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섭(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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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玘燮
1916년 ~ 1979년 3월 14일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본관은 김해(金海). 제10대, 12대, 15대, 16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남정 김동욱의 아버지이다.
1916년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 명정리(현 통영시 명정동)[1] 에서 태어났다. 1934년 일본 교토 히가시야마중학교를 졸업하였고, 1957년 해인대학 법정학부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활동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1939년 2월 6일 부산지방검찰청 통영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혐의없음으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출옥한 바 있다.#
8.15 광복 직후 1945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여 통영군 문화부장을 지냈고 1952년에는 통영읍의회 의장에 취임하였다.# 1954년에는 한국제망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55년 9월 1일, 통영읍의 충무시 승격과 동시에 시의회에서 초대 충무시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그는 시장직을 1958년 1월 6일까지 역임한다. 그 사이 1956년 동아일보에 입사하기도 했고, 충무상공회의소 회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임기 직후인 1958년 9월부터 1959년 5월까지는 제8대 재단법인 국민학원 이사장을 지냈으며, 1959년에 대한어망공업협회 이사장에 취임하기도 했으며#, 고향에서 명정양조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경상남도 충무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최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 후보로 경상남도 고성군-충무시-통영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최석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민정당, 민중당에 몸담다가 1966년 신한당 분당 때 신한당에 입당하여 당무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1967년 2월 신민당이 창당되자 입당하여 중앙정책심의회 부의장 및 중앙지도위원 등을 지냈으며, 같은 해 6월 열린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역시 민주공화당 최석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최석림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사퇴하자 3년뒤 치러진 1970년 재보궐선거에서 신민당 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후보등록이 무효 처리되었다. 1년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충무시-통영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고성군-충무시-통영군-거제군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민주공화당 복수공천을 받은 김주인, 최재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金玘燮
1916년 ~ 1979년 3월 14일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본관은 김해(金海). 제10대, 12대, 15대, 16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남정 김동욱의 아버지이다.
2. 생애[편집]
1916년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 명정리(현 통영시 명정동)[1] 에서 태어났다. 1934년 일본 교토 히가시야마중학교를 졸업하였고, 1957년 해인대학 법정학부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활동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1939년 2월 6일 부산지방검찰청 통영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혐의없음으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출옥한 바 있다.#
8.15 광복 직후 1945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여 통영군 문화부장을 지냈고 1952년에는 통영읍의회 의장에 취임하였다.# 1954년에는 한국제망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55년 9월 1일, 통영읍의 충무시 승격과 동시에 시의회에서 초대 충무시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그는 시장직을 1958년 1월 6일까지 역임한다. 그 사이 1956년 동아일보에 입사하기도 했고, 충무상공회의소 회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임기 직후인 1958년 9월부터 1959년 5월까지는 제8대 재단법인 국민학원 이사장을 지냈으며, 1959년에 대한어망공업협회 이사장에 취임하기도 했으며#, 고향에서 명정양조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경상남도 충무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최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 후보로 경상남도 고성군-충무시-통영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최석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민정당, 민중당에 몸담다가 1966년 신한당 분당 때 신한당에 입당하여 당무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1967년 2월 신민당이 창당되자 입당하여 중앙정책심의회 부의장 및 중앙지도위원 등을 지냈으며, 같은 해 6월 열린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역시 민주공화당 최석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최석림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사퇴하자 3년뒤 치러진 1970년 재보궐선거에서 신민당 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후보등록이 무효 처리되었다. 1년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충무시-통영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고성군-충무시-통영군-거제군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민주공화당 복수공천을 받은 김주인, 최재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3. 선거이력[편집]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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