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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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담 당시의 사진. 왼쪽부터 장제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 쑹메이링[1] 이다.
1. 개요[편집]
대한민국 25년(1943) 11월 23일부터 26일까지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영·중 3국 정상들이 모여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3국 정상들은 "한국인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 독립하게 할 것을 결의"했고, 이를 12월 1일 선언했다. 한국은 당시 연합국으로부터 독립을 보장받은 유일한 국가로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이 거둔 가장 큰 성과였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공식 소개문
1943년 11월 22일부터 11월 26일까지 연합국 측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총리, 중화민국의 대원수[2] 의 카이로 회담의 회의를 개최하고 회담에서 합의한 내용을 선언으로 1943년 12월 1일에 발표되었다. 5일 동안 이루어진 회담 이후 발표된 선언문에서 연합국 정상들은 승전하더라도 더 이상 영토 확장을 도모하지 않을 것을 명시했고 일본이 제1차 세계 대전 후 점령한 영토나 과거 중국으로부터 침탈한 영토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연합국이 최초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의 영토 방침을 공식화한 선언이다.
이 선언으로 한국에 대해서 종전 이후 앞으로 자유독립국가로 승인할 결의를 하여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보장을 받았다. 그러나 구체적인 기한이나 절차에 대한 언급은 없었으며 '가능한 가장 이른 시기에'라는 초안에서 '적절한 절차로'(in due course)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내용으로, 한국 독립에 있어선 초안보다 더 불리해진 상태로 발표되었다. 왜냐하면 이 '적절한 절차'는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이 아닌 연합국의 신탁통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인 홉킨스는 미-중 정상회담 직후 한국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초안문구를 마련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초안 문구는 이후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속적인 수정을 거쳤다."우리는 일본에 의한 한국인들의 비참한 노예상태를 기억하고 일본 패망 후 가능한 가장 이른 시기에 이 나라가 자유 독립국이 되도록 결의하였다."
We are mindful of the treacherous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by Japan, and are determined that that country, 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 after the downfall of Japan, shall become a free and independent country
먼저 양국이 합의안 초안을 받은 영국은 가해주체인 일본과 노예상태의 정도에 대한 묘사인 비참한이라는 표현을 삭제하여 문구의 모호성이 더해졌다. 영국이 식민지 독립 문제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인 것은 전쟁 이후 자국 식민지에 끼칠 영향을 염려했기 때문으로 평가받는다.[3] 영국 정부는 기본적으로 한반도 문제에 무관심했고 퀘백 회담 당시에 신탁통치를 통한 식민지 처리 방안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영국 정부 역시 연합국이 한반도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것을 최대한 지연하려 했다.[4]
여기에 한국의 독립에 신탁통치 기간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한 루스벨트의 의중으로 인해 "가능한 빠른 시일에"라는 표현이 "적절한 시기에"라는 문구로 수정되었고 식민지 독립 문제에 가장 소극적이었던 영국 측 "적절한 절차를 거쳐"라는 표현을 첨가함으로써 독립 시기는 더 모호하게 바뀌었다.
이때에 E. C. 카우스 주중대사가 미 국무성에 보낸 보고서를 보면 한국 지도자들의 반응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언급이 나온다.[5]
한국의 장래의 지위에 관하여 워싱턴에 가있는 한국위원회의 이승만 씨가 나에게 보내온 10월 18일[6]
자 서한의 사본을 동봉합니다. 이승만 씨는 소련 극동군의 일부가 소련 정부에 의해 훈련되고 보급된 한국인 집단으로 이루어졌으며, 결국에 소련에 의하여 한국을 침공하고 소련에 가맹하는 소비에트 공화국을 그곳에 수립하기 위하여 사용될 것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현재 중경에 있는 이른바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나는 소련이 대일전쟁에 가담하게 되면 현재 시베리아에 있는 한국인 사단이 한국 침공에 사용될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중국 내에서 그들간에 끊임없이 논쟁을 거듭하고 있는 직업적 혁명가들의 이른바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이 이승만 씨가 예측하는 사태를 방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나는 이승만 씨에게 회답은 내지 않을 생각입니다.
중경에 거하는 한국인의 두 주요 분파 대표들이 12월 4일 우리 대사관을 방문하고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에 관계된 부분 중의 "In Due Course"란 어구의 설명을 요청하였습니다. 최초 한국인의 반향은 무조건 동의(同意)였지만, 중국 신문에 나타난 「적당한 시기」라는 번역과 중경에서 퍼지고 있는 전후 한국은 중국의 위임통치하에 두어질 것이라는 풍문은 이미 한국인들을 어정쩡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과 카이로 성명을 축하하려는 한국인의 집회 예정은 그 공식 원문이 발표되자 취소되었다는 것, 또 그들은 이제 중국 외교부 왕청휘 씨[7] 로부터 그 어구의 해석을 얻으려 한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동 한국인 대표들은 한국의 전후 지위에 대한 중국의 의도에 심각한 우려의 뜻을 표명하였으며, 일본은 이 '조건부 성명'을 한국 및 점령 지구에서 연합국이 한국을 중국의 지배하에 두려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하여 선전 자료로 이용하리라고 보고 있었습니다.
중국 신문 대공보(大公報)는 12월 3일, 카이로 선언에 대한 한국민의 기쁨을 표명하고 연합제국이 이제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한국군에게 무기대여법에 의한 군사원조를 공여해줄 것을 요청한 한국 임시정부 외교부장의 성명을 보도하였습니다만, 이 성명은 해당 신문에서 카이로 선언의 원문이 발표되기 전에 보도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카이로 회담과 선언문은 각 열강의 군사적, 국제정치적 이해관계와 입장차이의 조율된 결과인 만큼, 선언문의 표현은 모호할 수 밖에 없었고 식민지의 피지배 국민에게 독립의 희망을 주었음에도 그 희망이 불완전했다는 이중적인 성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할 수 있다.[8]
카이로 선언에 언급되지 않은 일본의 영토였던 류큐 열도나 오가사와라 제도도 일본 제국 분할의 일환으로 미군정의 오랜 통치를 거친 이후에야 일본에 반환되었다.[9]
2. 전문[편집]
2.1. 영어[영문][편집]
President Roosevelt, Generalissimo Chiang Kai-shek and Prime Minister Churchill, together with their respective military and diplomatic advisers, have completed a conference in North Africa.
The following general statement was issued:
"The several military missions have agreed upon future military operations against Japan. The Three Great Allies expressed their resolve to bring unrelenting pressure against their brutal enemies by sea, land, and air. This pressure is already rising.
"The Three Great Allies are fighting this war to restrain and punish the aggression of Japan. They covet no gain for themselves and have no thought of territorial expansion. It is their purpose that Japan shall be stripped of all the islands in the Pacific which she has seized or occupied since the beginning of the first World War in 1914, and that all the territories Japan has stolen from the Chinese, such as Manchuria, Formosa, and The Pescadores, shall be restored to the Republic of China. Japan will also be expelled from all other territories which she has taken by violence and greed.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With these objects in view the three Allies, in harmony with those of the United Nations at war with Japan, will continue to persevere in the serious and prolonged operations necessary to procure the unconditional surrender of Japan."
2.2. 중국어[중문][편집]
羅斯福總統、 蔣委員長、邱吉爾首相偕同各該國軍事與外交顧間人員、在北非舉行會議已完畢,並發表概括之聲明如下:
三國軍事方面人員,關於今後對日作戰計畫,已獲得一致意見。我三大盟國決心以不鬆弛之壓力,從海空各方面加諸殘暴之敵人,此項壓力已經在日益增長之中。
我三大盟國此次進行戰爭之目的,在於制止及懲罰日本之侵略。三國決不為自己圖利,亦無拓展領土之意思。三國之宗旨,在剝奪日本自從一九一四年第一次世界大戰開始後,於太平洋上所奪得或占領之一切島嶼,在使日本所竊取於中國之領土,例如東北四省、臺灣、澎湖群島等歸還中華民國。其他日本以武力或貪慾所奪取之土地,亦務將日本驅逐出境。我三大同盟國稔知朝鮮人民所受之奴役待遇,決定在相當時期使朝鮮自由與獨立。
根據以上所認定之各項目標,並與其他對日作戰之聯合國目標一致,我三大盟國將堅守進行其重大而長期之戰爭,以獲得日本之無條件投降。
2.3. 한국어[한글][편집]
루즈벨트 대통령, 장개석(蒋介石) 위원장, 처칠 수상은 각자의 군사, 외교전문과 함께 북아프리카에서의 회의를 마치고 이와 같이 발한다.
수차에 걸친 군사 관계 회의에서 일본을 상대로 한 앞으로의 군사작전들에 관해 상호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세 연합국(聯合國)은 잔인 무도한 그들의 공동의 적국들에게 해상과 육지와 그리고 영공을 통한 지속적인 압박을 가한다는 그들의 결의를(命)했다. 그와 같은 압박은 이미 가중되고 있다. 세 연합국은 일본(日本)의 침략을 제지하고 응징하기 위해 이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며, 또한 영토 팽창을 위한 야심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의 목적은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래 일본이 강탈했거나 점령해 온 태평양의 모든 섬들을 몰수하는 데 있으며, 또한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탈취한 모든 영토를, 예를 들면 만주, 대만, 팽호 열도[10]
등을 중국에 반환하는데 있다. 일본은 또한 폭력과 탐욕에 의해 탈취한 모든 다른 영토들로부터도 추방당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이 세 강대국은 한국민(韓國民)이 노예적인 상태에 놓여있음을 상기하면서 한국을 적당한 시기에[11][12]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로 만들 것을 굳게 다짐한다.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세 연합국은 일본과 싸우고 있는 다른 국가들과 보조를 맞추어 가면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는데 필요한 진지하고도 장기적인 군사 행동을 지속적으로 감행해 나갈 것이다.
3. 기타[편집]
-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의 영유권을 놓고 한창 논란인 지금,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의 중화민국 모두 이 곳에 관한 자신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 중 하나가 바로 이 카이로 선언이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여 맺어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으로 넘어간 영토 중 센가쿠 열도(댜오위다오)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일본은 전쟁과 상관없이 무주지를 편입한 것이라면서 무시하고 있다.
- 천수이볜 전 중화민국(대만) 총통은 총통 퇴임 직후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와 가졌던 인터뷰에서 카이로 선언에 이를 발표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총리, 장제스 당시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의 서명이 없다는 근거를 들어 법적 효력을 갖지 않는 성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는 카이로 선언으로 타이완 섬이 중화민국의 영토가 되었고, 따라서 그 후신인 중화인민공화국이 타이완 섬을 영유해야 한다는 당시 원자바오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의 주장을 반박하려는 목적으로 발언한 것이다. 다만 이건 처벌을 회피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 천수이볜뿐만 아니라 범록연맹 측 인사들 중 일부도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다. 카이로 선언에는 법적 효력이 없고, 이후 포츠담 선언에서는 일본의 영토가 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규슈 및 그 근해 도서로 제한된다고만 규정했고, 타이완 섬의 귀속에 대한 규정을 따로 두지 않고 '카이로 선언은 이행되어야 한다'라고만 해두었기 때문에 타이완 섬을 일본이 포기한 것은 맞지만 어느 국가로 귀속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사항은 이 당시에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들의 근거이다.
- 장제스가 윤봉길 의사의 거사에 감명을 받아 이 카이로 선언에서 적극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다는 사료가 존재한다. 해당 자료는 중화민국(대만) 국민당 당사(黨史)위원회가 1981년 펴낸 ‘중화민국중요사료초편(初編): 대일항전시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의 전시 외교기록을 모은 이 사료에는 카이로 회담 중국 측 의제 초안과 장제스의 비서장 왕충후이(王寵惠)가 남긴 회담일지가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중국은 회담 준비 단계부터 한국 독립 승인을 중요 의제로 다뤘다. 실무부서인 군사위원회 참사실이 장제스에게 보고한 의제 초안에는 일본의 항복 이후 취할 조치로 ‘중국 영토 회복’ 항목 바로 다음 순서로 ‘조선 독립 승인’을 명시해 비중 있게 꼽았다. 한 교수는 “중국은 소련이 먼저 한국 독립을 승인해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상황을 막기 위해 한국 독립에 적극적이었던 측면도 있다”면서 “그럼에도 장제스를 직접 만난 임정 요인들의 외교가 카이로 선언문에 한국 독립 보장 조항을 포함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13]
- 조선 독립에 협력한 장제스의 언행과는 달리 중화민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한 적이 없다.장제스의 임시정부 승인 거부 과정 그러나 중화민국은 미국 측에 한국 임시정부 승인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다만 당시 미국은 임시정부를 포함한 어떤 단체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했으므로 이에 장제스는 미국의 협조 없이 중국이 독자적으로 임시정부 승인 문제를 처리하는데 주저하여, 결론적으로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지지하지만 적당한 시기가 될 때까지 유보한다"고 밝혔고 이후 이 방침에 근거해 "한국 임시정부 승인문제"를 처리하였다.[14] 다만 소련의 한반도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임시정부를 조기 승인하고자 했던 것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