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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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79년 12월 15일에 개봉된 루팡 3세의 두번째 극장판이자 미야자키 하야오의 첫 번째 극장판 애니메이션 감독작. 작화감독은 오오츠카 야스오. 루팡의 자켓은 초록색.[6]
2. 예고편[편집]
3. 줄거리[편집]
괴도 루팡은 동료 지겐과 카지노에서 한탕 털고
기쁨을 만끽하는 것도 잠시, 훔친 돈이 위조지폐임을 눈치챈다.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기 위해 도착한 칼리오스트로 공국에서
정략결혼을 피하기 위해 필사의 도주극을 펼치는 공주 클라리스를 마주치게 되고,
사건의 냄새를 맡은 루팡은 지겐, 고에몽과 성에 잠입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수께끼의 팜므파탈 후지코와 경찰 제니가타와 직면하며
성의 감춰진 비밀을 하나씩 마주하게 되는데
당신의 신부를 데려가겠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선사하는 괴도 루팡의 낭만 액션 어드벤처가 시작된다!
1968년[7] , 모나코 국영 카지노에 든 카지노 수익금 수십억 달러를 멋지게 훔쳐낸 루팡과 지겐 다이스케. 돈뭉치에 파묻혀 기뻐하는 것도 잠시, 지폐를 자세히 살피던 루팡은 자신들이 훔쳐낸 것이 진짜 돈이 아니라 정교하게 꾸며진 사상 최강의 위조 지폐 '염소 지폐' 임을 알고는 고생해 가며 훔친 돈뭉치들을 모두 밖으로 날려보낸다.[8]
이후 두 사람은 지폐의 정체를 알아내고자 유럽의 칼리오스트로 공국[9] 에 위장 잠입했다. 그런데 멀쩡히 잘 달리던 자동차가 난데없이 펑크가 나버렸고 예비용 타이어로 갈아끼우고 있을 때, 난데없이 자동차 한 대가 쏜살같이 지나갔는데 안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운전대를 잡고 있었고 그 직후 그녀를 쫓는 듯한 무리들이 차를 타고 쫓고 있었다. 그 상황을 보고 신사도와 정의감이 불타오른 루팡은 지겐이 타지도 않았는데 곧바로 핸들을 잡고 여자의 뒤를 쫓기 시작했고[10][11] , 한참 뒤 그녀가 누구이고 그녀를 쫓는 자들의 정체와 그녀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알게 된다.
소녀의 정체는 칼리오스트로 대공가의 후계자 클라리스 칼리오스트로였고, 그녀를 쫓는 건 현재 공석인 대공직을 대신해 임시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라셀 드 칼리오스트로 백작. 그는 대공직을 물려받기 위해 클라리스와 결혼하려 들었지만 클라리스는 이런 그를 철저하게 거부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를 알게 된 루팡은 그녀를 구해내고 위조 지폐의 비밀을 밝혀내겠다는 일념으로 따로 활동 중이던 이시카와 고에몽을 불러들였고 백작에게 납치 예고장까지 보낸다. 예고장으로 인해 자연히 루팡 3세 담당 경찰인 제니가타 코이치까지 루팡 사건에 끼어들게 된다. 여기에 라셀 백작의 하인으로 위장해 위조 지폐를 훔치려는 미네 후지코까지 얽히면서 위조 지폐를 둘러싼 경찰, 도둑, 백작의 대활극이 펼쳐진다.
자세한 내용은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줄거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등장인물[편집]
- 클라리스 드 칼리오스트로(クラリス・ド・カリオストロ Clarisse d'Cagliostro)
성격이나 행적 등을 보면 지브리 애니 히로인들과 꽤 유사하다는걸 알 수 있다. 감독이 자기 취향을 넣어서 만든 히로인이어서 그런듯.[16] 당시 인기가 매우 높았으며 2000년대 루팡 3세 컬트대사전이란 책이 나올 때 한 공식 인기투표에서 6위를 했는데 루팡 3세의 레귤러 5인을 제외하면 게스트 캐릭터 중 최고 순위였다.
- 라셀 드 칼리오스트로 (カリオストロ伯爵、グラフ・ラザール・ド・カリオストロ Grafe Rasare d'Cagliostro)
작중 초반에 루팡 일행이 손에 넣은 위조 지폐를 만드는 장본인으로[18][19] , 루팡을 잡겠다고 나서는 제니가타 경부가 자신의 비밀을 눈치챌 기미를 보이자 ICPO의 높으신 분들에게 부탁하여 철수하도록 만든다. 본인의 언급으론 전세계에 쓸만한 지인들이 많은 듯.[20] 결국 결말부에서 클라리스를 인질로 삼아 루팡에게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보물을 차지하려고 욕심을 부리다 시계탑의 거대한 분침과 시침 사이에 끼어서 천천히 압사당하는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다.[21] 루팡과 클라리스를 강으로 떨어뜨리고 염소 장식의 눈구멍에 반지들을 넣었는데, 이 염소 장식이 시계탑의 비밀 장치를 가동시키는 열쇠였고 이때 분침과 시침이 12시 쪽으로 움직이도록 되어있었기 때문에 갑작스런 시계탑의 작동에 당황하여 중심을 잃고 염소 장식에 매달린 채 어버버하다 그대로 시계침 사이에 끼어서 끔살당한 것.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작품에서 무스카랑 더불어 비참하게 죽는 악역 캐릭터.[22] 모델은 츠키오카 사다오라는 설이 있다. [23]
- 조도 (ジョドー Jodot, 비디오 더빙판 명칭은 주크)
라셀 백작이 후반부에 결국 죽자 이걸로 카리오스트로 공국도 끝이라며 순순히 포기하고 고에몬에게 목을 치라고 하지만, 고에몬이 무익한 살생은 하지 않겠다고 넘어가서 목숨을 건졌다. 백작이 죽은 이후 별다른 야심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오로지 공국 혹은 백작에 대한 충성심만 가지고 욕심 없이 온갖 더러운 짓을 도맡아 한 것이었던 모양.
- 구스타프 (비디오 더빙판 명칭은 루스타르)
- 월터
5. 제작[편집]
5.1. 제작 과정[편집]
원래 도쿄무비신사는 신 루팡과 루팡 3세 첫번째 극장판 루팡 3세 루팡 VS 복제인간의 각본을 쓴 팀들의 각본을 바탕으로 스즈키 세이준이 감수한 각본 초고를 바탕으로 애니화를 할 예정이었다.[24] 그리고 오오츠카 야스오에게 이 작품의 감독을 맡아줄 것을 의뢰했지만 오오츠카 야스오는 이미 몇 번이나 영상화되어 이미 캐릭터가 고착화된 작품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고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상담 전화를 하니까 "내가 할까?" 라고 먼저 달려들었다고 한다.
토미자와 노부오가 말하길,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의 실질적인 프로듀서는 오오츠카 씨로, 자신의 급여도 오오츠카씨가 미래소년 코난에서는 원화맨으로 얼마 받았냐고 물어서 18만 엔이라고 대답하니까, 자, 20만 엔 준다고 새로운 회사로 이적했으니까 월급이 오르는 것이 당연하다며 월급 액수 책정을 오오츠카가 했다고 한다. 그리고 칼리오스트로의 성의 감독을 미야자키 하야오가 맡게 된 것도, 오오츠카가 사장인 후지오카 유타카에게 말해서 결정되었다고 한다. 루팡 3세 극장판 1기가 개봉해서 상영중인데, 2기는 오오츠카 야스오가 감독을 하기로 결정이 난 상태인데, 오오츠카 씨가 머리를 감싸고 뭘 만들까라고 고민하고 있는데 1979년 5월 쯤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홀연히 나타나서 감독을 맡게 되었다고 말했다.
미야자키는 오자마자 그 각본을 버렸고 따로 각본을 쓰지 않고 콘티를 그려가면서 동시에 스토리를 짰다, 각본은 나중에 공동명의로 출판되었다. [25]
여기에는 속사정이 있었는데, 첫째는 일상물을 추구하는 타카하타 이사오와 모험활극을 좋아하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만들고 싶은 작품의 취향과 연출 성향도 서로 달라[26] , 미야자키가 회상하기를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히트하자 똑같은 노선으로 만들어진 엄마찾아 삼만리는 그저 힘들기만 했다고 푸념했고, 역시 일상물인 빨강머리 앤은 지겨워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래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타카하타 이사오가 감독하고 있던 빨강머리 앤에서 장면설정과 레이아웃을 담당(15화까지)하고 있었지만 "앤은 싫다. 나머지를 부탁한다"며 때려치우고 루팡 3세 극장판 감독을 맡는다. 전년도에 미래소년 코난으로 처음으로 감독 경험[27] 도 쌓은 미야자키에게는 이 작품은 타카하타 이사오와의 콤비 활동을 그만두고 독립하는 분기점이었다. 이때 미야자키가 나가면서 시노하라 마사코 같은 애니메이터를 빼가서 빨간머리 앤 제작 현장은 난리가 났고 타카하타 이사오는 골머리를 썩었다고 한다.[28]
둘째는 이 작품이 극장 개봉하는 연도에는 TV에서는 한창 루팡 3세(애니메이션 2기)가 방영되고 있었다. 미야자키는 이 2기를 보고 화가 났다. 실은 2기도 연출을 맡아달라는 제의가 있었지만, 루팡은 캐릭터로서 생명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캐릭터는 시대와 함께 하는 것이라는 지론이 있었기 때문에 거절했다. 원작 만화가 연재하기 시작한 것은 1967년. 일본에서 청년문화가 폭발하던 시기로, 몽키 펀치도 서른한 살의 신인 만화가로 어떻게 하면 재미있는 만화를 그려서 히트작을 만들까 하는 열망이 가득 차 있었고, TV판 1기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진 1971년은 미야자키는 서른 살로 아직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떻게 하면 굉장한 작품을 만들까 하는 '헝그리' 정신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미야자키는 이런 점에서 원작 만화에 공감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년이 흘러 시대도 사회 분위기도 달라져서 루팡 3세도 미야자키도 30대 후반. 2기 루팡은 시대와 엇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1기 루팡은 살인은 하지 않았는데 2기 루팡은 툭 하면 총으로 사람을 쏴 죽여서 해결하려하고, 여자나 밝히고 언제까지 천방지축 철없는 애송이처럼 까부는 루팡을 지켜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나이와 같은 중년의 '아저씨'가 된 루팡을 등장시켜 루팡 시리즈의 결론을 내리고 쫑(終;오와리)내면서 마침표를 찍을 작정이었다.[29]
"목표가 없으니까 인간을 타겟으로 하는 것입니다."
"루팡을 좋아한다면 그리는 것을 그만둬야 합니다. 나중에 어찌하다보니 '신 루팡(2기)'의 최종회를 담당하게 됐을 때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고, 소녀를 도와주고 떠나는 루팡을 다시 그렸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인터뷰에서[30]
미야자키는 칼리오스트로 성을 만들고 나서 TV판 2기의 연출을 제안받았다. 그리고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한 2기 시리즈 마지막화인 155화 루팡 3세 안녕, 사랑스런 루팡이여에서 지금까지의 붉은 재킷을 입고 나왔던 2기의 루팡은 가짜인 것처럼 연출을 했다. 극 중에서 제니가타 경부로 변장하고 활약했던 루팡이야말로 칼리오스트로의 성의 '진짜 루팡'이라고 2기 시리즈를 마무리 지었다. 이러한 원작을 무시하는 것에 가까운 극단적인 해석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오히려 원작 만화의 루팡의 이미지를 덧씌워버리고 루팡이란 캐릭터를 미야자키의 것으로 기억하게 만들 정도로 고평가를 얻게 되었다. 훗날 미야자키의 친구 오시이 마모루도 시끌별 녀석들 2 Beautiful Dreamer에서 비슷한 짓을 저지르기도 했고 똑같이 성공했다는 점이 흥미로운 점이다.
여기 있는 이야기 대부분은 'BS 애니메 야화'라는 방송에서 언급된 이야기이다.
5.2. 영향을 받은 작품[편집]
기본적인 플롯은 1971년에 연출을 맡은 적이 있는 루팡 3세(애니메이션 1기) 제10화 위조지폐점을 노려라!의 리메이크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위조지폐범을 찾아 우크라이나의 눈덮인 산 속에 있는 거대한 시계탑 건물로 가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시계탑 바늘에 매달리는 루팡, 밑으로 떨어지는 함정, 톱니바퀴, 최후에는 시계탑이 폭발하는 등 이 영화와 유사한 장면도 있다. 이 에피소드에 여주인공 클라리스와 칼리오스트로 가문의 설정 등의 살을 붙여만들었다. 루팡이 소녀를 구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로드무비에 가까운 전개는 21화 '말괄량이 소녀를 구해라' 하고도 유사하다.
클라리스는 고전 동화에 나오는 '탑 안에 갇힌 공주' 클리셰이지만, 영화 제목과 주연들의 이름을 따온 모리스 르블랑의 '아르센 뤼팽 시리즈' 소설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31] 와 <초록색 눈동자의 아가씨>[32] , 이 젊은 시절의 뤼팽과 중년의 뤼팽이 등장하는 두 소설은 이 영화의 루팡의 나이 변화와 성장, 도둑놈이지만 소녀를 구하는 기사도 정신을 가진 루팡 설정의 뿌리가 된다.
미야자키는 아니메쥬의 인터뷰에서 <녹색 눈동자의 아가씨>에 나오는 호수와 로마 유적, 어릴 적 읽은 <유령탑>[33] 에 나오는 거대한 시계탑과 톱니장치, 지하실이 작품의 원천이라고 밝혔다. 1988년 인터뷰에서 어릴 적에 유령탑을 무척 재미있게 읽고 이것을 언젠가는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싶었고, 그것을 루팡으로 바꿔서 해 버렸다. 아저씨 루팡을 할 생각이었다.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는데 당시 제작기간이 짦아서 수면부족의 연속이어서 지금에도 조금 "やばいな(별로다. 좋지 않다)"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했다.
또한 폴 그리모(1905~1994) 감독이 만든 프랑스 애니메이션 왕과 새(1952년작)[34] 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폭군 왕이 강제로 여주인공과 결혼하려고 결혼식을 올리는 설정, 그 여주인공을 구해서 탈출한다는 스토리, 성의 디자인, 엘리베이터, 바닥이 열려서 밑으로 떨어지는 장치, 줄을 이용해서 성을 탈출하는 장면, 오토자이로는 아니지만 비슷한 헬리콥터같은 비행정이 나오는 등. 미야자키 감독도 이 작품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세계 최초로 사람이 탑승해서 조종하는 거대로봇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한데, 여기 나온 거대 로봇의 손은 미래소년 코난에 나오는 로보로이드의 손 디자인과 닮았고, 그림자 집단과 칼리오스트로 백작이 발사하는 장갑 손톱과 디자인이 매우 흡사하다. 코난 엔딩도 왕과새의 마지막 시퀀스랑 비슷하다.
왼쪽이 왕과 새(사팔뜨기 폭군) 오른쪽이 칼리오스트로의 성
게드전기가 극장 개봉하던 날에, 지브리가 제공하는 왕과 새도 공개되었다, 번역가는 도쿄대 불문학과 졸업의 타카하타 이사오. 미야자키와는 선후배 사이이자 동료이자 라이벌. 과거에도 몇 번이나 미야자키 작품에 대한 비판의 의견을 내놓곤 했는데, 그날 공개석상에서 "뭐, 칼리오스트의 성은, 절반 이상이 이 작품의 파쿠리 같은 겁니다.(웃음)(まあ、『カリオストロの城』なんて、半分以上この映画のパクリみたいなもんですよ(笑))"이라고 폭탄발언을 연발했다고 한다.
BS NHK 아니메 야화(한국어 자막)에서 한 평론가가 말하기를, 다른 작품에서 인용한 대목을 빼면 오리지날 부분은 10분도 안 남을 것이라며, 이 작품이 너무 추켜세워져서 걸작 명작 취급을 받지만, 스토리는 구멍 투성이[35] 고, 그리고 굳이 칼리오스트로 공국에까지 잠입을 하는 논리적인 이유가 없다고. 쓰지도 않고 버린 위조 지폐의 굳이 뭘 찾겠다는 것은 공국으로 보내기 위한 구실이며 억지 설정일 뿐이고 스토리는 위조지폐의 비밀은 내팽겨치고 클라리스를 구출하는 이야기로 삼천포로 빠진다. 미야자키가 발명했다고 착각하기 쉬운 애니메이션 표현 기법은 이미 다른 애니메이션에서 먼저 선보인 것을 가져온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미야자키 달리기'라고 불리는 루팡과 지겐이 다리를 쫙쫙 벌리면서 펄쩍 펄쩍 뛰는 모습은 디즈니의 Alice in Cartoonland에서 먼저 선보인 표현 방법이다.
거기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감독을 맡았기 때문인지 미래소년 코난의 느낌도 배어있다. 시기도 미래소년 코난 방영 후 개봉했다.
스토리의 구성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방법론을 응용했다고 밝혔다. 즉, 결말을 미리 정하고 거기에 맞춰 치밀하게 이야기를 쌓아 올려가는 스타일로, 젊은 때라 이런 방법론을 연구했는데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그런 짓은 하지 않게됐다고 한다. 미야자키 본인은 어떤 인물을 먼저 등장시키고 이야기를 진행해가면서 이 인물이 이런 면이 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과정이 즐겁다면서, 이후 처음의 설정 자체가 바뀌어버리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나, 스토리 구성 자체가 모호한 모노노케 히메, 벼랑 위의 포뇨 등에서 보듯 각본가로써의 미야자키 하야오는 스토리의 짜임새와 개연성은 포기한 듯한 작품을 만들어버리고는 했다.[36]
5.3. 제작 환경[편집]
작품 자체도 그야말로 후다닥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제작기간은 4개월 반 만에 뚝딱 해치운 작품이었다. 미야자키는 후에 "내 체력의 한계를 이 작품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라고 했을 정도였으니 엄청난 강행군이었다는 것을 미뤄 짐작할수 있다. 미야자키 본인의 말로는 정신적인 데미지와 체력을 회복하기까지는 몇 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제작 기간이 짧은 탓에 처음 구상했던 그림 콘티를 수정해야 했다. ABCD 파트에서 D파트 부분, 처음부터 이 D파트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영화를 만들었는데 시아게(채색)팀이 못 칠한다고, 이 이상 그림 매수를 늘리면 극장 개봉일에 못맞춘다고 해서 그림콘티를 다시 수정해야 했고, 더 잘 만들기 위해 콘티를 고친 것이 아니라 스케줄 때문에 콘티를 다시 그려야 해서 이거야말로 관객이 오는지 말든지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데미지가 남았다면서. 미야자키는 소련을 쳐들어갔을 때 지평선에 모스크바가 살짝 보이는데도 철군해야 했던 독일군의 심정이었다라는 밀덕후다운 비유를 들어 아쉬움을 표현했다. 이런 비유를 드는 이유는 어차피 정의를 위한 싸움도 아니고, 테마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공주를 구하는 고전적인 빅토리아 시대쩍(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 같은 거라서, 그렇다면 철저하게 엔터테인먼트로서 '햐아~! 이 라스트를 위해서 이 영화를 만들었구나!'라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거기서 브레이크가 걸려버렸을때 망연상실까지는 아니더라도 엄청난 좌절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관에 손님이 안 온 것이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을 정도였다고.[37]
이미지 보드에서는 루팡, 클라리스, 제니가타가 탄 오토자이로와 그림자 집단과의 엄청난 공중전[38] , 클라이막스는 시계탑에서의 화끈한 액션활극이 펼쳐질 예정이었지만, 현실은 제작 후반에는 스케쥴에 쫓겨서 거의 맨날 24시간 풀가동 밤샘 작업으로, 스탭들은 밥먹을 시간도 없어서 영화에 나오는 제니가타와 경찰 일행처럼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워야했다.[39] 이때 먹은 컵라면 갯수가 무려 3600개쯤이란다. 이 장면도 참 명장면인데 성 안에선 부유층 인사들이 온갖 호화스러운 만찬을 즐길때, 대조적으로 밖에 대기하던 경찰들이 먹던 게 컵라면이었다.
게다가 나중에는 채색작업할 인력이 부족해서 원화맨도 동화맨도, 경리를 담당하는 사원도 프로듀서까지 셀에 색칠을 해야 했다. 140일 정도의 제작기간에 총 작화매수는 약 45,000매, 전편 약 1,450컷, 작품에 참여한 11명의 원화맨은 하루에 1컷 이상, 동화는 하루에 300매 이상이 되는, 현재의 애니메이션 제작 환경(지브리의 원화맨의 경우 한 달에 4컷 정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애니메이터를 갈아넣어서 만든 경이적인 노동이었다.
본작의 원화 담당 11명 중 7명이 미래소년 코난에도 참여했다. 코난은 매주 20분짜리 한 편을 만들어야하는 TVA라서 스케쥴이 영화보다 더 힘들었다고 한다. 그 힘든 과정을 겪은 원화맨들이 있었기에 이 영화도 단기간에 완성될 수 있었다.[40] 그리고 원화가들의 장난끼로 코난이 출연하는 장면도 있다.[41]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작품의 작화감독 오오츠카 야스오가 미래소년 코난의 히로인 라나를 못생기게 그린 거에 대해서 그의 미소녀 그림에 대한 신용을 잃었고 이번 작품에서도 오오츠카 야스오가 그린 클라리스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42] 그래서 오오츠카 야스오가 그린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일러스트에서는 일부러 클라리스의 얼굴이 안 보이게 아래로 향하게 그리게 했으며 본편 중에는 토에이 시절부터 함께했던 미소녀 전문 애니메이터 시노하라 마사코[43] 를 불러 클라리스의 얼굴을 전부 수정시켰다고 한다. 루팡이 클라리스에게 마술을 해주는 장면은 클라리스가 무조건 예쁘게 나와야한다며 미야자키가 직접 작화감독을 했다.
본작의 오프닝은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내는 연출법의 좋은 예로 손꼽힌다. 가령 까맣게 채색되어 실루엣만 그려진 배 그림 한장과 배경 그림 한장으로 30초를 버티는 식. 안노 히데아키는 천재라고 감탄하고, 자기 작품에도 이런 연출(보여주고 싶은 대목이고 움직여야 할 곳은 철저하게 움직이고, 그 외의 장면은 에반게리온에서 화장실의 소변기 그림 한 장을 보여주고 횡이동을 하면서 대화 소리만 들리는 연출처럼 제작비 절감을 위해 그림 한 장만 횡이동하면서 대사로 때우는 것으로 따라한다.
그뿐만 아니라 시간도 예산도 부족한 상황에서, 배경 미술도 기존의 사진을 손으로 그린 것처럼 보이게끔 가공해서 사용하고(샹들리에가 나오는 씬 등), 미네 후지코가 그림의 눈동자 부분을 열어서 백작을 엿보는 씬의 초상화는 실제로 존재하는 그림이다. 그 밖에 영화에 등장하는 실재하는 그림의 해설 일본 블로그 글
참고로 배경미술 담당은 야마모토 니조
그리고 효과음(인물이 충격 먹을 때, 혹은 충돌할 때)이 당시 같은 해에 제작중이던 베르사유의 장미와 돌려쓴 흔적이 보인다. 같은 도쿄 무비(TMS社)의 작품이라 그런 듯.
6. 흥행 결과와 이유[편집]
극장 개봉 성적 자체는 제작비와 홍보비로 5억 엔 정도 돈을 들여서 만들어서, 벌어들인 것은 극장 흥행수익 6억 천만 엔에서 배급수익(흥행 수익에서 극장측 몫을 뺀 수익)은 3억 500만 엔으로 정도였으니 한 2억 엔 정도 적자인 폭망 수준이었고[44] , 미야자키는 이 작품 이후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만들기까지 한동안 극장판 감독을 맡지 못했다.[45] 미야자키 본인은 "이제 두번 다시 극장용 영화는 못 만들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때의 경험으로 감독은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너무 힘들어서 더 하고 싶지 않았고, 그냥 애니메이터 스탭으로 일하고 싶어졌다고 회상했다.(전력질주, 완전연소 스타일인 미야자키[46] 는 이후 나우시카, 라퓨타, 모노노케 히메, 포뇨 때도 작품을 만들고 나면 감독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꺼냈다. 그만큼이나 한 작품에 최선을 다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오히려 TV 재방송이나 상영회에서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재평가되었다. 다음 해인 1980년 TV로 방영될 때는 시청률 22%. 1999년 2월 26일 닛폰 테레비의 금요 로드쇼에는 23.4%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흥행에 실패한 이유를 BS NHK 아니메 야화 (한국어 자막)에서 분석하기를, 1978년 전년도에 개봉한 스타워즈와 미지와의 조우로 일본 전역은 느닷없이 몰아친 SF 붐으로 물들어 있어서, 극장용 애니메이션 영화는 SF 영화가 아니면 흥행이 안되는 시기였다.[47] 그래서 배급을 담당한 극장의 취급은 도쿄를 비롯한 대도시에서는 단관 개봉이었지만, 지방 도시에서는 2편 동시개봉으로 상영했다.[48]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도 지금처럼 일반인도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하지도 않았고, 애니메이션 업계인과 애니메이션 팬들이나 주목하는 기껏해야 전년도의 미래소년 코난으로 처음으로 감독 데뷔하고, 극장판 감독은 이번에 처음인 신인 감독이었다. 더구나 작품 스타일도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장편 만화영화를 연상시키는, 옛날 성과 공주가 나오는 내용으로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와는 동떨어진 작품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아니메 팬은 미소녀같은 캐릭터 팬이 절반 이상이었고, 일반 가정에는 아직 비디오 기기(VCR)라는 것이 보급되기 전이라, 영화관에는 필름 사진기를 들고 가서 야한 서비스 컷 장면이 나오면 사진을 찰칵 찰칵 찍어서 수집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정지화면이 많은 영화를 선호했고, 미야자키 하야오처럼 움직임이 많은 영화는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
일본 서브컬쳐계의 시대적 흐름은 1974년 우주전함 야마토의 인기로 시작한 제1세대 오타쿠의 등장과 함께 동인지 붐, 성우 붐, 미소녀 캐릭터 모에 붐, 은하철도 999와 스타워즈로 촉발된 SF 붐 등의 오타쿠 문화를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해하지 못하고 외면했다. 자신이 좋아했던 1971년 초록색 재킷의 루팡을 다시 부활시켜서 자신이 보기에 마음에 안 드는 빨간색 재킷의 루팡 2기 TV 시리즈에 저항하려고 한 것이다. 이 영화에는 루팡 3세 1기의 에피소드 나오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연출이 많다. 예를 들면, 위죄지폐를 버리는 장면, 청소기로 보석을 빨아들이는 씬, 상대의 자동차의 타이어를 총으로 쏘고는 "해냈다"라고 포즈를 잡는 장면, 방송국 기자로 위장해서 잡입하는 작전, 시계탑의 메카니즘 등이 있다.
NHK 방송의 인터뷰에서 흥행이 안된 것이 의외였다고 하자 미야자키는 의외가 아니라 자신이 참여한 1기 이후로 시리즈화되어 루팡 3세는 큰 인기를 얻었는데 그 시리즈에 등을 돌린 영화였다면서, 루팡이 성격이 쾌활하고 까부는 밝은 부분뿐이라면 싫었고 어두운 그림자 부분도 다루지 않으면 안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우리들(제작팀)에게는 있었다고.정신 차리고 보니 우리들은 은하계의 구석에서 작아져 있었다 - 미야자키 하야오 흥행실패에 대한 소감
더빙 시에 미야자키는 이번 루팡의 나이 설정은 기름기(느끼함)가 쫙 빠진 중년이라서 루팡 3세의 성우인 야마다 야스오에게 까부는 목소리의 연기는 자제하고 전에 성우역을 맡은 적이 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더빙할 때처럼 연기하라고 지시하자 야마다 야스오는 "내가 성우니까 내 맘대로 하겠다."[49] 라고 거만한 태도로 말해 오오츠카 야스오가 화를 냈다고 한다. 하지만 시사를 마친 뒤 작품의 질이 높은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아 사과하고 몇백 번이고 지시하는대로 하겠다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불분명하다(일본 위키피디아 참고).
루팡의 성격 변화뿐만 아니라, 지겐도 전작 복제인간 편에서는 "미네 후지코하고 절교해라!", "귀찮은 일에는 끼어들고 싶지 않다!"는 당시의 젊은이들[50] 들이 공감할 만한 캐릭터였는데, 이 작품에서는 정반대로 루팡과 함께라면 지옥 끝까지 가는 의리의 '싸나이'로 그려진다. 미네 후지코도 제니가타도 2기 시리즈와 첫번째 극장판에 등장하는 인물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인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