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사적/1~1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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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재청에 등재된 정식 명칭을 기준으로 한다.[2] 일제지정문화재 재평가로 인해, 다른 왜성들과 같이 지정해제되었다. 이후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7호로 1997년 10월 30일 재지정되었다.[3] 신라 고분군/반월성과 연관성이 없고, 고려사나 동경잡기에 관련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읍성의 수해를 막기 위한 제방이라는 설과 읍성의 외성이라는 설이 있다. 문화재청 링크[4] 무열왕릉에서 출토된 경주 태종무열왕릉비는 국보 제 25호로 지정되어 있다.[5] 보존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지정해제되었다.[6] 보존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지정해제되었다.[7] 타 신라 고분군들과 묶여 사적 제512호로 재지정되었다.[8] 타 신라 고분군들과 묶여 사적 제512호로 재지정되었다.[9] 타 신라 고분군들과 묶여 사적 제512호로 재지정되었다.[10] 타 신라 고분군들과 묶여 사적 제512호로 재지정되었다.[11] 타 신라 고분군들과 묶여 사적 제512호로 재지정되었다.[12] 일제지정문화재 재평가로 인해, 다른 왜성들과 같이 지정해제되었다. 이후 지방지정문화재로 지정권고, 1999년 2월 26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71호로 지정되었다.[13] 일제지정문화재 재평가로 인해, 다른 왜성들과 같이 지정해제되었다. 이후 지방지정문화재로 지정권고, 1998년 11월 13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74호로 지정되었다.[14] 일제지정문화재 재평가로 인해, 다른 왜성들과 같이 지정해제되었다. 이후 지방지정문화재로 지정권고, 1999년 3월 9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7호로 지정되었다.[15] 일제지정문화재 재평가로 인해, 다른 왜성들과 같이 지정해제되었다. 이후 지방지정문화재로 지정권고, 1999년 3월 9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8호로 지정되었다.[16] 일제지정문화재 재평가로 인해, 다른 왜성들과 같이 지정해제되었다. 이후 지방지정문화재로 지정권고, 1998년 9월 9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79호로 지정되었다.[17] 일제지정문화재 재평가로 인해, 다른 왜성들과 같이 지정해제되었다. 이후 지방지정문화재로 지정권고, 1997년 10월 30일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18] 일제지정문화재 재평가로 인해, 다른 왜성들과 같이 지정해제되었다. 이후 지방지정문화재로 지정권고, 1998년 11월 13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76호로 지정되었다.[19] 성산기산동도요지와 묶여 사적 제510호로 재지정되었다.[20] 성산사부동도요지와 묶여 사적 제510호로 재지정되었다.[21] 타 고분군들과 묶여 사적 제513호로 재지정되었다.[22] 타 고분군들과 묶여 사적 제513호로 재지정되었다.[23] 타 고분군들과 묶여 사적 제513호로 재지정되었다.[24] 타 고분군들과 묶여 사적 제513호로 재지정되었다.[25] 타 고분군과 묶여 사적 제514호로 재지정되었다.[26] 타 고분군과 묶여 사적 제514호로 재지정되었다.[27] 타 고분군과 묶여 사적 제515호로 재지정되었다.[28] 타 고분군과 묶여 사적 제515호로 재지정되었다.[29] 성산성 인근지역이 군특수기지로 됨에 따라 산성이 연결도로로 사용됨으로써 중요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상실되었다 평가되어 사적에서 지정해제 되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사적 재지정이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