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코 후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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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날 때부터 나는 불행했다. 요코하마에서, 야마나시에서, 조선에서, 하마마쓰에서 나는 언제나 학대를 받았다. 나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지금 과거의 모든 것에 감사한다. 나의 아버지에게도, 어머니에게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도, 외삼촌 이모에게도, 아니 나를 부유한 가정에 태어나지 않게 하고 가는 곳마다 생활의 모든 범위에서 괴롭힐 만큼 괴롭혀준 나의 전 운명에 감사한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나의 아버지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나 외삼촌 이모 집에서 아무 어려움 없이 컸다면 아마 나는 내가 그렇게도 미워하고 경멸하는 그런 사람들의 사상이나 성격이나 생활을 그대로 받아들여 결국 나 자신을 찾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명이 나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은 덕에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지금 확실히 알았다. 지금 세상에서는 고학 같은 것을 해서 훌륭한 인간이 될 턱이 없다는 것을. 아니 그뿐이 아니다. 소위 훌륭한 인간만큼 하찮은 것도 없다는 것을. 남들이 훌륭하다고 하는 일에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나는 남들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의 진정한 만족과 자유를 얻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아닌가. 나는 나 자신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타인의 노예로 살아왔다. 너무나 많은 남자의 노리개였다. 나는 나 자신의 삶을 살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나 자신의 일을 말이다. 그러나 그 나 자신의 일이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알고 싶다. 알아서 그것을 실행하고 싶다.
1. 개요[편집]
일본의 아나키스트이자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추서된 일본인 독립유공자[4] 이며 박열의 아내다. 한국명은 박열의 성에 후미코를 한국 한자음으로 읽은 '박문자'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지 이틀 만에 치안 경찰법에 근거한 예비 검속으로 남편[5] 박열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다이쇼 덴노와 히로히토 황태자의 암살을 계획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천황의 명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우쓰노미야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의문사하였다.[6]
2. 생애[편집]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사에키 후미카즈(佐伯文一)는 히로시마현 아키군의 사족 집안 출신으로 일본제국 경찰로 근무하면서 야마나시현 히가시야마나시의 소마구치(杣口)에 머물다가 농민의 딸이었던 가네코 도쿠노(金子トクノ)와 결혼하였다. 아버지는 어머니 외에 다른 여자와 불륜 관계를 맺는 등 가정을 돌보지 않았으며 결국 술과 도박에 빠져 경찰 자리에서 파면되는 바람에 후미코는 여러 곳을 전전하는 불우한 가정 환경 속에서 자랐다. 부모가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사이라 사생아나 다름없었던 후미코는 출생신고도 안 되었으며[7] 소학교에 입학할 수조차 없었다. 때문에 어릴 적부터 호적에 없다는 까닭으로 비국민 취급을 받으면서[8] 큰 상처를 입었는데[9] 이것이 후일 후미코가 아나키스트가 되는 데 영향을 끼친다.
사실혼 아내와 자식들[10] 을 호적에 올려주지 않았고 후미코의 어머니가 사생아로나마 호적에 올리겠다는 것도 체면 상한다며 반대한 데다 학교에 못 가는 자식들에게 자신이 대신 무언가를 가르치는 일도 없었고 직장에서 짤린 후 아무 일도 안 하고 술과 노름에만 빠져 지내는 등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했던 아버지는 처제(후미코의 이모)와 눈이 맞아 불륜을 저지르다가[11] 가출하였고 어머니도 이런저런 다른 남자와 동거하기 시작했다. 후미코는 이 과정에서 아버지의 가정폭력을 목격하고 어머니의 동거남들에게 학대나 절도[12] 를 당하는 등 고생했다. 심지어 갈수록 어려워지는 형편에 세간살이를 팔아 생활하다 더 팔 것도 없어지자 집에 남은 '마지막 물건'(본인의 표현이다)이 되어 어머니 손에 사창가에 유녀로 팔려갈 뻔한 적도 있었다. 생각에서 그친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인신매매 업자 앞에 애를 데려다 놓기까지 했으나 그나마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가 마음을 바꾸면서 매춘부 신세는 면했다.
후미코가 8살 때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새아버지 고바야시 나가요시의 고향 야마나시현 기타쓰루(北都留)로 갔고 이때 이부 여동생이 태어났지만 어머니는 이 남자와도 곧 헤어졌고 삼촌과 함께 어머니의 친정 가네코(金子) 가문이 있는 히가시야마나시군 스와촌 오아기 소마구치(같은 군 마키오카, 현 야마나시시)에 가서 자랐다. 어머니는 잡화상 후루야 쇼헤이와 재혼하면서 후미코를 떼어놓고 가는 바람에 결국 어머니에게도 버림받은 후미코는[13] 외삼촌 집에 맡겨져 자랐다. 그리고 9살 때 자식이 없던 고모(생부의 여동생) 사에키 가메가 결혼한 남자, 즉 고모부 이와시타 케이세이치로(岩下 敬三郎)의 집에 입양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로 인해 겨우 호적을 얻기는 했으나 친부모가 아닌 외조부의 5녀로 입적되었다. 하지만 사위의 집에 살던 후미코의 친할머니는 손녀를 조선으로 데려오는 과정에서 거친 환경에서 자라나 말과 행동이 공손하지 못하고 성격도 비뚤어진 데가 있는 후미코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고(그건 후미코의 잘못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결국 입양 이야기는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학교 성적표 등 공식 서류에 적힌 이름은 몇 달 만에 어느새 '이와시타 후미코'에서 '가네코 후미코'로 원상복구되어 버렸고 후미코를 집안의 후계자는커녕 손녀로도 인정하지 않은 할머니는 고모와 함께 후미코를 식모처럼 부려먹으며 학대했다. 더 이상 양녀가 아니지만 떠맡게 된 아이에게 시킬 일은 식모 노릇뿐이었다. 고모부와 고모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근무하다가 사망 사고 책임을 지고 사직한 후 조선에서 지주로 살고 있었는데 이들도 마찬가지로 후미코를 조카로 인정하지 않고 시시때때로 모욕을 주거나 정신적으로 학대하였다. 주변에서는 이를 모르지 않았으나 고모네 집이 그 지방 유지였던지라 이웃들도, 다른 친척들도, 학교 교사도 모두 모른척하며 누구도 이 점에 대해 항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나마 소학교(초등학교)까지는 졸업시켜 줬으나[14] 이것도 단지 '애를 데려와 놓고 소학교도 안 보낸다더라, 저 집 형편이면 수업료가 비싼 것도 아닌데' 운운하는 수군거림을 자기네가 듣기 싫어서였다. 후미코가 아니라 자기 체면을 위해서. 조선에 와서도 친척들에게 학대를 받자 후미코는 자살을 생각하기까지 했으나 그런 갑갑한 친척들과 살던 일본인 마을과 달리 우연히 간 조선인 동네에서는 후미코를 차별하지 않고 똑같은 아이로 대우하였고 굶주린 후미코에게 먹을거리를 내주기도 하는 등 따뜻이 대우하였다.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을 좋게 볼 리야 없었겠지만 학대받으며 굶주린 어린아이까지 그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배척하지는 않았던 것이다."뭐, 조금 아는 집 아이예요. 아무튼 너무 가난한 집 자식이라서 예의범절도 모르고 말 같은 것도 얼마나 상스러운지 얼굴이 화끈거립니다만 너무 불쌍해서 데려왔지요."
후미코를 본 이웃집 여자에게. 후미코가 듣는 면전에서.
1917년 부강공립고등소학교를 졸업한 뒤 후미코는 약 2년간 완전히 식모로 전락해 집안일만 하며 살다가 1919년 조선에서 일어난 3.1 운동을 목격하고 "권력에 대한 반역 정신이 일기 시작하여 남의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감격이 가슴에 솟아 올랐다."고 한다.[15] 이렇게 후미코는 조선인의 처지에 자신의 처지를 투영하여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에 깊이 공감했다. 후미코는 7년 만인 1919년 4월 12일에 고모 집에서 쫓겨나 일본으로 돌아왔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자신들을 위해서였다. 슬슬 후미코도 나이가 차서 시집보낼 곳을 알아봐야 할 때가 되어가는데 그러면 돈이 안 들 수가 없고 자기네 돈 들이기 싫으니까 고향으로 돌려보내 외갓집으로 떠넘긴 거다. 시집 안 보내고 집안 식모로만 들어앉힌 채 나이먹어 가게 하자니 그건 또 자기 체면이 상하고.(...)[16] 어머니의 집으로 찾아갔으나 어머니는 그 때까지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하지 못해 여러 남자들과 결혼했다가 다시 이혼하고 재혼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후미코는 아버지를 다시 만나기도 했으나 아버지는 외가와 짜고 후미코를 돈이 많은 스님인 작은외삼촌[17] 과 강제로 혼인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반발을 품은 후미코가 학문에 대한 관심이 강해지고 야마나시에서의 생활에 염증을 느끼면서 완전히 독립하여 부모 양쪽 모두와 헤어지고 1920년 4월 도쿄로 상경했다. 도쿄로 상경한 후 작은외할아버지 구보타 가메타로의 집에 머물면서 우에노(上野)에서 신문팔이, 가루비누 노점상과 행상, 식모살이, 식당 종업원 등 여러 일을 하면서 고학 생활을 이어나갔다. 이때 사회주의자들과 교류를 시작했고 일하면서 마사노리(政則) 영어 학교와 겐슈 학관을 다녔다. 3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사귄 친구의 소개로 사회주의와 러시아 혁명에 대한 책을 접했고 이에 큰 영향을 받았다.
후미코는 1920년 7월부터 1921년 10월까지 위에 서술한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계속 사회주의 책과 잡지를 탐독했다. 기독교와 사회주의, 아나키즘을 접했는데 기독교에는 실망하고 사회주의에는 처음에는 관심을 갖고 공부했지만 결국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상처만 받으며 실망했다. 이쪽 계열인 남자들을 2명 정도 만나 짧은 연애도 해 봤지만[18] 결국 먹버만 당하며 환멸을 느끼는 등...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단호한 거부의 자세를 보였다. 공산주의 세상이 되어도 권력자가 교체되는 것일 뿐 민중들에게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19] 1921년 여름 유학과 기타 이유로 도쿄에 머물고 있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원종린, 정우영, 김약수, 정태성 등)과도 교류를 시작하였다. 1921년 11월 후미코는 작은외할아버지 집에서 독립해 유라쿠초에 있는 사회주의자들이 모이던 이와사키(岩崎) 오뎅집의 종업원으로 들어갔다. 낮에는 손님을 접대하고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녔다.
1922년 2월 후미코는 정우영의 하숙에서 그가 발간준비를 하던 잡지 <청년조선>의 교정쇄에서 박열의 시 '개새끼'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그 후 정우영의 하숙집에서 우연히 박열과 마주치고, 그가 바로 박열이라는 걸 알게 된 뒤 정우영에게 소개를 부탁한다.나는 그 시를 읽었다. 이리도 힘 있는 시가 있으랴. 한 구절 한 구절이 내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것을 다 읽었을 때 나는 정말이지 황홀할 정도였다. 내 가슴의 피가 뛰고 있었다. 어떤 강한 감동이 나의 전 생명을 고양하고 있었다.
(중략)"난 이런 시를 본 적이 없어요.(중략) 어디가가 아니에요. 전체가 좋아요. 좋다는 게 아니라 그냥 힘이 있어요. 나는 지금 오랫동안 내가 찾고 있었던 것을 이 시에서 찾은 듯한 기분이에요."
한 달여가 지난 3월이 되어서야 박열은 오뎅집으로 후미코를 찾아왔다. 박열과 교제하기 시작한 후미코는[20] 그의 사상에 공명하여 아나키스트가 되었고 5월부터 동거를 시작했으며[21] 동거남 박열을 따라 박열이 조직한 사회주의자 모임인 '흑도회(黑濤會)'[22] 에 가입했다. 그리고 7월 10일 박열과 함께 흑도회 기관지 <흑도>를 창간했고 한 달 뒤 2호를 냈다. 그러나 흑도회는 9월 사회주의자로 이루어진 '북성회(北星會)'와 아나키스트들로 이루어진 '흑우회(黑友會)'[23] 로 분열되었고 후미코는 박열, 홍진유, 박흥곤(朴興坤), 신염파(申焔波), 서상일(徐相一), 장상중(張祥重)이 함께 조직한 흑우회에 김중한(金重漢), 니야마 하쓰요(新山初代), 구리하라 가즈오(栗原一男)와 함께 가입했다. 11월에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대담한 조선인(太い鮮人)>[24] 이라는 운동지를 발간했다.무엇인가가 내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무엇인가가 내 마음속에서 태어나고 있었다.
그 사람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저토록 그를 힘차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찾아내고 싶었다. 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중략)-그렇다, 내가 찾고 있던 것, 내가 하고자 하는 일, 그것은 확실히 그의 안에 있다. 그 사람이야말로 내가 찾고 있던 사람이다. 그 사람이야말로 내가 할 일을 갖고 있다.
알 수 없는 환희가 내 가슴속에서 솟아올랐다. 흥분하여 나는 그날 밤에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1923년 4월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불령사'를 조직하였는데[25] 3월부터 살기 시작한 도쿄 도요타마군 요요기 도미카야의 집을 본거지로 정하고 5월 27일에 불령사 첫 모임을 가졌다. <대담한 조선인>을 '현사회(現社會)'라는 제목으로 바꿨고 후미코는 이 잡지에 계속 글을 실었다. 6월에는 당시의 저명한 아나키스트였던 모치쓰키 가쓰라와 가토 가즈오의 강연회를 열고 일본의 노동운동가인 나카시니 이노스케의 출옥 환영회도 개최했다. 6월 30일에는 현사회 4호가 간행되었고 8월 11일에는 불령사 6차 정례회의가 박열의 집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박열이 이전부터 은밀히 추진했던 폭탄 입수를 둘러싸고 김중한과 박열의 사이가 나빠지자 불령사는 점점 갈등이 커졌고 1923년 8월 흑우회가 해산되자 니야마 하쓰요와 김중한은 불령사를 나와 자신들만의 잡지를 발행하였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고 조선인 학살이 벌어진 지 사흘째인 9월 3일 후미코는 박열과 예비 검속을 핑계로 경찰에 연행되었는데 하루만에 경찰범처벌령에 따라 구류가 연장되었다. 수사 도중 폭탄 입수 계획이 밝혀지자 일본 당국은 10월 20일 형법 73조(대역죄) 위반으로 두 사람을 기소하였다. 처음에는 치안경찰법 위반으로 불령사 동인들을 포함한 16명을 기소했으며 일본 정부는 조선인 대학살 사건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이 '불령선인의 비밀결사 사건'을 대대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당시 후미코는 예심 신문에서 "다이쇼 덴노는 병자이기 때문에 히로히토 황태자를 엿보려 했다 황족과 정치 실권자에게 폭탄을 투척하기 위해 박열과 논의한 후 김중한에게 상하이에서 폭탄을 입수해 달라는 의뢰를 한 적이 있다"고 했지만 실행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은 밝혀지지 않았다. 수사를 받으며 권력에 대한 후미코의 반감은 더욱 강해졌으며 다른 불령사 동지들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계속 수사를 받았다. 결국 1924년 2월 14일 박열과 후미코, 김중한이 폭발물단속벌칙 위반 혐의로 추가 기소되었고 다른 불령사 동인들은 불기소되었다.
1925년 5월 4일 예심판사 다테마스 가이세이는 이 사건은 대심원 관할로 넘어간다며 후미코에게 전향을 요구했지만[26] 후미코는 전향을 거부했다. 이 해 여름부터 옥중 수기 집필을 시작했고 7월 17일 기소되었다.
위의 법정 사진이 공개되자 일본 사회는 또 다시 발칵 뒤집혔다. 중범죄자라기엔 너무나 자유분방하고 당당한 모습의 사진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을 촬영한 사람은 담당 판사 다테마스 가이세이였는데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회유하려고 촬영한 것이라고 한다. 이 일로 인해 다테마스 가이세이[28] 는 해임되었고 1927년 당시 일본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총사퇴에도 영향을 줄 정도였다.
1926년 2월 26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린 첫 공개 공판에서 조선 예복과 사모관대를 입고 출두한 박열은 이름을 묻는 재판장에게 조선어로 "나는 박열이다"라고 답했으며 후미코도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박문자"라고 말했다. 1926년 3월 23일 두 사람은 도쿄 우시고메구청에 혼인신고를 제출하며 옥중 결혼했고 후미코는 박열의 호적에 들어갔다. 이틀 후인 25일 열린 최종 판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박열은 "재판은 유치한 연극이다"며 재판장을 질책했고 후미코는 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불과 11일 후인 4월 5일 천황이 명하여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후미코는 4월 8일부로 우츠노미야 형무소 도치기 지소로 이감되어 복역하던 중 7월 23일 향년 23세에 의문사하였다. 일본은 후미코의 사인이 자살이라고 하였으나 일본의 발표에 의구심을 품은 후세 다쓰지 변호사와 흑우회, 불령사의 동료들은 후미코의 어머니와 함께 도치기현 시모츠카군 이에나가촌 갓센바의 형무소 공동묘지에 가매장된 후미코의 시신을 확인해 보았다. 하지만 사인을 밝혀내지 못한 채[29] 결국 유해를 화장했다. 일본은 후미코 추모 열풍이 불 것을 염려하여 후미코의 어머니[30] 와 동료들을 검속하기도 했다. 8월 1일 후세 다쓰지의 집에 보관해 두었던 유골을 경찰이 강제로 탈취해가기도 했다. 법적으로 후미코는 박열의 아내였기에 8월 16일 박열의 형 박정식이 자신의 장남 박형래를 데리고 경북 상주에서 직접 와서 후미코의 유해를 모셔가려 했지만 일본제국 경찰은 유골을 직접 주지 않고 조선의 경찰서로 보냈다. 상주경찰서에서 유골을 인수받은 박정식은 박열의 고향이자 선영인 경상북도 문경군 문경면 팔령리에 후미코의 유해를 매장하였다.
박열은 22년 2개월 동안 복역한 끝에 8.15 광복 이후인 1945년 10월 27일 석방되었으며 한국인 여성과 재혼해 자식도 낳았지만 이후에도 일찍 죽은 그녀를 잊지 않고 후미코의 기일마다 집안 내에서 묵상을 하는 등 추모 분위기를 가졌다고 한다. 1973년 7월 23일, 즉 47주기에는 문경 팔영에 있는 묘소에서 묘비 제막식이 거행되었고 사망 50주기인 1976년 3월 야마나시현 마키오카 소마구치에 있는 후미코의 생가 터에 가네코 후미코를 기리는 '금자문자비(金子文子碑)'가 세워졌다. 후미코의 묘는 본래 주흘산에 있는 박열 집안의 선산 지역 문경시에 있었는데 2003년 박열의 생가가 있던 곳에 '박열의사기념관'을 세우면서 후미코의 묘를 기념관 경내로 이장했다.
후미코가 남긴 원고는 동료 구리하라 가즈오가 정리하여 시집과 자서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何が私をこうさせたか)>로 출간되었다(본 문서 인용문들의 출처). 이 자서전에는 '아 이렇게 지지리 복도 없는 인생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혹한 환경이었던, 불꽃처럼 살았다기보단 아프게 살다 간'[31] 그녀의 반생, 아플 만큼 아팠고 외로울 만큼 외로웠으며 '태어났다'가 의미하는 어떤 축복도 갖지 못한 채 태어나서 오히려 세상에 '버려졌다'고 해야 할 끔찍한 운명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전 생애를 보낸[32] 후미코의 짧은 삶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첫 출간은 사망 5년 뒤인 1931년 7월 10일이다. 첫 기억이 시작되는 4살 어린 시절부터 박열과 만나 동거생활을 시작하기 직전까지를 다루고 있는 이 수기는 한국에는 2012년에야 정발되었는데 원제대로 출판된 버전도 있고 <나는 나>또는 <독립운동가 박열을 사랑한 가네코 후미코의 불꽃수기>로 제목이 바뀌어 나온 버전도 있지만 내용은 모두 같다. 출판 당시에는 그다지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으나 영화 박열의 상영을 계기로 주목받았다.
철학자 쓰루미 슌스케는 후미코의 옥중 수기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이 수기는 번역서에서 떼어낸 추상어로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고 15년의 전쟁을 겪고도 별로 변하지 않았던 오늘의 일본 지식인들의 허를 찌른다.
중대한 사상이 정규 교육제도 안에서 근면한 학습을 통해서만 세워진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가네코 후미코의 수기는 누군가 대신 써준 위서처럼 보일 것이다. 누가 써주었는가 하면 일본의 국가가 쓰게 한 것이고 국가에 대해 혼자 맞선 그녀가 이 수기를 쓴 것이다.
3. 기타[편집]
- 소설가 김별아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다룬 소설 "열애"(2009)를 출간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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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맞이하여 가네코 후미코 여사가 생을 마감한 지 92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게 됐다. 박열의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 92년 만 독립유공자 인정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이 훈장은 일본 현지의 친족이 보관하였다가 2019년 7월 23일 후미코 추도식[33] 에 맞춰서 추모 단체인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를 통해서 문경의 박열의사기념관에 기증하였다.
- 2023년 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