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인간 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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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희대의 패륜아 임금
2. 나는 잔혹한 조선의 군주. 하지만 내 가족에게만은 따뜻하겠지
3. 찬탈의 업보
4. 종합
4.1. 비슷한 사람들
4.2. 태종과의 비교
4.3. 쿠데타의 명분의 차이
4.4. 왕으로서의 그릇의 차이




1. 희대의 패륜아 임금[편집]


세조의 패륜행위는 어지간한 폭군들의 뺨을 연속으로 후려치고도 남는다.[1] 이 점에서도 같은 과정으로 집권한 할아버지와 많이 비교된다.[2]

우선, 형제관계에서도 친형인 문종의 정실이자 자신에게는 형수님이었던 현덕왕후의 일가가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하자 현덕왕후를 폐서인하고 무덤을 현릉(문종의 왕릉)에서 파헤쳐 서인(평민)의 무덤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당시 현덕왕후는 남편이자 세조의 형인 문종과 합장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형수에게도 불경을 범한 것인데다, 애꿏은 형이자 선왕에게까지도 패륜짓과 무례를 범한 셈이다. 게다가 계유정난 당시 형의 무덤의 비석을 감독하던 민신과 다섯 아들들 역시 형의 무덤인 현릉에서 참살해 버렸다.

거기에 현덕왕후의 무덤 장소를 무덤터로는 최악인, 범람이 잦고 습한 지역에 이장을 해버렸다. 이 때문에 현덕왕후의 관은 강에 버려졌다. 강에 버린 이유가 세조가 단종을 죽인 뒤에 현덕왕후의 혼령이 세조의 꿈에 나타나 저주를 걸었고 이 때문에 덕종(원래는 의경세자, 세조의 아들, 추존돼서 왕)이 일찍 죽었다는 야사까지 나왔다. 하지만, 실제로 덕종은 단종보다 일찍 죽었기에 사실과 맞지 않는다.

태종의 경우 신덕왕후의 묘를 이장하기는 했으나, 신덕왕후는 태종과 아무 관련이 없었다. 이성계의 첫째부인 한씨는 이방원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 있었다. 또 당시 이성계는 살아있었고, 아버지 때문에 신덕왕후를 폐서인 시키지는 않고 후궁으로만 격하시켰다. 거기에 태종 입장에서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유가 신덕왕후의 배겟머리 송사로 인한 세자책봉 문제였다. 방석은 태조의 아들중 막내였고 아무런 공도 없었으므로 당위성이 부족한 세자책봉인 것은 명백했다. 그러므로 이방원 측 입장에서는 명분수립을 위해 그녀를 격하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형인 정종과의 사이도 매우 좋았고 아버지인 태조에게도 신덕왕후와 그 자녀 일가에게 한 것 외에는 큰 패륜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기 위해 조사의를 시켜 반란을 일으키면서 그나마 태종을 싫어하던 이들까지 모두 지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게 했다. 비속 살해 역시 정당한 이유가 전혀 없다는 전제 하에서는 명백한 패륜이었다.

게다가 태종이 이복동생인 방번, 방석은 죽였지만 동복형인 방간은 살려준 것과 달리, 세조는 동복동생(안평대군, 금성대군)까지 죽여버렸다. 금성대군의 단종복위모의와 관련해서 같은 지역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 관련없는 일반 백성까지 포함해 엄청난 수를 학살했다는 야사도 있다. 더욱이 태종의 경우, 확실히 반란을 일으켜 시가전까지 일으킨 동복형을 살려주었으나, 세조는 반란 혐의만으로 동복동생 둘을 죽여버렸다.

이복동생들도 단종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죽이고 식솔을 노비로 부렸으며, 세종의 후궁으로 자기에게는 서모에 해당하는 혜빈 양씨 또한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려던 것을 막으려고 했다가 그녀 또한 죽였다. 그것도 강제로 머리를 깎고 비구니로 만들어서 절로 내쫓은 다음에 죽인 것이다. 잘 아는 대로 친조카인 단종까지 죽였다.

심지어는 친동생 안평대군의 양어머니이자 자신의 친숙모였던 성녕대군 부인을 양자를 두둔한다는 이유만으로 폐서인을 시켜 버렸다. 성녕대군은 세종대왕의 친동생이자 세조의 조부모님들인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막내아들인데, 다른 형제들과도 나이차가 많이 나는 막둥이라서 그런지 태종과 원경왕후도 끔찍히 귀여워해서 결혼 후에도 궁궐에서 끼고 살았을 정도다. 병약해서 14살에 죽고 말았는데 죽을 즈음에 당시 충녕대군이던 세종대왕이 동생을 살리려고 어의들과 함께 의서를 연구하고 곁에서 밤낮으로 간호를 할 정도로 세종대왕도 몹시 아꼈던 동생이다. 그래서 자기 아들 안평대군을 자식없이 죽은 동생의 양자로 보낼 정도였는데 이런 짓을 한 것이다. 세조의 왕위찬탈을 적극 지지했던 또 다른 패륜아 양녕대군은 자기 막내동생이 죽을 때 활쏘기를 하고 술마시고 놀았다. 오죽하면 참고 참던 태종조차 "사람의 마음이 없다."고 분노할 정도.

한마디로 친족을 죽이는 것에 전혀 거리낌 없이 태종조차 하길 꺼려한 일을 예사로 해댄 희대의 패륜아다. 조선의 역사상 자기의 서모, 이복형제에 더해서 동복형제까지 이렇게 마음대로 다 죽여버리고 작은어머니를 폐서인시키는 왕은 세조 이외에는 없었다.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만한 존재는 송두리째 뽑아버린다라는 방침 때문이라 단 한치의 빈 틈도 없이 철저하게 말살을 해버린 것이다. 어차피 권력이라는 비열한 속성상 부자지간에도 권력을 공유할 수 없는 법이라지만...

그리고 세조가 가장 욕을 먹는 부분은 단종관련 문제이다. 하다못해 암군이라는 인조도 전왕 광해군을 죽이지 않았는데[3] 세조는 조카를 자기 손으로 죽여놓고 시체 수습도 안해서 엄흥도라는 인물이 대신 수습해 장례를 치뤄줄 정도다. 하지만 정작 실록에는 "단종이 자살해서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다."고 적어놓는 조작까지 해놨다. 정작, 단종 사후 시신의 행방은 중종대가 되어서야 밝혀지는데, 후대에 사람들이 봐도 기가 찼는지, 뒤의 기록에는 "단종실록의 기록들은 쥐새끼와 여우새끼들이 아첨을 하는 간사한 붓장난이니, 이에 속지 말라."고 대놓고 까는 글이 있었을 정도다. 이래놓고 왕위 찬탈 전에는 자기 측근들을 시켜서 자신을 주공단에 비유했었다.

심지어, 단종을 왕실족보인 선원록에서 파 버렸다. 바로 단종을 문종의 서자 어쩌면 그 아래인 사생아로 격하시켜 버린 것. 단종은 왕위에서 쫒겨난 후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는데 문종의 적자였으니 대군(大君)이 되어야 맞지만 서자가 받던 군(君)이 되었다. 이 후 1681년 숙종에 의해 노산대군으로 높여졌는데 문종의 적자로 인정함과 동시에 왕으로 추존하기 위한 예비단계였다.

친족은 아니지만 세조 본인과 매우 가까운 왕실의 인척도 방해가 되면 죽인 것도 있다. 단종의 장인인, 정순왕후 송씨의 아버지 송현수는 단종 복위 운동에 휘말려 사사당했는데, 이 사람은 세조 본인과 매우 절친한 친구다. 애초에 그가 단종의 장인이 된 것도 세조의 영향이 매우 큰건데 송현수 입장에선 옛 속담처럼 모진 놈과 친했다가 날벼락 맞은 격이다.

원천석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태종을 가르친 스승이다. 태종이 저지른 왕자의 난 때문에 제자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져서 자신을 만나러 며칠을 기다리는 태종을 피해 도망다닐 정도였는데 후에 상왕으로 은거한 태종의 부름에 마지못해 만나러 왔다. 이 때, 태종이 스승에게 자신의 손자들을 직접 소개를 시켜주었는데 노인이 아직 어린 세조를 보고 "조부닮았는데 부디 형제를 사랑해라."라고 거듭 강조했다 한다. 오죽하면 이런 야사가 다 남아있다.

웃긴 것은 별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친인척들은 다 작살 내놓고 나라를 갉아 먹는 공신들은 우대해줬다. 한명회같이 비리만 저지르면 양반이고 홍윤성 같은 인간백정도 손대지 않았다. 개인적인 인성만 평가하자면 조선사에서도 손에 꼽히는 망나니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인물.[4]

2. 나는 잔혹한 조선의 군주. 하지만 내 가족에게만은 따뜻하겠지[편집]


어린 조카인 단종과 안평대군 등 동복동생마저도 경쟁자로 보고 제거했던 패륜 행적에 비해, 본인 기준에서 자신에게 잘해줬거나 가까웠던 가족들에게는 잘해줬던 것 같다. 우선 친어머니인 소헌왕후에겐 매우 극진히 효를 다하였다. 오죽하면 궁궐에서 피접나온 소헌왕후가 세조의 잠저에서 승하했을 정도.

또한,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를 친어머니 못지 않게 극진히 모셨다. 이유는 동생인 안평대군이 연년생이라서 소헌왕후가 안평대군을 양육하는 사이 상대적으로 보살핌을 받지 못해서, 신빈 김씨가 어린 세조를 업어서 키웠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신빈 김씨의 소생들은 계유정난 무렵 세조와 가까이 지냈으며 특히 신빈의 아들 계양군은 적극적으로 세조를 지지했다. 이 외 세조는 즉위한 이후에도 신빈의 아들들은 극진히 대해 주었다. 신빈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막내아들인 영응대군의 유모 역할도 했다.

대단한 애처가이기도 했다. 위에 기술했듯 후궁도 둘 뿐이었다. 정실 왕후인 정희왕후 윤씨를 아껴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로 밖에 나갈 때에도 항상 대동했고, 국정에서도 그녀의 의견을 많이 참고했다. 국정 회의에서도 "우리 집사람이 말야..."라면서 왕비의 의견을 소개하는 기록도 있다. 정희왕후도 정치적 식견이 워낙 훌륭해서 자신의 친척들을 등용하려는 세조를 말리기도 했다. 훗날 정희왕후는 세조 사후 아들 예종과 손자 성종을 위해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2번이나 하면서 국정을 무난하게 꾸려나갔다.
어떻게 보면 이것만이 자신과 닮았으면서도 여러모로 자신과 상향되는 식으로 대비되는 할아버지인 태종과 비교해서 떳떳하게 큰 소리를 칠 수 있을 유일한 부분인지도 모르겠다.[5]


3. 찬탈의 업보[편집]


한편, 문종과는 다른 방향으로 자식복이 없었는데, 장남 의경세자는 세조가 왕이 되고 3년만에 죽고, 차남 예종은 즉위 13개월 만에 죽었는데 둘다 20세를 못 넘기고 모두 요절했다. 의숙공주는 향년 35세로 그나마 남자 형제들에 비하면 오래 살았지만 자식을 두지 못했다. 야사에 존재하는 맏딸 이세희가 실존인물이 아니라면 자식들이 모두 요절한 것. 그리고 손자들도 그리 오래 살지 못했는데 의경세자의 아들인 월산대군성종은 모두 30대에 죽었고, 증손자인 연산군도 폐위당해 30살에 비참하게 병사한다. 그나마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장수했으나 금치산자에 가까울 정도로 바보로 살았다.[6] 이후 다른 증손자인 중종은 단종의 장례를 치르어 준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럭저럭 장수했지만 고손자인 인종과 명종도 각각 20대와 30대에 자식도 못남겨서 결국 배다른 조카한테 왕위를 물려줘야 했다.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가설이지만 조선 왕들의 장자들 중에 태조의 장자 진안대군태종의 장자 양녕대군을 제외한 나머지 조선 왕들의 장자들은 모두 세조때문에 수난을 겪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도 있다. 세종의 장자 문종은 세조에게 독살당했다는 의혹이 있고 문종의 장자 단종은 세조에게 살해당하였는데 이러한 세조의 패륜행위 때문에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는 세조의 아들이라서 세조가 지은 죄 때문에 업보를 받아서 일찍 요절했다는 얘기가 있고 의경세자가 요절한 다음에 일어난 왕의 장자들의 수난 또한 세조 다음의 왕들이 모두 세조의 후손이니까 세조가 지은 죄에 대한 업보를 받아서 수난을 겪은게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당시 백성들은 어린 나이에 살해당한 단종에 대한 연민과 세조 공신들의 악행으로 세조를 천하의 개쌍놈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당장 권력을 이용한 재산강탈이나 만행은 기본이고, 홍윤성 같은 살인마도 있으니... 이 때문에 수많은 소문이 생겨났다. 대표적인 소문으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침을 뱉었는데 그 자리에 욕창이 생겼다, 단종이 죽자 분노한 현덕왕후의 귀신이 의경세자를 죽였다(위에서 언급한대로 의경세자는 사실 단종 이전에 사망한다.). 의경세자의 죽음에 분노한 세조가 현덕왕후의 관을 파내서 바다에 버렸다는 등 세조에는 달갑지 않은 소문들이 쌓여 갔다. 현덕왕후를 격하시키면서 문종의 능에서 파낸후 툭하면 물난리가 나는 곳에 이장해 버린 사실이 낳은 소문이다.
그리고 현덕왕후의 딸이자 단종의 친누이인 경혜공주를 노비로 전락시켰을때 경혜공주는 만삭이었는데, 세조가 만약 경혜공주가 아들을 낳으면 목졸라 죽이고 딸을 낳으면 데려와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정희왕후가 경혜공주의 아이는 아들이었지만 몰래 데려와서 여장을 해서 키웠다고 한다. 이후 세조는 아이가 아들인걸 알고 울면서 아이의 이름을 정미수라고 지었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정미수는 3살이었고 만삭인 아이는 딸이었는데, 이런 소문이 생긴 이유는 민간 여론이 " 세조는 경혜공주의 아들을 죽이고 뱃속의 아이도 죽일거야 " 이런 식이었기 때문인듯하다.

세조에 관한 안좋은 소문은 수십년 뒤 초대형 폭탄을 만들어 낸다. 성종때 사관인 김일손이 위에서 언급한 '현덕왕후의 관을 파내서 바닷가에 버렸다', '세조 자신의 아들인 덕종의 후궁 권 귀인을 세조가 찝적댔다', '사육신의 난 직후 세조가 신숙주를 통해 사육신을 회유하려고 하자 역으로 면박을 줬다'는 소문을 성종의 사초에도 그대로 기록해버렸다. 아울러 김일손은 세조실록의 공식기록엔 '단종은 자결했고 세조가 이를 불쌍히 여겨서 대군의 예로 장례를 치러줬다' 고 조작해놨지만 중종 때까지는 소문이어야 했던 '세조가 단종을 살해한 후 짐승이 뜯어먹게 방치했고 이후 어느 사람(고을향리 엄흥도)이 몰래 묻어 주었다.'라는 기록까지도 성종의 사초에도 그대로 기록해버렸다. 성종실록 집필과정에서 이것이 발각되면서 김일손의 스승이였던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연쇄작용을 일으켜 무오사화라는 초대형 폭탄을 만들어 버렸다

다만 불교 쪽에서는 숭불정책 때문인지 세조에게 긍정적인 야사가 많이 남아있다. 대표적으로 등에 종기가 난 세조가 온천을 찾아가 어떤 동자에게 등을 밀어달라고 한 후 동자에게 "내가 왕이니 등을 밀어줬다는 것을 비밀로 해라."라고 하니 그 동자도 "너도 문수동자가 등을 밀어줬다고 알리지 말거라."라는 말을 해 사라져버렸고 깜짝 놀란 세조가 자신이 본 문수동자의 모습을 그림과 조각으로 남겨 상원사에 맡겼다던지, 불당에 절하는데 고양이가 나타나 자객을 알려줘서 그 보답으로 상원사에 양묘전을 내렸다던지, 속리산 법주사로 갈 때 가마 걸리지 않게 가지를 들어다 준 소나무가 기특하다며 정2품의 품계를 내려줬다던지 하는 속리산 정이품송 소나무 야사도 있는데, 이는 불교를 숭상하던 세조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위의 야사들이 보여주는 세조의 나쁜 면모를 희석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게다가, 세조의 후원을 받는 불교로서는 이런 인식을 좋든 싫든 널리 퍼트려야만 했을 것이다.

또다른 야사에서는 라이벌 김종서와 엮어서 (현덕왕후의 저주로 생긴) "욕창을 치료하기 위해 온천을 찾아갔더니 거기의 아낙네가 사실 아버지를 비난하다 궁을 떠나버린 세조의 딸이었던데다 그 남편이 계유정난 때 살해당한 김종서의 손자였더라"등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야사의 끝에 따르면 세조는 그 사실을 알고 너그러워져서 자신이 죽인 김종서에 대한 속죄같은 의미로 그 김종서의 손자를 정식으로 부마로 맞으려고 했지만, 딸 부부는 소식을 끊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이 야사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드라마가 공주의 남자다.

어쨌든, 많은 야사에 등장하는 왕이기도 한데 그 야사의 대부분이 그의 왕위찬탈과 그로써 비롯된 일과 관련된 내용이다. 위의 문수보살 이야기처럼 그에게 호의적인 내용도 있지만 그런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다가 그의 잘못과 그로 인한 인과를 다룬 내용이며, 그 중에는 그의 추악한 인성을 부각시키는 이야기도 있다.


4. 종합[편집]


조카을 저버린 패륜아에 앞서서 할아버지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조선 전기의 번영에 암운을 드리운 암군이라는 평도 있는데, 사실 '암군'이라고 보기엔, 어찌 됐든 간에 조선의 법제를 정비한 것이나 조선의 중앙집권체제를 거의 완성시킨 업적이 있고 그외 여러가지 공적이 있기에 암군이라고 할수는 없다. 그렇다고 '명군'이라고 볼 수 없는 건 사실이다.

지나친 공신 우대정책으로 인해 훗날 훈구파라고 명명되는 공신집단을 창출한 것이나 집현전을 폐지하여 건전한 관학파를 양성하는 인재 집합소를 스스로 없애버린 것이 당대에는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집현전이 활성화 된 것은 어디까지나 세종시절 한정으로 문종대만 되어도 활력이 떨어졌다지만, 그렇다고 이걸 아주 없애버린다? 성종대에 사실상 집현전의 부활 개념으로 설치한 홍문관이 결국 언론 삼사중 하나로 머문 것을 봐도 알 수 있지만, 관학파 육성이란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

세종대에 육성된 인재들을 세조가 대거 도륙함으로써 인재풀을 일거에 박살냈고, 결국 이것이 그나마 있는 능력있는 공신들을 숙청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지적된다.

그리고 결국 손자 성종 대에 훈구세력의 건재와 사림의 정계 진출로 인해서 도리어 왕권을 약화시킨 꼴이 되고 말았다. 특히, 관학의 훈구화가 진행된 것은 공신을 주로 등용했던 세조 때라는 말도 있다. 왕권강화를 찬탈의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오히려 세조 스스로가 결국에는 카리스마가 없는 후대 왕권을 약화시킨 것이다. 또 할아버지 태종은 숱한 대간들의 공격을 받으며 불같이 화를 낸 적도 더러 있었으나 사냥 나갈 때에조차 그들을 동행하며 언론 활동을 권장한데 반해, 세조는 대간들의 언론 활동을 탄압해서 유교정치의 근간을 뒤흔들었다는 점도 세조의 평가를 크게 떨어뜨린다.

이 왕권약화가 두드러지는 대표적 예가 성종의 즉위인데, 원래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과 성종의 친형이 있음에도 성종이 즉위한 것은 그가 권신 한명회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즉, 왕실에서 명백한 왕위계승자인 제안대군이 있음에도 차기 왕을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권신에게 휘둘린 것이다. 한마디로 권신의 뜻에 따라 다음 왕이 바뀌는 이상한 사태가 생겨버린 것이다. 세조 본인이 일으킨 계유정난이라는 사례와 이러한 왕권 추락의 세태로 초래된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이후 대부분의 조선의 왕들은, 그나마 좀더 백성들을 생각한 성종, 영조, 정조 등의 개념군주 옥의 티는 넘어가자 이외에는 대체적으로 자신의 권력 보전 및 일신의 안위만을 살피는 경향이 강해졌으며, 이러한 추세는 결국
을 만들어냈다는 의견이 많다.

또한, 군사적인 업적을 남겼음에도 군사 면에서 실책 역시 벌이고 마는데 형 문종이 화차를 개발하는 등의 조선 전기까지의 무기체계 발전을 멈춰버린 왕도 바로 세조다. 총통위의 폐지로 화포 개발이 멈춰진 것은 물론 세조 때 조선군의 인사고과가 철저히 궁시 위주로 재편시켜 창검술의 운용이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조선군의 화력 뿐만 아니라 백병전 능력까지 떨어뜨려 버린 셈이다. 다만 화력은 당대 여러 기록들이나 군사 무기 분야 편제를 봐서 당시까지는 그렇게까진 멸시되진 않은 듯 하다. 그러나 백병전 능력은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어 임진왜란 시기가 되면 근접 전투 기술 자체가 거의 실전되어버리고 명군이 주력이 되어야 했다.

특히 군사적인 부분에서 빼놓을 수가 없는 것이 보법이다. 이전에는 봉족제에 따라 군사 1명당 조호(봉족호. 경제적으로 군인을 지원하는 가구)가 병종과 빈부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급되었다. 평균적으로 3명이 한호를 이루되, 토지 소유의 빈부를 기준으로 의무자의 재산에 맞추어 부유한 집안은 1정을 1호로, 가난한 집안은 5정을 1호로 배정하고 부유한 이가 군역을 지는 경우에는 조호를 지급하지 않는 식으로 각 가구의 경제사정에 맞추어 유연하게 책정되었다. 그런데 세조 때 보법이 시행되면서 호가 아닌 인정을 기준으로 계산하는데다가 1명당 2정으로 줄어들게 된다. 이는 군역을 번거로운 조사와 산정과정 없이 간단하게 부과하고 군사의 수를 크게 늘릴 수는 있었지만 보인이 맡는 경제적 부담이 심각하게 커진다는 문제점이 있다. 특히 이전에는 가계수준에 맞추어 유연하게 책정되던 군역부담이, 세조의 보법 이후로는 일률적으로 인정을 기준으로 하게 된데다 이전보다 부담 자체도 커져서 보인들이 이를 감당할 수 없게되어 이를 피하려고 유망이 빈번해졌다. 경제적인 지원이 사라지자 군역을 실질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정병 역시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걸 고려시대에 비유해 보면 군인에게 지급되는 군인전이 복무비용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버린 것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군역의 폐단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보법을 계기로 군인층의 붕괴와 양인의 감소가 점차 강해지기 시작한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시점에서 조선에 제대로 된 군인층이 거의 없는 수준이었던 것은 여기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총평하자면, 나름의 능력이나 업적은 있었지만 단종, 금성대군 등 개인적인 패륜짓 뿐만 아니라 피끝마을 같은 학살을 자행하는 등 전형적인 폭군이며, 자부심이 너무 강해서 귀에 거슬리는 쓴소리를 싫어하여 직접 선대왕이 남겨놓은 업적을 죄다 개판으로 망쳐놓아 훗날 조선에 큰 어려움을 주었다. 이 단점이 찬탈자라는 오명과 함께 군주로서의 그의 평가를 떨어뜨린다.[7]

'오명을 감수한 구국의 결단자'란 식의 평가는 세조 즉위 이후 김동인의 대수양 같은 평가의 흔적이긴 한데, 쿠데타 미화를 위해 군사정권기에 연계가 있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이와 관계없이 사실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을 곧이 곧대로 해석하면 이런 평가가 나올 수 있는게 사실이라 민주화 이후에도 세조 미화 사극이 종종 나오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 실록들은 편찬 주체나 목적을 염두에 두고 비판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실록이다. 이는 '덮어놓고 그냥 믿지 말아라.'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정황은 없는가?' 등의 의문을 제기하면서 다른 기록과 정황증거들과 함께 해석해야 한다는 의미다. 실록의 기록은 한 기록만 뚝 떼어놓고 봐서는 안 되고 다른 관련 기사들과 함께 비교 분석하면서 읽어야 한다.

특히나 세조의 왕위찬탈을 반대하는 조의제문이 사화의 발단이 된 예가 있듯이 실록에 있어 조카의 왕위찬탈 및 살해라는 패륜행위로 왕이 된 세조에 대한 부분만은 당시로서는 더욱 예민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간단히 생각해봐도 만약 후대 임금에서 세조의 찬탈을 비판한다면 그것은 '현 왕의 왕위 정통성 부정 -> 역모 -> 숙청' 루트일텐데 저 난폭하고 거칠 것 없는 세조 본인의 시대에는 실록의 기록에 대한 감시는 단언컨대 조선 왕조기간 전체를 통틀어 가장 살벌했을 것이다.[8]

심지어는 사관이 있었을 리가 만무한 수양대군의 사저에서 심복들과 나눈 대화가 실려 있는 게 바로 단종실록이다. 이를 두고 <조선국왕 이야기>의 저자 임용한 교수는 단종실록에 대해 '단종실록은 세조실록의 예고편이다'라는 촌평을 남기기도 했다.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은 태종의 신하들이 편찬한 태조실록처럼 수양 일파의 사관이 철저히 반영된 총체적 편집물이라는 것을 감안을 하고 조심스럽게 해석을 해야 하며, 계유정난과 세조의 찬탈에 이르는 역사는 역사 해석을 실록에만 지나치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실록을 배제하면 남는 기록이 없으므로 역사 인물 세조의 평가는 근거가 없어진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 다음은 추측과 예상 등이 이를 메워야하는 지난한 과정. 이걸 메우는 과정에서 역사적 지식이 부족하다면 흔히 동원되는 것이 야사나 소설 등의 또 다른 편견들이다.

4.1. 비슷한 사람들[편집]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악한 숙부'의 대표적인 인물로 유명세가 높지만 그의 선배격으로 신라 헌덕왕이 있다. 이 쪽은 크게 뚜렷한 업적도 없고 자연재해와 기근에 속수무책이었을 뿐더러 그로 인해 백성들이 심하게 고생하는 판에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고려숙종이 있다. 고려의 숙종과 비슷한 점이 특히 많다. 수명도 52세였고, 후계자가 둘 다 이다.[9] 또한 이웃 명나라영락제와도 상당한 유사한 면목을 보여주는 인물. 영락제가 환관을 중용해서 폐단이 커졌다면, 세조는 공신을 중용해서 폐단이 커졌다. 세조에게는 그를 '나으리'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는 성삼문이 있었고 영락제에게는 '연적찬위'[10]라는 말을 남긴 방효유가 있었다는 것도 상당히 비슷하다. 하지만 나름 명의 국가 시스템을 정비하는 등 업적이 많았던 영락제와 달리 세조는 오히려 그걸 무너뜨린 인물이라는 점에서 평가가 더욱 떨어진다.

흔히, 라이온 킹스카에 비유되기도 한다. 정말 비슷하다. 능력있는 동생이 세자로 책봉되지 못한 것하며 왕위찬탈의 과정도 비슷했다. 물론 형 문종에 비하면 세조가 세자 책봉이 못된 것은 당연하다. 또한 먼치킨 아버지에 재능이 있는 형제들이 있었던 점, 신하들 함부로 대하는 거나, 우애 따위 안드로메다로 날려보낸 인물이라거나, 나름대로 정치에 재능이 있었다는 점, 자뻑이 꽤 심했다는 점 등에서 여러 가지로 삼국지조비와도 비슷한 점이 의외로 많다. 심지어 묘호까지도 똑같다. [11]

대한민국의 11,12대 대통령인 전두환과 비교가 되기도 한다. 두사람은 똑같은 과정으로 집권을 하였으며 집권과정이 똑같이 평가를 받으며
업적은 평가중이지만 한국이라는 국가의 문제점 대부분이 박정희로 부터 시작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학자들의 의견에 의하면 재벌의
부의 집중, 지나친 경쟁사회, 언론의 시녀화의 영향, 아직까지도 나오는 일가 부정부패라든지 하는 여러가지의 문제점이 전두환 정권으로
부터 강화 되어 나온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심지어 4.13 호헌조치를 하는 것을 보면 시대를 읽는 눈이 부족한 점에서 서로 비슷하다고 보인다는 평가가 있다.

4.2. 태종과의 비교[편집]


세조는 자신의 할아버지인 태종 이방원과 정말 많이 닮았다. 자신의 반대파의 를 죽이고, 죽이고 왕으로부터 왕위를 양위받아 즉위했으며 무인 기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문에도 능통한 능력자란 점이고 강력한 왕권확립을 추진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세조의 행보는 태종의 격세유전이라기 보다 사실상 태종의 능력이 대거 너프되고 폭력성이 대폭 강화된 열화판 카피라는 표현이 가장 적합하다.


4.3. 쿠데타의 명분의 차이[편집]


우선 태종이 아버지 이성계에게 항거한 이유는 어느 정도 명분이 있었다. 조선 왕국이 건국된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후계자에게 필요한 것은 정통성임에도 태조 이성계는 태종의 첫째 형인 진안대군도 둘째형 정종도 아닌 새파랗게 어린 막내 아우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해 버린다. 그나마 나이가 어려도 유일한 적통이라는 식의 정통성이 있다면 이 책봉을 누구나 납득할 수 있었겠지만, 이방석은 유교왕국 조선에서 보더라도 신덕왕후의 차남이라 정통성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고 태조 이성계의 일방적인 독단으로 세자에 책봉된 것에 불과했다. 결국 아버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할 정도로 출중한 능력을 가졌던 이방원이 크게 반발한 것.

반면 세조는 나이는 어리나 정당하고도 확고한 왕위계승 자격[12]을 가진 조카 단종을 강압적으로 몰아내고 개인의 욕심으로 왕위에 오른 명분이 전혀 없는 찬탈이였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대해 세조 사후 시간이 흘러 세조의 후손들이 계속 왕에 즉위한 후에도 세조의 찬탈에 대해 조선에서 계속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기까지 하였다

거기에 태종은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 동복형제만큼은 어떻게든 살려주려고 했으며 정도전의 자녀는 살려주는 관대함을 보였지만, 세조는 동복형제부터 본보기로 죽였으며 이미 죽은 의 묘까지 능욕한다. 똑같은 패륜이라고 보더라도, 클래스 자체가 다르다.


4.4. 왕으로서의 그릇의 차이[편집]


태종은 이후 왕이 되면서도 조선의 기반을 굳히는데 밑거름을 한다. 우선 왕권강화를 위해 자기 아내 민씨의 권력남용이 발생하자 민씨 가문을 싸그리 숙청했으며 세종의 장인까지도 왕권강화에 걸림돌이 되자 핑계를 삼아 죽일 정도였다. 물론 이는 도덕적으로는 큰 비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후에 세종과 문종이 안정적으로 통치하는데 큰 이바지가 된다. 하지만 세조는 한명회와 사돈까지 맺어가며 공신들을 방치하고 큰 권력을 줘서 훗날 후대에 훈구세력이 형성이 되어 왕권이 약화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태종은 대신들의 횡포와 부패를 견제할 언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사관을 싫어함에도 사관의 권한을 인정하고 대신들이 사관을 압박하는 것을 막아준 왕이 바로 태종이다. '(태종 본인이) 말에서 떨어졌다는 걸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는 발언을 그대로 사관이 실록에 남긴 유명한 사례도 바로 태종 시기의 일이다. 반면 사관의 활동이 가장 위축된 시기가 바로 세조이다. 찬탈 이후 조선을 어떻게 이끌것인가에 대한 거시적인 시각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세조만 눈치 보면 나머진 꺼릴게 없었던 훈구파 권신 세력이 엄청나게 성장하여 세조 사후 예종을 거쳐 성종조차도 왕위서열에서 밑이었음에도 장인어른이 한명회이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공신들의 인사정책의 차이라 할 수 있다. 태종은 공신들을 숙청하는데 공신들이 부정부패를 저지르거나 미풍양속에 해를 끼치거나 국법을 어겼을 때 쫓아내거나 벌을 주거나 신상필벌을 철저히 하였다. 그래서 아들과 손자인 세종문종에게 강력한 왕권을 부여할 수 있었고 공신들도 함부로 전횡을 부릴 수 없었으며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세조는 자신을 도와준 공신들이 죄를 범하였어도, 홍윤성의 예를 보듯, 너무 오냐오냐하게 관대하여 신상필벌을 흐지부지하게 하여 그들의 전횡을 묵과하여 백성들에게 비판을 많이 받았다. 손자인 성종과 증손자인 연산군에게 나쁜 유산을 남겨 훈구의 성립과 왕권약화라는 부작용이 생겼다

태종은 왕으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반면 세조는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1] 패륜이란 면에선 차라리 연산군이 더 나은편이다. 어머니의 죽음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알고 있던 인수대비한테 조차도 "제 어머니를 왜 죽이셨습니까?" 라고 면전에서 크게 소리친 정도니까.[2] 다만 할아버지 태종은 인간성에서는 많이 까여도 정치는 잘했다.[3] 사실 인조는 광해군에게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자비로워서 그런게 아니라 죽일 명분이 없어서지만...[4] 한명회는 그래도 비인륜적인 짓은 안 저질렀지만 홍윤성은 청탁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투덜댄 삼촌을 때려죽였다는 야사가 있을 정도라서 '살인마 정승'이라고 야사에 기록되었다. 실록에서도 홍윤성이 정승이 되자 홍윤성의 고향에서 축하선물로 노비 두명을 보냈는데 노비가 튼실치 않다며 노비들을 고른 나계문을 때려팼고 그것도 모자라 나계문이 자기 땅에 심어 가꿔놓은 나무를 모조리 베어갔는데 급기야는 홍윤성의 종의 남편인 김석을산이 나계문을 패 죽여버리기까지 했다.[5] 태종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태종은 세조와 비교해서 본처인 원경왕후 외에도 후궁들이 꽤 많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자 세조의 아버지인 세종대왕도 마찬가지였다.(...)[6] 다만 진짜 바보인지는 성종때부터 지금까지 수백년 간의 논쟁거리이다.[7] 그래서인지 이덕일이 노론벽파과 송시열 만큼 증오하는 인물이 바로 세조라는 것이다.[8] 물론 이러한 실록을 칼을 든 채로 대놓고 감시한다는 것 자체가 세조 본인이 자신의 왕위 정통성을 흔드는 행위이므로 눈에 띄게 감시를 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목에 칼 들이대면 장사없다는 사실만 명심해두자.[9] 하지만 고려의 숙종이 처한 상황을 오면 오히려 세조의 할아버지인 태종에 더 비슷해 보인다.[10] 연나라 적이 제위를 찬탈했다는 뜻이다. 성삼문은 그나마 나으리라 하여 군주로 인정하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방효유는 아예 역적취급을 했다. 죽이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 영락제를 비난하는 사람들조차도 숙청 범위를 갖고 까지, 방효유를 죽인 것 자체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되돌릴 수 없다면 끝까지 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11] 그런데 조비의 묘호는 두 개이다. 고조세조. 진수삼국지는 고조로, 사마광자치통감은 세조라는 묘호로 기록되어 있다.[12] 세종 - 문종 - 단종 라인은 왕위계승서열 순도 100%를 자랑한다. 여기에 단종 본인은 문종의 장남으로서 원손 - 세손 - 세자를 거쳐 국왕이 되었다. 나이가 어렸으며 어린 왕을 지켜줄 세력이나 왕실 웃어른이 없었던 것이 화근이었을 뿐이다. 이 라인과 맞먹는 순혈도를 자랑하는 라인은 현종-숙종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