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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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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 개요[편집]
고려 초중기의 3경[1] 중 하나로 현재의 경상북도 경주시이다. 비록 신라는 멸망했지만 그 과정에서 왕건은 신라의 구 세력을 그대로 포용했고, 옛 신라의 수도 금성은 동경으로 개칭되어 고려 초중기 동안에는 계속 중요한 도시로 남아있었다. 사실 수도 개경에도 황룡사 9층 목탑보다 높은 건물은 없었을 정도니[2] 고려시대에도 신라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개경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로 크고 화려한 도시를 유지했다.
경주가 개성의 동남쪽이라지만 동쪽보단 남쪽에 더 가까운데도 동경이라 이름지은 이유에 대해 주보돈 교수는 위 신라 단락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미 신라 때부터 경주를 동경이라는 별칭으로 불렀기 때문에 고려에서도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3]
그러다 이후 신라부흥운동의 성격이 있었던 동경민란의 진압 이후 경주로 격하되어[4] 3경에서도 빠지고 남경(서울특별시)이 추가되었고, 몽골 제국군의 침략으로 황룡사 목탑이 불타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곧 동경으로 복권되어 원간섭기 이후의 외왕내제 체제가 붕괴되기 전까지 여전히 고려의 주요 대표도시로 기능했다. 흔히들 고려 후기에 3경에서 동경이 빠지고 남경이 그 자리에 들어갔다는 식으로 아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는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고려 후기 충렬왕 34년(1308년) 때 남경과 동시에 각각 계림부와 한양부로 격하되었다. 즉 고려의 3경제도가 끝날 때까지 경주는 동경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최상급 행정기관인 5개 부(府) 중 하나였을 정도로 위상은 상당했고, 경상도의 여러 대도시와 더불어[5] 경상도 내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였다. 거기다가 당시에는 경상도 자체가 인구가 많다 보니 전국으로 치더라도 손꼽히는 대도시였다.[6] 일제강점기 초반에도 전국 도시들 중에서 최상위권에 위치할 정도로 위상은 여전하였으나 산업화의 진전과 더불어 부산, 대구가 경주를 역전하여 전국 대도시의 위상을 뺏겼다. 나아가 현대에는 오히려 옛날에 경주 주변의 외항으로 경주에 장 보고 문화생활하러 오던 옆동네 포항, 울산한테도 밀리는 지방 소도시로 전락하게 되었다(...).
개의 품종 중 하나인 동경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조선 헌종 때인 1845년에 나온 경주지역 지리지 이름도 동경잡기(東京雜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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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경(개성), 서경(평양), 동경(경주).[2] 개경에도 흥왕사처럼, 황룡사보다 옆으로 더 넓은 사찰은 있었다. 흥왕사는 조선의 경복궁과 맞먹는 면적을 자랑했다.[3] 그리고 평양이 개경의 서쪽보다는 북쪽에 가까운데도 고려시대에 북경이 아닌 서경이라 이름지은 이유도 엄연히 고구려와 신라를 모두 통합했다는 입장인 고려 정부가 신라의 옛 수도인 동경과 대등하게 대비하기 위해서 고구려의 옛 수도 평양을 서경으로 붙였다고 주보돈 교수는 추정하였다.[4] 고려, 조선시대에는 이런 식으로 반란이 일어나면 행정구역의 격을 낮추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5] 대표적으로 상주시, 진주시, 안동시, 성주군.[6] 18세기의 인구 통계에 따르면 5번째로 인구가 많은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