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미(유송)
덤프버전 : (♥ 1)
1. 개요[편집]
유송의 화가로 자는 경현(景玄). 왕유(王孺)의 아들이자 왕홍(王弘)의 조카.
2. 생애[편집]
415년, 서주(徐州) 낭야군(琅邪郡) 임기현(臨沂縣)에서 왕유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 부터 영리했다. 젊었을 때는 배우기를 좋아하고 글을 잘 썼으며 서예에 능통해 그림을 잘 그렸다. 또한 음률, 의약에 뛰어나고 음양술수(陰陽術數)도 할 줄 알았다. 왕미가 16살이 되던 해인 430년에 주에서 수재(秀才)로 천거되어 형양왕(衡陽王) 의계(義季)가 왕미를 우군(右軍)에 불렀는데 왕미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왕미는 사마제주(司徒祭酒)에 임명되었다. 주부(主簿)와 태자중사인(太子中舍人)을 두루 역임했다.
이후 부친 왕유가 죽고 관직을 버렸는데 벼슬살이가 싫어졌는지 남평왕(南平王) 유삭(劉鑠)의 자의참군(諮議參軍) 및 중서시랑(中書侍郞), 남랑사태수(南琅邪太守), 의흥태수(義興太守) 등의 직책에 불렸지만 평소에 관직에 뜻이 없어 모두 병을 빌어 벼슬하지 않았다. 여러 번 핑계를 대 벼슬에 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왕미는 10년동안 관직에 오르는 것을 거절하며 1칸 짜리 집에서 서적을 읽고, 그림을 그렸으며 음악을 공부하며 시간을 보냈다. 왕미는 고풍을 즐기고 글을 지으며 평생을 관직에 오르지 않고 일생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런 이에게 고비가 찾아오니 바로 동생 왕승겸(王僧謙)의 죽음이었다.
453년, 동생 왕승겸이 병이 들었는데 이것이 생각보다 심각해서 왕미는 걱정하며 동생 왕승겸을 정성스럽게 돌봤다. 그러나 왕승겸은 왕미가 주는 약을 제때 먹지 않아 병세가 나날히 악화 되었고 결국 세상을 떠나니 왕미는 슬피우며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 생각했다.
이런 왕미는 동생을 죽게했다는 죄책감에 병에 들어도 병을 치료하지 않고 승려가 되었다. 이런 왕미의 몸은 당연히 건강하지 못했고 병세가 악화되어 갈때도 동생의 죽음을 생각하며 치료하지 않았다. 결국 왕미는 병으로 사망하니 향년 39세였고 동생 왕승겸이 죽은지 40일이 되는 날이었다.
왕미는 문예, 서예, 음률등에 출중했고 재물을 탐하지도 않았으며 집에서 생활하며 검소하게 지냈다. 그가 지은 문집 10권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0 16:30:57에 나무위키 왕미(유송)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