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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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의 소속팀. 연고지는 사이타마현 토코로자와시. 모기업은 세이부 철도이다.
195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총 3차례나 일본시리즈 3연패를 차지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6] 특히 80년대~90년대 라이온스는 이 기간 동안에만 퍼시픽 리그 우승 9회, 일본시리즈 우승 8회를 달성하며 요미우리의 V9 시대에 버금가는 왕조를 구축했었다. 23회 퍼시픽 리그 우승, 13번의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일본 야구 그 자체인 요미우리 자이언츠 다음가는 성적으로 퍼시픽 리그에서는 소프트뱅크 호크스를 제외하면 독보적인 기록이다.
한국 언론에는 예전에도 그랬고 현재도 '세이부 라이온즈'라고 쓰지만, 매체 등에서는 '세이부', '사이타마 세이부' 식으로 쓴다. 하지만 그냥 일반적으로는 오랫동안 익숙해져서 저 식으로 부르는 사람이 대다수이고 굳이 귀찮게 사이타마까지 붙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2. 역사[편집]
2.1. 니시테츠 시절[편집]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최다 우승팀으로, 1949년 창단하고 1950년 양대 리그 시행 이후 후쿠오카의 헤이와다이 구장[7] 을 연고지로 한 니시테츠 클리퍼스를 시작으로 이듬해 같은 후쿠오카의 센트럴 리그 구단 니시닛폰 파이리츠와 합병하여 니시테츠 라이온즈가 되었다. 애초에 후쿠오카 정도의 지방 도시에 야구팀이 두 개나 있는 게 무리였으나, 당초에는 철도회사인 서일본철도와 신문사인 서일본신문(西日本新聞)의 합작으로 후쿠오카의 단일 연고 팀을 만들려 했다. 그러나 센트럴 리그, 퍼시픽리그 중 어느 리그에 속할 것인가를 두고 두 회사 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하여 결국 각자 팀을 창단했고 1년 후에 니시닛폰이 니시테츠에 합병되면서 퍼시픽 리그 소속이 되었다. 1950~60년대의 강팀으로 군림하면서 1956~1958년에는 명감독 미하라 오사무, 명투수 이나오 카즈히사와 강타자 오시타 히로시, 나카니시 후토시의 활약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물리치고 일본시리즈 3연패를 차지했다.
그 후 1963년 리그 우승을 끝으로[8] 우승권에서 멀어졌다. 원래 지방 사철이 모기업이라 재정도 넉넉하지 않은 데다 당시 비인기 팀들이 모여 있던 퍼시픽 리그 소속에 소규모 지방 도시를 홈으로 쓰는 덕분에 관중 동원도 여의치 않아 팀의 부진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본프로야구 최악의 흑역사인 검은 안개 사건으로 주전들 대부분이 줄줄이 구속→영구 제명 크리를 먹어 팀이 순식간에 약체화되었고, 그 때문에 니시테츠가 더 이상 팀을 유지할 수 없어서 1972년 구단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2.2. 고난의 시기: 타이헤이요클럽-크라운라이터 시절[편집]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 시절 구단기.[9]
고난의 시기 구단가, 君ライオンズ.[10]
이후의 사정은 현대 유니콘스와 우리/서울/넥센/키움 히어로즈가 짬뽕된듯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니시테츠가 1972년 시즌을 끝으로 구단 운영에서 손을 떼면서 롯데 오리온즈 구단 오너였던 나카무라 나가요시[11] 에게 구단 매각을 의뢰했는데, 인수하겠다는 기업이 나타나지 않자 자신이 직접 후쿠오카 베이스볼(주)라는 구단 운영법인을 만들어 팀을 인수하고 팀 운영비는 자신이 구단 경영을 맡았던 롯데 오리온즈 시절처럼 팀의 명명권을 팔아 조달했다.
이렇게 해서 스폰서의 변천에 따라 1973년 타이헤이요 클럽(太平洋クラブ)[12] 라이온즈, 1977년 크라운라이터(クラウンライター)[13] 라이온즈로 이름을 바꾸면서 라이온즈는 어찌저찌 존속하게 된다. 그러나 롯데와는 달리 라이온즈의 스폰서로 나선 기업들은 업종을 보면 알겠지만 프로야구 구단을 인수할만한 능력은 전혀 되지 않아서 이 당시의 라이온즈는 계속해서 자금난에 시달리며 키움 히어로즈 창단 이후 2년간과 거의 비슷한 침체기를 보내게 된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가 바로 히가시오 오사무로, 니시테츠 말기-타이헤이요/크라운라이터 시대-세이부 최전성기를 모두 거쳤던 라이온즈 구단 역사의 산 증인 그 자체로써 라이온즈 한 팀에서만 꿋꿋이 20년간 뛰며 간판 스타이자 에이스로서 암흑기였던 팀을 지탱해 나갔다.
결국 미덥지 못한 스폰서의 쥐꼬리만 한 재정 지원으로 강팀을 만들 수도 없거니와 팀의 막장화만 가속되었다. 끝내 얼마 안되는 스폰서 자금과 나카무라의 개인 인맥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에 이르러 GG를 치고 팀 해체의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처해 있을 때 한 줄기 빛과 같은 광명이 비추었으니 당시 부동산, 사철 재벌로 막강한 자금력을 보유한 세이부 그룹이 구단 인수에 관심을 보인 것이었다. 마침내 후쿠오카의 시민들도 든든한 구단주를 얻어서 옛 영광을 다시 재현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후쿠오카의 라이온즈 팬들은 이것이 후쿠오카 야구의 영광스런 부활이 아닌, 라이온즈와 후쿠오카의 작별일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했다.[14]
2.3. 세이부의 인수[편집]
2.3.1. 1980년대 황금기[편집]
1978년 말 세이부 그룹은 라이온즈 구단을 인수할 것을 표명했다. 세이부 그룹은 라이온즈 프랜차이즈를 인수하기 전에 두 차례나 야구단 스폰서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일본프로야구가 양대리그로 나눠지기 이전에 존재했던 일본야구연맹(JBL)에 참여했던 도쿄 세네터스(東京セネタース)-츠바사군(翼軍)의 재정적 스폰서를 해줬다.[16] 당시 귀족원 의원이었던 아리마 요리야스와 세이부 그룹의 모종의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후 2차 세계대전 이후 세너터스가 재건에 실패하자 1970년대에는 다이요 훼일스의 요코하마 스타디움 건립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다이요의 2대 주주로 경영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이부는 구단 인수의 조건에 자신들이 한창 부동산 개발 중이던 도쿄 근교의 사이타마로의 이전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사철인 도쿄-사이타마 지역의 세이부 철도를 기반으로 하는 세이부 그룹에게 있어서 거의 적자가 안 발생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프로스포츠단인 라이온즈를 그나마 적자가 최대한 안 나게 운영하고, 연고지 주변 지역의 관중을 끌어들어 수익을 올리려면 반드시 사철이 자리잡은 곳 근처에 스포츠단 연고지를 두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애초에 간토 도쿄-사이타마 및 간사이 시가[17] 지역의 세이부가 드럽게 멀리 떨어진, 자기네 철도도 안 다니는 규슈 후쿠오카 지방에서 야구단을 운영하는 게 넌센스였다. 당장 훗날의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가 왜 해체됐는지 생각해 봐도 답은 나온다.
어쨌거나 당시 라이온즈 구단은 그런걸 가릴 처지가 못 되었다. 연고지 이전의 조건을 내거는 기업이라도 인수하겠다고 해주면 넙죽 받아야 하는 게 당시 구단이 처한 현실이었다. 결국 팀은 세이부 그룹에 인수되어 후쿠오카를 떠나 사이타마로 이전했고, 후쿠오카의 팬들은 옛 영광의 재현은커녕 크나큰 상실감만 맛보아야 했다. 결국 후쿠오카는 1989년 서로 죽이지 않고는 못살던 예전의 라이벌 호크스가 후쿠오카 이전을 발표할 때까지 무려 10년의 세월을 연고팀 없는 상실의 시대를 살아야 했다.
세이부에게 인수된 뒤 인기 만화였던 밀림의 왕자 레오의 레오를 마스코트로 삼았다. 레오의 일러스트는 실제로 테즈카 오사무에게 저작권료를 주고 정식으로 사용권을 승인받았다.[18] 후쿠오카에서 도쿄 근교로 이전해 오면서 일단 기존 팬층은 개척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어린이들에게 친숙한 만화 주인공을 마스코트로 해서 어린이들부터 공략하자는 마케팅 전략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공략당한 어린이들이 밑에서 기술한 세이부 황금 시대를 거치면서 3, 40대 성인으로 성장한 지금 세이부 팬층의 주축을 형성하고 있다.
세이부 라이온즈로 바뀐 이래, 오로지 이기는 것만이 팬을 확보하는 것이라는 일념하에 구단주인 츠츠미 요시아키는 감독 겸 관리부장(GM 역할)이던 네모토 리쿠오(1982년부터는 관리부장 직에만 전념)에게 구단 운영의 전권을 위임했고, 네모토는 각종 방법을 동원[19] 하여 팀의 전력을 강화시켰다.[20] 결국 이러한 전력 보강 등을 이어간 끝에 1982년, 팀은 드디어 퍼시픽리그 전기리그 우승에 이어 플레이오프 에서도 후기리그 우승팀 닛폰햄 파이터즈를 격파하며 퍼시픽리그 우승을 이루고[21] 뒤이어 일본시리즈에서도 주니치 드래곤즈를 격파. 24년 만에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룩하며 그 결실을 이루어냈다. 그 뒤로부터 1992년까지 10여년의 기간, 그러니까 1980년대~1990년대 초반 동안은 가히 세이부의 황금 시대, 왕조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세이부는 이시게 히로미치-츠지 하츠히코 키스톤과 아키야마 코지-키요하라 카즈히로-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의 일명 AKD 클린업 트리오, 모리의 계승자 이토 쓰토무가 버티는 백스톱까지 갖춘 철벽 야수진을 갖췄고, 투수진에는 와타나베 히사노부-쿠도 키미야스 원투펀치에 '오리엔탈 특급' 곽태원(궈타이위안, 카쿠 타이겐)가 선발진에 버티고 있고 구원진에는 카토리 요시타카. 시오자키 테츠야 등이 건재했다. 이 시기 세이부는 V9 시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버금가는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강 전력의 팀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명장 모리 마사아키의 지도 아래 이 기간만 리그 우승 9회, 일본시리즈 우승 8회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리그 우승으로 일본시리즈 진출 후 패한 경우는 한신 타이거즈의 양대 리그제 실시 이후 현재까지 유일한 일본시리즈 우승인 1985년... 리그 우승을 못한 경우는 1984년의 한큐 브레이브스에 1위 자리를 내준 경우와[22] 1989년의 긴테츠 버팔로즈에게 리그 3번째 우승을 헌납한 경우.[23]
그렇게 해서 세이부(西武) 라이온즈로 30년 가까이 이어졌으나, 인기도 떨어지고 모기업 세이부 철도의 상태가 영 좋지 않게 되자 2008년 지역 이미지 부각을 위해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가 되었다. 도쿄에 미련이 남아 있던 세이부 그룹으로서는 끝까지 사이타마라는 명칭의 사용을 거부해왔으나[24] 결국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팬베이스가 자신들이 원하던 도쿄 중심부가 아닌 사이타마의 베드타운 지역에 형성된 탓에 결국은 고집을 꺾었다. 오죽 사이타마라는 명칭을 쓰기 싫었으면 세이부(西武)라는 명칭은 과거 전국시대의 도쿄와 그 주변 지역을 의미하는 무사시노(「武」蔵野)의 서부지역을 의미하는 이름이라고 주장하며[25] 본거지와 팬베이스가 도쿄의 서부 지역이니 세이부라는 명칭도 지역명칭이라는 해석을 굳이 강조하면서까지 사이타마라는 이름을 붙이기를 거부하면서 버텼다.[26]
2.3.2. 황금 시대 이후~2012년 시즌[편집]
1992년 이후 세이부 황금 시대 주역들이 노쇠하거나 타 팀으로 트레이드[27] 및 주축 선수들의 FA(자유계약선수) 선언[28] 으로 1980년대의 황금기는 끝난다...라고는 하지만, 1990년대 중후반에도 세이부는 여전히 파리그의 강호였고, 첫 번째 리그 우승을 이룬 1982년부터 2007년[29] 까지 B클래스로 떨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단지 문제는 일본시리즈 우승을 못 해서 그렇지. 모리 마사아키의 뒤를 이어 팀을 맡은 히가시오 오사무 감독이 지휘한 1997~1998년에는 2년 연속으로 파리그 우승을 하였지만, 당시 일본시리즈에서는 각각 노무라 카츠야의 야쿠르트 스왈로즈와 '머신건 타선'을 앞세운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게 발목을 잡혔다. 그 이후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제4대 괴동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명 유격수 마쓰이 카즈오, 대형 슬러거 알렉스 카브레라 등이 투타의 기둥으로 활약하면서 이하라 하루키 감독 지휘 하에서 2002년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오랜 기간의 감독 수업을 거친 이토 츠토무가 감독으로 취임한 2004년에는 정규시즌에 2위를 하였으나 플레이오프를 통해 닛폰햄과 다이에를 차례대로 꺾고 리그 우승을 하고 일본시리즈에서 주니치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1992년 이후 12년 만에 다시 일본시리즈를 우승하게 된다.
와타나베 히사노부 감독이 지휘한 2008년 시즌에는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대결하여 4승 3패를 기록, 우승을 거머쥐었다. 전신인 니시테츠 시절을 포함하여 1950년 양대리그제 시행 후 현재까지 리그 21회, 일본시리즈 13회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엠블렘[30] , 홈 덕아웃 위치(1루에서 3루로), 유니폼을 변경하고 출발한
애니메이션 아노하나의 배경이 사이타마라서 정식으로 콜라보하여 이런 이미지도 나왔다.
2.3.3. 모기업의 위기와 매각위기[편집]
모기업인 고쿠도[31] 의 경영 부진이 계속되자 세이부 구단도 점점 살림을 줄여나갔고 2004년 세이부 돔과 2군 구단의 명명권을 인보이스에 매각하는 등 자구책 마련에 분주하였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하였다. 2004년 긴테츠-오릭스 구단 합병으로 일본 야구계 재편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세이부 구단도 치바 롯데, 니혼햄 파이터즈, 다이에 호크스 4개 구단과 합병을 논의하였으나 니혼햄 파이터즈는 삿포로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합병에서 발을 빼고 롯데 마린즈와 다이에 호크스도 세이부가 아닌 서로 간의 양자 합병을 모색하게 되면서 세이부의 합병 시도는 무산되었다.[32]
이후 세이부 철도의 뇌물 공여 및 유가증권 허위 기재 등 비리 사건이 연달아 터지고 결국 상장폐지까지 되자 세이부 그룹에서는 구단 매각 방침을 세웠고 긴테츠 인수, 신구단 창단 등에서 연달아 물을 먹은 라이브도어에서 적극적으로 인수 의사를 밝히면서 순조롭게 매각 협상이 진행되나 싶었지만 200억~250억에 이르는 구단 인수 비용과 세이부 돔을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인수 협상이 지지부진해지면서 세이부 그룹에서는 매각을 포기하게 된다.
2.3.4. 2013년~2021년[편집]
자세한 내용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2013-2021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4. 2022 시즌[편집]
자세한 내용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2022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5. 2023 시즌[편집]
자세한 내용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2023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6. 2024 시즌[편집]
자세한 내용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2024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관중 수 추이[편집]
일본 프로야구에서 가장 관중 수가 적은 구단 중 하나로 롯데, 라쿠텐과 꼴찌를 치열하게 경쟁하는 구단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첫째로는 홈타운이 사이타마라는 점이 꼽힌다. 사이타마는 원래 도쿄의 베드타운으로 발달한 도시로,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이 지방 상경민으로 도쿄에 직장을 가지고 사이타마에 집을 사서 도쿄로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여기 사람들은 놀 때도 이케부쿠로로 가서 놀지 사이타마에서는 안 논다. 다들 도쿄의 번화가로 가서 일부터 놀이까지 모든 것을 해결하고 사이타마에서는 잠만 자니 아무것도 없다고 다사이타마라는 별명까지 붙었을 정도. 당연히 사이타마 거주민들은 사이타마에는 별로 애정이 없으니 어렸을 적부터 보고 자란 고향 팀을 응원하거나, 도쿄 팀이자 전국구 팀인 교진을 응원하는 것.
80년대에 이주해 왔으므로 그때부터 사이타마에 지역 밀착 마케팅을 진행했으면 80년대생들이 성인이 된 2010년대쯤부터는 성과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세이부 구단 자체도 사이타마에 별 애착이 없었다. 세이부가 서부 무사시노의 약자라 우리의 팬베이스는 도쿄라고 줄기차게 주장해왔을 정도로 사이타마를 등한시했고 이벤트나 마케팅 자체를 잘 안 한다. 모기업인 세이부 철도가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어, 허투루 쓸 돈이 없기도 해서 마케팅조차 잘 안 했으니 시민들이 좋아해줄 리가.
또한 홈구장인 베루나 돔은 관람 여건이 별로 좋지 않은 구장이라 보러 가고 싶지 않은 구장이라는 점도 있다.
두 번째로는 재미없는 야구를 하는 팀이라는 점. 홈 구장도 중립구장이라 투타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은 무난무난한 야구를 해서 팀 컬러도 무색무취한데, 프랜차이즈 스타도 없다. 정확히는 있어도 FA되면 다 미국이든 교진이든 팀을 나가버리니 팬들이 정 붙이고 응원할 만한 구심점이 될 선수가 없다. 그렇다고 카프처럼 아예 빡세게 허리띠를 졸라매서 가난하지만 젊은 친구들 이미지도 아닌, 적당한 준척급은 몇 명 또 잡는다.
세 번째 이유로는 이 지역은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때문에 축구 인기가 굉장한 곳이다. 우라와는 투자도 많이 받고 성적도 좋기 때문에 팬덤이 아예 정착되어 버렸고 조금 있던 야구팬들도 대부분 점점 우라와로 넘어가는 추세여서 라이온즈의 인기가 있을 수가 없는 구조이다. 게다가 오미야 아르디자도 성적이 좋진 않지만 역사가 깊은 팀이기 때문에 인기가 나쁜 편은 아니다. 라이온즈보다 많으면 많지 절대로 적은 편은 아니다.
성적 역시 80년대 세이부 황금기 시절에는 대단했지만 그 이후로는 별볼일이 없다. 잘 나갈 때는 가끔씩 리그 우승도 하고 뜬금없이 몇 년에 한 번 정도 잊어버릴만 하면 일본시리즈도 먹는데 압도적인 강팀은 아니라 B클래스로 떨어지기도 한다. 잘해도 최고는 못 되고, 못해도 꼴찌는 아닌 정도의 무난무난한 시즌을 반복중이다. 엄청나게 잘하면 그 압도적인 강함에 반한 팬이 생기고, 엄청나게 못해버리면 세리그의 베이스타즈처럼 놀림감이 되며 컬트적인 팬이 생기는데, 정말 이도저도 아닌 것.
10년간 스토리도, 스타도 없는 팀이다. 단순히 구장이 접근성이 별로라 보러 가는 사람이 적은 게 아니라 경기의 시청률조차 낮다. 여튼 그래서 인기가 많이 없는 구단. 비슷한 처지인 라쿠텐은 그냥 도호쿠 지방 인구수 자체가 적어서 어쩔 수 없는 경향이 있고(대신 타향살이하는 사람들이 봐 주니까 시청률은 관중 수에 비해서는 약간 낫다), 롯데는 구장 시설 개보수 및 마케팅, 스타선수 영입과 발굴에 적극적인 편인데, 세이부는 개선의지도 별로 없는 팀이다. 애초에 그룹 자체에서 구단을 매각하고 싶어하는데 조건이 안 맞아 못 하는 것에 가까운지라 그냥 인기 없는 채로 적당히 시즌을 때워가는 중인 팀. 그나마 2010년대 들어 뒤늦게나마 사이타마 지역 밀착 마케팅을 시작해 사이타마 현민들의 마음을 얻어가고 있기는 하다.
현재 팬덤은 사이타마에서 태어나 사이타마가 고향이면서 80년대 세이부 황금기를 함께한, 70년대 후반~80년대생 정도의 40대와 00년대 전국구 스타였던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마쓰이 카즈오로 유입된 90년대생, 2010년대 들어 사이타마 지역 밀착 마케팅을 시작한 이후로 팬이 된 어린이들이 주축이 되고 있다.
4. 홈구장[편집]
자세한 내용은 베루나 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니시테츠로부터 구단을 인수한 후 베루나 돔을 홈구장으로 쓰고있다. 세이부 연선과 유원지에 있어 구장에 올 때 자차 이동이 아니라면 세이부 철도 이용이 강제되는 구장이다. 문제는 세이부 철도는 오미야 쪽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35] 그래서 주중과 주말 관중 편차가 크다.
그 외에 사이타마현영 오미야공원 야구장이 제2 홈구장이다. 여기선 1년에 3경기 정도 치른다.
여담으로 과거에 나가노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매해 1~2경기 열렸으나 2008년까지만 개최하고 이후에는 경기가 배정되지 않았다.
5. 2군 시설 및 클럽하우스[편집]
세이부 제2구장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한때 공단에 있는 컨테이너 기숙사나 군부대의 BEQ처럼 생겼었다. 열악했던 세이부의 선수 기숙사 현지에서는 도호쿠 대지진 등으로 집을 통째로 날린 이재민들을 수용하는 가설 주택이라고 까였었다. 사진에는 안 나와 있지만 세이부 돔 안에 있는 1군 라커룸도 열악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한 때 구리기로 유명했던 요코하마 스타디움만 하더라도 DeNA가 구단을 인수한 후로 적극적인 투자의 일환으로 대대적으로 개수가 이루어져 지금은 메이저리그가 부럽지 않은 클럽하우스가 됐는데 이 팀의 클럽하우스는 팬들로부터 "만화 가게냐"라면서 까였을 정도.
츠츠미 일가가 그룹 총수 자리에서 야구단에 아낌없이 투자하던 80년대만 하더라도 선수들이 야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12개 구단 중에서 손꼽히는 시설이었으나 츠츠미 일가가 그룹 경영에서 손을 뗀 이후로는 시설이 낡아가는데도 그냥 방치하는 바람에 현재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중 열악한 쪽으로 선두를 다투는 기숙사, 훈련 시설이 되어버렸다.[36] 경영 주체가 바뀐 이후로 모기업인 세이부 측에서 야구단을 짐짝으로 보고 있는 시선이 많아지다 보니[37] 제대로 된 개/보수도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홈구장인 세이부 돔의 개/보수에도 적극적이지 않았으나 키시 타카유키의 FA 이적, 세이부 선수단의 집단 성명 등이 이어지자 그제서야 공조 시설 확충 등의 시설 개선을 하였다.
그리고 2017년 시즌 종료 이후 세이부 돔과 2군 시설, 기숙사 시설 리모델링에 180억 엔을 투자해 2021년까지 완공하기로 했다. 2019년 7월 현재 스토어 샵, 실내 연습장, 기숙사가 최신 시설로 완비되어 있는 상태. 이젠 더 이상 컨테이너가 아니다. 기사+탐방 동영상
6. 유니폼[편집]
자세한 내용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유니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응원[편집]
자세한 내용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응원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마스코트[편집]
예전에 쓰던 로고는 밀림의 왕자 레오의 레오를 로고 겸 마스코트로 사용했다. 지금은 마스코트만 레오와 라이나로 사용 중.
이에 대해서 나오는 이야기 중 유명한 것이 데즈카 오사무가 자신은 마스코트로 판쟈를 그렸는데, 세이부 라이온즈 측에서 멋대로 레오라고 주장한다더라는 카더라 통신이다. 그런데 이 부분은 일본위키백과에서도 언급은 하지만 출처제시가 안되는 부분이고, 세이부는 레오라고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정글대제 출판본을 기준으로 보면 미묘하게 다르게 생겼다 같은 이야기를 제외하고 보면, 판쟈와 레오의 외모 차이를 두는 부분은 귀 끝의 검은 부분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물론 판쟈의 귀끝도 검게 그리는 예가 없지는 않지만[38] , 전집을 포함해서 둘의 차이를 둘 때는 판쟈는 그야말로 순백으로 그려진다. 이런 점에서 보면 마스코트는 판쟈보다는 레오의 성체 버전일 가능성이 높다...기 보다는 판쟈라는 근거가 저 카더라와 느낌적 느낌밖에 없다. 사실 이런 것 다 필요없이 세이부 측이 레오라고 사용하고 있고, 이름 들어가는 부분은 다 레오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마스코트는 레오가 맞다.
프로야구 초창기 삼성 라이온즈 어린이 회원 점퍼의 마스코트가 저 마스코트를 약간 정면으로 바라보게 하는 수준에서 모방한 것이었다. 어느 어린이 회원은 삼성 라이온즈 점퍼를 입고 민속촌에 갔다가 일본 관광객들이 '세이부 라이온즈네' 하는 바람에 약간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그리고 2008년 팀명을 바꾸면서 사이타마현 캐릭터인 코바톤을 비공식 마스코트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레오는 무려 기네스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공중제비를 30초에 31개를 해서 한동안 세상에서 공중제비를 가장 많이 돈 마스코트라는 타이틀이 있었다.[39]
9. 팬덤[편집]
팀명에 '사이타마'라는 지역명이 들어가 있으나 정작 사이타마는 시즈오카와 함께 '일본 축구의 성지' 라고 불릴 정도로 축구의 인기가 야구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지역이라 세이부는 비인기 구단에 속했다.[40] 실제로도 사이타마 현에서 세이부는 현대 유니콘스보다는 아주 조금 나은 대접을 받고 있다.[41][42][43]
그래도 2010년대 들어서는 지역 밀착 마케팅과 사이타마 배경의 만화와의 콜라보[44] 나 2008년부터 시작한 오미야구장 홈경기, 2017~2018 시즌의 호성적으로 인해 세이부 구단의 홍보물이 오미야역 근처에도 걸리는 등 사이타마현 동부지역에서도 인기가 늘어나는 중. # 실제로 우승을 차지한 2018시즌에는 구름 관중이 모여들었다. 이후 2019 시즌에도 관중이 더 늘어 총관중 180만·평관 2만 5천 시대를 열었고 2005 시즌 이래 최다 관중 수를 갱신했다. 그러나 2020시즌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경기 수가 120경기로 단축된 데다 유관중 경기도 그 절반인 60경기로 한정되어 300,120명에 그치고 말았다. 그런데 2021 시즌은 작년과 다르게 8월 18일 기준으로 401,197명, 관중 수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는 중이다! 가장 먼저 40만 관중에 진입한 것은 덤이다.
유니폼 교체 이후 응원문화가 점차 바뀌고 있다. 과거 1루 외야 홈 시절엔 작은 배트를 사용한 비교적 전통적 응원이었는데, 서포터즈들은 배트를 놓고 손뼉응원을 많이 하고 있으며, 한 손으로 드는 작은 깃발이 완전히 정착되었다. 거기다 게이트기도 심심찮게 보여 축구장이 다 되어가고 있다. 누가 응원으로 경쟁하는 팀 아니랄까 봐 롯데처럼 점프 응원도 즐겨 한다. 그러나 응원콜을 좋아해서 응원가를 안 부르는 타석도 많은 롯데와는 다르게 응원가를 많이 부르며 선발 라인업 발표 직후에 모든 선수의 응원가를 한번씩 불러주는 것도 여전히 하고 있다.[45]
2013년에 비교적 가까운 치바 롯데 마린즈와 라이벌전을 선포하고 양 측 홈에서 3연전을
특이하게 본거지인 사이타마현에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밀리지만 유일하게 가장 인기있는 곳이 있는데, 그 곳이 뜬금없이 본거지로부터 저 멀리 떨어진 간사이의 시가현이다. 그 이유는 세이부 그룹의 창립자인 츠츠미 야스지로가 시가현 출신이기도 하고, 지금도 세이부 계열의 오미 철도가 영업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사
10. FA 최다 배출 구단[편집]
2023년 종료 시점에서 FA 제도로 21명의 선수를 유출하며 일본프로야구에 1993년 FA 제도가 도입된 이후 가장 많은 선수를 유출한 구단이기도 하다. 아래 명단을 보면 팀의 주축 선수들이 모두 다른 팀 유니폼으로 갈아입었음을 알수 있다.
2022년 11월 16일 주전 포수 모리 토모야가 오릭스로 이적하면서 세이부에서 FA로 팀을 떠난 20번째 선수가 됐다. 아키야마 쇼고의 이적 후 3년 만의 사례.
선수들의 계속된 유출은 노후화된 시설, 돔구장 전환 이후 선수들에게 쾌적하지 못한 구장 환경과 구단의 좋지 않은 경영 사정이 맞물린 결과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와 비슷한 팀이 KBO 리그의 두산 베어스이다.[51]
11. 이야깃거리[편집]
-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와 함께, 나머지 10개 NPB 팀과는 달리 한국 국적 선수와의 인연이 거의 없는 편이다. 백인천이 1970년대 후반 (1975~1976) 뛴 적이 있었지만 2021년 현재 기준으로는 너무나도 까마득한 옛날이기에... 물론 당시 백인천은 팀의 간판으로서 큰 활약을 했다. 특히 타격왕을 5모(0.0005) 차이로 차지한 일은 아직도 회자되기도 하며, 이로 인해 백인천이 라이온즈에 재적한 것은 불과 2년밖에 안 됨에도 불구하고 당시 팀의 응원가 우리들의 우상 라이온즈(僕憧ライオンズ)의 가사에 나오는 선수들 중에서 백인천이 언급될 정도이고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전신 구단인 다이헤이요 시절 스타들을 초청해 팬미팅을 가질 때 백인천도 참석했다. 그러나 백인천이 퇴단한 이후로는 45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국인 선수가 단 한 명도 입단하지 않았다. 물론 재일교포 선수들은 꽤 있었다. 대표적으로 도쿠야마 후미무네, 고노 준키[52] , 모리모토 히초리[53] 가 있다. 이외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재일로 잘못 알려져 메이저 언론들도 재일교포설을 당시 대서특필했으나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마쓰이 가즈오 역시 재일설이 돌았지만 근거는 없다.
- 연고지인 사이타마현을 배경으로 한 만화가 많아서 그런지 콜라보도 상당히 잦은 편이다. 따지고 보면 구단의 시초부터가 밀림의 왕자 레오와의 협력이었으니[54] 뿌리를 따라간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위에서 언급되었던 아노하나 콜라보는 물론 크레용 신짱[55] , 야마노스스메[56] , 러키☆스타[57] 등 다수의 사이타마 배경 만화와 콜라보를 이어오고 있다. 그 외 아니마 옐![58] , 명탐정 코난[59] , 드래곤볼 슈퍼[60] , 다이아몬드 에이스[61] 등의 만화랑도 콜라보를 한 바 있다. 그리고 퍼시픽 리그 차원에서의 콜라보도 많았는데 이쪽으로는 BanG Dream!의 미나토 유키나[62] 나 THE iDOLM@STER의 죠가사키 미카, 카스가 미라이, 피에르, Re: 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의 에밀리아[63] 랑 엮인 바 있다. 2021년 8월 2주간 소녀☆가극 레뷰 스타라이트의 츠유자키 마히루와 콜라보를 했다. 버튜버 업계와도 2021년 8월 13일 hololive의 시시로 보탄, 시라카미 후부키와의 콜라보가 확정되었다. # 콜라보 상품은 8월 15일부터 판매되었다.
- KBO 리그의 두산 베어스와 가는 행방이 비슷하다. 이유는 죄다 FA로 선수들 유출시키고 모기업은 있는데 돈이 없어서 선수들 유출시키는 것도 비슷하지만 전성기 때 주축 선수들을 트레이드 시켰다는 점도 비슷하다.
- 공식이 아닌 팬 사이트긴 하지만, 러브 라이브!를 패러디한 러브세이부 사이트가 있었다. 현재는 닫힌 상태지만 그 전의 흔적들을 보면 오피셜 사이트의 업데이트에 맞춰서 계속 갱신을 이어온데다 뉴스 페이지나 스토리 패러디, 맴버 소개, 일러스트 패러디 등도 상당한 고퀼에 완성도가 높아 국내에서도 화제가 되었었다. 게다가 2020년에도 아마추어 선수 대상 입단 모집을 기깔나게 패러디했었다... # # # #
- 적이 많은 편이다. 가까운 치바 롯데는 치바 쪽이 저격 응원가를 만들 정도로 라이벌리고[64]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와는 치바보다도 길고 질긴 악연 그 자체. 니시테츠와 난카이 시절부터 일본시리즈를 놓고 오래 대결해 왔는 데다 다이에 인수 이후 후쿠오카 야구의 적통이라는 자리까지 더하면서 끊고 싶어도 끊기 어려워졌다. 도호쿠 라쿠텐도 FA 계약으로 세이부 선수들을 털어가다시피 해 적대시하고 있다.
- KBO 리그 키움 히어로즈가 하고 있는 네이밍 마케팅의 원조가 바로 이 팀이다. 다이헤이요 클럽과 4년, 크라운 라이터와 2년간 스폰서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네이밍 마케팅은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후에 세이부 철도가 인수, 세이부 라이온즈로 바뀌게 되었다. 이 팀의 2군도 한때는 명명권 계약으로 2005~2006년까지는 인보이스(インボイス), 2007년에는 굿 윌(グッドウィル)과 계약을 맺어서 팀명을 변경했다가 2008년에 계약종료 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로 바뀌었다.
- 2015년까지 일본시리즈에서 홈 경기로 스윕 승리를 맞이한 유일한 구단이다.(1990년 일본시리즈) 나머지 4연승의 4번째 경기는 전부 원정 경기에서 나왔다.
- 최후의 9인 선발제 일본시리즈 우승 구단이다. 1986년 히로시마를 꺾고 우승했으며, 1987년부터 홈구장 엔트리 규칙을 따른다고 바뀌었다.
- 역사적으로 드래프트에서 제비를 잘 뽑는 팀이기도 하다.[65] 특히 일본프로야구의 판도를 바꿀만한 초대형 신인[66] 이 나오는 해의 경우 유난히 제비를 잘 뽑아서 팀 전력 유지에 큰 도움이 된다. 대표적인 예로 키요하라 카즈히로와 마쓰자카 다이스케가 있고[67] 2009년에도 6팀의 경쟁을 뚫고 코시엔 여름 대회에서 154km/h를 뿌린 좌완 투수인 기쿠치 유세이를 뽑아내는 강운을 과시했다. 2010년에도 또다기 6구단 경합이 벌어진 와세다 대학의 마무리 투수였던 오오이시 타츠야를 한방에 뽑아서 2년연속 6개 구단 경합에서 승리하는 기염을 토했다.[68][69] 확률로 보면 2.7%. 이정도 되면 사기 같다. 그리고 이 드래프트 1픽 운은 2010년대 들어서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가 가져갈려고할 찰나 2021년 4팀의 경쟁을 뚫고 대졸 좌완 대어 투수 스미다 치히로를 교섭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2년뒤 2023년 3팀의 경쟁을 뚫고 그해 대졸 좌완 최대어 타케우치 나츠키까지 교섭권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 노모 히데오가 나왔던 1989년[70] 과 다르빗슈 유가 나왔던 2004년[71] 의 경우에는 아예 지명 자체를 하지 않아서 제비뽑기에 참가하지 않았다. 지명을 안 한 경우에는 어쩔 수 없지만, 일단 뽑겠다고 달려들면 사기라고 생각될 정도로 제비뽑기 운이 좋은 팀이다.
- 1980년대 황금 시대에 보여줬던 퍼시픽 리그의 끝판왕 이미지에 걸맞지 않게 교류전 성적은 신통치 않다. 2017년 현재 교류전 통산 승률은 5할을 살짝넘는 정도로 12개 구단 중 정확하게 중간인 6위이고, 교류전 우승은 한 차례도 없다.
이치로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 이후 암흑기에서 도통 벗어나지 못하는 오릭스 버팔로즈도 해본 교류전 우승인데저정도면 본전치기는 한 게 아니냐고 생각도 할 수 있겠으나 교류전이 워낙 퍼시픽 리그가 센트럴 리그를 일방적으로 두들기는 양상으로 전개가 되어온지라 상대적으로 부진한 편. 실제로 퍼시픽 리그 내로만 따지면 리그 내 4위에 해당하고 2~3위권인 롯데와 닛폰햄과는 통산 승 수에서 10승 정도 차이가 나고 5위인 오릭스와도 얼마 차이가 안 나는 성적이라 교류전에서 별로 재미를 못 봤다고 보는 쪽이 타당하다.
- 왠지 2000년대 말부터 몇 년 간은 '중간계투가 불을 지르는 팀'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졌다. 니코니코 동화 같은 곳에서는 '세이부의 중간계투'라는 전용 태그가 따로 있으며, 2군에서는 통하는데 1군에서는 중요한 순간에 볼질에 불만 지르는 중간계투의 모습을 풍자한 '우리들'(俺達, 오레타치)라는 네타가 정리되기도 했다.오레타치 그래도 이 네타가 처음 등장한 2010년대 초반 즈음에는 와쿠이, 키시, 마키타 등 우수한 선발들이 있기라도 했는데 산적타선으로 다시 강팀으로 올라선 2018~19년엔 옛날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를 연상시키는 타고투저의 팀이 되어서... 중간계투뿐만 아니라 선발진도 기쿠치 유세이가 메이저로 간 2019년에는 폭망하면서 2020년에는 12구단 중 유일하게 개막 투수이자 1선발로 외국인 선수(잭 닐)을 내세웠다.[72] 2020년대에 들어서는 세이부가 오히려 산적 타선이 FA 이적으로 해체되고 투수 육성에 성공하며 투고타저 팀이 되어버린 바람에,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중간계투가 불을 지르는 팀의 이미지가 강해지고 있다.
- 다만 2019년의 잭 닐이 특이한 거지 용병 선발, 특히 대만인이 아닌 미국, 중남미 용병 선발은 죄다 망하기로 유명하다. 용병 선발 중 10승을 넘긴 미국, 중남미 출신 선수는 창단 이래 잭 닐이랑 디트릭 엔스가 유일하다! 당장 최근 세이부의 용병 선발들은 2020년의 션 놀린, 2018년의 파비오 카스티요[73] , 2017년의 알렉시스 칸델라리오, 스테판 파이프, 2016년의 앤디 밴 헤켄, 2015년의 웨이드 르블랑, 궈쥔린[74] 등 실패 사례만 수두룩했다.
- 유달리 보복성, 고의성 빈볼 및 힛 바이 피치가 많은 팀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빈볼 공세는 후쿠오카 시절 말기~세이부 인수 초창기 팀의 에이스였던 히가시오 오사무의 전매특허였고, 히가시오가 1990년대 중~후반 7년동안 감독을 맡으면서 투수들을 육성한 영향도 어느 정도 있다. 그 영향이 이러한 빈볼 투구를 비신사적인 행위가 아니라 상대 팀의 심리를 흔들기 위한 전략의 일부로 인식하는 배터리. 히가시오 오사무와 그의 동기 내지 후배들이 스태프 및 감독을 맡으면서 "몸쪽 공을 공략 못 하거나 못 피하고 맞는 쪽이 기술이 없는 것"의 마인드가 있으며, 이후 팀에 입단하는 후배 투수들도 이러한 마인드를 이어받아 자연스레 빈볼을 자주 던진다. 그냥 인상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수치상으로도 드러나는데 실제로 2010년대에 12개 구단 중 팀 최다 힛 바이 피치 1위를 7번이나 기록했으며(2011~2016, 2018, 2019) 그 중에서도 몇 번은 2위와 상당한 차이가 나는 1위이다. 2020년도는 교진에게 1위를 빼았겼지만 2021년에 다시 소뱅과 공동 1위, 2022년에도 교진보다는 하나 적지만 파리그 안에서는 1위가 사실상 확실한 상황이었으나 기어이 빈볼 하나를 더 기록하며 교진과 함께 힛 바이 피치 공동 1위가 되었다. 당연히 타 팀에선 이런 고의성 짙은 힛 바이 피치 성향을 곱게 봐줄리 없기 때문에 이것으로 인한 벤치 클리어링이 자주 발생한다.
- 우승이 귀한 센트럴리그 두 팀의 위안거리로 세이부가 두들겨맞는 거 다시 보기라는 말이 있다. 양 팀 모두 세이부를 꺾은 게 마지막 일본 제패였기 때문. 또한 퍼시픽 리그에서는 유이하게[75] 센트럴리그 6팀과 최소 한 번씩[76] 시리즈에서 맞붙어본 적이 있는 팀이기도 하다. 일단 요코하마가 일본시리즈에 올라오는 일이 워낙 드물어서 미션을 클리어하려면 상당히 빡세다.[77]
- 2017년 기준으로 과거 9년간 홈 구장에서 6번이나 우승을 허용한 전적이 있다. 특정 구장에서 우승이 확정되는 경기를 치를 확률은 크게 잡아야 1/6인데 이것 또한 엄청난 확률이다.
정작 사이타마가 잘나갈 땐 원정에서 우승18년은 본인이 우승하여 허용하지 않은 것으로 끝인 줄 알았으나 홈에서 일본시리즈 진출을 허용했다.
- 전술한 우승 허용 전적 외에도, 1985년 일본시리즈에서 한신 타이거스의 유일한 일본시리즈 우승을 허용해 한신 팬들에게는 인터리그 세이부 원정 경기 동안 세이부 돔 1루부터 3루까지 한신 팬들로 꽉꽉 찰 정도로 세이부 돔이 성지 내지 제3 홈구장[78] 취급받는 중. 2013 인터리그 롯코오로시 2018 인터리그에서도 1루를 가득 메운 한신 팬들이 롯코오로시를 합창하였다. 세이부 홈구장인 메트라이프 돔은 간사이 주요 도시에서도 기본 4시간은 걸릴 정도로 심각하게 접근성이 나쁘다.[79]
- 묘하게 8로 끝나는 해에는 우승 아니면 팀 역사의 전환점이 찾아온다. 창단 이후 처음으로 맞이한 8로 끝나는 해인 1958년에는 이나오 가즈히사를 앞세운 기적의 리버스 스윕으로 일본시리즈 3연패를 달성했다. 1968년에는 5위에 그쳤는데 그 다음 해에 검은 안개 사건이 터지는 등 기나긴 암흑기가 시작된 해였다. 하지만 이 해 드래프트에서 히가시오 오사무를 지명하며 훗날 라이온즈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되는 유망주를 발굴하기도 하였다. 1978년은 세이부 그룹이 구단을 인수해서 후쿠오카에서 사이타마로 이전하고 세이부 라이온즈로서 출범한 해이다. 세이부가 구단을 인수한 이후로는 매년 무슨 일이 있어도 8로 끝나는 해에는 최소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1988년에는 주니치 드래곤즈를 4승1패로 꺾고 1958년 이후 30년 만에 일본시리즈 3연패를 달성했고, 1998년에도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나 이해에는 머신건 타선을 앞세운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게 무릎을 꿇었다. 2008년에는 그 직전해 25년 연속 A클래스의 기록이 중단되고 B클래스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성적으로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일본시리즈에 진출해서 하라 감독이 나믿승믿을 시전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일본시리즈 우승을 탈환했다. 그 후 10년동안 우승과는 인연이 없다가 2018년에도 시즌 전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초반부터 선두로 나서 10년 만의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한편 현재의 구단 역사와는 관계없지만 1948년엔 옛 모기업이었던 서일본 철도 소속 사회인야구팀이 도시대항야구대회[80]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 구단기가 존재하지만 구단이나 응원단 측은 해당 구단기를 사용하기 꺼리고 남색 바탕에 신 로고를 넣은 깃발을 밀고 있다. 위에서 보면 알듯 장기 사용권이 만료되어 기존 구단기를 함부로 사용했다가는 저작권 소송이 걸려 거액의 보상금을 물어줘야 하기에 조심할 수밖에 없다. 리그 깃발 옆에 계양하는 건 비영리인 데다 자주 비춰주지도 않아서 문제 없이 쓰고 있으나, 거기 빼면 구단기는 거의 안 보인다. 같은 이유로 코나미에서 제작한 야구 게임들은 수출판에서 공식 구단기가 아닌 새 구단기를 썼으나 프로야구 스피리츠 2021에서 깼다. 그러나 2023년 다시 장기 사용권을 취득하면서 복귀 각을 재고 있다.
- 2017년에는 요코하마가 19년 만에, 2021년에는 오릭스가 25년 만에 일본시리즈 진출에 성공하면서 일본시리즈에 진출한 지 가장 오래된 팀이 되었다. 2021년 기준으로 13년이라 타 지역과 비교하면 짧은 편이다. 한미일 프로야구팀 가운데에는 18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참고로 1위는 창단 이후 44년 동안 단 한 번도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한 시애틀 매리너스. 한국에서는 1999년 한국시리즈 이후 25년째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한 롯데 자이언츠가 가장 오랫동안 한국시리즈에 못간 팀으로 남아 있다.
- 노하라 신노스케의 초대 성우인 야지마 아키코와 츠키노 우사기의 성우인 미츠이시 코토노가 이 팀의 팬이다. 야지마는 성우로 대성한 이후 응원을 하는 편이지만 미츠이시는 실질적인 고향은 도쿄지만 태어난 곳이 사이타마라서 세이부를 많이 응원한다. 또한, 유우키 카나도 이 팀으로 열성 팬이다.
- 2023년 8월 26일 마스코트인 레오가 기네스 세계 기록을 달성했다. 도전 종목은 '30초간 마스코트가 뒤돌기를 한 최다 횟수'로 총 31회 뒤돌기를 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각종 굿즈를 판매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