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알 마드리드 CF/라 퀸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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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문서: 레알 마드리드 CF/UEFA 챔피언스 리그
지난 1958-59 시즌에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페렌츠 푸스카스라는 파괴적인 듀오를 가졌음에도 리그에서는 준우승에 그쳤고, 루이스 카르니글리아 감독은 푸스카스를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 제외한 것으로 인해 경질되었다. 그리고 CR 플라멩구에서 마누엘 플레이타스 감독을 영입했다.
한편, 3시즌간 활약하며 발롱도르를 수상하기도 했던 레몽 코파가 친정팀인 스타드 드 랭스로 복귀했다. 코파가 떠나자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은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에서 맹활약한 떠오르던 신성 펠레를 영입하기 위해 산투스 FC에 제의했으나 거절당했다. 대신에 보타포구 FR에서 지지를 영입해 팀의 네임밸류를 한단계 더 높였다.[1] 그 외에도 카나리오, 루이스 델 솔 등을 영입했다.
8강에서는 OGC 니스를 만났다. 니스는 1956-57 시즌에도 8강에서 만났고, 이번 시즌에는 1라운드에서 페네르바흐체 SK를 플레이오프 끝에 꺾고 올라왔다.
4강에서 만난 상대는 1958-59 시즌 라리가 챔피언이자 레알 마드리드의 최대 숙적 FC 바르셀로나로 유러피언 컵 최초로 엘 클라시코가 벌어졌다. 바르셀로나는 예선에서 불가리아 챔피언 PFC CSKA 소피아를 종합 6-2로 꺾고, 1차전에서 강팀 AC 밀란을 1차전 2-0, 2차전 5-1로 대파하여 종합 7-1로 8강에 진출하였으며, 8강에서 울버햄튼 원더러스를 상대로 1차전 4-0, 2차전 5-2 완승을 거두어 종합 9-2로 4강까지 올라와 숙적 레알과 맞붙게 된 것이다.
한편, 바르셀로나의 엘레니오 에레라 감독은 라슬로 쿠발라와의 불화로 2차전에서 그를 제외했고 레알에게 패배하자 결국 이것이 빌미가 되어 더블을 달성했음에도 즉각 경질당했다.
결승에서 만난 상대는 클럽 역사상 최초로 분데스리가 챔피언에 오른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였다. 프랑크푸르트는 BSC 영 보이스, 빈 SC, 레인저스 FC를 차례로 꺾으며 결승에 올랐고 특히 4강에서는 레인저스를 상대로 무려 2경기 12골을 때려넣으며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후반전이 시작되자 레알의 페렌츠 푸스카스가 해트트릭을 넘어 4골을 터트려 점수차를 크게 벌렸다. 프랑크푸르트의 우베 슈타인이 1골을 만회하였지만, 디 스테파노가 1골을 추가해 디 스테파노와 푸스카스 두 선수가 결승전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진귀한 기록을 남겼고, 스타인이 1골을 더 만회해 7-3으로 경기를 끝마치면서 레알 마드리드는 유러피언 컵 5연패를 달성하였다. 참고로 프랑크푸르트의 마지막 만회골 때 레알 마드리드의 수비수인 마르키토스[2] 가 어처구니 없는 백 패스 실수를 하였는데, 이에 동료가 불같이 화를 냈다. 7-2로 앞선 상황에서도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팀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이 경기가 UEFA 챔피언스 리그로 대회가 개편된 현재까지 결승전에서 나온 가장 점수 차가 큰 경기 중 하나이다.[3]
이 경기 이후 유명한 일화가 있다. 레알 마드리드의 강인한 전력, 특히 새로 가세한 페렌츠 푸스카스의 실력에 겁이 난 독일 축구 연맹이 푸스카스가 1954년에 약물 복용을 한 적이 있다며 영구 출전 금지를 시켜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이 일었다. 당연히 사실 무근임이 밝혀졌고, 푸스카스는 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분노의 해트 트릭을 터뜨렸다고 한다.
1. 소개[편집]
레알 마드리드 CF의 다섯 번째 유러피언 컵 우승인 1959-60 시즌, 일명 '라 퀸타'의 우승 과정을 서술하는 문서이다.
2. 배경[편집]
지난 1958-59 시즌에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페렌츠 푸스카스라는 파괴적인 듀오를 가졌음에도 리그에서는 준우승에 그쳤고, 루이스 카르니글리아 감독은 푸스카스를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 제외한 것으로 인해 경질되었다. 그리고 CR 플라멩구에서 마누엘 플레이타스 감독을 영입했다.
한편, 3시즌간 활약하며 발롱도르를 수상하기도 했던 레몽 코파가 친정팀인 스타드 드 랭스로 복귀했다. 코파가 떠나자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은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에서 맹활약한 떠오르던 신성 펠레를 영입하기 위해 산투스 FC에 제의했으나 거절당했다. 대신에 보타포구 FR에서 지지를 영입해 팀의 네임밸류를 한단계 더 높였다.[1] 그 외에도 카나리오, 루이스 델 솔 등을 영입했다.
3. 1라운드[편집]
3.1. 1차전[편집]
3.2. 2차전[편집]
4. 8강[편집]
8강에서는 OGC 니스를 만났다. 니스는 1956-57 시즌에도 8강에서 만났고, 이번 시즌에는 1라운드에서 페네르바흐체 SK를 플레이오프 끝에 꺾고 올라왔다.
4.1. 1차전[편집]
4.2. 2차전[편집]
5. 4강[편집]
4강에서 만난 상대는 1958-59 시즌 라리가 챔피언이자 레알 마드리드의 최대 숙적 FC 바르셀로나로 유러피언 컵 최초로 엘 클라시코가 벌어졌다. 바르셀로나는 예선에서 불가리아 챔피언 PFC CSKA 소피아를 종합 6-2로 꺾고, 1차전에서 강팀 AC 밀란을 1차전 2-0, 2차전 5-1로 대파하여 종합 7-1로 8강에 진출하였으며, 8강에서 울버햄튼 원더러스를 상대로 1차전 4-0, 2차전 5-2 완승을 거두어 종합 9-2로 4강까지 올라와 숙적 레알과 맞붙게 된 것이다.
5.1. 1차전[편집]
5.2. 2차전[편집]
- 경기 결과
한편, 바르셀로나의 엘레니오 에레라 감독은 라슬로 쿠발라와의 불화로 2차전에서 그를 제외했고 레알에게 패배하자 결국 이것이 빌미가 되어 더블을 달성했음에도 즉각 경질당했다.
6. 결승[편집]
결승에서 만난 상대는 클럽 역사상 최초로 분데스리가 챔피언에 오른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였다. 프랑크푸르트는 BSC 영 보이스, 빈 SC, 레인저스 FC를 차례로 꺾으며 결승에 올랐고 특히 4강에서는 레인저스를 상대로 무려 2경기 12골을 때려넣으며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6.1. 단판전[편집]
- 경기 결과
후반전이 시작되자 레알의 페렌츠 푸스카스가 해트트릭을 넘어 4골을 터트려 점수차를 크게 벌렸다. 프랑크푸르트의 우베 슈타인이 1골을 만회하였지만, 디 스테파노가 1골을 추가해 디 스테파노와 푸스카스 두 선수가 결승전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진귀한 기록을 남겼고, 스타인이 1골을 더 만회해 7-3으로 경기를 끝마치면서 레알 마드리드는 유러피언 컵 5연패를 달성하였다. 참고로 프랑크푸르트의 마지막 만회골 때 레알 마드리드의 수비수인 마르키토스[2] 가 어처구니 없는 백 패스 실수를 하였는데, 이에 동료가 불같이 화를 냈다. 7-2로 앞선 상황에서도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팀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이 경기가 UEFA 챔피언스 리그로 대회가 개편된 현재까지 결승전에서 나온 가장 점수 차가 큰 경기 중 하나이다.[3]
이 경기 이후 유명한 일화가 있다. 레알 마드리드의 강인한 전력, 특히 새로 가세한 페렌츠 푸스카스의 실력에 겁이 난 독일 축구 연맹이 푸스카스가 1954년에 약물 복용을 한 적이 있다며 영구 출전 금지를 시켜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이 일었다. 당연히 사실 무근임이 밝혀졌고, 푸스카스는 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분노의 해트 트릭을 터뜨렸다고 한다.
6.2. 결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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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지지는 팀의 중심인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페렌츠 푸스카스와 공존해야 했는데 이들과 사이가 나빴다. 유러피언컵에서도 부진했고, 리그에선 19경기 6골에 그쳤다. 결국 유러피언 컵 정상에 2번 오른 것에 만족하고 보타포구로 복귀했다.[2] 현재 첼시 FC에서 뛰고 있는 마르코스 알론소의 친할아버지로, 본명은 마르코스 알론소 이마스이다.[3] 이후 1974년에 바이에른 뮌헨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상대로 재경기 포함 5-1로 승리하고, AC 밀란이 1989년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 1994년에는 FC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4-0으로 승리하여 타이 기록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