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시마섬/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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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쓰시마섬(대마도)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
2. 초기 역사[편집]
… (전략) … 왜의 북안(北岸)에 있는 구야한국(狗邪韓國)에 도착한다. ( 대방군에서) 여기까지 7,000여 리이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바다를 건너 1,000여 리에 대마국(對馬國)에 이른다. 그 대관(大官)을 비구(卑拘)라고 하고 부관(副官)을 비노모리(卑奴母離)라고 한다. 이 나라는 홀로 있는 섬으로 사방 400여 리쯤 된다. 땅과 산이 험하고 못과 숲이 많다. 도로는 짐승과 사슴이 다니는 길과 같다. 1,000여 호 정도가 있으나 좋은 밭은 없다. 해산물을 먹고 스스로 생활[自活]하고 있으며, 배를 타고 남북으로 쌀을 사온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왜국으로 가는 길에 소개된다. 그때도 이름은 대마국(對馬國)이었다. 현재의 부산 동래구 혹은 경남 거제시로 추정되는 독로국과 김해로 확실시되는 구야국(금관국, 금관가야)에서 바닷길로 접한다고 나온다.[1]
다만, 쓰시마가 태초부터 왜국(야마토 조정)의 직접 지배 영역은 아니었을지라도 한반도보다는 일본 열도와의 역사적 연결고리가 더 깊었음은 분명하다. 이는 8세기에 저술된 고사기의 야시마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유추가 가능하다. 영토 관념이 모호하던 상고 시절 일본어족 화자들이 쓰시마에 자리잡았으며, 이는 훗날 쓰시마가 일본령으로 자연스레 편입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백제가 멸망하고 일본 조정이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일본 열도 역습을 대비해 서쪽 각지에 쌓은 이른바 조선식 산성[2] 가운데 하나인 가네다 성(金田城)이 있다.[3] 신라구가 활발하던 시절에 규슈와 함께 털리기도 했다. 전진기지에 가까운 지리적 특성 탓이다. 나중에 가면 여진족 해적들까지 쓰시마를 공격한다(도이의 입구). 고려 시대 원나라가 주도한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때는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친 곳이 쓰시마이다.[4]
일단 기본적으로 쓰시마는 산지가 대부분이라 평지가 거의 없어 농업 생산성이 떨어졌고 인구도 별로 없는 척박한 섬이었다. 따라서 전근대에는 크게 욕심을 가질만한 땅이 아니었다. 기록상 옛날부터 왜국계 거주민으로 보이기는 하는데, 대마도를 외국처럼 묘사하면서 신라 의복을 입고 있다는 일본 기록도 보인다. 고대 일본에서도 대마도는 변방 외지로 취급했다. 대마도는 일본 본토를 향해서 봉건제도 하의 느슨한 복속관계만 맺으며 자치를 하고 있었고, 한반도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정부는 대마도를 경상도 관할로 여겼다.[5] 반면 대마도 토착세력은 일본 본토에 꽤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대마도는 평상시 고려, 조선국의 물품을 수입하여 일본 본토에 넘겨 꽤 이득을 보았고, 식량이 부족하면 조선에서 원조를 받거나, 도둑이 되어 약탈을 했다.
신라, 고려, 조선이 쓰시마섬을 직할 통치하지 않았던 이유는 물론 일본어족 화자들이 섬을 먼저 선점했다는 현실적인 여건 때문이기도 하지만 농업 생산성이 떨어지는 데다가[6] 이를 광업으로 보충하기에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만주는 역사적 연고성은 둘째치더라도 동북평원과 삼강평원이라는 드넓은 평야지대가 있었기 때문에 북방민족의 전투력이 강했음에도 고려든 조선이든 간에 북벌론이 꾸준히 제기되었지만, 쓰시마는 이와 정반대로 일본어족 화자 주민들의 존재로 인해 편입 난이도는 상대적으로 높으며 이익을 볼 가능성은 낮았다. 따라서 직할 통치하면서 중앙정부의 행정력을 투입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냥 놔두고 대일 무역 중개지로 써먹는 방안을 선택했다 굳이 직할령으로 편입하지 않고 일본의 가신이자 조선의 신하라는 대마도주의 이중적인 지위를 봐주었던 것이다.
대마도는 일본에서도 드물게 전란에 휘말리지 않고 평온하게 지낼 수 있었다. 가마쿠라 막부 때부터 영주였던[7] 쓰시마 소(宗) 씨가 하극상의 시대인 센고쿠 시대를 거쳐서 700년이 지난 메이지 덴노 시대까지 별 문제 없이 집권하고 있었을 정도이다. 사실상 조선 시대 초기 대마도 정벌 이후로는 쓰시마가 직접적으로 군사 공격을 받은 일은 전혀 없다고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6.25 전쟁도 무사하게 벗어난 편으로, 세계사적으로 보아도 한일 양국 사이에 있는 섬 치고는 굉장히 평온하게 지낸 편이다.
쓰시마 도주인 소(宗)씨가 사실은 한국 부산의 송(宋)씨가 건너가 된 것이란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1740년 동래부지(東萊府志)라는, 부산을 다룬 책에 처음 나오는 것이다. 아마 宗과 宋이 글자가 비슷한 것 때문에 이런 주장이 나온 듯 한데, 부산에 살던 송씨가 건너가 쓰시마 섬에서 아비루(阿比留)를 물리치고 쓰시마 도주가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빙성은 낮다. 조선 후기에도 재야의 양반들은 독자연구를 행했다. 부산에 이들 조상의 무덤이 있다는 주장인데 울산에도 비슷한 전설이 내려오는 것으로 볼 때 한반도와 가까운 지리적 특성 탓에 나온 전설인 것으로 보인다.
소씨의 기원은 헤이안 시대의 호족인 고레무네(惟宗)[8] 이다. 한국에도 종(宗) 씨가 있긴 한데 항왜 출신이다. 소씨가 한반도 출신은 아니지만 외부(일본열도)에서 쓰시마 섬으로 들어와서 기존의 세력이었던 아비루 씨를 누르고 섬의 권력을 장악했다는 역사 자체는 사실이다. 아비루 씨도 소 씨와 마찬가지로 외부로부터 유입된 세력인데,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가즈사(上總)의 아비루 군(畔蒜郡)[9] 에서 쓰시마로 건너왔다고 소개하고 있다. 다만 소 씨가 권력을 잡게 된 뒤에도 아비루 씨를 아주 없앤 것이 아니라서 아비루 씨는 그대로 계속 섬의 유력자로 남았고, 지금도 쓰시마에서 가장 많은 성씨이다.
헤이안 시대 중기에 쓰시마의 카미(守, 태수)로 부임해 있던 미나모토노 요시치카(源義親)가 쓰시마 현지에서 관물을 횡령하고 백성들을 약탈하고 다닌다는 고발을 받았는데, 이 요시치카의 아버지가 바로 당시 무사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으며[10] 하치만타로(八幡太郞)[11] 라고 불리던 가와치 겐지의 수장 미나모토노 요시이에(源義家)였다. 요시치카는 요시이에의 둘째 아들로써 아버지 못지 않은 무력으로 명성이 자자했고, 조정에서는 요시치카 회유를 위해 요시이에의 가신이었던 후지와라노 스케미치(藤原資道)를 보냈지만 스케미치는 그대로 눌러앉아 요시치카와 함께 관리를 죽이는 등의 범죄를 저지른다. 결국 요시치카는 소환 및 오키(隠岐) 유배라는 처벌을 당했는데, 유배지로 가지도 않고 이즈모(出雲)로 건너가서는 현지 지방관을 죽이고 관물을 약탈하는 등의 악행을 일삼았다. 결국 일본 조정은 이세 헤이시의 다이라노 마사모리(平正盛)를 시켜 요시치카를 토벌하게 했는데, 이 마사모리가 바로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할아버지. 무사들의 신망을 얻고 있던 하치만타로 요시이에의 아들이자 천하 제일의 무용을 가진 것으로 이름높던 요시치카가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당한 것은 가와치 겐지의 체면을 구기는 것이었고 세력이 꺾인 겐지를 제치고 헤이시가 무사 가문으로써 대두하는 계기가 되었다.
3. 한국사와의 관계와 왜구의 활동[편집]
기록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3세기부터다. 쓰시마 섬은 산이 많고 농토가 적어 이곳의 주민들은 주변 지역에서 식량을 조달해 생활했다. 야마토가 급속히 성장하고 신라와 대립이 심해진 5세기 초에는 군사적인 전진 기지 역할을 한 적도 있었으나, 실성 마립간 시기에 풍도 해전에서 왜군이 박살나면서 소강 상태에 들어간 듯하다. 단 고대의 왜군은 후대 왜구가 임진왜란을 제외하면 좀 큰 해적이었던 것과 달리 일본 관군의 성격을 띤 경우도 많았다.왕은 왜인이 쓰시마 섬(對馬島)에 병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 두고서 우리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서 그들이 일을 일으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예군사를 뽑아 적의 진영을 격파하고자 하였다.
조선시대의 동사강목에서는 태종 무열왕이 이곳을 정벌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무열왕의 대마도 공격은 고려 이전의 기록에서 교차검증되는 부분이 아니라 큰 주목을 받진 못하고 있고 아무튼 조선시대에 그런 전승이 전해지고 있었다는 근거는 된다. 이 기록에 대해서는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 참조. 이 때 무열왕이 중간 진지로 쌓고 주필(駐蹕)한 곳이 부산의 태종대라고 되어있다.
통일신라 말기~후삼국시대 전반부의 신라구가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에는 일본 본토까지도 신라인 해적이 쳐들어갔지만 역시 가장 많이 털린 곳은 한반도와 가까운 쓰시마였다. 후백제의 사절단이 쓰시마에서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는데, 이처럼 쓰시마는 일본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같은 역할을 했다.
한국 기록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사건이나, 일본삼대실록에서는 신라 경문왕 치세인 870년, 쓰시마 섬 사람 우라베노 오토쿠소마로(卜部乙屎麿呂)가 신라 바다 근처에 가마우지를 잡으러 갔다가 신라국에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살펴보니 당시 신라에서는 큰 배를 만들고 군사를 훈련시키고 있었고, 신라인에게 물어보니 신라가 쓰시마 섬을 정벌하기 위한 준비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겨우 탈옥해 일본 본국에 이 사실을 전하고 본국의 지원을 요청, 대비했다고 한다.
다만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라 신라에서 국가적으로 진지하게 그런 준비를 했는지는 불확실하며, 당시 신라구 해적이 일본 연안을 약탈하는 일이 잦았다는 점이나 이후 점점 신라구의 규모가 수천 단위로 커진다는 점을 볼 때 오토쿠소마로가 붙잡힌 뒤 봤던 것은 정식 신라 해군이 아닌 대규모 신라인 해적 기지였을 수도 있다. 훗날 수백 척의 함대로 쓰시마를 공격했다 붙잡힌 신라 해적 현춘도 자신은 신라 왕이 명령해 출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려시대에는 진봉무역으로 고려와 교역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무역량이 감소하면서 먹고 살 식량이 없었다. 그래서 호구지책으로 삼은게 노략질.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왜구의 선봉 역할을 했다. 왜구가 가장 들끓었던 시기는 여몽연합군이 쓰시마 섬을 침공했었던 때 이후로, 그만큼 여몽연합군의 쓰시마 섬 침공은 쓰시마 섬의 농토를 초토화시켰다. 그리고 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고려 정부는 일방적으로 쓰시마 섬에 대한 곡물 수출을 끊어 버렸다. 식량이 부족하게 되자 왜구가 더욱 극성을 부리게 되었다.
아무튼 여몽연합군에게 호되게 당했는지 현지에서는 어린 아이들을 어를 때 쓰는 말로 간고(ガンゴー)란 말이 있는데 간은 원나라(元)를 뜻하고 고는 고려를 뜻한다.[12] 영국에서 보나파르트란 말의 어감과 비슷하다.
4. 한반도 국가의 쓰시마 섬 원정(대마도 정벌)[편집]
이 왜구들 때문에 한반도 국가들도 바다를 건너 원정길에 나서기도 했다. 그것도 3차례나. 1차는 고려 말 1389년(창왕 2년), 2차는 조선 개국 직후 1396년(태조 5년), 3차는 1419년(세종 1년)의 토벌작전. 3차 토벌은 간지(干支)를 따서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 한다. '쓰시마 섬 원정'은 조선의 군사력을 보여주어 왜구의 재발을 방지하려는 것이 1차 목적이었다.
또한 명나라 역시 왜구의 피해가 막심해 일본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려 했는데, 이 경우 자연스레 조선이 선봉장 역할을 하게 될 수밖에 없고 이는 원이 고려를 이용해 일본을 공격한 것과 같은 꼴이 되어 조선은 내정간섭을 받을 위험이 컸다. 따라서 명나라에서 무슨 말이 나오기 전에 조선이 먼저 쓰시마를 공격한 것이다. 이를 통해 쓰시마 섬에 잡혀 있는 중국인 포로를 명나라로 귀환시키는 한편 왜구에 대한 경계는 조선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명나라에 보여주려 한 것이다.
조선시대 기록인 국조정토록에 기록된 쓰시마 섬 전투 기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6월 임진일, 두지포에 상륙하여 왜구 50여 명과 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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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를 추격하여 배 129척을 빼앗아 20척을 남기고 불사름, 가옥 1939호를 불사름, 왜구 114명을 참하고 21명을 사로잡음, 한인(중국인) 132명을 구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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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내곶에 목책을 치고 주둔
편장을 보내 가옥 68호, 배 15척을 불사름, 왜구 9명을 참수, 한인 15명과 조선인 8명을 구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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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노군(두지포의 맞은 편 해안 추정)으로 진격
좌군절제사 박실이 매복에 당하여 선상으로 퇴각, 편장 박홍신, 박무양, 김해, 김회와 군사 180명(실록기록)이 전사/추락사
편장 김효성이 추격에 저항하자 추격군이 물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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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병오일, 거제로 귀환
쓰시마 섬 원정은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막판에 좌군절제사 박실(朴實)이 쓰시마 도주가 이끄는 군대와 조우해서 180명 사상이라는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전투, 비전투 병력을 모두 합쳐 2만에 달하는 전체적인 병력 규모로 보면 참패라고 하기는 어려운 피해다. 박실의 패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상륙 후 줄곧 왜구를 상대하면서 승승장구하면서 방심했던 것, 그리고 줄곧 패배하던 쓰시마 섬의 왜구는 사실상 정규군이나 다름 없었지만, 쓰시마 도주와 무사들이 개입하면서 태세를 재정비하고 지리에 익숙한 장점을 살려 방어전을 전개한 것에서 패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패전은 조선군 퇴각의 결정적인 원인이 아니었다. 방어에 주력하는 적을 상대하면 자연스럽게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 때는 태풍이 올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사상자가 제법 발생한 상태에서 자칫하면 지원군, 보급, 퇴로가 전부 끊길 수가 있으니 퇴각한 것이다.[13][14]
사실 이때 쓰시마 섬 정벌은 사실상 원정…이라는 이름으로 약탈 나간 왜구들의 빈집털이가 되었다.[15] 이 왜구들은 충청도에 있는 수군 진영을 기습, 각종 물자와 함선을 약탈하고 귀환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상왕이었던 태종은 왜구들이 쓰시마 섬에 도달하기 전에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이종무의 쓰시마 정벌군은 임무를 완수하고 이미 거제도에 도착한 상태였다. 그런데 군사들이 지쳐 있었고, 마침 태풍이 오는 듯한 날씨여서 신하들은 일단 군사를 재정비 할 것을 요청했다. 태종의 새로운 명령을 받은 사자가 거제에 도착했을 때 마침 군사들이 쓰시마로 출발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날 밤에 풍랑이 몰아쳐 전함이 일부 파손되고 유실되었으며 군사 일부가 사망했다.
그러자 상왕 태종은 병조판서를 시켜 글을 지어 항복한 왜인들을 쓰시마로 돌려 보냈다. 전체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쓰시마 도주에게 회유책을 쓴 것이다. 글의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을 참고.[16]
이 원정의 성공과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안정으로 왜구의 수는 이전에 비해 격감하여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조선의 물질적 양보 하에[17] 왜와 조선 간의 평화적 교류가 활발해졌다.[18] 당장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세종실록 이후로는 성종 때까지 왜구 관련 기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모두가 쓰시마 섬 정벌의 효과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크게 영향을 끼쳤을 건 분명하다.[19]
유럽의 역사와 비교해보면, 르네상스 시기 지중해를 횡행했던 바르바리 해적을 토벌하기 위해 유럽 각 나라들은 몇 차례고 토벌을 했지만 오스만 제국에서 은근히 밀어주는 통에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심지어 본거지였던 튀니스나 알제 같은 곳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긴 했지만 오히려 비용만 막대하게 들 뿐, 약탈 자체는 계속되었다. 덕분에 모로코의 술탄 같은 경우 수십만의 유럽인 노예들을 거느리고 베르사유 궁전 못지 않은 호화로운 궁전을 건립하며 오스만 제국 못지 않은 하렘을 거느렸다고 한다. 이 해적들이 겨우 토벌된 게 산업 혁명 시기였던 19세기 초였다.
게다가 남중국해의 베트남/중국계 해적 같은 경우 중국 황제들이 해적 두목들에게 벼슬을 주는 식으로 무마한 경우도 상당히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정일수. 이와 비교하면 조선은 나름대로 왜구 소탕에 성공한 셈이다.
5. 근세 변경으로서의 역사[편집]
자세한 내용은 대마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쓰시마섬의 영주는 조선 왕의 신하[20] 이면서 막부의 다이묘라는, 두 직위를 동시에 가졌다. 교과서적인 변방사라 할 수 있다. 어쨌거나 이 원정의 성공 이후로, 조선에서는 강경책 대신 회유책을 써서 무역을 허가했다. 쓰시마가 일본과 조선 두 나라 사이를 무역하면서 조일무역의 중개지가 되었고, 그 때문에 많은 쓰시마 도민들이 조선에 들어와서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외국인이 조선 땅에 들어와서 사는 걸 조선 정부가 곱게 볼 리가 없었고[21] 이에 경상도 해안 인근에 삼포를 신설하여 무역량을 줄였다. 그러나 16세기까지 쓰시마는 조선의 목면과 곡물 등을 수입하고 은, 동, 물소 뿔,[22] , 유황,[23] 후추 등을 제공하면서 중개인으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곡물생산량이 1만 석 정도[24] 에 불과하던 쓰시마는 조선과의 무역(밀무역이 다수였지만)으로 수입을 2배 이상 뻥튀기할 수 있었다.
한편, 쓰시마 섬의 영주는 쓰시마 슈고를 몇 차례 지낸 규슈 북부의 다이묘 쇼니(少弐)씨와도 깊은 관계를 맺었다. 쇼니씨는 무로마치 시대 내내 스오(周防)의 오우치씨와 맞싸웠으나 열세에 놓여 몇 번씩 다이묘가 전사하고 영지가 털렸는데, 이때 쓰시마 섬으로 튀었다가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자기 본거지를 회복해서 오우치씨와 싸움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쇼니씨는 오우치씨를 끝내 극복하지 못한 채 전국시대에 가신 류조지씨의 하극상으로 멸망했고, 쇼니씨와의 관계를 통해 규슈 본토에 진출하려던 쓰시마 섬의 공작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오닌의 난 이후 무로마치 막부의 통제가 무너지고, 일본 상인들은 무역의 확장을 요구하며 중종 5년(1510년) 부산포, 내이포, 염포의 삼포에서 쓰시마 도주의 지원을 받아 폭동을 일으켰다(삼포왜란). 삼포왜란은 15일 만에 진압되었고 이로 인해 양국의 외교가 일시적으로 단절되었다. 이에 일본에서 직접 중개를 하여서 2년 만에 관계를 회복하는데, 이것이 임신약조다. 그러나 이럴 때마다 무역에 대한 통제는 강화되었고 이에 쓰시마 도민들은 다시 반발하는 구조가 반복되어 30차례 정도의 왜변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비변사가 설치되기도 했다. 실록을 보면 꾸준히 쓰시마를 '간사하고 교활하다'고 평가하는데 이러한 경험으로 주요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단순한 노략질 차원을 넘어 정규군의 전면적 침략전쟁에서 선봉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압박으로 인해 쓰시마가 말려들어간 것인데,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가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였으며, 만약 쓰시마가 원정 참가를 거부하면 쓰시마섬부터 결단난다.
실제로 쓰시마 도주의 입장에서 두 나라가 전쟁 나서 좋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쓰시마는 조선-쓰시마-일본의 중개무역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입장이었는데 조선이 일본에게 져서 망하면 그게 그대로 무너지고, 조선이 이겨도 일본과 교역을 할 리가 없으니 이 무역은 무너지고, 회복에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 결국 이겨도 져도 쓰시마에겐 전혀 득 없는 전쟁이었다. 거기에 일본에서도 가장 농업 생산량이 딸리던 쓰시마 입장에서는 전쟁을 하러 오는 엄청난 수의 일본군에게 머무를 숙영지를 제공하고 군량을 제공해야 하는게 아예 어려웠다. 그래서 쓰시마는 전쟁을 막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하기도 했다. 1590년에는 일본을 경계하라는 의미에서 도주 소 요시토시가 선조에게 조총 몇 점을 진상하였다. 그러나 이미 화포 무기를 지닌 조선은 총통에 비해 위력이 약한 조총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 당시 조총은 연사력이 떨어지고 위력이 약했다. 그래서 본토에서 전쟁할 일이 없었던 조선은 오다 노부나가가 개발한 교대 사격술 등을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에, 차라리 익숙한 활이 더 연사력이 좋다고 판단해 조총을 도입하지 않았다. 대신 매일이 전쟁이던 일본은 연사력이 떨어지는 조총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3교대 사격술 등을 개발해 조총의 약점을 극복했다.[25] 결국 조선은 전쟁이 일어난 이후에야 조총의 장점을 인식하고 도입하게 된다.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에 조선 통신사를 요청하기도 했는데, 이 통신사가 바로 황윤길과 김성일의 통신사다.
또 그 유명한 '명으로 가고자 하니 길을 빌려 달라(假道入明)'라는 문구도 쓰시마 도주가 조작한 것으로, 원래 문구는 '명을 정벌하려 하니 길을 안내하라(征明嚮導)'였다. 쓰시마 도주가 택도 없는 무례한 요구를 조선이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다소 완화된 표현으로 조작했던 것이다. 현대라면 전쟁 특수라도 누렸겠지만 뱃길 안내를 위해 끌려가서 다시 돌아오지 못한 일도 비일비재했다. 거기다 식량이 부족하여 기아에 시달리면서 쓰시마 섬은 7년 전쟁 동안 상당한 고생을 한다. 그래서인지 당시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는 일본이 조선을 완전히 점령할 경우 농사가 가능한 거제도를 영지로 받기로 했다.
아무튼 강항의 《간양록》을 보면 양국 사이에서 투잡을 뛰면서 이익을 취하는 쓰시마 섬의 어쩔 수 없는 삶이 한일 양국 모두에게 안 좋게 보였는지, 쓰시마 섬 관련된 부분에서는 결코 좋은 소리가 안 나온다. 간양록에 실린 일본 승려의 증언에 따르면, 평시에 조선에 오는 일본 사절들 상당수는 실제로는 쓰시마 도주 개인이 보낸 것이고, 왜국의 국서(倭國書)란 것도 다 쓰시마 도주의 거짓 수작이라고 한다. 심지어 임란 이전 김성일 일행이 일본에 갔을 때, 일본 승려가 조선 통역에게 사정을 듣고 쓰시마 도주의 속임수를 다 알려 주려다가 쓰시마 섬 통역에게 제지당한 일도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도에 각 지역별 영주들이 상경해 묵는 수도의 집마저도 쓰시마 도주에게는 없어, 당시 소 요시토시는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집 근처 여관에서 잠시 유숙해야 했고, "일본 본토 사람은 악착스럽지만 교활하지는 않은데, 쓰시마 놈들은 악착스럽기는 덜 하나 간사스러운 꾀는 이루 말할 수 없다"는 등의 안 좋은 대우와 시선에 대한 기록들이 넘친다. 하지만 쓰시마 도민들 입장에서는 저렇게 하지 못하면 살 수가 없는 것이 현실. 한국 기록에서 아무리 쓰시마를 두고 간사하다, 교활하다, 이중적이다 이래봐야 쓰시마 도민들에게는 그런 말은 귓등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당장 굶어죽게 생겼는데 그럼 뭐 어쩌라고. [26][27]
위에서 말한 국서를 자세히 설명하자면 쓰시마 섬이 왜란 이후 먹고 살기 위해 조선에 무역 재개를 요청하는데, 조선이 그래줄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북방의 여진족이 흥하고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을 쇄환해야 했기 때문에, 국교 재개에 의지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불구대천의 원수들이라 욕하면서도 '쓰시마 섬만은 허락할 수도?'라고 말을 흘리면서 쓰시마를 설레게 했다. 쓰시마가 포로 일부를 석방하면서 징징대니까 일단 조선은 사명당 유정을 '탐적사(探賊使)'라는 명분으로 일본에 파견하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접견한다.
조선에서는 일본을 명나라의 조공 체제에 편입시키려고 쇼군의 칭호를 '국왕'으로 바꿔야 한다고 했는데, 목마른 자가 우물 판다고, 먼저 굽히고 들어가는 쪽이 아쉬운 쪽, 즉 국서를 먼저 보내는 쪽이 지고 들어간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니들이 먼저 국서 보내렴" 하는 입장을 취했다. 일본은 이를 당연히 거부했고, "국교 재개하려면 니네가 먼저 국서 보내라"라고 요구했다. 이렇게 양국이 서로 기싸움을 하는데, 이 과정에서 속 타는 건 쓰시마 섬.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국서 위조였다. 일본이 먼저 국서를 보낸 것처럼 문서를 쓰고 조선의 요구사항 중 하나였던 "전쟁 당시 왕릉을 도굴한 자를 잡아서 보내라"는 항목을 만족시키려고 다른 죄를 지은 죄인을 보내서 '이 놈이 바로 조선 왕릉을 도굴한 놈입니다'라고 하니, 조선은 국서가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일본이 먼저 보낸 줄 알고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28] 를 파견했다. 조선의 사신들이 가져온 국서에 '국서에 답한다'라는 표현이 있는 것을 확인한 쓰시마 도주는 이 표현마저 '국서를 보낸다'라는 문장으로 조작했다. 결국 양국의 국교가 회복되고 무역도 제한적이지만 재개된다.[29] 이것이 기유약조이다.
그런데 1635년에 이 국서 위조가 공개적으로 들통나면서 쓰시마가 털릴 위기에 처하지만 에도 막부는 이를 묵인해줬고[30] 다른 다이묘들과 로주가 합의하여 대신 감독관을 파견하면서 양속적 성격이 강했던 쓰시마는 완전히 일본에 편입되어 일본의 대조선 외교 창구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31] 2000년 이후 16~18세기 동아시아 은 교역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까지 쇠퇴했던 중국 - 일본의 은 교역을 대체하는 창구로서 쓰시마 섬의 은 무역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대체로 17세기부터 18세기 초반까지 조선은 중국의 생사, 비단, 약재 등을 중개하고 인삼 등을 판매하며 수익을 누렸다. 특히 인삼은 일본인들의 수요가 매우 높아 1695년 일본이 수출용 은화의 은 함량을 80%에서 64%로 깎았을 때도 유일하게 80% 은을 줘가면서 사갔던 물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18세기 초반 인삼의 일본 내 국산화가 진행되고, 북아메리카산 백삼이 유입되면서 인삼 교역은 쇠퇴했으며 조일 중개 무역은 청과 일본이 무역 조약을 맺는 18세기 후반경에 거의 단절된다. 하지만 교역이 완전히 단절되었다는 것은 아니고, 해삼 등 해산물이나 쇠가죽 등의 판매가 쓰시마를 경유해서 활발히 이루어졌다. 조선은 반면에 꾸준히 은, 동 등 귀금속과 유황 등을 수입하는 경로로 쓰시마 섬 무역을 이용했다. 그리고 일본산 인삼은 난재배와 지력 관리에 소홀히 해 약효가 떨어진다는 평가가 생겨 일본산 인삼산업은 현대에 접어들기 이전에 이미 사양산업이 되었다.
6. 근현대[편집]
1861년에 러시아 제국이 통상조약과 개항을 요구하면서 쓰시마 섬을 점령했다. 반년 간 주둔하다가 영국의 개입으로 철수하였다.
면암 최익현이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유배된 곳이기도 하다. 최익현은 1906년 음력 7월 9일에 유배되어 음력 11월 17일에 병사했다. 최익현이 단식 투쟁을 하던 끝에 사망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으나 최익현의 제자 임병찬이 쓴 《대마도일기》에 따르면, 최익현은 일본군 장교가 "일본이 주는 밥을 먹었으니 머리카락을 깎으라"고 요구하자 이에 단식 투쟁을 선언하고 고종에게 상소문을 올리려 했으나, 다음날 그 일본군 장교가 다시 찾아와 통역에 잘못이 있었으며 사죄한다고 말하자 그날 저녁 죽을 입에 댔다고 한다. 최익현이 단식을 한 기간은 이틀이었으며, 그로부터 3개월 뒤 병을 얻었고 이로 인해 병사했다. 이후 수선사(修善寺)에서 장례를 치루고 시신은 부산으로 옮겨졌다. 시신이 부산에 도착한 당일 일본 측에서 당황할 정도로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시간이 지나 1986년 한일양국의 인사들이 힘을 모아 수선사에 최익현 순국비를 세웠다.
쓰시마 도주에서 화족이 된 소 가문의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의 남편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쓰시마 섬 영유권 주장 및 반환 요구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이 불법적으로 점령한 영토는 반환하기로 했으므로, 불법적으로 점령된 쓰시마 섬도 반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간접 지배 형태를 직접 지배 형태로 전환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근거가 미약한 주장이다. 그러나 그 당시 일본 열도는 이 말을 듣고 불안해했으며 언론에서는 '쓰시마 섬의 위기'라는 식으로 대서특필했다.
사실 이승만의 쓰시마 섬 반환 주장은 당시 독도 영유권이 불확실했던 상황에서 협상력 유지를 위한 카드의 하나로 사용했을 가능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독도에 대한민국의 정식 경찰 병력이 입도한 것은 1954년이 되어서였기 때문. 협상 카드로서의 쓰시마 섬 영유권 선언을 넘어 실제로도 이승만이 쓰시마 섬 영유권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며 진실은 저 너머에. 이후로는 대한민국 정부 차원에서 쓰시마 섬 영유권을 주장한 사례는 없다.
일본 시마네현이 우리땅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영토 분쟁을 일으키며 다케시마의 날을 선포하자, 이에 대응하여 2005년 경상남도 마산시(현 창원시)가 6월 19일을 대마도의 날로 선포했다. 마산시가 앞장섰던 건 그곳에서 기해동정의 우리 원정군이 출항했기 때문이요[32] , 6월 19일이 작전개시 D-데이였던 데에 기인한다. 대마도의 날 제정 자체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이 문서에서 길게 설명했듯이 명확한 증거에 기반한 행동은 아니다.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쓰시마 주민들은 한국인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