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이스카리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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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예수의 제자 중 하나로, 예수를 은화 30냥에 팔아버려 배신한 뒤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그리스도교에서 살인에 버금가는 죄인 자살로 생을 끝마친 인물이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는 최악의 죄인으로 손꼽히며, 기독교 전승에서는 자살한 후에 악마에게 잡혀갔다고 한다.
다른 사도들이 다 성인으로 분류되어 축일을 가지는 데 비해 유다는 당연히 그런 거 없고 가톨릭과 정교회, 개신교 등 종파를 막론하고 죄인으로 분류되어 아직까지도 저주와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리스도교와 대립하는 이슬람의 쿠란에서도 스승을 배신한 대가로 알라의 분노를 사서 알라가 유다를 예수로 보이게 하여 십자가 형을 받게 하였다고 할 정도로 스승을 배신한 제자로 여겨 좋게 보지는 않는다. 현재 유럽 일부국가에서는 아이에게 유다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다.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에서는 지옥 최하층에 있는 루시퍼의 입에 물려 놓았다.[3] 서양 문화권에서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함께 배신자의 대명사로 통한다. 각종 사료에서 배신 행위에 대해 "브루투스 같은 놈"이라거나 "유다 새끼 같은 놈" 따위의 욕을 해대는 것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유다의 배신에 대한 묘사나 여파가 과장된 것이고, 그저 예수와의 개인적인 마찰과 배신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로부터 인류 세계에 큰 영향을 주는 그리스도교의 탄생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세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며,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유다는 예수의 13번째 제자'라고 아는 경우가 있는데, 사도가 13명이었던 적은 없다. 유다가 이탈하고 사도 마티아스가 그 자리를 대체하여 12명을 유지한다.[4]
2. 이름에 대하여[편집]
히브리인의 이름 뒤에 붙이는 호칭은 성씨나 Last name과는 다른 일종의 별명으로, 그 사람의 출신지나 본적, 자란 고장, 직업이나 친척, 아버지, 할아버지 이름이거나 신체적 특징 등을 주로 붙인다. 이름이 같은 사람이 워낙에 많아 구별해야만 하는데, 당시에는 성씨란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계의 성씨들은 이렇게 수식어를 써서 구별하는 과정을 거치다 가문의 형성과 함께 고착화된 것이 대부분이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유다 이스카리옷'이라, 한국 개신교에서는 '가룟 유다'라 음역하였다. 이스카리옷 유다의 '이스카리옷'이 무슨 뜻인지는 불명확하지만, 뜻을 풀이하는 3가지 설이 있다.
- 카리옷 사람 유다
- 열심당원 유다
- 거짓의 아들 유다
3가지 설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종교학계는 1번과 3번에 무게감을 두는 편이고, 2번은 여러 가지 음모론이나 가설을 세우기 좋아 인지도는 비슷비슷하다.
일부 신학자들은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유다에 대한 반감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 결정적으로 로마 제국에 대반란을 일으켰다가 대대적인 탄압을 당하면서 비유대인 기독교 신자들과 분리되기 시작했고, 결국 3세기 즈음을 기준으로 사실상 유대인과 기독교도들은 서로 갈라진 별개 세력으로 구분되었다. 이 때문에 가장 먼저 작성된 마르코 복음서에선 그저 악인으로 묘사되는 유대인들이, 가장 나중에 작성된 요한 복음서에선 악랄한 악마 등으로 묘사된다고 한다.
유다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다는 전승을 따라, 그의 이름을 딴 지옥이 바로 저 유명한 쥬데카다. 또한 그의 이름의 알파벳 표기인 Judas는 여러 언어에서 배신자를 뜻하는 단어로 쓰인다.
2.1. 동명이인[편집]
중세시대에는 유다라는 이름이 유다 이스카리옷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기도 기피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유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다'라는 뜻을 지니며 당시 유대인 사이에서 흔한 이름이었다. 그리고 하누카 축제의 기원이 되는 유대인 영웅이자 하스몬 왕조의 시조인 마카베오 유다 때문에 당대 유대 사회에서는 마카베오 유다 같은 영웅이 되라고 유다라는 이름을 흔하게 붙였다. 예를 들어 안중근 의사를 존경해서 아들 이름을 중근이라고 짓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후대에 중근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나라를 팔아먹는 바람에 사람들이 중근이라는 이름을 기피하게 된 셈.
게다가 유다는 이스라엘 12지파 중 하나이며, 현재의 '유대'인이라는 민족명칭도 유다와 어원이 같다. 당장 이 지파에서 예수와 다윗 왕이 나왔다(!). 신약의 편지 중 하나인 유다서를 쓴 유다[7] 가 있고, 병자들의 성인인 유다가 있다. 특히 병자들의 성인 유다는 호주에 있는 '성 유다 종합병원'의 주보성인이다. 이 외에도 성 유다 고등학교 등 이 유다의 이름을 딴 시설들은 정말 많다. 심지어 12사도들 중에서도 유다가 한 명 더 있다. 다만 이 경우에는 '유다 타대오'라고 구별해서 불러야 한다.
이렇게 이들은 사실 모두 같은 이름이지만, 실제 영어로 쓸 때에는 악인인 유다 카리옷은 Judas, 그 외의 유다는 Jude로 표기하여 다르게 쓴다. 영어뿐만 아니라 유럽어권에서는 대부분 비슷한 방법으로 배신자 유다와 다른 유다를 구분한다.
3. 세기의 배신[편집]
날이 저물었을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아 같이 음식을 나누시면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몹시 걱정이 되어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지금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사람이 바로 나를 배반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죽음의 길로 가겠지만 사람의 아들을 배반한 그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 그 때에 예수를 배반한 유다도 나서서 "선생님, 저는 아니지요?" 하고 묻자, 예수께서 "그것은 네 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예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줄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하셨다. 그리고는 빵을 적셔서 가리옷 사람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유다가 그 빵을 받아 먹자마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 때 예수께서는 유다에게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예수께서 왜 그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 유다가 돈주머니를 맡아보고 있었기 때문에 더러는 예수께서 유다에게 명절에 쓸 물건을 사오라고 하셨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하신 줄로만 알았다. 유다는 빵을 받은 뒤에 곧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예수의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리가 떼를 지어 열두 제자 중의 하나인 유다라는 사람을 앞세우고 나타났다. 유다가 예수께 입맞추려고 다가서자, 예수께서는 "유다야, 입을 맞추어 사람의 아들을 잡아 넘기려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가 유다의 배신을 알면서도 그를 제자로 뽑아준 건지 아닌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어느 시점에서건 최후의 만찬 전에 예수는 이미 유다의 배신에 대해 예견하고 있었다고 성경은 전한다. 사실 예수는 그 뿐만 아니라 나머지 제자들의 간접적 배신도 예견하고 있었다. 반면 다른 제자들은 유다가 그 유명한 배반의 입맞춤을 하러 현장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눈치조차도 채지 못했다.
마태오의 복음서에 따르면, 최후의 만찬에서 자리에 앉은 예수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말한다. 현장에 있는 제자 중 하나가 자신을 배신하여 팔아넘길 거라는 이야기였다. 충격을 받은 제자들은 서로 의심하면서 앞다투어 예수에게 설마 그 배신자가 자기냐고 묻기 시작했고, 예수는 자신과 함께 대접에 손을 담그는 자가 그라고 한다.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묘사가 살짝 다른데, 제자들이 쩔쩔 매던 와중에 베드로가 예수의 품에 의지해 누워있던 예수가 가장 사랑하던 제자에게 물어보라고 신호를 주었고, 이 제자의 물음에 예수가 자신이 빵을 적셔주는 사람이 그라고 답한다. 마르코의 복음서에서는 예수 자신과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가 그 배신자라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모든 복음서에서 예수는 유다가 배신자란 것을 정확하게 알았고, 만찬 당시 유다 본인에게도 자신이 그의 배신에 대해 알고 있다는 언질을 넌지시 주었다.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건지, 유다에게 "네가 할 일을 해야 하지 않겠냐."하고 빵을 떼어준 후 그를 보내주고, 질책하거나 만류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후 유다의 비참한 운명에 대해서도 알았는지, 예수 자신이 억울하게 죽게 되는 것은 신의 계획대로 일어나는 일일 뿐이지만, 그 죽음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는 유다는 화를 입게 될 것이라며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유다 본인에게는 더 나았을 것"이라고 탄식하는 등, 분노나 배신감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마태오의 복음서는 만찬 당시 예수가 유다 본인의 배신에 대해 알고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음에도 유다가 예수와 제자들 앞에서 대담하고 뻔뻔하게 행동한 것으로 묘사한다. 모든 제자들이 예수에게 앞다투어 설마 자기가 배신하게 되냐고 묻는 중에 유다 역시 예수에게 "(그 배신자가) 접니까, 선생님?"이라고 물었는데, 예수는 "네가 말하였다"라고 그의 대답을 긍정한다.[8] 유다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소름 돋을 장면.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내가 빵을 적셔서 떼어준 사람이 그 배신자"라고 '사랑하는 제자'에게 말하며 유다에게 빵을 적셔서 떼어주고 유다는 그걸 받는다.[9] "가서 네 할일을 하라"며, 유다가 곧장 자신을 팔아넘기러 갈 것임을 알면서도 그를 먼저 보내준다. 유다는 바로 수석 사제에게로 가버리는데, 베드로가 '사랑하는 제자'에게 다가가서 그게 누군지 추궁을 했음에도 '사랑하는 제자'가 베드로에게 말을 안 했는지, 다른 제자들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하며, 예수가 해야 할 일을 하라고 그를 보내자 그 할 일이 뭔지에 대해서 의문을 표하기도 하는데, "유다가 회계 담당이고 이제 명절이니까 심부름 시키려고 보내셨나 보다~" 라고 받아들인 제자들도 있었던 것 같다.
이후 겟세마네에서 기도를 마친 예수가 제자들을 깨워서 자신을 팔려는 자가 다가왔다고 보여주고, 그 현장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이스카리옷 유다였다. 유다는 자신이 입 맞추는 자가 예수이니 그를 잡으라 하고, 예수에게 입을 맞추러 다가와서는 천연덕스럽게 인사를 건넨다.
마태오의 복음서에서 예수는 유다에게 무슨 일을 하려고 온 줄 알고 있으니 해야 할 일을 하라고 말하고, 루가의 복음서에서는 유다가 다가오자 입을 맞추고 자신을 팔아넘길 셈이냐고 묻는다.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이 유명한 유다의 입맞춤이 등장하지 않는다. 유다와 군대가 다가오자 예수가 먼저 누굴 찾느냐고 묻고 사람들이 "예수 찾으러 왔는데요" 하자 자신이 그 예수라고 본인이 먼저 나서고, 이에 군인들이 놀라서 어버버거리자 자신이 예수가 맞으니 자기만 잡고 제자들은 해치지 말고 보내주라며 자신의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한다. 이후 예수는 끌려가서 재판받고 십자가형을 받으며, 죄책감을 견디지 못한 유다는 은 30냥을 반환한다.
이후 유다가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는 출처마다 내용이 다르다.
- 마태오의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를 판 후 후회하여 자신과 작당한 대사제들에게 은전 서른 닢을 되던져준 후 목 매달고 자살했으며, 그가 되돌려준 돈이 껄쩍지근했던 대사제들은 그 돈으로 근처에 땅을 사 나그네, 즉 무연고자들의 묘지로 썼다고 적혀 있다.
- 사도행전에서는 자살이나 은전 반납에 대한 언급은 없고, 그가 산 밭에서 거꾸러져 배가 갈라지고 내장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 2세기 초에 활동한 교부 파피아스(Papias, 60?-130?)[10] 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파피아스에 따르면 유다는 저주를 받아 온몸이 퉁퉁 부어 문을 빠져나갈 수 없을 지경이 되었으며, 몸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 고름이 흘러나와 주변 땅을 적셨다고 한다. 파피아스가 쓴 기록은 복음서나 사도행전과 내용이 매우 다르다.
흔히 마태오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온 내용을 합쳐서, 목을 매달아 자살했는데 시신을 거둬주는 이가 없어 썩어가다 줄이 끊어져 떨어지고 복부가 터져 내장이 흘러 나왔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다. 과학적으로도 말이 되는 이야기라[11] 이미 고대 시기부터 인기 있던 해석이지만, 본문을 읽어보면 양자가 완전히 다른 전승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게 명확하기 때문에 학자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전승 간에 겹치는 부분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유다는 예수를 배반한 뒤 종적을 감추었고, 초대 교회 신자들 사이에서는 유다의 최후에 대해서 (아마도 비참하게 죽었으리라는 내용으로) 이런저런 소문이 돌았던 듯하다. 그런 소문의 일부가 전해져서 복음서나 사도행전 또는 교부의 글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후대의 우리로서는 "예수를 배반한 뒤 유다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4. 배신의 이유[편집]
가장 흔하게는 물욕에 눈이 멀어서 팔아넘긴 것이라 하지만, 이런 설명은 약간 부족하다. 좀 개연성이 떨어지고 석연치 않는 부분이 있다는 말.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겼다는 서술은 마태오의 복음서에만 나오고, 그마저도 유다가 배신을 하기로 결심하고 대사제들에게 가서 얼마를 주겠냐고 하자 제시한 값이다. 사실 이 가치도 알기 힘든데, 그냥 '작은 은 30[12] '이라고만 써 있지 화폐 단위가 안 써 있다. 당시에 통용되던 은전만 해도 드라크마, 데나리우스, 스타테르 등 다양하다. 하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들을 보면 거금도 아니고, 유대교 율법으로 성인 노예의 값에 불과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은전 서른 닢에 대한 기록은 구약성서를 읽다 보면 종종 나온다. 출애굽기 21장 32절에서는 남, 여종을 따지지 않고, 소(가축)가 뿔로 들이 받아서 노예를 죽게 한 경우 소의 주인은 30 세겔로 노예의 값을 지불하고 소는 돌로 내리쳐 죽인다는 구절이 있다. 즉 장성한 남자에게 율법상 목숨 값으로 줄 수 있는 최소 비용인 셈이다.
이럴 경우 문자 그대로 유다가 물욕에 눈이 멀었다고 받아들이기엔 석연찮은 부분이 생긴다. 아무리 물욕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공동체를 배신하고 그 수장을 팔아넘기는 행위는 대단히 위험한 행위이다. 정상적인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를 행하기 전에 충분한 대가를 달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제시받은 대가는 고작 노예 1명의 값 뿐인데도 유다는 이걸 순순히 받아들이고 배신을 결심했다는 것이다.[13][14]
따라서 성경을 저자의 의도가 담겨있는 문학으로 보는 신학인 성서비평학에서는 이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을 내놓는다. 첫째는 창세기의 요셉이 형제들에 의해 이집트로 노예로 팔려간 이야기를 모티브로 차용한 이야기라고 보는 것, 둘째는 즈카르야서 11장에서 '주님의 종'이 제사장들에게 경고하며 나를 믿으면 품삯을 달라고 했더니 제사장들은 겨우 은 30세켈만 줬고, 결국 '주님의 종'은 이스라엘을 망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차용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전자는 예수가 미리 천국에 가서 제자들을 기다릴 것을 암시하게 되는 것이고, 후자는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유대인들은 저주받을 것임을 암시하는 셈이다.
유다는 예수가 이스라엘의 혁명을 이끌어갈 것이라는 믿음에 의해 제자가 되었지만, 후에 자신이 생각하는 물리적 혁명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예수의 행보에 배신감이 들어 배반했다는 해석도 있다. 다만 끌려가는 모습을 본 직후 자신이 그저 무죄한 사람을 팔았다면서 예수를 팔아 받은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성전에 도로 던졌다고 한다. 후에 제사장들이 이 돈을 피가 묻은 돈이라 여겨 성전의 금고에 넣어두길 꺼렸기 때문에 바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무연고자, 나그네의 무덤으로 사용했다. 밭을 살 때 쓰인 돈의 출처를 따 지은 이 밭의 이름은 피밭(하켈다마하≒아겔다마).[15] 십자군 시대에는 이곳에 성 마리아 성당이 지어졌고, 그 후 성지에서 병자와 순례자들을 돌보는 일에 종사했던 기사수도회에 양도되면서 성지순례 도중 예루살렘에서 죽은 순례자들을 묻는 곳이 되었다. 현재는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원이 세워져 있다. 아이러니.
사탄이 들어갔다는 루가의 복음서와 요한의 복음서[16] 의 주장을 무시한다면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가져오는 자, 즉 이방인(로마 제국)을 물리치고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영토를 회복할 부흥 군주라고 인식되어 왔다. 메시아 신앙의 기원이 남유다 왕국과 북이스라엘 왕국이 모두 무너지고 장기간에 걸쳐 포로 생활과 외세의 지배를 받을 때 생성됐기 때문. 더불어 예수가 활동하기 100여년 전, 그리스 계열 헬레니즘 왕조들에게 이스라엘이 지배받을 때 유다 마카베오가 무장 봉기를 일으켜 마카비 전쟁을 통해 하스몬 왕조를 세워 이스라엘 독립왕국을 일으켰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이른바 진짜 메시아가 등장했던 셈.
다만 후에 하스몬 왕조에게 정복당한 에돔 출신 안티파트로스가 하스몬 왕조의 내분을 틈타 로마를 등에 업고 이스라엘의 실권을 장악했고, 안티파트로스의 아들인 헤롯이 하스몬 왕통을 단절시키고 새로운 헤롯 왕조를 열었다. 이 헤롯왕이 성경에 등장하여 갓난 아기들을 죽인 그 헤롯왕이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렸던 이유도 다윗왕의 자손인 메시아(=예수)가 새로운 다윗 왕조를 일으켜 이스라엘 왕조를 일으킬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17] 그렇기에 당시 유대인들에겐 메시아=카리스마 쩌는 무장봉기세력의 리더라는 인식이 있었다. 물론 이땐 예수뿐만 아니라 다른 메시아 후보들도 있었다. 누가 됐든 로마로부터 무장봉기를 통해 독립을 쟁취하면 메시아가 됐기 때문.[18]
그래서 12사도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 대부분도 예수가 그렇게 행동하리라 믿고 따라다녔을 것이다. 심지어 엄청난 기적 및 능력도 가졌으니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예루살렘 입성은 예수의 추종자들에게는 독립전쟁의 신호탄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를 지켜보던 유다는 아무리 보아도 예수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다음 2가지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다.
- 첫째, 예수를 의도적으로 위험에 빠뜨리면 예수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야훼의 아들'로서 초인적인 권세를 드러낼 것이며, 이를 통해 로마 제국에 대한 독립전쟁을 본격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을 가능성이다. 1961년도작 성서영화 <왕 중 왕>에서도 유다가 이런 논리로 예수를 배신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는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후 광야에서 사탄이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보라. 그대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천사가 당신을 보호해 줄 것이니까."라고 유혹한 것을 연상시킨다. 이에 대해 예수는 "주 하느님을 함부로 시험하지 말라." 하고 반박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수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으며 많은 창작물에서 이러한 구도를 차용하기도 했다. 한국 창작물 중에는 신돈에서 신돈과 원현의 관계가 이 해석에 따른 예수와 유다의 관계와 흡사, 아니 아예 빼다 박았다.
그러나 정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이런 해석은 낭설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정말로 유다가 끝까지 예수를 구원자라 믿으며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한 것이라면, 그가 십자가상 죽음 이전부터 예수가 수없이 언급한 부활의 결과를 보지도 않은 채 바로 자살을 하였다는 점이 설명되지 않는다.[19] 또한 예수를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던 사도들 중 하나인 유다가 그리스도교에서 금기시되는 자살을 하였을 리도 없다. 유다는 예수를 넘기려고 마음 먹은 시점에서부터 이미 타락하여 사도가 아니게 되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20]
- 둘째, 자신이 믿고 따른 예수가 이제 와 보니 글러먹은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로마 제국에 대한 반역) 혐의를 벗기 위하여 배신했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예수가 보통의 인간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는 것을 직접 본 제자라면 모순이 된다.[21]
유다가 예수를 따르기 전의 직업이 무엇이었는지는 성서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세리로 알려진 경우가 꽤 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사도들 가운데에서 회계를 담당하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또한 신학자들은 그가 금전욕이 많았던 자라 해석한다. 따라서 그가 정말로 금전을 탐하여 배신을 하였을 경우 또한 배제할 수 없다. 금전욕과 위 해석에서 언급된 예수에 대한 실망이 맞물린 결과라는 해석 또한 가능하다.
- 셋째, 2006년 복원된 유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유다에게 자신을 팔아넘겨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도구, 즉 예수가 메시아로서 완성되는 것을 도운 인물이란 내용의 설이 나온다. 이 메시아 완성설은 초기 기독교에서부터 제시된 것인데,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유다의 행동도 하느님의 의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유다의 배신은 그 자체로 예수의 대속을 완성하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었다.'는 식의 해석으로 오래된 철학적 문제기도 하다.
이사야서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초반에 소개되듯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반드시 필요했다. 세례자 요한은 처음 예수를 보았을 때 한 말이 '보아라,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는 주님의 어린 양이다' 이다(요한 복음서 1장 29절), 유대교 전통에서, 어린 양은 제물로 바쳐지기(살해당하기) 위해 준비된 제물이며, 그냥 자연사한 양은 제물로서의 가치가 없다. 죄를 그 짐승에게 전가시키고 죽이는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예수는 '단순히 죽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고전 유대교 의식에서 어린양이 번제로 바쳐지듯 '죽임을 당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로 간주되는데, 예수는 무죄한 존재였음에도 죄인들을 대신하여 저주를 뒤집어써야 했고, 죄의 결과인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해 이에 절망하며 고통을 맛봐야 했다. 즉 예수의 십자가형은 필연적이었으며, 여기서 성부는 죄를 뒤집어쓴 아들을 철저히 외면하고 짓밟히도록 놔두는 공의로운 면모를 만족해야만 인류의 구속을 할 수 있었다. 단순히 예수가 이 세상에 성육신하고 살다 갔다는 걸로 성립되는 게 아닌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누군가는' 예수를 죽여야 하며, 이스카리옷 유다는 '예수를 죽게 만든' 제 1 원인제공자였다.
그러나 이렇게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라 해서 그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성경 속 섭리에선 저들의 이기적인 동기로 임한 행동 역시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는 전능자의 지혜가 묘사된다. 이스라엘을 벌할 때 이방국가들을 이용하거나, 현대 그리스도인을 징계하기 위해 세상 사람들 간에 수치를 당하게 하거나 고난을 내리는 식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동시에 각자의 자기의지로 하고 싶은대로 행했을 뿐이므로 결국 심판의 대상이 된다. 제사장들이 예수를 제거해서 기존의 질서를 되돌리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지만 실은 그것이야말로 인류를 구원할 계획이었듯이, 모두가 자유의지로 살아가는 것 같은데 결국은 세상 만사가 창조자의 완벽한 통제 하에 있다는 역설은 유한한 지성을 가진 인간의 이해범위를 넘어서는 스케일의 신비이다.
예수에 대한 인식이 다른 이슬람[22] 에서는 이스카리옷 유다가 십자가에 예수(이슬람에서는 '이사'로 불림) 대신 못박혔다는 전승이 있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예수의 모습으로 변한 유다이고, 진짜 예수는 죽지도 않고 그냥 승천했다는 것.
5. 유다와 예수의 관계[편집]
우선 유다에게는 나자렛 예수가 스승인지, 아니면 작은 선교 그룹을 이끄는 리더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를 배신하고 산헤드린 공의회의 비뚤어진 카야파 파벌에게 팔아치운 것이 인간적으로는 비난받을 배신 행위라는 사실은 변함 없다.
그러나 자신을 배신할 유다를 기꺼이 제자로 받아들인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예수 본인의 결정이다. 예수의 짧은 인생 마지막 시기에 배신했다고 하지만, 예수는 그에게 회계장부를 담당하는 경리 역할을 맡겼다. 어지간히 믿고 신용한 것이 아니라면, 제자라고 해도 선교 그룹의 얼마 되지도 않는 소중한 자금을 맡길 리가 없다.
사실 크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직전의 인간관계는 처참한데, 어머니 마리아, 마리아 막달레나, 요한 등을 제외하고는 예수 그리스도 체포 후 뿔뿔히 흩어진다. 골육지친인 모친, 제자 둘을 제외하고는 추종자 오천명을 먹이던 놀라운 인기는 급격히 식어 들어갔다.[23] 그 베드로마저 예수를 세 번 부인했고,[24] 다른 제자들도 부활 이후 다시 모이기 전까지는 흩어져 있었다.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베드로나 유다나, 마리아와 요한,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를 제외한 다른 추종자들 모두 예수의 배신자인데, 그들 모두를 예수가 제자로 삼고, 무리의 일원으로 삼았다. 배신자마저 먼저 찾아가 거두려고 노력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베드로는 세 번 부인한 후 예수에게 세 번 사랑을 고백하면서 용서 받고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25] "을 받았지만, 유다는 그러지 못했다. 그의 말로를 자살로 검토한다면 회개하지 않고 인간적 죄책감에 빠져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된 것이고, 저주를 받아 병에 걸려 죽었다고 검토한다면 역시 회개하지 않은 채로 악에서 벗어나지 못해 저주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26] 만약 유다가 자살하지 않고 예수의 부활을 지켜보았다면 유다는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하는 가정을 해볼 수 있는데 아마 그랬다면 초기 기독교 최악의 적으로 등장했지만 개심하여 12사도를 능가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바울로의 역할이 그의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과 기독교 신자, 역사학자, 호사가들이 미치도록 알고 싶어하는 배신의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하지 않다. 위의 항목에서 배신의 원인을 분석했지만, 진짜 자세한 내막은 당사자인 예수와 유다만이 알 것이고 후세 사람들은 그저 추측만 할 뿐이다. 성경이나 여러 복음에서도 유다가 뜬금없이 스승을 팔아넘겼다고만 이야기하지, 그 계기나 자세한 과정에 대해서는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제자들 모두 그냥 별 생각 없이 있던 와중에 최후의 만찬에서 갑작스럽게 배신자 이야기가 나왔고, 유다는 그로부터 얼마 후 그들 곁을 떠나버려 제대로 그 내막을 아는 제자가 없다.[27]
6. 여담[편집]
독실한 기독교 신자 상대로는 굉장히 심한 욕이며, 기독교를 국교로 믿거나 실질적인 국교인 나라에서는 사용을 자제하는 게 좋을 정도다. 국내에서도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이 유다같은 놈아!'라고 하면 대단한 모욕이 된다. 정말 최선을 다하여 실드를 쳐준다고 하여도, '조국의 정치적 독립을 원했기에 예수를 배신한, 의도는 좋았던 사람'이 한계이다.[28] 이마저도 복음서의 저자들이 정말로 그런 의도에서 유다를 묘사했다고 볼 건덕지가 적으므로, 기독교 신자들과 문화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쭉 욕을 먹을 예정.
13이란 숫자가 재수없다는 속설의 원흉. 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와 열두 사도 중 13번째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최후의 만찬이 벌어진 식탁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인물이기 때문에, 13명이 앉은 식탁에서 제일 먼저 일어난 사람이 좋지 않은 최후를 맞게 된다거나 불길해진다는 속설이 있다.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가능한 한 13 자체를 피하는 편.[29]
7. 창작물에서[편집]
- 애니메이션 마왕 단테의 에피소드 제3화에서 이름이 언급된다.
-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지옥편에서는 지옥 밑바닥에서 카이사르를 배신한 브루투스, 카시우스와 함께 루시퍼에게 물어뜯기고 있다. 당시 시대상이 시대상이다보니 허리부터 물어뜯기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와 달리 예수를 배신한 죄로 가장 고통스럽게 머리부터 물어뜯기는 중이라고.
- 이탈리아 영화감독 프랑코 제피렐리(Franco Zeffirelli)의 미니시리즈 <나자렛 예수 (Jesus of Nazareth, 1977)>에서는 예수와 화해하고 싶다는 제사장 세력의 속임수에 넘어가 예수의 위치를 알려주었고, 나중에서야 자신이 미끼가 된 것을 알고 비통하여 자살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에서 유다는 예수가 히피적인 광신도들에게 휘말려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 믿고 있으며 날이 갈수록 더해지는 지나친 관심과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끝내 배신을 하게 되지만, 예수에게 가해지는 상상 이상의 폭력에 괴로워하다 자신을 악역으로 설정한 신을 저주하며 자살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사실상 해당 작품의 진 주인공.
- 니코스 카잔차키스 원작의 마틴 스콜세지 작품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도 등장한다. 배우는 하비 카이텔. 작중에서 유다는 예수를 위하여 험한 일을 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예수가 유다에게 자신을 로마에 밀고할 것을 끊임없이 부탁하자 유다는 이를 계속 거절하면서 "당신이 나라면 당신을 배신하라는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느냐?" 묻는다. 그러자 예수는 "아니. 그래서 아버지는 나에게 더 쉬운 일을 맡기신 거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일을." 하고 대답한다. 유다는 끝내 예수의 부탁을 들어준다.[30]
- 보르헤스의 소설 <Three versions of Judas>에서는 '유다가 사실 하나님이자 진짜 구세주'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기독교에서 육체적 쾌락을 거부하고 고행을 선택하는 것처럼, 천국의 행복을 거부하고 지옥을 택했다는 이야기. 기독교적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31]
- 데스노트 애니판 25화에서 L이 죽기 전에 빗속에 함께 서있다가 흠뻑 젖은 야가미 라이토의 발을 수건으로 닦아주는 장면이 있다. 작가 왈, 이 장면은 예수가 유다의 배신을 알면서도 발을 닦아준 것을 오마주한 것이라고 한다.
- 헬싱에 나오는 이스카리옷은 유다를 모티브로 해서 만든 비밀결사다. 다만, 여기서는 신의 뜻을 어둠 속에서 행했다는 쪽의 해석을 바탕으로 성립한 듯 하다. 작중 안데르센의 말에 따르면 사도(使徒)가 아닌 사도(死徒)로, 때가 오면 은화 30을 신전에 바치고 밧줄로 목을 멘 뒤, 지옥으로 내려가 740만 5926의 악귀[32] 와 싸울 거라고 여러모로 신을 위해서라면 살인조차 마다않는 광신도들다운 표어다.
- 만화 세인트☆영멘에서는 지옥으로 떨어졌다가 예수가 12사도에게만 줬던 (오리지널) 면죄부를 이용해서 구원받았다는 설정이다. 물론 죄가 죄인지라 한 장으로는 안 되고 다섯 장을 모두 사용해서. 이에 대해 붓다는 "그 배신이 이걸로 용서가 되는 거였냐?!"라며 황당해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면죄부는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지우개 도장으로 만든 어버이날 안마 쿠폰' 수준이기 때문.
- 이 이스카리옷 유다에 대한 인문학 책이 나왔었다. 제목은 <예정된 악인, 유다(원제: Judas: The Troubling history of the renegade Apostle)> 현재는 절판.
- GTA5에서 막판에 A엔딩을 선택하면 트레버 필립스가 죽으면서 마이클 드 산타와 프랭클린 클린턴에게 자신을 배신하고 죽이려 들자 "유다같은 새끼들"이라고 저주를 퍼부으며 불에 타죽는다.
- 모바일 게임 영원한 7일의 도시의 등장인물 이스카리오 역시 이스카리옷 유다에서 유래됐다.
- 만화 UQ HOLDER!에서는 여자로 등장한다. 본명은 이슈트 카린 오테지만 현재는 다른 이름으로 활동 중.
- Lobotomy Corporation의 ALEPH 등급 환상체 T-03-46은 탈출 시 T-01-45의 시계에 새겨진 12명의 직원을 사도라는 이름의 적대개체로 만드는데, 예외적으로 12번째 사도는 적대개체가 아니고 여전히 직원으로 취급되어 컨트롤할 수 있다. 그리고 이 12번째 사도가 T-03-03 환상체를 작업하면 T-03-46의 체력이 갈려나가며 순식간에 제압되고 사도들은 전원 자살한다. 12번째 이름이 시계에 새겨질 때 인용되는 문구가 요한서 6:70[34] 이라는 것을 보면 12번째 사도의 모티브는 유다인 듯.
- 2000년에 개봉했던 흔한 드라큘라의 2차 창작물 중 하나인 드라큘라 2000 이라는 영화[35] 에서는 최후에 드라큘라의 정체가 이스카리옷 유다라고 나온다. 은에 타격을 입는 이유가 예수를 은화 세닢에 팔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거라고.
- 죠죠의 기묘한 모험의 캐릭터 판나코타 푸고의 모티브였었다. 왜 과거형이냐 하면, 초기안에서는 푸고가 죠르노 일행을 배신하고 중간 보스가 되는 스토리로 가려고 했다가 암울해져서 포기했기 때문.
- 그래픽 노블 쥬다스(Judas)에서는 유다가 자살한 뒤 지옥에 내려가 겪는 이야기를 다룬다. 본작의 유다는 예수가 펼친 기적들과 현실 간의 괴리를 보면서 그를 원망하지만 나중에는 예수를 이해[36] 하고 용서하며, 예수가 부활한 뒤에는 지옥에 있는 다른 이들을 인도하게 된다. 이때 검은 색의 광배가 그려진 모습이 특징.
- 다음웹툰 중 월요일에 연재되는 그라티아의 등장인물인 사신 진오기가 유다라는 세례명을 가지고 악마들과 인간들을 배신하였다.
- 아이작의 번제의 캐릭터 중 하나로 구현되었다. 은화 세닢에 판걸 반영해서 처음부터 동전 3개를 들고 시작한다. 또한 악마와 거래를 해야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인 벨리알의 서를 기본템으로 들고 시작하며 체력도 1칸으로 다른 캐릭터보다 낮다. [38]
- 영화 세계사에서 예수와 다른 제자와 함께 등장한다. 최후의 만찬을 갖던 중 예수가 이 자리에 배신자가 있다고 말하고, 웨이터가 주문을 받기 위해 큰 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크게 놀란다.
- 창세기전 외전 서풍의 광시곡에 등장하는 이스카리옷의 이름의 유래도 이 사람. 정확하게는 출신 지역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