓도 있겠지만, 화가 나서 부하 한 명에게 "야, 거기 담요 좀 열어봐!"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사체가 몇 구인지 파악할 수 있어요!?"라고 반문하자, 상대방도 가만히 헬기를 타고 돌아갔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가장 힘들었던 것은 "단풍나무"입니다. 사체의 반송 준비중 비닐 봉지에 들어간 무언가가 날라 왔습니다. 붉고 작아 처음에는 단풍나무잎인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알고보니 피로 물든 아이들의 손바닥이었던 겁니다. 서서히 시신을 보는데 익숙해져 있었습니다만, 그것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정말 불쌍하고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었습니다.
14일 15시경부터 날씨가 악화되어 시신 이송 작업은 거기서 중단됐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그날 밤도 전날과 마찬가지로 시신 옆에서 쪽잠을 자고, 다음날 15일 아침, 우리 공수부대는 임무를 마치고 헬기로 나라시노에 귀환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오스타카 산에 있던 것은 13일 아침부터 15일 아침까지 48시간 정도입니다. 잠도 식사도 못한 채 극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하면 꽤 스트레스가 쌓여 있었던 것입니다.
경찰과 싸우기도 했습니다. 자위대 헬기가 옮겨 오는 것은 곡괭이와 삽 등의 공사용 장비, 시신 보관용 담요 등 임무에 직결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경찰 헬기는 도시락이나 담배, 침낭을 많이 들고 왔습니다.
한 번은 펼쳐진 침낭이 헬기의 풍압에 떴습니다, 근처에 있던 내 부하가 황급히 뛰어 들어 눌렀습니다. 그러자 경찰관이 그를 향해 "이봐 자위대 양반, 침낭에 구멍난다고"라고 단언했습니다. 부하는 휴식 중이었기 때문에 담배를 들고 있었습니다. 경찰은 그가 장난스럽게 침낭에 누워 뒹구는 것처럼 보았던 것입니다. 그 경찰관에게 "야 이 등신아! 침낭이 떠서 로터에 닿으면 헬기가 추락한단 말이야!"라고 호통쳤습니다.
매스컴에도 화가 났습니다. 카와카미 씨의 담요를 벗긴 것도 그렇습니다만, 시신 사진만 찍는 무리도 있다보니 무심코 "작작 해라!"라고 꾸짖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14일 낮 무렵에 한 신문 기자가 가지고 온 조간 신문을 봤을 때는 역시 기뻤습니다. 거기에는 카와카미 씨를 들고 헬기로 옮기는 사쿠마 중사 사진이 1면에 실렸습니다.
지금은 재해 때 자위대의 활동이 미디어에서도 다루어지고 있지만, 당시 자위대는 어떤 의미로 숨어 사는 쪽이었습니다. 언론이 현장에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우리의 활동이 대대적으로 피사체가 되다니 나 자신은 상상도 하지 않았고, 어쨌든 놀랐습니다. 동시에, 우리들은 옳은 일을하고 있구나라는 실감이 솟았습니다.
5년 전에, 사고 30주년으로 방송국의 취재를 받았을 때, 감독이 입을 열자마자 "왜 자위대의 도착이 늦었습니까"라는 질문을 한 것은 뜻밖이었습니다. 원래 당시의 재해 파견 요청을 받아야만 최초 출동 할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마음대로 현장으로 향할 수는 없었습니다.
또한 "밤중에 현장에 갈 수는 없었던 것인가"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낙하산 · 보병 부대는 심야의 현장에도 구조 활동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수송 명령 당시 자위대 헬기는 밤에 볼 수 있는 장치가 장착되어 있지 않고, 어두운 밤에 미지의 산지 · 숲의 비행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12사단 예하 부대는 밤새 바로 암중 모색으로 현장을 향해 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자위대는 할 수 있는 일을 했다고 나는 지금도 확신합니다.
스트레스 장애
오스타카에서의 경험은 이후 자위대 삶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가장 큰 것은 "스트레스 장애"에 대해 몸소 배운 것입니다. 사실 나라시노에 돌아온 후 불면증으로 고생했습니다.
낮에 일을 하고 있을 때는 그럴 일이 없지만, 밤 아파트에 가서 어두운 장소에 있을 때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침실은 물론 화장실과 욕실 전기도 켜 둔 채로 두지 않으면 불안. 그리고 취침 중에 문득 창문에 시선을 돌리면 베란다에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나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거의 전신의 사람도 있고, 상반신만 있는 사람, 타버린 사람 등 모든 사람, 오스타카의 현장에서 우리가 후송에 관련됐던 시신의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물론 환각이라고 스스로 납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나타나면 두려움을 느끼는 반면, 그만큼 불편은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저 "왜 나타나는 거야"라는 기분이었습니다. 결국 위스키를 마시지 않으면 잠들 수 없는 상태가 1개월 정도 계속 되었습니다.
그동안 육류도 전혀 먹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동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시절의 자위대는 아직 스트레스 장애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공정단은 남자 중의 남자가 모인 맹자들의 정예 부대였습니다. 연상의 부하를 통솔하는 젊은 간부로, 약점은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미친건가? 병원에 갔다 와라"는 말만 들을 것 같아 상관에게도 누구에게도 상담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스타카에 출동한 자 중 외박을 신청해 나갔던 영내 거주 대원이 "섬뜩한 느낌"이라며 주둔지에 돌아와 모두 함께 자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이상하게도 안심했습니다. 그 대원을 향해 "한심한 놈"이라고 웃었습니다만, 내심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 동일하구나"라고 안심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훨씬 나중에 내가 대령으로 연대장이 되었던 2003년에 자위대가 이라크에 파견되었습니다. 나도 파견에 대비해 부대 지휘관으로서 스트레스 장애에 관한 교육을 받았고 (결국 나 자신은 이라크에 가지 않았습니다만) 더욱 그 후의 근무에서도 지휘관 · 참모에게 필요한 지식으로 배웠습니다 .
그래서 당시 26세의 내가 오스타카 산 이후 자택에서 체험 한 것이 바로 '급성 스트레스 장애 (ASD)'의 전형적인 예였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이후 간신히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덧붙여서, ASD 상태가 1개월 이상 지속되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고합니다.
전장과 대규모 재해 피해 지역 등의 열악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강한 인간도 스트레스 장애를 겪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내가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단 48시간의 임무에 내 마음은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숨기고 혼자 괴로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자위대 해외 파견이나 재해 파견 때마다 정신 건강에 대한 관리를 체계적으로 실시하고 있습니다. 임무 종료 후 대원을 혼자 스트레스 장애를 대적하는 것 같은 상태로 방치하는 것은 안 되며, 만일 그랬다면 그 지휘관은 실격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귀중한 체험은 나 자신에게 지휘관으로서 많은 부하를 이끌고 임무를 완수하는 데 큰 양식이 되었습니다.
그 슬픈 사고에서 35년을 맞이하는 지금, 다시 피해자의 명복과 생존자와 유족 분들의 삶에 행복이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오카베 토시야 (오카베 토시야) 전 육상막료장
1959년 후쿠오카 현 출생. 전 육상 자위관 (방대 25기). 제6사단장, 북부방면 총감 등을 거쳐 2016년 제35대 육상막료장에 취임. 2017년 8월에 퇴임.
「주간 신쵸 출판사」 2020년 8월 13·20일 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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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술했듯 123번은 당연히 결번되었으나 2020년 8월 6일에 뜬금없이 JL123편이 35년 만에 포착되면서 사람들을 당혹시켰다. 물론 실제로 편성된 것은 아니었고 직원이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비행기와 관제탑의 통신 테스트 작업 중 더미 데이터를 입력하는 과정에서 그냥 쓰기 편한 '0123'을 입력해서 발생한 문제로 밝혀졌다. 즉 아무 의미 없는 숫자였던 것이다. 더미 데이터다 보니 비행 정보가 비정상적이었고 마침 시기도 오봉 직전이어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에 대해 일본항공은 직원의 실수를 사과하고 향후에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직원을 교육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참고로 더미 데이터를 부여했던 실제 해당 항공기의 편명은 'JL712'. 이런 단순한 해프닝이 기사로 뜬 것만 봐도 일본인들이 이 사고로 인해 얼마나 큰 트라우마를 얻었는지 알 수 있다.
- 일본의 전 가수이자 현 배우인 후카다 쿄코가 만 2세에 본 참사가 일어났던 날 원래 가족과 탑승 예정이었지만 이동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던 도쿄 모노레일 하네다 공항선이 지연하고 있었기 때문에 탑승하지 않았다고 한다. 링크 해당 링크에 따르면 이나가와 쥰지, 이츠미 마사타카, 아사미 레이, 쟈니 키타가와, 소년대, 쇼텐의 출연자들 역시 123편에 탑승하려 했다고 한다.
- 이 일이 있고난 이후 많은 항공기 기장들은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상황을 재현한 시뮬레이터를 돌리며 어떻게 하면 같은 상황에서 비행기를 살릴 수 있을 지 연구를 하였다. 그리고 4년 뒤 유나이티드 항공 232편이 피로 파괴로 유압 장치 파손이 발생하였을때 해당 사건을 연구했던 데니스 피치 기장은 엘 헤인즈 기장, 빌 레코즈 부기장, 더들리 드보르작 항공 기관사를 도와 175명의 귀중한 목숨을 살리는데 성공했다.
13. 대중매체에서[편집]
- 추락 후 30분이 지나고 나서 일본 방송에 속속 속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링크는 저작권 문제로 삭제됨.
- 테레비 아사히(ANN)에서는 쇼 프로그램 '월요 스페셜 90'이 방송 중이었는데 자막으로 479명이 탄 하네다 발 오사카 행 일본 항공 여객기가 사고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했고 쇼 프로그램 도중에 뉴스 속보 프로그램을 편성하여 소식을 전했다.#
- 닛폰 테레비(NNN)에서는 생방송인 '더 톱 텐(ザ・トップテン)'[118] 이 막 시작되고 남녀 진행자(사카이 마사아키, 사카키바라 이쿠에)가 참가자를 소개하는 시점이었다. 문제는 해당 방송이 생방송 중이었기 때문에 남자 진행자가 '잠시 긴급 뉴스 때문에 뉴스 스튜디오로 장면을 바꾸겠으니 양해 바랍니다'라고 말하고 보도국으로 장면이 전환되어 추락 장소(나가노현 키타아이키무라촌) 등 상세한 정보를 전했다. 이런 상황이 프로그램 진행 중 3~4번 반복되었다. 해당 프로그램에 출연한 코이즈미 쿄코는 방송 당일 123편에 사용한 것과 같은 비행기(JA8119)[119] 로 삿포로에서 도쿄로 돌아왔는데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리고 프로그램 종료 후 바로 뉴스 속보 프로그램으로 전환되었다.
- NHK에서는 다큐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었는데, 자막으로 속보를 내보내고 속보 프로그램을 편성해 '여객기가 레이더에서 사라졌다!'는 방송을 했다.#
- NHK를 포함해 주요 방송사들은 사고 직후 철야방송을 통해 사고 속보를 전했다.
- 항공 사고 수사대 3편에서 이 사고에 대해서 방영하였다. 한국어판 제목이 "늑장 대응의 대가"인데 상당히 비유적이다.[120] 원제는 Out of control, 즉 통제 불능으로 이상 발생 직후부터의 조종 불가 상황을 뜻한다.
- 야마사키 도요코의 소설 지지 않는 태양이 이 사고를 모티브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2009년에 와타나베 켄 주연의 동명의 영화가 개봉되었으며 2016년 WOWOW에서 카미카와 타카야 주연으로 드라마화되었다.
- 소년탐정 김전일의 유키야샤 전설 살인사건의 비행기 사고가 이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의견이 있다.
- 사이코메트러 에지의 에피소드 중에서 비행기 사고로 자폐아가 된 소녀의 이야기도 이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
- 갓핸드 테루의 마히가시 테루가 겪은 천하 항공기 추락 사고 역시 이 사건을 참조하였다는 의견이 있다.
- 사이코 닥터 시리즈 중 1부에서 주인공 카이 쿄스케가 대학 시절에 사랑했던 여대생의 죽음을 조사할 때 이 사건이 언급된다.
- 2018년 3월 11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여러 음모론들 중 군부대에서 비밀 훈련 작전을 진행하던 중 날린 표적기가 기체와 충돌했다는 설에 중점을 뒀다. 링크
- 요코야마 히데오의 소설 "클라이머즈 하이"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121] 도 있다.
- 한국에서 본 사건을 소재로 한 노래와 뮤직비디오가 가수 루이(LUEY)[122] "루(淚)-그대가 힘들면"이라는 이름으로 2001년 말에 제작되었다. 앨범 발매 전에는 약 6~7분 가량의 긴 분량의 버젼이 엠넷 등의 케이블 방송에서 파일럿 형식으로 사전 공개되었다. 사고 과정이 조금 더 상세하게 묘사되어 조종사들이나 탑승객들의 모습이 조금 더 비중 있게 나오며 이의 배경 음악으로 '루'의 MR 파트가 중간에 추가로 삽입된다. 하지만 후에 나온 버전의 시작과 끝 부분에 들어가는 신문 보도나 희생자를 위한 추모 문구가 없는지라 해당 항공 사고를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그냥 뮤직비디오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극본 정도로만 생각할 정도다.
실제 이 인물은 재일교포로 연극을 공부했으며 귀국 한 달을 앞두고 홀로 항공편에 올랐다가 안타깝게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으나 사귀던 애인과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은 뮤직비디오에서의 극적인 연출을 위한 설정이었을 뿐 모델이 되는 이혜경은 당시에 애인이 없던 평범한 20대 아가씨였다고 한다. 그래서 고수가 맡은 이혜경의 애인으로 나오는 김태우라는 캐릭터는 사실 가공인물이다.
-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작품 속 영원한 루저 나카무라 쇼토쿠가 자위대에 있을 때 이 사고의 처리에 참가했다는 뻥을 쳤다. 작가의 언급에 따르면 처음 작품을 그릴 당시에는 나카무라가 직접 경험담이랍시고 이야기를 했지만 나중에 들춰 보니 그 이야기는 나카무라의 선배의 경험담으로, 나카무라 본인은 파견나간 적이 없었다. 뽀록난 후 나카무라가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제로 ~문신의 소리~에는 항공기 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은 타키가와 요시노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본작(1989년) 1개월 전 터진 항공기 사고에서 유일하게 구조되었으며 구조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가족들의 시신에 둘러싸여 공포에 떨었다고 하니 본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