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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회/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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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편집]
1.1. 미 감리회 선교 시대(1884~1930)[편집]
한국 감리교회는 1884년 북감리회의 매클레이(R. S. Maclay) 선교사[1] 가 내한하여 의료선교와 교육사업에 대해 고종의 윤허를 받은 것을 시초로 본다.[2]
당시 조선은 중국과 일본에 비해 서양 국가들의 관심이 덜했고, 이는 기독교 선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미국 감리교회에서 조선 선교를 결정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1882년 조선과 미국은 수호조약을 맺었고, 이듬해 1883년 5월 초대 미국 공사로 푸트(L. H. Foote)가 내한하기에 이른다. 조선 정부는 이에 민영익을 수반으로 한 '보빙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하여 고종의 친서를 미국의 아서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보빙사는 1883년 7월 한성을 출발, 9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고 거기서 열차를 타고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으로 향했다. 이때 열차 안에서 볼티모어 러블리레인교회 담임 가우처(J. K. Goucher) 목사가 보빙사 일원을 만났다. 낯선 동양인을 보고 관심이 생긴 가우처는 민영익과 대화를 나눈 후 그해 11월 미감리회 해외선교부에 2천 달러를 보내면서 조선 선교를 촉구했고 해외선교부는 여기에 3천 달러를 보태 5천 달러를 한국 선교 개척비로 책정한 후 조선에 가까운 일본에 있던 매클레이를 조선에 파견하여 선교 가능성을 탐색토록 한 것이다. 마침 매클레이는 이전 중국 선교사로 있었을 때부터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갖고 실제로 교단 본부에 선교를 촉구했던 적이 있었다. 매클레이는 1884년 6월 24일 제물포에 도착하여 같은 날 오후 6시 서울에 들어왔다. 그리고 친분이 있던 김옥균의 도움[3] 으로 의료선교 및 교육사업에 대한 고종의 윤허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렇게 매클레이의 활약으로 선교의 길이 열렸고, 이에 힘 입어 미감리회와 미국 북장로회가 적극적으로 선교사 파송에 나섰다. 북장로회는 의사 호러스 뉴턴 알렌(H. N. Allen)을 먼저 보냈다. 그러던 중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터졌고,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알렌이 치료하여 살림으로써 조선 선교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미감리회는 의사 윌리엄 스크랜튼(W. B. Scranton)과 아펜젤러(H. G. Appenzeller)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고, 이듬해에는 스크랜튼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일명 스크랜튼 대부인)을 추가시켰다. 3명의 선교사는 먼저 일본에 도착하여 1달 정도 머물면서 조선에 대해 공부했다. 그리고 갑신정변의 여파로 정세가 불안한 것을 감안하여 매클레이는 선발대로 아펜젤러 부부를 보내기로 하였고, 아펜젤러는 북장로회가 파송한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함께 1885년 4월 5일 오후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이날은 마침 부활절이었다.
하지만 아펜젤러는 한성에 바로 들어가지 못했다. 이는 미국공사관 측에서 정세 불안을 이유로 여성인 아펜젤러 부인이 한성에 들어가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아펜젤러는 4월 10일 다시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갈 수밖에 없었고, 한성은 당시 미혼이었던 언더우드가 먼저 가게 되었다. 매클레이는 스크랜튼을 먼저 조선으로 보내기로 하였고, 스크랜튼은 5월 3일 인천에 도착한 후 알렌과 함께 제중원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스크랜튼은 감리회가 독자적으로 선교할 수 있도록 선교 부지를 확보하였고, 이에 아펜젤러 부부는 스크랜튼 대부인과 함께 다시 조선으로 향하여 6월 20일 인천에 도착하였다.
이후 같은 해 스크랜튼은 시병원을, 헨리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1886년 메리 스크랜튼이 이화학당을 세워 의료선교와 교육선교를 시작했다. 스크랜튼이 세운 시병원은 제중원과 달리 정부의 입김이 미치지 않는 민간 병원이었으며 가난한 민중을 위한 병원이었다. 제중원과 달리 턱이 낮은 시병원에는 조선 민중들이 몰려들었고, 1887년에는 고종이 시병원(施病院)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에 반해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은 학생 수가 들쑥날쑥했는데 이는 외국인 선교사에 대한 반감 때문으로 보인다. 당장 고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병과 달리 공부는 당장 배우지 않아도 괜찮은 듯 보였기 때문. 아펜젤러는 조선인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고종에게 청원하여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교명을 하사받았다. 그러자 학생들이 몰려들어 1887년에는 건물을 신축해야 했다.
스크랜튼 대부인은 여성교육 사업을 전개하였는데, 상황은 배재학당 초창기보다 더욱 어려웠다. 2명으로 시작한 여학교는 1887년에 7명이 되었고, 같은 해 고종으로부터 '이화학당(梨花學堂)'이란 이름을 하사받았고, 이에 힘입어 여성교육 사업도 활기를 띨 수 있었다. 1887년 10월에는 여성 선교사인 로드와일러(L. C. Rothweiler)와 하워드(M. Howard)가 파송되어 로드와일러는 이화학당에, 하워드는 시병원에서 근무하였다. 하워드는 1887년 여성병원인 '보구녀관(普救女館)'[4] 을 세웠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여성전용병원이었으며, 보구녀관이란 이름도 조정에서 하사한 이름이었다.
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 사업으로 시작한 간접 선교 방식에서 점점 직접 선교로 방식을 변화시켜 나갔다. 1887년 배재학당 학생 중에서 최초로 세례자와 구도자가 나왔고, 이에 힘입어 아펜젤러는 한옥 한 채를 구입하여 '베델'이라 이름 짓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1889년에는 정식으로 구역회(Circuit)을 열고 교회를 설립하였으니 이는 정동제일교회의 시초이다. 이로써 미감리회의 정식 직접 선교가 시작되었다.
남감리회는 윤치호의 청원으로 1895년 리드(C. F. Reid) 선교사가 내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윤치호는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했을 때 남감리회와 접촉하여 교인이 되어 있었다. 복권 후 윤치호는 1895년 2차 김홍집 내각에 참여하였고, 이와 같은 상황에서 남감리회의 선교를 요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15년 넘는 베테랑 선교사였던 리드는 중국과 조선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윤치호는 직접적으로 리드 선교사를 지목하여 조선에 오게 했다. 리드는 감독 헨드릭스(E. R. Hendrix)와 함께 조선에 방문하여 선교 가능성을 탐색했고, 남대문 부근에 선교 부지를 구입한 후 리드를 정식 파송하였다. 이로써 남감리회의 조선 선교도 시작되었다. 1897년에는 콜리어(C. T. Collyer)와 과부 캠벨(J. P. Campbell)이 2차 선교사로 들어옴으로써 북감리회처럼 남녀 선교 사업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캠벨은 배화학당이라는 여학교를 세웠다. 미국에서 남북 감리교회는 노예제를 이유로 갈라졌던 만큼 다소 소원했으나 한국에서만큼은 서로 협력하였다. 이는 남감리회가 북감리회에 비해 10년 늦게 들어온 만큼 동등하게 경쟁하기엔 여러 모로 어려운 점이 많았기 때문이며, 먼저 들어온 북감리회 선교사들이 남감리회의 선교 개척 시 많은 부분 협력해 주었기 때문이다.
북감리회는 1887년 배재학당을 통해 한국 개신교 최초로 신학 교육을 하였고, 이는 1888년의 영아 소동으로 잠시 주춤했다가 1894년 다시 신학반(후일 신학회로 개칭)으로 재개되었다. 남감리회는 신학교육을 북감리회와 함께 연합하여 실시하기 시작했고, 이 결실이 1907년 협성신학교 개교로 나타났다. 여기서의 협성(協成)은 두 교단이 함께 연합했다는 의미이다. 이 협성신학교가 지금의 감리교신학대학교의 기원이다.
장로회가 1907년 평양에서 대부흥이 일어났던 것보다 먼저 감리회는 1903년 원산에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남감리회 선교사 하디(Hardie)의 회개로 시작된 부흥 운동은 삽시간에 주변으로 퍼졌고, 선교사들과 한국인 모두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며 새롭게 사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교회사적으로 1907년 한국 교회 대부흥 운동은 1903년 원산 대부흥 운동이 불을 지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에 동시기에 들어온 장로회와의 과열 경쟁을 피하기 위해, 감리회는 장로회와 선교지 분할 협정을 맺었다.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1. 서울, 평양, 부산 같은 큰 도시는 동일 선교지로 삼는다.
2. 선점되어 있는 지역은 선점한 교단에 양보한다.
이를 통해 감리회 선교지는 경기, 강원, 충청, 황해, 평남, 평북 일부지역으로, 장로회 선교지는 경기, 경북, 경남, 전북, 전남, 제주, 황해, 평남, 평북, 함남, 함북으로 분할되었다.
당시 감리회는 남북 감리회 2개의 선교부만 들어와 있었고 장로회는 미 남/북 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호주 장로회 총 4개의 선교부가 들어와 있어서 처음부터 양 교단은 교세 차이를 보였다. 그래서 장로회가 보다 넓은 지역에 선교지를 할당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현재 북한 지역에 우세했던 교단은 감리회가 아니라 장로회였다. 선교지 분할이 의미가 없어진 현재까지도 감리회가 중부지역에 강세를 보이고 장로회가 전라도, 경상도를 포함한 남부지역까지 강세를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존 웨슬리 시절부터 낙오지 지역에 중점적인 선교를 하던 관례대로, 섬이나 해안지역에 감리회의 교세가 강한 편이다. 현재 감리회는 처음 들어온 인천을 비롯, 서울, 경기도, 충청도(서해안) 쪽이 강세를 보인다. 또 강원도 지역에서도 굉장한 강세를 보인다.[5] 다만, 경상도[6] 나 전라도[7] 쪽은 장로회 교단이 압도적이라 감리회는 제법 생소하게 받아들이는 듯 하다.
1.2. 자치시대(1930~1945)[편집]
남북 감리회는 한국에서 다방면에 걸쳐 협력하였고,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부흥하여 1916년부터 본격적으로 통합 논의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3.1 운동 이후에는 독립에 대한 갈망이 높아지면서 교회도 독립 교회를 설립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23년부터 통합 절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우선 전도 사업, 교육 사업, 출판 사업 등을 공동으로 추진하고, 예문을 통일, 연회원 입회 규칙, 교회 임원 명칭을 통일하고 선교기념예배당 건축 사업에 합의하였다. 1926년에는 '조선남북감리교회 통합방침연구연합위원회'가 조직되어 합동 5원칙을 정했다. 1928년과 1930년에는 북감리회와 남감리회 총회에서 각각 합동이 승인되었고 1930년 12월 2일 '기독교조선감리회' 창립 총회가 개최됨으로써 한국 감리회는 자치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연회는 중부, 서부, 동부, 만주 네 연회를 두었고[8] , 총리사(후일 감독으로 개칭)는 북감리회보다 교세가 약했던 남감리회 출신의 양주삼 목사가 선출되었다. 1931년, 연회에서는 미국의 여자 신학생들이 안수를 받았다. 기독교조선감리회의 교리와 장정에서 교직자의 자격에 남녀의 구별은 없다고 명시했기 때문이다. 비록 한국인 여성 목사 안수는 아니었지만, 세계적으로 매우 일찍, 그것도 한국 땅에서 여성 안수가 이루어졌다는 것에도 의의가 있다. 무엇보다 선교국보다 피선교국에서 교단이 합동된 것은 굉장히 큰 의의가 있다.
새로이 출범한 기독교조선감리회는 1930년 '교리선언'을 채택하였는데 당시로서는 굉장히 진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가 천국임을 믿으며..."라고 했다. 1920년대부터 미국 기독교계에 근본주의 바람이 불어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을 생각하면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1930년대부터 시작된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은 한국 감리교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1936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은 양주삼 총리사에게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며 애국의 표현이라는 요지의 통첩을 보내 압박하였고, 양주삼은 이에 굴복하여 1937년 선교사들과 함께 신사참배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듬해인 1938년 9월 3일에는 목회자들에게 신사참배 참석을 종용하는 통보를 보냈다. 같은 해 개최된 3차 총회에서는 아예 총회 일정 가운데 남산의 조선신궁을 참배하는 일정까지 넣어 철저히 일제의 압력에 순응하는 비굴한 모습을 보였다. 3차 총회에서 총리사로 선출된 김종우 목사는 10개월 뒤 병으로 별세하였고, 후임 감독[9] 으로 정춘수가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감리회는 본격적인 친일의 길을 걸었다.
정춘수는 3.1운동 33인의 한 명으로 참석했을 만큼 초창기엔 항일 의지를 지닌 인물이었으나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검속되었다가 전향서를 제출하고 석방되면서부터 친일의 길을 걸었다. 1940년부터 정춘수는 일본 감리교회와 합동을 추진했고, 창씨개명에도 앞장섰다. 정춘수는 같은 해 10월 총리원(지금의 감리회 본부) 이사회를 열어 일본 기독교로 '혁신'하라는 '혁신안'을 발표하였다. 이는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배제시키고 일본 교회처럼 한국 교회를 개조하려는 방안이었다. 구체적으로 혁신안에는 성경에서 구약을 배제시키고 신약에서도 유대교 영향이 강한 책들을 배제시켰다.
총독부가 제안한 혁신안이
하지만 모든 감리회 교인들이 넋 놓고 시시때때로 선을 넘는 폭주기관차 정춘수의 막장 행각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철원읍교회의 강종근 목사와 회양읍교회의 권원호 전도사, 삼척 천곡교회의 최인규 권사, 신석구 목사 등이 신사 참배에 불응하였다가 옥고를 치르고 대부분 옥사 또는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강종근 목사는 1940년 9월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1년 징역형을 받고 투옥되었고, 이때 받은 고문으로 사경을 헤매다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후유증으로 1942년 사망하였다. 권원호 전도사는 일제에 순응하는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제에 반대하는 설교를 했고, 일제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가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고문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최인규 권사는 정춘수의 혁신안에 반대하다가 투옥되었으나 형무소에서도 전향과 신사참배와 궁성요배, 일장기 경례까지 거부하여 심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2년 옥사하였다. 신석구 목사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으나 북한이 적화될 때에도 끝까지 남았다가 6.25 전쟁 시에 처형되었다. 한편 한국 감리회의 역사에 먹칠을 한 정춘수는 해방 후 과거 자신이 저지른 치부가 그대로 돌아와 감리교내 입지가 불안전해지자 냉큼 개신교 신앙을 버리고 천주교에 입교하여 생존을 이어나갔다.
1.3. 현대(자립시대, 1945~현재)[편집]
해방이 되자 한국 기독교계는 대회를 열어 교회의 앞날에 대해 논의했다. 본래 남북 교회 모두를 아우르는 대회를 개최하였으나 이미 소련의 점령 하에 있던 이북 교회는 참석하지 못해 '남부대회'로 불리게 되었다. 이 대회에서 해방 직전 일제에 의해 교단이 모두 통폐합된 것을 그대로 유지하느냐, 다시 환원하느냐 분분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결국 각 교파는 환원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감리회는 이때 최초의 분열을 겪게 되는데, 먼저 정춘수의 막장 행적에 반대하다가 면직, 휴직 처분을 당했던 교역자들을 중심으로 재건파가 등장했다. 재건파는 85명이었는데, 이들은 감리교신학교에서 기독교조선감리회 중부/동부 연회를 소집하고 '1939년 이후의 정책은 부인하고 그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요지의 선언서를 발표하고 1930년의 기독교조선감리회의 법적 상속자임을 천명하였다. 이에 속하지 않은 이들은 감리교 수습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교회 복흥 방침'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서 복흥파라는 용어가 나왔다. 두 파는 따로 총회를 열어 감독을 선출함으로써 분열하였다. 양 파의 분열은 1949년까지 계속되었다가 이해에 양측이 통합에 합의하여 통합 총회와 통합 연회를 개최하였고, 이때부터 교단명을 '기독교대한감리회'로 개칭하였다.
반면 이북의 감리교회는 수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신석구 목사와 이윤영 목사를 중심으로 서부 연회가 재건되고 교역자 양성을 위하여 성화신학교도 세웠지만 소련에 의해 주요 인사들이 연행됨으로써 활동이 빠르게 축소되기 시작했다. 결국 1947년 서부 연회 목회자들이 대거 월남함으로써 서부연회는 사실상 소멸되었다.
6.25 전쟁을 겪으면서 감리회는 위기에 처했지만 미 감리회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되려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과 실세였던 이기붕이 각각 감리회 장로, 권사였던 점은 더더욱 감리교회 양적 성장의 계기가 되었다. 정권에 힘입어 노른자위인 광화문에 교단 본부 부지를 할당 받았고, 4.19 혁명 전까지 계속 정권의 비호를 받았다.
1950년대에 감리회는 다시 분열하였다. 이는 장정을 어기고 감독 재선에 나선 류형기 목사 때문에 벌어졌다. 류형기 목사는 이미 감독을 역임하였고 1953년 임기 만료로 새로 감독을 선출해야 했다. 하지만 류형기 감독은 미 감리회와 친분이 두터웠고 당시 상황은 미국의 지원이 있어야만 재기가 가능했다. 이를 두고 류형기 감독의 재선을 지지하는 성화파와 장정대로 하자는 호헌파가 분열했다. 성화파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이북에서 활동하다 월남한 이들 중심이었고, 호헌파는 충청도 인사들이 중심이었다. 호헌파는 1955년 독자 연회와 총회를 조직하고 신학교도 따로 세웠다. 두 파는 치열하게 갈등하다가 미국 감리교회와 한국 평신도들의 중재로 류형기 감독이 물러난 1958년 이후 합동 절차에 들어갈 수 있었다. 1959년 정동제일교회에서 합동 연회가 개최됨으로써 분열을 이리 봉합되었으나 각 파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서클정치가 감리회 안에 자리 잡았다. 두 파는 교단의 주요 직책을 놓고 끊임없이 경쟁했다. 1966년에는 정동파가 새로 생기면서 삼파전이 되었고, 1966년 총회에서는 세 파에서 모두 자파 인사를 감독으로 선출하려다가 110번이나 과반 미달로 감독이 선출되지 못하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결국 세 파는 합의하여 우선 호헌파 변홍규 목사를 감독으로, 정동파 이병설 목사는 총무국 총무로, 성화파 나사행 목사는 교육국 총무로 선임하면서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한편, 1955년에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는 한국 최초의 여성 목사 안수가 이루어졌다. 외국인 여선교사들이 안수된 후 20년도 더 지난 후에 일이지만 한국 최초의 여성목사 안수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크다.
1960년대 교단 분열이 소강 상태를 보이면서 신학 연구가 활발히 일어났다. 유동식 교수와 윤성범 교수를 중심으로 토착화 신학이 감신을 중심으로 활발히 연구되었다. 유동식 교수는 풍류도와 신학의 대화를, 윤성범 교수는 유교와 신학의 대화를 시도하였다.
1970년대에 교단은 양적으로 급성장하는 동시에 또 다시 분열 하였다. 총대 구성을 놓고 세 파의 다툼이 벌어지는 가운데 1970년 11월 총회에서 성화파에서 감독이 나오자 이에 불만을 품은 153개 교회가 따로 경기연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성화파나 호헌파도 아니었고 그간 교단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인사들이었다. 하지만 경기연회는 교단의 승인을 받지 못했고 이에 1975년에는 연합총회라는 독자 총회까지 열었다. 경기연회가 분립된 상태에서 1974년 기존 총회는 감독 자리를 놓고 호헌파와 성화파가 경쟁했다. 이 과정에서 성화파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교단 정화를 선언하고 갱신 총회를 열었다. 이로써 기존 총회와 연합총회, 갱신총회 세 개의 총회가 분열되었다.
이에 충격받은 미 감리회는 분열을 수습하지 않으면 지원을 끊겠다며 압박해 왔고, 중립 교회들을 중심으로 교단 통합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런 노력으로 1978년 교단 분열을 종용케 한 교단 체제를 개혁하고 통합 총회를 열어 분열이 일단락되었다. 이때부터 감독을 연회별 복수로 만들고, 감독의 파송권을 형식화하여 장로교회처럼 개교회가 목회자 선임권을 가지게 했다.
78년 체제는 2004년까지 큰 변화 없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2004년부터 옛 감독의 권한에 비견될 만한 전임 '감독회장' 제도가 신설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78년 체제 하에서 기독교대한감리회의 대표인 감독회장은 연회 감독 중 한 명이 맡아 왔으나 늘어나는 행정을 전담할 전임 감독회장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고, 이것이 2004년 전임 감독회장 신설로 이어진 것이다. 전임 감독회장은 막강한 권한이 있어서 경쟁을 촉발시켰다. 결국 2008년 신경하 감독회장의 임기 만료와 더불어 신임 감독회장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터졌다. 임마누엘교회의 김국도 목사의 사회법 위반 혐의를 들어 신경하 감독회장은 후보 자격을 뺏었지만, 김국도 파의 힘이 막강하여 이를 저지하려 했고, 결국 서로 고소하여 수년간 감독회장 자리를 놓고 표류했다. 2010년에는 감독회장 자리가 공석이 되기도 했다. 감독회장 후보자들 간의 자격 요건 문제로 생긴 분쟁 때문이었다(참고). 이것을 '감리교 사태'라고 한다. 결국 법원에서는 2010년 12월에 감독회장 대행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장로를 맡고 있는 변호사를 선임했다(참고). 감리회 내부의 대립이 극심하다보니 법원에서 결국 공석이 된 감독회장을 감리회 목사가 아닌 장로회 장로로 선임하는 지경까지 간 것이다. 2012년에 전임 감독회장이 임시 감독회장을 맡아 이 문제를 수습하고 2013년에 정식 감독회장이 선출이 돼서야 '감리교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된 듯 하다.
2012년 9월 25일 감리회 총회에서 목회세습 금지법이 통과되었다. 이미 목회세습 문제가 오래된 상황에서 감리회에서 먼저 뒤늦게나마 목회세습을 막아보겠다고 나서 사회적으로도 크게 보도된 상황. 이런 상황에서 김홍도 목사는 "다 날 죽이려 든다!"라고 미국에서 외쳤대나 뭐래나.
2016년 1월 14일 제 31차 감리회 임시총회에서는 한국 교단 중 처음으로 목회자 이중직을 허용하였다. 물론 장정개정위원회가 올린 개정안에 따라서 기존 이중 직업을 가진 교역자를 불성실한 교역자로 규정안 기존 법안을 재정자립이 어려운 미자립교회[12] 에서만 허용하였다. 이에 미자립교회 담임자가 이중직을 허락받으려면 , 해당연회 감독으로부터 근무지, 직종, 근무시간등을 서면으로 신청하고 허락받아야 한다. 이전에도 예장통합에서 목회자 이중직을 막거나 정죄하면 안된다고 보고서를 올렸으나 실제적으로 장정에 채택하지 않은 것을 본다면 최초로 이중직을 허용한 것은 그만큼 현실적으로 미자립 교회에 대한 지원이 전과 같지 않고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1960년대의 신학 흐름을 자유주의 신학으로 보고, 50년대의 지리멸렬했던 교단의 분열과 통합, 서클 정치를 보면서 환멸을 느낀 전 해병대 군종감 전덕성 목사가 1961년 교단을 탈퇴하였다. 전덕성 목사와 17인의 동지들을 중심으로 미국 자유감리교회의 지원을 받아 "한국예수교자유 감리회"가 1962년 설립되었고 전덕성 목사는 초대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1964년에는 교단명을 "예수교대한감리회"로 변경하였다.
2. 특징[편집]
미국의 감리회는 신학적으로 상당히 진보적이며 이성을 중시하는 교파이지만, 한국의 감리회 교단인 기독교대한감리회는 한국 개신교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종파인 개혁교회(장로회)의 개혁주의 신앙의 영향을 많이 받아 어느정도 보수적인 편이다.[13] 그러나 이 이야기는 교회와 교단에만 국한될 뿐 신학대에서는 반면 원래의 색깔처럼 굉장히 진보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감리교회가 어느 정도 보수적인 색채를 띄기에 신학생들 또한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신학생들이 여럿 있으며 진보적인 신학교수들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 학생들이 꽤 있는 편이다. 합동보수·고신·재건 등 보수적인 장로교단에서는 감리회에서 신학 공부를 했다고 하면, 좋게 말해서 자유주의자, 나쁘게 말해서 이단으로 치부하기도 한다.[14]
감리교 소속 대학교는 기타 개신교학교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측면이 있다.
이는 굉장히 이상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 감리회의 기본 입장과 장로회의 기본 입장은 완전히 다르며, 교리적 측면으로 보면 오히려 서로를 어느 정도는 이단으로 해석[15][16] 할 수도 있는 측면까지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칼뱅주의자들은 실제로 감리회가 이단적인 교리를 가르친다고 주장하고는 한다.[17]
금란교회의 김홍도 목사 같은 경우엔 근본주의적이며 반이성적인 발언을 남발하여 리처드 도킨스에게 세계구급으로 까이기도 했을 정도. 또한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몇몇 감리회 계통 인사들 역시도 근본주의적인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이 많아서 상당한 차이를 느끼게 한다.
그런데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는 같은 에큐메니컬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 비해서도 좀 더 강경한 입장을 보인다. 예장통합은 동성애에는 기본적으로 반대하면서도 동성애자에 대한 핍박이나 정죄는 지양하자는 입장이라면, 기감회는 동성애를 옹호하는 것만으로도 출교 조치를 취하겠다는 입장을 보일 정도.[18]
동성애 문제와 관련하여, 최근 미국 감리교회는 동성결혼문제로 지난 남북전쟁 이후 최대의 분열위기에 있다. 원래는 2021년 총회에서 분리에 관한 논의와 결정이 이루어 질 예정이었으나 전세계적인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2022년으로 총회자체가 연기된 상황. 하지만 이미 몇몇 교회(감리교 연회에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정도의 재정적 여건을 가진 교회)는 감리교에서 분리되어 나와 독립적인 교단으로 출범을 앞두고 동성애에 호의적이지 않은 교회들을 모으는 중이다. 특히 기존 미국 감리교에 소속되어있던 한인교회들은 한인교회 자치기구를 통한 독립적인 감독권을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반동성애 성향의 새로운 감리교 단체 인 가칭 GMC(Global Methodist Church) 로 합류하는 분위기이다.
한국 개신교 시작부터 함께한 장로회[19] 와는 이런저런 교류가 오랫동안 이어져 상호 영향을 끼쳤다. 가령 한국감리회는 본래 감리회에는 없던 장로라는 직분이 존재하며, 반대로 장로교회에서 여성 교인에게 부여하는 ‘권사’라는 직분은 감리회로부터 도입된것이다. 또한 감리회의 시조 존 웨슬리가 제창한 성령을 통한 성화와 거듭남, 칼뱅의 이중예정론에서 완화된 믿음에 의한 의인과 선행의 필요성 , 이를 뒷받침하는 하나님이 허락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한 은총에 관한 이론도 장로교에 도입되었다. 담임 목사직도 연회에서 파송하기 보다는 개별 교회에서 청빙하거나 교회를 개척하고 담임목사직을 맡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물론 지금도 개별 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기 위해서는 감독의 동의가 필요하다.
축도에서는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가 교단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표준 말미이지만, 목사의 성향에 따라 "함께 하실지어다." 또는 "함께 있을지어다."로 끝맺는 경우도 간혹 있다.[20] 축도의 형식은 2가지인데,,, 사실상 어느 것을 사용해도 상관이 없다.
예배형식의 경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오순절교회처럼 통성기도와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교회도 있고, 예장통합이나 기장처럼 경건하고 말씀을 강조하는 교회도 있다. 그리고 예전을 중시하는 교회여서 매주 성찬을 하는 교회도 있다. 이는 존 웨슬리가 성공회사제 출신이고 성만찬을 강조했던 인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전을 강조하는 교회와 말씀을 강조한 웨슬리처럼 성경을 강조한 교회와 야외에서 설교를 했을 때 일어난 각종 성령의 역사하심과 체험이 있었는데, 심지어 입신체험까지 나타났다. 이러한 것은 웨슬리의 본인의 일기에 다 기록이 되어있는데... 이러한 전통에 따라서 성령의 체험을 강조하고 통성기도와 자유롭게 기도하는 교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21]
미국 감리교회는 과거에 목사가 부족하여 성만찬을 시행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교회의 부흥회 스타일 예배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감리교 예배의 특징은 역설적으로 교단만의 특별한 특징이 없는 것이다.
칼뱅과 루터도 강조했지만 존 웨슬리는 성만찬을 강조한 인물인데, 은혜의 방편으로 여겼는데 특별히 열린 성만찬(Open Comunion)을 했던 인물이었다. 즉 세례를 받지 않았어도 그리스도 예수를 행한 믿음과 신실한 사랑이 있다면 성만찬을 허용했다는 것이다.
3. 조직 및 교세[편집]
현재 기독교대한감리회가 대한민국 감리회를 대표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의 합동-통합에 이어 3번째로 큰 교단이다. 그리고 예수교대한감리회를 비롯한 감리회를 표방하는 군소 교단들이 존재한다.# 참고로 JMS 등의 일부 사이비 종교에서 예수교대한감리회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이단으로 오해받는 일도 있다[22] . 군소 감리교단들이 존재함에도 기독교대한감리회는 분열되지 않은 하나의 감리교회로 인정받는다. 왜냐하면 장로회와 달리 총회가 분열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23] . 대표적 군소 감리교단인 예수교대한감리회는 군목 출신 전덕성 목사가 기독교대한감리회의 부패와 지나친 진보적 신학에 반발하여 외국의 자유감리회를 모델로 독자 교단을 만들어 형성된 것이다. 장로회처럼 서로 제명 처리하고 총회를 따로 열어 자기네가 유일 정통이라고 우긴 것이 아닌 것이다.
감리회 조직도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총회 - 연회 - 지방회 - 구역회 - 당회의 수직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총회는 본부라고 할 수 있으며, 연회는 성공회나, 천주교의 교구와 같이 전국을 각 지역별로 나눈 것이다. 지방회와 구역회는 연회를 더 자잘하게 나눈 것이며, 당회는 각각의 교회를 의미한다.
총회와 연회의 대표자는 각각 감독회장, 감독#감리회의 직책이라고 하며, 지방회와 구역회는 감리사라고 한다.
국내 연회는 서울연회(서울 북부), 서울남연회(서울 남부), 중부연회(인천, 경기 서부), 경기연회(경기 남서부), 중앙연회(경기 동부), 동부연회(강원), 충북연회(충북), 충청연회(충남 서부), 남부연회(충남 남부), 삼남연회(영남, 제주), 호남선교연회(호남)가 있으며, 미국의 미주특별연회(미국 한인교회)와 서부연회(북한)가 존재한다.
각 연회 관할구역의 경계는 장로회의 노회 관할구역처럼 느슨하지 않고, 가톨릭·성공회 교구의 관할구역 경계처럼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기준 2016년 현재 교인수는 137만여 명이다.감리회 교세현황
2000년부터 자세한 교세 변화는 기독교 대한감리회 본부선교국(KMCMission)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대략적인 지역별 교세를 살펴보면, 수도권과 강원권, 충청권에 교세가 강하며, 특히 강화군[24] 을 포함한 인천광역시와 강원도[25] 에서는 감리회가 초강세이다. 대전광역시[26] , 세종특별자치시, 충청남도에서도 감리회의 교세가 강한 편이다.[27] 전라북도에서는 군산시, 익산시, 전주시·완주군과 부안군에서 소폭 강세이고 여타 시군은 감리회의 교세가 약하다. 제주특별자치도는 전반적으로 개신교 교세가 약하기는 하지만 관내 개신교 중에서만 집계하면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에 이어서 두번째로 교세가 강하며, 전라남도와 경상북도[28] , 경상남도[29] 는 교세가 약하다.
3.1. 산하 신학교[편집]
※ 해당 교단은 1982년 교육부에게 인가받은 성화신학교(선문대학교)의 예수교대한감리회가 아니다. 성화신학교의 예수교대한감리회는 통일교의 위장 교단이며 결국 통일교에게 흡수된다.
4. 교육[편집]
한국의 감리회 관련 4년제 대학으로는 감리교신학대학교(약칭 감신대), 협성대학교, 목원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연세대학교[30] , 그리고 배재대학교가 있다. 흔히들 신학과정이 있는 학교 중 메인인 감리교신학대학교는 신학적으로 상당히 진보적이고 목원대와 협성대는 보수적인 편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감리교회 테두리 안에서 신학과는 보수/진보로 쉽게 나눌 수 있지 않다. 1950~90년대까지나 그런 경향이 있었지만 2000년대 이후로는 감리교 신학과들의 학풍 차이는 매우 옅어졌고, 현재는 교수의 성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 중 감리교신학대학교, 협성대학교, 목원대학교, 연세대학교에 교역자 양성 기능이 있으며, 배재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는 신학과가 없다. 물론 미션스쿨이다 보니 채플도 있고 배재대에는 학부에는 기독교사회복지학과(대학원 복지신학과)가, 이화여대에는 기독교학과가 있지만, 감리회 교역자 양성기능은 없고 KAICAM과 인준했기에 초교파 목사 양성 기능은 있다.[31]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의 경우 감신대, 협성대, 목원대에서 감리회 필수 강의들을 수강하면 감리회 목사가 될 수 있다.
감리회 전문대학으로는 배화여자대학교, 안산대학교, 인덕대학교가 있다.
5. 신앙고백[편집]
5.1. 1930년 조선감리교의 교리적 선언[편집]
1. 우리는 만물의 창조자시요 섭리자시며 모든 선(善)과 미(美)와 애(愛)와 진(眞)의 근원이 되시는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2. 우리는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사 우리의 스승이 되시고 모범이 되며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3.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사 우리의 지도와 위안과 힘이 되시는 성신을 믿으며
4. 우리는 사랑과 기도의 생활을 믿으며 죄를 용서하심과 모든 요구에 넉넉하신 은혜를 믿으며
5. 우리는 구약과 신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과 실행의 충분한 표준이 됨을 믿으며
6. 우리는 살아계신 주 안에서 하나이 된 모든 사람들이 예배와 봉사를 목적하여 단결한 교회를 믿으며
7.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가 천국임을 믿으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 모든 사람이 형제됨을 믿으며
8. 우리는 의의 최후 승리와 영생을 믿노라.
5.2. 1997년 감리회 신앙고백[편집]
원한다면 공적 예배 자리에서 사도신경이 아닌 이 신앙고백문으로 신앙을 고백하여도 상관이 없으나, 감리교회 가운데 그렇게 하는 교회는 없다시피 하다.1. 우리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주관하시는 거룩하고 오직 한 분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2.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승천 하심으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3.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며 완전하게 하시며 위안과 힘이 되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4.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도리와 신앙생활에 충분한 표준이 됨을 믿습니다.
5.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죄사함을 받아 거룩해지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부름받음을 믿습니다.
6. 우리는 예배와 친교, 교육과 봉사, 전도와 선교를 위해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믿습니다.
7. 우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나누고 평화의 세계를 이루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형제됨을 믿습니다.
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우리 몸의 부활과 영생 그리고 의의 최후 승리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습니다.
5.3.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신경[편집]
감리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의로운 사회구현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온 전통을 가지고 있다. 1930년 제1회 총회에서 사회신경을 채택하고 이를 신앙의 실천적 목표로 삼아, 보다 나은 사회를 이루는 데 이바지하여 왔다. 우리는 오늘의 시대가 안고 있는 새로운 문제들을 앞에 놓고 우리의 사회적 삶의 새로운 실천 원칙을 받아들여야 할 시점에 도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 감리교인은 우리에게 선한 의지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우리의 가정, 사회, 국가, 세계 그리고 생태적 환경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선언하는 바이다. 우리는 만물을 선하게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며,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다.
1. 하나님의 창조와 생태계의 보존 우리는 하나님의 명하심을 따라 우주 만물을 책임 있게 보존하고 생태계의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
2. 가정과 성, 인구 정책 우리는 가정과 성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귀한 제도임을 믿는다. 가정을 올바로 보존하며 성의 순결성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다. 그리고 우리는 인구 문제로 인한 세계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책임 있는 인구 정책이 수립되도록 노력한다.
3. 개인의 인권과 민주주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자유와 인권이 있음을 믿는다. 따라서 정권은 민주적 절차와 국민의 위임으로 수립되어야 하며 국민 앞에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정권 유지를 위해 국민을 억압하고 언론의 자유를 위협하는 어떠한 정치 제도도 배격한다.
4. 자유와 평등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기 때문에 성별, 연령, 계급, 지역, 인종 등의 이유로 차별하는 것을 배격하며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사회 건설에 헌신한다.
5. 노동과 분배 정의 우리는 자기실현을 위한 노동의 존엄성과 하나님이 주신 소명으로서의 직업을 귀하게 여긴다. 동시에 우리는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빈부의 격차를 시정하여 분배 정의가 실현되도록 최선을 다한다.
6. 복지 사회 건설 우리는 부를 독점하여 사회의 균형을 깨뜨리는 무간섭 자본주의를 거부하며,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적 사회주의도 배격한다. 우리는 온 국민이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서로 도우며 사는 복지 사회 건설에 매진한다.
7. 인간화와 도덕성 회복 오늘의 지나친 과학 기술주의가 비인간화를 가져오고 물질 만능주의가 도덕적 타락(성도덕, 퇴폐문화, 마약 등)을 초래한다. 따라서 우리는 올바른 인간 교육, 건전한 생활, 절제 운동(금주, 금연 등)을 통하여 새로운 가치관의 형성과 도덕성 회복을 위해 앞장선다.
8. 생명 공학과 의료 윤리 우리는 근래에 급속히 발전한 생명 공학이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사실과, 근대 의학의 발전이 가져오는 장기 이식 등에 대해 교회의 책임 있는 대책과 올바른 의료 윤리의 확립이 시급함을 강조한다.
9.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정의 사회 실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구주임을 믿는다. 또한 오늘의 현실 속에서 정의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타 종교와 공동 노력한다.
10. 평화적 통일 우리는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하나의 민족이 여러 가지 국내외적 문제로 분단되어 온 비극을 뼈아프게 느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민족의 동질성 회복과 화해를 통한 민족, 민주, 자주, 평화의 원칙 아래 조속히 통일되도록 총력을 기울인다.
11. 전쟁 억제와 세계 평화 우리는 재래적 분쟁은 물론,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핵무기 생산과 확산을 반대한다. 동시에 세계의 기아 문제, 식량의 무기화, 민족 분규, 패권주의 등의 해결을 위해 모든 나라와 협력함으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한다.
6. 주요 교회[편집]
- 기독교대한감리회
- 정동제일교회 (천영태 목사)[32]
- 상동교회 (이성조 목사)[33]
- 아현감리교회 (김형래 목사)[* 미국 북감리회의 스크랜턴 선교사가 세운 애오개 시약소를 모체로 하여 발전한 교회이다. 1885년 내한한 북감리회의 첫 의료선교사 스크랜턴(W. B. Scranton)은 복음전도가 금지되어 있는 상황에서 정동에 ‘시병원’을 개설하여 환자들을 진료하였다. 정동을 중심으로 의료활동을 벌이던 스크랜턴은 가난하고 소외된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정동 밖으로 나가 애오개, 동대문 그리고 남대문 시장 등에 진료소를 분산하여 설립할 계획을 세우고, 애오개에서 가정 먼저 의료활동을 개시하였다. 스크랜턴은 1888년 12월 애오개 언덕의 한옥에 ‘애오개 시약소’를 열었는데, 서대문 밖 애오개는 어린아이들과 무연고자의 무덤이 많았고, 전염병 환자 진료소인 활인서(活人署)가 있던 곳으로 가난하고 병든 민중을 위한 병원을 개설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학교와 병원사업은 궁극적으로 기독교 선교에 목적을 두었기 때문에 언제나 복음전도가 병행되었다. 바로 이 애오개 시약소가 이후 아현교회로 발전하였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아현교회(阿峴敎會))] 김유신, 김지길, 신경하의 3명의 감독회장을 배출했으며, 1987년에는 전국의 목회자가 아현교회에서 민주화항쟁을 준비하는 모임을 가지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교회이다
- 광희문교회(차재일 목사)
- 종교교회 (전창희 목사)[34][35]
- 동대문교회 (서기종 목사)[36]
- 선한목자교회 (김다위 목사)[37][38]
- 가평중앙교회 (김남신 목사)[39]
- 청평감리교회 (이성준 목사)[40]
- 대성교회 (이형호 목사)[41]
- 목동교회 (유병헌 목사)[42]
- 사랑의교회 (박주영 목사)[43]
- 화악교회 (김요셉 목사)[44]
- 현리중앙감리교회 (손동찬 목사)
- 가평제일감리교회 (김혜경 목사)[45]
- 승안감리교회 (서경철 목사)[46]
- 광림교회 (김정석 감독)[47]
- 금란교회 (김정민 목사)[48]
- 임마누엘교회 (김정국 목사)[49]
- 용두동교회 (최범선 목사)[50]
- 석교교회 (이현식 목사)[51]
- 만리현교회 (김래현 목사)
- 중앙교회 (이형노 목사)[52]
- 금호제일교회 (김형석 목사)[53]
- 일신교회 (윤동규 목사)
-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54]
- 서강교회 (여우훈 감독)
- 창천교회 (구자경 목사)[55]
- 대신교회 (황문찬 목사)
- 꽃재교회 (김성복 목사)[56]
- 아현중앙교회 (이선균 목사)
- 서대문교회 (이주익 목사)[57]
- 빛가온교회 (서길원 목사)[58]
- 꿈이있는교회 (하정완 목사)
- 도봉교회 (이광호 목사)
- 사강교회 (이태영 목사)
- 은평교회 (김동현 목사)
- 양광교회 (장석주 목사)
- 진관교회 (이현식 목사)[59]
- 하늘가족교회 (방원철 목사)[60]
- 영등포중앙교회 (최태수 목사)[61]
- 대림교회 (강득환 목사)[62]
- 베다니교회 (곽주환 목사)[63]
- 배광교회 (이학성 목사)
- 한사랑교회 (황성수 목사)
- 세신교회 (김종구 목사)
- 은혜교회 (서동원 목사)[64]
- 남산교회 (이원재 목사)[65]
- 수표교교회 (김진홍 목사)[66]
- 충신교회 (배철희 목사)
- 로고스교회 (전준구 목사)[67]
- 큰믿음유신교회 (이홍규 목사)[68]
- 갈보리교회 (김영생 목사)[69]
- 인천 내리교회 (김흥규 목사)[70]
- 인천 창영교회 (남강현 목사)[71]
- 인천 방주교회 (임 철 목사)[72]
- 인천 대은교회 (전명구 목사) [73][74]
- 인천 숭의교회 (이선목 목사)[75]
- 인천 학익교회 (백성현 목사)
- 인천 하늘꿈교회 (신용대 목사)
- 인천 계산중앙교회 (최신성 목사)
- 인천 효성중앙교회 (정연수 감독)[76]
- 인천 주안감리교회 (한상호 목사)[77]
- 인천 부광교회 (김상현 목사)[78]
- 인천 부평교회 (손웅석 목사)[79]
- 인천 산곡교회 (조재진 목사)
- 인천 제일교회 (김규열 목사)[80]
- 인천 드림교회 (박장혁 목사)
- 인천 하나비전교회 (김종복 목사)[81]
- 부천 기둥교회 (고신일 감독)
- 부천 꿈마을엘림교회 (김영대 목사)
- 부천 제일교회 (이민재 목사)
- 일산 광림교회 (박동찬 목사)
- 강화 은혜교회 (김찬호 목사)
- 김포 고촌교회 (박정훈 목사)
- 수원 오목천교회 (김철한 목사)
- 수원성교회 (임일우 목사)[82]
- 수원 종로교회 (강성률 목사)
- 용인 목양교회 (김완중 목사)
- 수지 선한목자교회 (강대형 목사)[83]
- 안양감리교회 (임용택 목사)[84]
- 안산광림교회 (민경보 목사)[85]
- 꿈의교회 (김학중 감독)[86]
- 샘골교회 (진광호 목사)[87]
- 제암교회 (최용 목사)[88]
- 동탄시온교회 (하근수 목사)
- 하남 성안교회 (장학봉 목사)
- 하남 주님의교회 (최기혁 목사)
- 천안 하늘중앙교회 (유영완 목사)
- 만나교회 (김병삼 목사)[89]
- 불꽃교회 (공성훈 목사)[90]
- 성남 대원교회 (임학순 목사)
- 의정부중앙교회 (이광석 목사)
- 의정부제일교회 (오태현 목사)
- 이천 중앙교회 (김종필 목사) [91]
- 강릉중앙교회 (박태환 목사)[92]
- 속초교회 (김동준 목사)[93]
- 속초 조양교회 (최선길 감독)[94]
- 양양감리교회 (조선석 목사)[95]
- 원주 삼천교회 (우광성 목사)
- 원주 제일교회 (최헌영 목사)
- 철원제일교회 (이상욱 목사)[96]
- 춘천중앙교회 (심성수 목사)[97]
- 춘천안디옥교회 (유진형 목사)[98]
- 대전 제일교회 (이성호 목사)[99]
- 대전 한빛교회 (백용현 목사)[100]
- 대전 산성교회 (지성업 목사)
- 대전 하늘문교회 (홍한석 목사)[101]
- 대전 천성교회 (한동수 목사) [102]
- 대전 둔산성광교회 (이웅천 목사)
- 대전 둔산제일교회 (문상욱 목사)
- 대전 힐탑교회 (안승철 목사) [103]
- 대전 복음천하교회 (곽성영 감독)[104]
- 대전 보문교회 (김진태 목사)[105]
- 대전 열방교회 (임제택 감독)
- 당진 교회 (방두석 목사)
- 부산 제일교회 (정찬석 목사)[106]
- 부산 온누리교회 (박성수 목사)[107]
- 부산 동행교회 (김동균 목사)[108]
- 부산 동래온천교회 (정동준 목사)
- 익산 영생교회 (박용호 목사)
- 하늘숲덕일교회 (이정형 목사)
- 충무감리교회 (김래성 목사)
- 새생명교회 (김형완 목사)
- 생명나무교회 (이구영 목사)
- 예수교대한감리회
7. 주요 교단 목록[편집]
- 기독교대한감리회(악칭 기감) : 해당 문서 참조.
- 예수교대한감리회(약칭 예감) : 해병대 군종감을 지낸 전덕성 목사가 1961년 기독교대한감리회를 탈퇴한 후 1962년 미국 자유감리교회와 연합하여 세운 교단. 공식 홈페이지 소개 참조. 교단 분열이 아닌 독립 후 창설이기 때문에 기독교대한감리회 분파가 아닌 독자적인 교단이다. 한기총 회원 교단으로 신앙적으로도 상당히 보수적인 하드코어 웨슬리 신앙을 추구하며 기독교감리회와 다르게 보수적이고 교회 일치(에큐메니컬) 운동에도 소극적인 입장을 보인다.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문래동에 총회본부를 두고 있으며 기감에 비해서는 교세가 매우 약하고 교단 소속 교회들도 그리 많지 않은 군소 교단이다.[110][111] 지역적으로는 인천광역시, 경기도와 충청북도에 주로 분포하며 대전, 세종, 전북은 교세가 매우 약하다. 영남권에는 아직 진출하여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