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명군/유럽
덤프버전 :
분류
상위 문서: 명군
1. 그리스[편집]
2. 로마 제국[편집]
3. 프랑크 왕국(843년 베르됭 조약 이전)[편집]
4. 프랑스[편집]
5. 독일어권(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 포함)[편집]
6. 네덜란드[편집]
7. 영국[편집]
8. 덴마크[편집]
9. 스웨덴[편집]
10. 핀란드[편집]
11. 이탈리아[편집]
12. 에스파냐[편집]
13. 포르투갈[편집]
14. 폴란드[편집]
15. 보헤미아[편집]
16. 헝가리[편집]
17. 러시아[편집]
18. 루마니아[편집]
19. 불가리아[편집]
20.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편집]
21. 세르비아[편집]
22. 알바니아[편집]
23. 교황[편집]
24. 훈 제국[편집]
25. 관련 문서[편집]
[1] 로마사 전체에서 행정능력과 미래를 내다보고 내린 판단과 계획 제시 능력, 실용적인 명령, 감찰 및 피드백 제시 등 행정 전반에서 그 능력과 성과 모두 전체 1~2위를 다툰다고 평가받는다. 이런 평처럼 티베리우스 이후 로마 황제들은 본인이 행정 업무를 볼 때 선례를 참조하거나, 후계자들을 제왕교육시킬 때, 티베리우스가 내린 명령문을 교과서처럼 참조했다.[2] 인기가 당대엔 진짜 없었고, 원로원에게는 세습을 통해 집권한 점과 세야누스, 마크로를 앞세운 공안통치 등으로 인해 폭군이라고 불렸다.[3] 콤모두스 사후 내란을 수습하고 단독 황제로서의 재위기간은 197년 부터이다.[4] 당대엔 아들 카라칼라의 실정, 체제의 외손자 엘라가발루스의 막장 행보 속에서 명군으로 더 높게 찬사를 받았다. 그렇지만 강력한 카리스마, 결단력, 영리한 행정 능력과 별개로, 본인이 얻을 단기적인 이득 때문에 지속적으로 데나리우스를 평가절하하면서, 당대부터 큰 우려를 샀다. 그리고 그 우려 그대로 오늘날 재평가 속에서도, 세베루스의 경제 정책과 조치들은 로마 제국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면서 후임 황제들에게 큰 숙제를 남겼다.[5] 다만 어머니인 율리아 마마이아를 제어할 수 있었던 할머니 율리아 마이사가 죽은 이후, 마마보이화 되기 시작하였으며, 군대 통솔 능력이 부족하였다. 이는 암살의 원인이 된다.[6] 동시대, 후대 로마인 모두에게 명군이라는 평과 동시에 폭군으로도 평가됐다. 그 이유는 지나칠 만큼 잔인하고, 성격이 괴팍해서 재위기간이 흐를수록 그 잔혹함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7] 분립기의 지방 망명정권이나 미하일 8세가 뒤를 찬탈했지만 어쨌든 이어 수복했으므로 정통으로 취급.[8] 800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9] 유럽의 정세를 뒤집고, 프랑스를 반석 위에 올렸다는 평을 받는다.[10] 교황을 굴복시킬 정도였다.[11] 잔다르크를 토사구팽하여 비난받는 것과 별개로 백년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프랑스의 중앙집권화에 기여하였다.[12] 양아치가 떠오를 정도로 악랄한 행보를 보였으나 결과적으로는 프랑스의 국익에 도움이 되었다.[13] 896년부터 서로마 황제.[14] 독일왕으로서의 업적도 출중하지만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티아 왕국을 합쳐 밑의 합스부르크 제국을 출범시킨 공로 또한 높은 인물이다.[15] 엄밀하게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겸 프로이센 공작.[16] 보통 수준의 군주였지만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발탁하고, 오스트리아 제국과 손 잡아보았자 별거 없으니 러시아 제국을 끌어들이는 게 낫다고 하는 등 정세를 읽고 인재를 등용하는 데 능했다. 명장 대 몰트케도 그의 시기에 중용되었다.[17] 바이에른 선제후로는 막시밀리안 4세. 1806년부터는 바이에른 왕국의 첫번째 국왕 막시밀리안 1세로 재위했다.[18] 영국 국왕으로서의 평가는 좋지 못하지만 영국 문화에 완전히 적응하기 어려웠다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 조지 1세는 영국의 왕으로 즉위했을 당시에 이미 50의 나이었다.[A] A B 왕은 아니었고 Stadtholder라는 직위였지만 이 직위가 네덜란드 공화국을 대표하는 자리이고 세습도 가능하므로 국왕에 준하는 직위로 간주하여 본 문서에 기재하였다.[19] 벨기에 혁명으로 나라의 절반이 분리된 실책도 존재하기 하지만 업적도 많은 편이다.[20] 외교에 능해 삼국 협상을 이끌었다.[21] 1차 세계대전 당시 패전할 경우 왕조가 폐지될 수 있는 위기 속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전쟁에 최선을 다한 결과 승리로 이끌면서 영토상 최절정기를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내치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22] 엘리자베스 2세의 아버지로 말 더듬이었지만 최선을 다하여 극복했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국민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면서 영국과 연합군의 승리에 일조했다.[23] 원래 프랑스 출신이며, 프랑스 입장에선 매국노 로 인식될 수도 있는 인물이다. 이유는 칼 14세 요한 본인의 항목을 보면 된다.[24] 러시아 황제로서의 평가는 미묘한 편이지만 당시 상류층이었던 스웨덴계 핀란드인의 권리를 보장하고 핀란드인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등 핀란드 대공으로서는 괜찮았다.[25] 위의 시칠리아 왕국 국왕으로서도 명군이다. 시칠리아 왕국 국왕으로는 카를루 5세.[26] 사보이아 공작으로서는 1675년부터[27] 1320년부터 폴란드 왕[28] 하지만, 1848년 혁명 당시 헝가리인의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한 것에 책임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29] 이 아래로는 모노마코비치 왕조[30] 1547년부터 루스 차르국 차르.[31] 1721년부터 러시아 제국 황제.[32] 홀스타인고트로프로마노프 왕조[33] 1861년부터 루마니아 연합공국 공작.[34] 1881년부터 루마니아 왕국 국왕.[35] 1346년부터 세르비아 제국 황제.[36] 1374~1379년까지 '세르비아인과 포두나블레(현대 세르비아의 일부)인의 군주', 1379~1389년까지 '전(全) 세르비아인의 군주'.[37] 1389~1402년까지 Knez, 1402~1427년까지 Despot. 둘 다 공작으로 번역해도 무방하나 Knez는 슬라브어인 반면 Despot는 당시 동로마 제국에서 쓰던 용어이므로 격이 더 높다.[38] 현대에는 평가가 엇갈리는 사람이나, 후대 교황들인 식스토 5세나 우르바노 8세 등이 성 베드로 이후 가장 뛰어난 교황이라고 칭송한 바 있으므로 기재.[39] 헝가리인들의 주장에 따르면 헝가리의 명군으로 분류되어 위의 헝가리 문단에 추가될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의 헝가리 땅이 훈족의 영향을 받은 역사가 있는 것과 별개로 훈 제국을 확실히 헝가리의 역사라고 볼 수 있는지는 논란이 있어서 별개의 문단으로 남아있다. 튀르키예인들 또한 훈 제국을 자신들의 역사로 여기지만 다른 나라들은 훈 제국을 튀르키예의 역사로 여기지 않으므로 명군/아시아 문서의 튀르키예 문단에는 없다.[40] 한 나라의 전성기와 명군의 등장 시기는 매우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