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남조)/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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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패공(沛公)은 입관(入關)하고서,부녀(婦女)를 총애하는 일이 없었는데,이것은 범증(范增)이 그의 뜻이 큰 것을 두려워했던 이유입니다。지금 명공(明公)께서 처음으로 건강(建康)을 평정하시고,해내(海內)에서 풍문과 명성을 생각하고 바라보는데,어찌 어렵고 망했던 자취를 습하시어,여덕(女德)으로써 누가 되려 하십니까![1]
昔沛公入關,婦女無所幸,此范增所以畏其志大也。今明公始定建康,海內想望風聲,奈何襲亂亡之跡,以女德爲累乎!
그의 아들은 10명인데:의(懿)、부(敷)、연(衍)、창(暢)、융(融)、굉(宏)、위(偉)、수(秀)、담(憺)、회(恢)이다。연(衍)은,양(梁) 고조(高祖) 무황제(武皇帝)이며,양(梁) 고조(高祖) 무황제(武皇帝)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으니:통(統)、강(綱)、속(續)、역(繹)、종(綜)、적(績)、윤(綸)、기(紀)이다。통(統)은,소명태자(昭明太子)이다。강(綱)은,간문황제(簡文皇帝)이다。
十子:懿、敷、衍、暢、融、宏、偉、秀、憺、恢。衍,梁高祖武皇帝也,梁高祖武皇帝八子:統、綱、續、繹、綜、績、綸、紀。統,昭明太子。綱,簡文皇帝也。
『신당서(新唐書)』
1. 개요[편집]
《양서(梁書)》와 《남사(南史)》에 명시된 공식 계승(繼承)은 무제(武帝)부터 경제(敬帝)까지 4대(四代)이며 일각에서는 예장왕(豫章王)과 정양후(貞陽侯)도 정통으로 보기도 하지만 정사서(正史書)에서는 부정했다. 영가왕(永嘉王)의 경우 양의 계승을 주장하며 일어났으나 이미 공식적으로 진패선(陳覇先)에게 황위를 넘겼기 때문에 정통 황제로 인정 받지 못했다. 특이점이라면 역대 황제 중 무제를 제외한 모두가 타에게 시해(弑害)당했으며 무제 또한 직접적으로 시해당하지 않았을 뿐 타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역대 황제들의 국성(國姓)은 소씨(蕭氏)로 전조의 남제(南齊)와 같다. 즉 남북조시대에서 국가 이름은 4번 바뀌었지만 왕조는 3번 교체된 셈. 소연(蕭衍)은 소도성(蕭道成)의 삼종질(三從姪)로 거슬러 올라가면 소정(蕭整)에 이르며 후에 칠묘(七廟)에 이름을 올렸다.
1.1. 역대 황제[편집]
1.2. 추존 황제[편집]
1.3. 비정통 황제[편집]
1.4. 초대 황제의 칠묘[편집]
1.5. 후한(侯漢)[편집]
1.6. 후량(後梁)[편집]
2. 왕실 계보도[편집]
2.1. 무제 이전[편집]
2.2. 무제 이후[편집]
3. 여담[편집]
3.1. 고조(高祖) 무황제(武皇帝) 소연(蕭衍)[편집]
문제(文帝) 유의륭(劉義隆)과 함께 암군(暗君)과 폭군(暴君)이 주를 이루던 남조(南朝)에서 손에 꼽히는 명군(名君)으로 평가받으나 지나친 불교(佛敎) 신봉과 비윤리적(非倫理的)인 황족들의 행보로 한편으로는 전성기를 이끈 반면에 한편으로는 국가의 쇠퇴를 불러왔다. 소연은 황족들이 백성을 수탈하고 사치스럽게 생활한다 해도 너그럽게 용서했으며 심지어 황족들 간에 불륜도 그들을 다그치는 데에서 멈췄다. 이는 후에 후경(侯景)이 건강(建康)을 초토화 시켰을 때 친척은 물론 아들들까지도 서로 황제의 자리에 눈이 멀어 눈치만 볼 뿐 누구하나도 나서지 않아 소연이 감금되는데 일조했다.
3.1.1. 임하왕 소정덕(蕭正德)[편집]
숙부의 온갖 정성에도 불구하고 온갖 인간말종 짓으로 보답했으며 특히 후경이 난을 일으키자 오히려 그를 끌여들여 황제가 되었다가 토사구팽 당했다.
3.2. 태종 간문황제 소강(蕭綱)[편집]
명군의 자질이 있었으나, 후경의 난으로 피살되었다.
3.2.1. 예장왕 소동(蕭棟)[편집]
소연의 증손자로 후경에 의해 약 4개월 동안 괴뢰 황제가 되었지만 폐위 후 작은 할아버지 소역에 의해 두 동생과 함께 제거되었다.
3.2.2. 무릉왕 소기(蕭紀)[편집]
소연의 8남으로 다른 비정통 황제들과 달리 꼭두각시로 즉위한 것이 아니라 후경의 난을 틈타 촉 땅에서 스스로 자립한 것이다. 하지만 이복 형 소역과 동시에 즉위했으므로 대립했고 거기에 재물을 아껴 부하들에게 피살되었다.
3.3. 세조 원황제 소역(蕭繹)[편집]
문학가였지만 황제에는 어울리지 않았으며 결국 조카 소찰에 의해 피살되었다.
3.3.1. 숙종 민황제(정양후) 소연명(蕭淵明)[편집]
무제의 형 소의의 아들로 무제의 조카이다. 동위와의 전투에서 묵사발이 나 포로로 잡힌 후 나중에 괴뢰 형제로 귀국하여 황제가 잠시 됐지만 결국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진패선이 폐위시켜 버렸다. 진패선은 소연명을 다시 북제로 추방시키려고 했지만 그전에 병사해 버렸다.
재위 기간도 짧고 적국의 꼭두각시라서 일반적으로 황제로 보지 않지만 몇년 뒤 강릉 남부에서 남량이라는 소국을 세운 소장[2] 에 의해 민황제로 추존되었다.
3.4. 목종 경황제 소방지(蕭方智)[편집]
비운의 마지막 황제이다.
3.4.1. 영가왕 소장(蕭莊)[편집]
진짜 마지막 황제는 이분이지만 비정통 황제로 본다. 양나라가 멸망하고 진나라가 서고 즉위했으나, 머지 않아 멸망당해 북제로 망명한 후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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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연은 건강에 입성한 후 반씨 다음으로 아름답다는 여비(余妃)를 취했는데 때문에 정사를 돌보는데 방해가 되었다. 이에 시중(侍中) 범운(范雲)과 영군장군(領軍將軍) 왕무(王茂)는 소연을 알현하여 간언한 말이다. 범운은 즉시 왕무에게 여비를 주라 말하였고 이에 소연도 그것이 현명하다 생각했다. 여비는 왕무에게 시집을 갔으며 범운과 왕무에게 백만 전(錢)을 하사했다. 여담으로 세상에서 제일가는 반씨를 죽인 사람도 왕무이다.[2] 소역의 장손으로 아버지는 무열태자 소방등이며 소방등은 현종 무영황제로 추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