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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희(1859)

덤프버전 :




조선귀족
朝鮮貴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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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작후작백작
완순군 · 의양군 · 창산군 · 청풍군 · 박영효 · 윤택영민영린 · 이완용 · 이지용[1]
자작
고영희 · 권중현 · 김성근 · 김윤식 · 민병석 · 민영규 · 민영소 · 민영휘 · 박제순 · 송병준 · 윤덕영 · 이근명 · 이근택 ·이기용 · 이병무 · 이완용[2] · 이용직 · 이재곤 · 이하영 · 임선준 · 조민희[3] · 조중응
남작
김가진[4] · 김병익 · 김사철 · 김사준 · 김영철 · 김종한 · 김춘희 · 김학진 · 남정철 · 민상호 · 민영기 · 민종묵 · 민형식 · 박기양 · 박용대 · 박제빈 · 성기운 · 윤웅렬 · 이건하 · 이근상 · 이근호 · 이봉의 · 이용원 · 이용태 · 이윤용 · 이재극 · 이정로 · 이종건 · 이주영 · 이항구 · 장석주 · 정낙용 · 정한조 · 조동윤 · 조동희[5] · 최석민 · 한창수
습작후작백작
이달용 · 이덕용 · 이덕주 · 윤의섭 · 박찬범 · 이병길고중덕 · 고흥겸 · 송종헌 · 이영주
자작
고희경 · 권태환 · 김호규 · 민병삼 · 민충식 · 민형식 · 민홍기 · 박부양 · 윤강로 · 이규원 · 이종승 · 이창훈 · 이충세 · 이택주 · 이해국 · 이홍묵 · 임낙호 · 임선재 · 조대호 · 조용호 · 조원흥 · 조중수[3]
남작
김교신 · 김덕한 · 김세현 · 김석기 · 김영수 · 김정록 · 남장희 · 민건식 · 민영욱 · 민철훈 · 민태곤 · 민태윤 · 박경원 · 박서양 · 박승원 · 성주경 · 윤치호 · 이규환 · 이기원 · 이능세 · 이동훈 · 이범팔 · 이병옥 · 이원호 · 이인용 · 이장훈 · 이중환 · 이풍한 · 장인원 · 정주영 · 정천모 · 조중구 · 조중헌 · 최정원 · 한상기
승작후작백작
이완용고희경 · 송병준
반납김석진 · 민영달 · 유길준 · 윤용구 · 이용구 · 조경호 · 조정구 · 조희연 · 한규설 · 홍순형
{{{-2 [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2] 1872년생 이완용(李完鎔)으로 1858년생 이완용(李完用)과 동명이인임. [3] 1927년 파산자로 선고되어 조선귀족령 제8조 1항에 따라 1928년 2월 29일부로 자작의 예우가 정지되었지만 자식이었던 조중수에게 자작 작위가 승작됨. [4] 1919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협조해 습작 불능 처리됨. [5] 재산 분쟁으로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 오등작일제강점기 조선귀족에 공작은 없었으며, 그에 준하는 작위와 관련한 정보는 왕공족 문서 참고. ※ 취소선 표시는 작위를 박탈당한 인물을 뜻함.
작위 박탈 사유 [ 펼치기 · 접기 ]
  • 윤치호 : 1913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됨에 따라 작위 박탈
  • 김사준 : 1915년, 조선보안법 위반 사건에 연루되어 작위 박탈. 신한혁명당의 간부 중 하나인 성낙형이 고종을 망명시키고자 했는데, 김사준이 이를 수락하고 실행에 옮기려다 일제에 발각되어 김사준을 비롯한 고종 망명 사건 관련자들 다수가 검거
  • 김윤식 : 1919년, 독립 청원서 제출로 인해 작위 박탈
  • 이용직 : 1919년, 독립 청원서 제출로 인해 작위 박탈
  • 민영린 : 1919년, 아편 흡입죄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 김병익 : 1919년, 아편 흡입죄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 민태곤 : 1941년 12월, 도쿄에서 조선민족독립운동 사건으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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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062861> 의장1 ||
||<width=20%>
초대

야마가타
이사부로 ||<width=20%>
제2대

미즈노
렌타로 ||<width=20%>
제3대

아리요시
주이치 ||<width=20%>
제4대

시모오카
주지 ||<width=20%>
제5대

유아사
구라헤이 ||
||
제6대

이케가미
시로 ||
제7대

고다마
히데오 ||
제8대

이마이다
기요노리 ||
제9대

오노
로쿠이치로 ||
제10대

다나카
다케오 ||
||
제11대

엔도
류사쿠 ||
||<-5><bgcolor=#062861> 부의장 ||
||
초대

김윤식 ||
제2대

이완용 ||
제3대

박영효 ||
제4대

민병석 ||
제5대

윤덕영 ||
||
제6대

이진호 ||
제7대

박중양 ||
||<-5>
[ 1910 ]

고문
고영희권중현민상호박제순송병준
이근상이근택이완용이재곤이지용
이하영임선준장석주조중응조희연
조민희한창수
찬의
강경희권봉수김만수김사묵김영한
남규희민상호박경양박승봉박제빈
박중양염중모유맹유정수윤치오
이건춘이겸제이재정이준상정인흥
조영희조희문한창수홍승목홍종억
부찬의
고원식구희서권태환김교성김낙헌
김명규김명수김준용김필희김한규
김한목나수연민건식민원식박제환
박희양서상훈서회보성하국송지헌
송헌빈신우선신태유어윤적엄태영
오재풍오제영윤치오이도익이만규
이봉로이원용이항직정동식정병조
정진홍조병건조재영조제환조원성
최상돈한동이허진홍우철홍운표
홍재하

[ 1920 ]

고문
고희경권중현민병석민영기박영효
송병준이하영윤덕영이윤용
부찬의
김현수
칙임 참의
김영진김영한김한목남규희민상호
민영찬민형식박승봉박이양박기양
박상준박승봉박의병박제빈박중양
백인기상호서상훈신석린신응희
어윤적엄준원염중모유맹유성준
유정수유혁로이건춘이겸제정진홍
조민희조진태조영희조희문한상룡
한진창
주임 참의
강병옥고원훈권태환김갑순김교성
김기태김명규김명준김상설김상섭
김연상김영무김정태김준용김창한
김필희김현수나수연노창안박경석
민건식민영은박기동박기순박봉주
박이양박제환박종렬박흥규박희양
방인혁서병조선우순송종헌송지헌
신석우신태유신창휴심준택심환진
안병길양재홍오재풍오태환원덕상
유기호유빈겸유익환유흥세윤치소
이강원이근우이기승이도익이동우
이만규이병렬이병학이택규이택현
이항직이흥재이희덕장대익장도
장상철장응상장직상장인원전석영
정동식정란교정병조정순현정재학
정태균정호봉조병건천장욱최석하
피성호한영원한상봉한창동허명훈
홍성연현은
참의
구연수김윤정김춘희김한목김희작
남규희민병석박기순원응상윤갑병
윤정현장헌식정건유현기봉

[ 1930 ]

고문
민병석윤덕영이윤용
칙임 참의
고원훈김관현김명준김서규김영진
김윤정남궁영민상호박두영박상준
박영철박용구박중양서상훈신석린
어담엄준원염중모유정수유진순
유혁로윤갑병이겸제이범익이진호
장헌식정교원조경하조성근조희문
주영환최린한규복한상룡한진창
홍종국
주임 참의
강동희강번고일청김경진김기수
김기홍김도현김두찬김병규김사연
김상설김상형김상회김신석김영택
김정석김정호김종흡김진수김창수
김한규김한목김한승남백우노영환
문종구민병덕박기석박종렬박보양
박봉진박철희박희옥방의석방태영
서병조서병주석명선선우순성원경
손재하손조봉송지헌신희련안종철
오세호오태환원덕상유승흠유태설
이경식이교식이근수이근우이기찬
이기승이동우이명구이방협이승우
이병렬이선호이은우이종섭이충건
이진호이택규이희덕이희적인창환
장대익장석원장직상장헌근정관조
정란교정대현정석모정석용정해붕
조병상주영환지희열최남선최양호
최연국최윤최윤주최준집최지환
최창조하준석한영원현준호현헌
홍치업황종국
참의
강필성김병원김성규김제하박상준
어윤적유만겸유성준진희규홍정철

[ 1940 ]

고문
김윤정박중양윤치호이범익이진호
한상룡
칙임 참의
고원훈김관현김명준김사연김연수
김영배김영진김우영김윤정김태석
김화준박두영박상준서상훈신석린
안종철원덕상유만겸유진순이겸제
이경식이계한이병길이원보장직상
장헌식정교원정란교정연기진학문
최린한규복
주임 참의
강이황권중식김경진김동준김병욱
김부원김사연김신석김원근김재환
김태집노준영민재기박지근박창하
박필병방의석서병조손창식송문화
신현구양재창원병희위정학이경식
이기찬이승우이신용이영찬이익화
이종덕임창수장용관장윤식장준영
장직상전덕룡조병상조상옥차남진
최윤최승렬최정묵최준집한익교
한정석현준호황종국
참의
김하섭문명기이승구

||
||<-5> 1. 중추원 의장은 조선 총독부 정무총감이 맡았다.
†. 재직 중 사망.
||




조선귀족 자작[예우정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조민희
趙民熙 | Cho Min-hui
파일:趙民熙.jpg
이름조민희 (趙民熙)
본관양주 조씨 (楊州)
출생1859년 11월 8일 (음력 10월 14일)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사망1931년 1월 2일 (향년 71세)
직업정치가, 관료
작위조선귀족 자작[예우정지]
주요 경력조선귀족 자작[예우정지]
이왕직 찬의
조선 귀족회 이사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가족 관계아버지 : 조병익
아들 : 조중수[1]
비고경술국적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
2. 생애
3.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e2b9c4c1-cef1-4b6b-a406-3d6b004c4328.jpg
1909년, 순종이 순행을 마치고 돌아와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친일 관료들과 기념촬영한 사진.
중앙에는 순종이 앉아있고 그 오른쪽에는 이재각, 민병석, 조중응, 김윤식, 이지용,
조민희, 고희성이 서 있으며 어진 뒤에는 이병무, 윤덕영이 서 있다.
순종황제의 왼쪽에는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임선준, 고영희, 송병준, 박제순이 서 있다.

조선대한제국정치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한일병합조약에 찬성해 경술국적으로 불린다.


2. 생애[편집]


1859년 10월 14일 한성부(現 서울특별시)에서 아버지 조병익(趙秉翼)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숙에서 수학하고 1885년(고종 22) 9월 증광 문과에 병과 10위로 급제한 뒤 그해 10월 승정원 가주서(假注書)를 시작으로 1886년 1월 승문원 부정자, 1887년 9월 양성현감에 이어 12월부터 1889년 10월까지 용인현령을 지냈다. 1890년 1월 성균관 대사성, 1891년 5월 봉산군수, 1894년 6월 승정원 동부승지, 1895년 5월 관세사장을 거친 뒤 8월 전주부 관찰사에 임명되어 1896년 1월 전주 재판소 판사를 겸직했다. 1897년 1월 비서원승으로 4월까지 장례원 장례와 태의원 소경을 겸직했으며 9월 평안남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10월에는 평안남도 재판소 판사를 겸직했다. 1899년 2월 평안북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평안북도 재판소 판사를 겸직했다. 1900년 10월 궁내부 특진관에 11월 법부 협판에 임명되었다. 1901년 1월 특명전권공사를 겸했고 3월에는 군부 협판에 이어 프랑스 주재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었다가 며칠 후 미국 주재 특명전권공사로 발령받아 1903년 12월까지 미국 공사로 재임했다. 1903년 12월 일본 주재 특명전권공사에 임명되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처리를 맡았고 일본 황태자가 대한제국을 방문하러 오자 그를 환영하는 친일 대신들이 만든 신사회의 부장이 되었다. 1909년 안중근하얼빈 의거로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하자 조문을 했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10월 조선귀족령에 따라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같은 달 중순 왕세자 이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고종의 명으로 일본에 갔다가 조선총독부가 비용 전액을 후원해 천황에게 사은의 뜻을 표하기 위해 조직한 '조선귀족 일본 관광단'에 합류해 천장절 행사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 정무총감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방문한 자리에서 관광단 일행을 대표해 일본 각지에서 환영을 받은데 대한 감사의 말을 전달했다. 1911년 1월 은사 공채 5만원을 받았고 2월 총독 관저에서 열린 '작기본서 봉수식'에 의복을 갖추어 참석했다. 1912년 2월 권업주식회사를 발기했고 8월 '한국 병합 기념장'을 받았으며 12월 종4위에 서위되었다. 1913년 7월 조선무역주식회사 발기인으로 창립에 참여했다. 1915년 1월 조선총독부 주도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시정 사업을 선전하기 위한 '시정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 협찬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나서 5월에 특별 회원으로 기부했다.

1915년 11월 다이쇼 덴노 즉위 대례식에 조선귀족 자격으로 참석한 후 처 최씨와 함께 대례 기념장을 받았다. 특히 <경성일보> 1915년 11월 29일자 사설을 보면 "우리들이 새로 복속된 백성이지만 화족이나 고등관에 비했을 때 조금의 차별도 없었으며 후한 접대를 받게 되어 천황 폐하의 일시동인하시는 후의에 대한 성은에 (나도) 모르게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라는 천황 즉위식 참석 감상문을 발표했다. 1917년 10월 일제의 협력과 지원하에 조직된 친일 불교 단체인 불교 옹호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1918년 4월 고등관 2등의 이태왕부 이왕직 찬시에 임명되어 1919년 11월까지 재임했다. 1919년 11월 조선총독의 자문 기구인 중추원의 고문에 정4위에 임명되어 1921년 4월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19년 1월 고종의 국장 빈전주감관리에 임명되었고 6월 조선농사개량주식회사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1년 4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관제가 개정되면서 칙임관 대우의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어 1924년 4월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3,0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25년 4월 사단법인 조선귀족회[2] 이사에서 퇴임했으며 1926년 5월 종3위로 승서되었다.

재산이 적지 않았으나 도박과 낭비로 탕진하고 1920년대에는 궁핍한 생활을 했다. 1923년 중순경부터 채권자들의 소송이 계속 이어지는 한편 파산 신청에 대한 재판에도 20여 차례나 소환에 불응해 조선귀족 최초로 구인장을 받았다. 1925년 10월경에 기록된 조선총독부 문서의 조선귀족 약력에는 도박 현행범으로 여러 번 검거되었지만 조선귀족이라는 것으로 관대한 처분을 내렸는데 멈추지 않고 더 심하게는 관아 역소 등에 출근해서도 사무실에서 도박장을 개설해 밤을 새기도 했다고 한다.[3] 1927년 12월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파산자로 선고받았고 1928년 2월 「조선귀족령」 제8조 1항에 따라 조선 귀족에 대한 예우가 정지되었다. 예우가 정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작위는 그대로 상속자에게 승계되었는데 죽은 후에는 1930년 1월 재단법인 창복회[4]에서 지급한 교부금 170원을 받았다.


3.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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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효 등이 고종의 퇴위에 협조한 대신들을 암살하려다 처벌된 사건은 이완용이 고종 퇴위를 반대하던 대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주장도 있음





[예우정지] A B C 1927년 12월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파산자로 선고되어 조선귀족령 제8조 1항에 따라 1928년 2월 29일부로 자작의 예우가 정지되었다.[1] 일제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조민희의 사망 이후 조선귀족 자작 작위가 습작되었다.[2] 1911년 4월 작위를 받은 조선귀족들이 천황의 성은에 감읍하고 사회의 모범이 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조직되었다.[3] 이완용의 부인에게서 매월 50원의 보조를 받아 생활했는데 세간에는 1명도 동정하는 자가 없었다고 비난했다.[4] 1929년 9월 도박과 아편 등으로 몰락해가는 조선귀족들의 파산을 구호하기 위해 조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