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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제이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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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제107대 천황.
에도 막부의 첫 번째 천황이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천황이기도 했다. 원래 이름은 가즈히토(和仁)였지만, 후에 가타히토(周仁)로 고쳤다. 오기마치 덴노의 황태자 사네히토 친왕(誠仁親王)의 아들로, 고요제이 덴노는 즉위한 후 아버지를 요코 덴노로 추존했다.
2. 생애[편집]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분로쿠(文禄) 2년(1593), 조선에서 약탈해 온 금속활자와 활자인쇄본 서적을 고요제이 천황에게 바쳤다. 천황은 그해 구게(공경)인 로쿠조 아리히로(六条有広, 1564 ~ 1616), 니시도인 도키요시(西洞院時慶, 1552 ~ 1640) 등에게 명령해 그 기술을 사용, 《고문효교》(古文孝教)[1] 를 인쇄하도록 했다{분로쿠칙판(文禄勅版)}. 이는 일본에서 금속활자를 사용한 최초의 인쇄 작업이었다. 또한 게이초(慶長) 2년(1597)에 조선 활자를 모방한 대형 목활자(木活字)를 제작해 《금수단》(錦繍段)을 개판하게 했다{게이초칙판(慶長勅版)}. 역으로 말하자면 한국사에서는 고려시대 때 개발된 금속활자가 이때까지도 일본 열도에는 없었다는 소리가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천하의 운명을 건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자 단고(丹後)의 타노베 성(田辺城)[2] 에서 서군(西軍)과 교전 중이던 호소카와 유사이를 아껴서 양군에게 칙령으로 성을 열 것을 명령했다. 게이초 8년(1603)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세이이다이쇼군(정이대장군)으로 임명했고, 이로써 역사상 세 번째 막부이자 가장 안정적이었던 에도 막부가 개창되었다. 조정의 권위를 억압하려는 도쿠가와 막부는 교토 조정에 대한 간섭을 강화해, 조정이 갖고 있었던 관위서임권이나 연호 개원(改元)까지도 막부가 가져왔다. 게이초 14년(1609)에 궁중에서 여관(女官)의 밀통사건{이노쿠마 사건(猪熊事件, 체웅사건)#}이 일어나자 에도 막부는 교토 쇼시다이(京都所司代, 경도소사대)에 명령해 엄벌을 요청했다.
고요제이 덴노는 히데요시의 강권으로 제1황자였던 요시히토 친왕(良仁親王)을 차기 계승자로 삼았지만, 히데요시가 죽자 이를 꺼려 동생인 도모히토 친왕(智仁親王, 1579 ~ 1629)에게 양위하기를 바랬고, 조정 신료들이나 쇼군 이에야스는 이를 반대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뒤, 고요제이 천황은 이에야스의 동의를 얻어 요시히토 친왕을 강제로 닌나지(仁和寺)[3] 에 출가시키고, 제3황자인 마사히토 친왕을 황태자로 세웠다. 게이초 16년(1611)에 마사히토 친왕(훗날의 고미즈노오 덴노)에 양위하고, 센도고쇼(仙洞御所, 선동어소)로 물러났다. 그러나 고미즈노오 덴노는 상황의 처소에 좀처럼 찾아가지 않는 등 덴노와 상황 두 부자는 오랫동안 불화 상태였다고 한다.
겐나(元和) 3년(1617)에 47세로 붕어했다. 시신은 화장되었는데, 이후로 현대의 쇼와 덴노에 이르기까지 역대 덴노들은 모두 매장되었으므로, 화장으로써 장례를 치른 마지막 덴노로 기록된다.
3. 기타[편집]
유학과 국학에 매우 능해서 《겐지모노가타리》, 《이세모노가타리》, 《구간쇼》를 지었다고 하며 《일본서기》를 게이초칙판으로 발행하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츠구가 참혹하게 죽은 후에, 히데츠구의 어머니를 위로하고자 '즈이류인'(瑞龍院, 서룡원)이란 원호를 내렸으므로 히데츠구와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던 듯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당시의 덴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본에선 임진왜란/정유재란을 덴노의 연호를 따서 각각 분로쿠의 역(문록의 역, 文禄の役), 게이초의 역(경장의 역, 慶長の役)이라고 부른다. 정작 덴노 본인은 히데요시에게 조선으로 건너가지 말 것을 당부하는 서신을 보냈는데, 씹혔다(...).[4] 이 어명을 담은 친필 문서 원본이 교토국립박물관에 남아 있다.#
《사명대사전》에서는 풍신수길을 앞세워 조선을 침공했다며 사명대사에게 농락당하는 신세로 나온다. 조선의 민간인들은 일본도 조선처럼 군주가 실권을 쥔 나라인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에 그려진 잘못된 묘사였다.[5] 오히려 고요제이 덴노는 임진왜란을 반대하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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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효경》의 훈점본[2] 교토부 마이즈루시에 있는 윤곽식 평성으로 훗날 에도 시대때 타나베 번의 번청으로 사용했지만 여러가지의 이유로 공원이 되었다.[3] 교토시 우쿄구 오무로오우치에 있는 진언종어실파의 총본산 사원[4] 그러나 이런 전적에도 불구하고 제국 시기의 일본은 히데요시가 고요제이 덴노를 수호했다며 빨아주었다.[5] 다만 조선 조정에서는 천황이 허수아비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왕과 신하들의 회의를 보면 일본 천황은 수백년째 허수아비이고, 실권은 쇼군이나 칸파쿠(관백) 등의 신하가 쥐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잘 모르는 민간인이 쓴 소설에서나 오해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민간인 출신으로서 권력을 잡은 히데요시 역시도 비슷한 오류를 저지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