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네이장시
덤프버전 :
||
쓰촨성 중남부의 도시. 쯔궁에서 동북쪽으로 30km, 쯔양에서 동남쪽으로 30km, 루저우에서 서북쪽으로 70km, 러산에서 동쪽으로 100km 떨어진 퉈강의 양안에 위치한다, 인구는 314만명으로, 그중 도시 자체에는 약 백만명이 거주한다. 시가지는 순환도로로 둘러져 있다. 사천 4대강 중 하나인 퉈강의 서안이 스중구, 동안이 둥싱구이다. 관내에는 네이장 사범대학교 등 여러 교육 기관이 있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중국인 화가이자 '동양의 피카소'라 불리는 산수화의 대가 장다첸(張大千)의 고향이다.
상고대에는 촉국에 속하였고, 진나라 대에는 촉군(蜀郡)에 편성되었다. 전한 대인 기원전 135년에는 건위군(犍爲郡)에 편성되었고, 그중에서도 현 쯔양시에 기반한 자중현(資中縣)에 속하였다. 후한 순제 대인 서기 130년 경에는 현 시가지 서쪽에 한나라의 오랜 지속을 기원하는 한안현(漢安縣)이 설치되었다.[1] 한세기 후 촉한 시기에 강양군(江陽郡)에 속했던 한안현은 4세기 초엽 진회제 영가[2] 연간에 폐지되었다. 이후 567년 북주 무제 한안현은 재차 설치되었고, 같은해 퉈강의 당시 이름인 중수(中水)에서 착안한 중강현(中江縣)으로 개칭되어 신설된 자중군(资中郡)에 소속되었다. 수문제 대인 581년에는 중수가 내강(内江)으로 개칭되며 중강현 역시 현 지명의 기원인 내강현(内江縣)으로 명명되었다.
수양제 대에는 내강현의 동부가 분리되어 현 스즈진(石子镇)을 치소로 한 우비현(牛錍縣)이 설치되었는데, 당나라 건국 후 청계현(清溪縣)으로 개칭되었다. 당대부터 북송 초에 이르기까지 내강, 청계 양현은 자주(资州)에 속하였다. 그러다 11세기 무렵 청계현이 폐지되어 내강현에 귀속되었고, 남송 대에 내강현의 치소가 현 도심으로 이전되었다. 다만 몽골-남송 전쟁으로 일대의 인구는 급감하였고, 결국 내강현 역시 폐지되었으나 명나라의 홍무제 연간에 복구되어 성도부(成都府)에 속하였다. 청나라 옹정제의 치세인 1727년에는 자주직례주(资州直隶州)에 편성되었다. 신해혁명 후에는 그저 네이장현으로 남았다가 1913년 촨난도(川南道)에 귀속되었고, 촨난도는 이듬해 용닝도(永宁道)로 개칭되었다.
1928년 도 체제의 폐지 후 1935년 네이장현은 쓰촨성 제2행정독찰구(四川省第二行政督察区)에 편성되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는 촨난행서구(川南行署区) 쯔중전구(资中专区)에 속하였고, 이듬해 전원공서(전구의 치소)가 네이장으로 이전되며 네이장전구(内江专区)로 개칭되었다. 1951년에는 퉈강 서안이 현급시가 분리되었고, 이듬해 네이장 전구는 쓰촨성 직할이 되었다. 1968년 네이장전구는 네이장지구(内江地区)로 바뀌었고, 1985년 기존 현급시와 지구를 합하여 지급시로 승격되었다. 퉈강 동안에 남아있던 네이장 현은 1989년 둥싱구로 전환되었다. 1995년에는 서북부의 쯔양현이 현급시로 승격되었고, 이듬해에는 젠양현이 현급시가 되었다. 1998년에는 쯔양, 젠양시와 러즈, 안웨현이 쯔양 지구로 분리되었다.
전통적으로 소금 생산, 즉 염업의 거점 중 하나였다가 근현대에 들어서는 사탕수수 경작 맻 제당업이 주요 산업이 되어 '사천의 감성(甜城)'이라 불렸다. 90년대 들어서는 중국의 전반적인 경제 성장과 함께 기계 / 전자 / 화학 공업, 건축 자재 생산, 제조업 등 다양한 산업이 발달하여 경제적 다각화가 이루어졌다. 최근에는 식품 가공업 거점으로 부상하였다.
교통 허브로 '쓰촨 남부의 목구멍'이란 뜻인 천남인후(川南咽喉), 청두와 충칭의 중간 지점이라 하여 성유중심(成渝中心)이라고 불린다.
다음 주요 철도역이 있다.
2019년 9월 웨이위안에서 규묘 5.4의 지진이 발생해 사망 1명, 부상 53명에 주택 86채가 붕괴했다.
네이장 시내에 있던 패루
쯔중의 무묘(관제묘)
1. 개요[편집]
쓰촨성 중남부의 도시. 쯔궁에서 동북쪽으로 30km, 쯔양에서 동남쪽으로 30km, 루저우에서 서북쪽으로 70km, 러산에서 동쪽으로 100km 떨어진 퉈강의 양안에 위치한다, 인구는 314만명으로, 그중 도시 자체에는 약 백만명이 거주한다. 시가지는 순환도로로 둘러져 있다. 사천 4대강 중 하나인 퉈강의 서안이 스중구, 동안이 둥싱구이다. 관내에는 네이장 사범대학교 등 여러 교육 기관이 있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중국인 화가이자 '동양의 피카소'라 불리는 산수화의 대가 장다첸(張大千)의 고향이다.
2. 역사[편집]
상고대에는 촉국에 속하였고, 진나라 대에는 촉군(蜀郡)에 편성되었다. 전한 대인 기원전 135년에는 건위군(犍爲郡)에 편성되었고, 그중에서도 현 쯔양시에 기반한 자중현(資中縣)에 속하였다. 후한 순제 대인 서기 130년 경에는 현 시가지 서쪽에 한나라의 오랜 지속을 기원하는 한안현(漢安縣)이 설치되었다.[1] 한세기 후 촉한 시기에 강양군(江陽郡)에 속했던 한안현은 4세기 초엽 진회제 영가[2] 연간에 폐지되었다. 이후 567년 북주 무제 한안현은 재차 설치되었고, 같은해 퉈강의 당시 이름인 중수(中水)에서 착안한 중강현(中江縣)으로 개칭되어 신설된 자중군(资中郡)에 소속되었다. 수문제 대인 581년에는 중수가 내강(内江)으로 개칭되며 중강현 역시 현 지명의 기원인 내강현(内江縣)으로 명명되었다.
수양제 대에는 내강현의 동부가 분리되어 현 스즈진(石子镇)을 치소로 한 우비현(牛錍縣)이 설치되었는데, 당나라 건국 후 청계현(清溪縣)으로 개칭되었다. 당대부터 북송 초에 이르기까지 내강, 청계 양현은 자주(资州)에 속하였다. 그러다 11세기 무렵 청계현이 폐지되어 내강현에 귀속되었고, 남송 대에 내강현의 치소가 현 도심으로 이전되었다. 다만 몽골-남송 전쟁으로 일대의 인구는 급감하였고, 결국 내강현 역시 폐지되었으나 명나라의 홍무제 연간에 복구되어 성도부(成都府)에 속하였다. 청나라 옹정제의 치세인 1727년에는 자주직례주(资州直隶州)에 편성되었다. 신해혁명 후에는 그저 네이장현으로 남았다가 1913년 촨난도(川南道)에 귀속되었고, 촨난도는 이듬해 용닝도(永宁道)로 개칭되었다.
1928년 도 체제의 폐지 후 1935년 네이장현은 쓰촨성 제2행정독찰구(四川省第二行政督察区)에 편성되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는 촨난행서구(川南行署区) 쯔중전구(资中专区)에 속하였고, 이듬해 전원공서(전구의 치소)가 네이장으로 이전되며 네이장전구(内江专区)로 개칭되었다. 1951년에는 퉈강 서안이 현급시가 분리되었고, 이듬해 네이장 전구는 쓰촨성 직할이 되었다. 1968년 네이장전구는 네이장지구(内江地区)로 바뀌었고, 1985년 기존 현급시와 지구를 합하여 지급시로 승격되었다. 퉈강 동안에 남아있던 네이장 현은 1989년 둥싱구로 전환되었다. 1995년에는 서북부의 쯔양현이 현급시로 승격되었고, 이듬해에는 젠양현이 현급시가 되었다. 1998년에는 쯔양, 젠양시와 러즈, 안웨현이 쯔양 지구로 분리되었다.
3. 경제[편집]
전통적으로 소금 생산, 즉 염업의 거점 중 하나였다가 근현대에 들어서는 사탕수수 경작 맻 제당업이 주요 산업이 되어 '사천의 감성(甜城)'이라 불렸다. 90년대 들어서는 중국의 전반적인 경제 성장과 함께 기계 / 전자 / 화학 공업, 건축 자재 생산, 제조업 등 다양한 산업이 발달하여 경제적 다각화가 이루어졌다. 최근에는 식품 가공업 거점으로 부상하였다.
4. 교통[편집]
교통 허브로 '쓰촨 남부의 목구멍'이란 뜻인 천남인후(川南咽喉), 청두와 충칭의 중간 지점이라 하여 성유중심(成渝中心)이라고 불린다.
다음 주요 철도역이 있다.
- 네이장역(内江站): 청유철도(成渝铁路), 네이쿤철도(内昆铁路)
- 네이장둥역(内江东站): 네이쿤철도(内昆铁路)
- 네이장난역(内江南站): 몐루고속철도(绵泸高速铁路)
- 네이장베이역(内江北站): 청유고속철도(成渝客运专线)
5. 사건사고[편집]
2019년 9월 웨이위안에서 규묘 5.4의 지진이 발생해 사망 1명, 부상 53명에 주택 86채가 붕괴했다.
6. 갤러리[편집]
네이장 시내에 있던 패루
쯔중의 무묘(관제묘)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9 12:51:54에 나무위키 네이장시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