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조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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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제71대 천황. 고스자쿠 덴노의 차남이었다.
2. 생애[편집]
1045년, 이복형 고레이제이 덴노의 황태제로 책봉되었으며, 후지와라노 요시노부(藤原能信)의 양녀인 모시/시게코(茂子)와 혼인했다.
1068년, 형 고레이제이 덴노가 붕어하자 즉위했다. 171년 만에 후지와라씨의 외손이 아니면서도 등극했으며, 당시 후지와라노 아소미는 관백인 후지와라노 요리미치(賴通)와 후지와라노 노리미치(敎通) 형제간의 내분이 한창이었기 때문에[2] 고산조 덴노는 천황의 권력을 강화하는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즉위 이후 반(反)섭관가의 선봉으로 동궁 시대부터 천황을 비호하고 있었던 후지와라노 요시나가(藤原能長)와[3] '무라카미 겐지'의 미나모토노 모로후사(源師房) 등을 등용해 후지와라노 아소미의 정권 독점 타파를 도모했으며, 후지와라노 사네마사(藤原實政)[4] 등의 하급 관리 등을 등용해 적극적으로 친정을 실시했다.
1069년, 엔큐의 <장원 정리령>을 발포하고, 기록장원권계소를 설치했으며, 1070년에는 견포 제도, 1072년에는 엔큐 선지승이나 <고가법>의 제정 등 율령제도의 형해화에 의해 약체화된 천황가의 경제 기반의 강화를 도모했다. 특히 '엔큐의 <장원 정리령>'은 지금까지의 정리령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치밀함과 공정함을 보였고, 그 때문에 기준 외의 섭정령이 몰수되는 등 후지와라 섭관가의 경제 기반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 당시 기록장원권계소는 장원을 보유한 사람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이 일이 국가와 장원 영주, 농민에게 안정을 가져와 엔큐의 선정이라 부른다. 반면 후지와라 섭관가는 내분때문에 고산조 천황을 상대로 적극적인 대항을 할 수 없었다. 또 이때 벌어진 엔큐 에조 전투에서 쓰가루 반도와 시모키타 반도까지 혼슈 전 국토가 조정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등 지방에서도 착실하게 영향력을 뻗어나가게 되었다.
1072년, 즉위 4년째에 황태자인 장남 사다히토 친왕에게 황위를 넘겨주고, 인세이(원정)를 실시하려고 했지만 병으로 쓰러져서 1073년에 붕어했다. 이때의 양위는 상황이 국정을 다스리는 인세이(원정)의 선례를 남겼다.
3. 가계[편집]
- 황후(皇后) : 케이시 내친왕
- 황후(皇后) : 증황태후(贈皇太后) 동궁비(東宮妃) 후지와라노 시게코(藤原茂子, 모시) (?~1062) - 후지와라노 킨나리(藤原公成)의 딸이자 후지와라노 요시노부(藤原能信)의 양녀
- 호리카와노 뇨고(堀河 女御) 후지와라노 아키코(藤原昭子) (1016~?) - 후지와라노 요리무네(藤原賴宗)의 딸
- 효부노 뇨고(兵部 女御) 미나모토노 모토코(源基子) (1049~1134) - 미나모토노 모토히라(源基平)의 딸
- 제2황자 : 사네히토 친왕(實仁 親王) (1071~1085)
- 제5황자 : 스케히토 친왕(輔仁 親王) (1073~1119)
- 전시(典侍) : 후지와라노 유키코(藤原行子) (1049~1134) - 후지와라노 사네츠네(藤原實経)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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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 연호에서 유래하여, 엔큐노미카도(延久帝)라고도 한다.[2] 둘 다 고산조 덴노의 형인 고레이제이 덴노의 장인이었고, 관백이다 보니까 서로 세도(勢道)를 다투게 되었다.[3] 외척으로 섭관정치의 절정을 누렸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손자였고, 후지와라노 요리무네(藤原賴宗, 차남)의 아들이었으나 숙부였던 후지와라노 요시노부(藤原能信, 4남)의 양자가 되었다. 또한 상술한 두 관백 요리미치(장남)와 노리미치(5남)의 조카였다. 엄연한 섭관가의 일원이 반섭관가의 선봉이라는 것이 앞뒤가 안 맞고, 세도정치에서 신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가 이랬다는 얘기도 없어서 낯설지만 친형제끼리도 서로 권세를 다투는데 조카라고 봐 줄 리가 없었다. 덴지 덴노도 을사의 변에서 소가노 이루카를 처단하기 위해 종제인 소가노 쿠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를 포섭했다.[4] 후지와라노 아소미 14세손으로 후지와라노 마나츠(藤原眞夏)의 운손자(雲孫子)였고, 요리미치·노리미치 형제의 7종질(七從姪: 17촌 조카)이었다. 후지와라노 아소미가 후지와라노 아소미의 정권 독점 타파에 나서는 것도 앞뒤가 안 맞지만 형제끼리도 싸우고 조카가 반기를 드는데 17촌이나 되면 겨레붙이라 할지라도 국물도 없을 게 뻔하다. 흥선대원군이 신 안동 김씨의 정권 독점을 타파하면서도 김병학과 김병국을 등용했던 일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