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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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의 시인, 화가, 문장가, 정부인[6] . 본명은 허초희(許楚姬)이며, 허옥혜(許玉惠)로도 전한다. 호는 난설헌(蘭雪軒)[7] , 자는 경번(景樊), 본관은 양천(陽川). 허엽의 딸, 허성의 이복 여동생이자 허봉의 동복 여동생, 허균의 동복 누나.
한국사에서 최초로 문집을 간행한 여성 시인이다. 남동생 허균이 발행한 그녀의 문집은 당대와 사후에 명나라와 일본에서 크게 인정받았으나, 조선과 중국 양국에서 오랜 기간 표절 의혹이 존재해 왔다. 이에 대해서는 허난설헌의 저서 전부가 허균의 손을 통해서 출판되었으므로 난설헌 본인이 표절한 것인지, 이를 간행하는 과정에서 허균이 쓴 것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후자라면 표절 의혹에서는 무사하나, 이 경우 글 자체가 난설헌이 쓴 것이 맞는지에 대한 논란이 생기고 만다. 다만 허난설헌의 친필 글씨가 있는 '유선사(遊仙詞)'가 양천 허씨 문중이 소장한 <양천허씨 5문장가의 묵적>에서 나오고,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로 어렸을 때부터 유명했으며 허난설헌/작품의 허엽의 12대 종손이 소장한 앙간비금도로 보았을 때 문장과 그림에 재능이 뛰어났다고는 평가할 수 있다.
2. 이름[편집]
2.1. 경번[편집]
청(淸) 나라 선비 우통(尤侗)의 자는 전성(展成)이고 호는 회암(悔庵)인데 장주(長洲) 사람이다. 외국 죽지사(外國竹枝詞) 백여 편을 만들어서 각각 그 나라의 풍속을 말하고 또 각주(脚注)를 달았다. 시험삼아 조선(朝鮮)을 읊은 것을 본다면 모두 네 수(首)인데, 풍문(風聞)을 거두어 모은 것으로 잘못된 것이 많다. 이제 모두 여기에 기록한다. 중국에서 최근의 것이 이와 같으니, 그 나머지 시대가 먼 것은 미루어 알 수 있다...
“그 나라에 8도(道)가 있고 양화도는 한강(漢江) 가에 있으며, 규수 허경번(許景樊)은 뒤에 여도사가 되었는데 일찍이 광한궁 백옥루(白玉樓)의 상량문을 지었다.”했다. 그러나 별안간 살구꽃이 붉다는 말은 어찌 두서(頭緖) 없는 것이 아니랴. 그리고 팔도 가요(八道歌謠)의 문구는 너무 무미(無味)하고 양화도는 한강의 중간에 위치하여 몇 굽이가 되므로 그냥 강가라 할 수 없으며, 난설헌(蘭雪軒) 허씨(許氏)를 허경번이라 한 것은 매우 옳지 않고 그가 여도사가 되었다는 말도 전여성(田汝成)의《광여기(廣輿記)》에 나오는 말을 따른 것이다.《광여기》에, “허씨의 남편 김성립(金誠立)이 왜란(倭亂)에 순절(殉節)하자 허씨가 여도사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근거 없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이 같은 말을 만들어내서 중국 사람을 속인 것일까. 그리고 중국의 기록에서 허난설헌과 허경번을 두 사람으로 나누고 있으니 더욱 가소롭다. 부인이 글에 능하고 재주가 많은 때문에 이 같은 욕이 미치는가. 매우 개탄(慨嘆)할 만하다.
ㅡ 《청장관전서》 제53권 #
이덕무에 의하면 허난설헌의 자 "경번"은 스스로 지은 호가 아니라 천박하고 경솔한 사람들이 조롱하려고 부른 명칭이라 한다. 즉 허난설헌 본인이 직접 부른 자는 아닌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당시 중국인들이 허난설헌을 부를 때 허경번이라 부르는 등 중국인들 사이에서 허난설헌의 이름이 허경번 혹은 여도사로 전해졌다.듣건대 경번은 스스로 지은 호가 아니고 부박한 사람들이 기롱하는 뜻으로 붙인 것이라 한다... 중국의 책에는 허경번과 허난설헌(許蘭雪軒)을 다른 사람이라 했고, 또 ‘그의 남편이 왜적의 난에 절조를 지키다가 죽자 허씨는 여자 도사가 되어 일생을 마쳤다.’ 했으니, 와전됨이 너무 심하다.
ㅡ 《청장관전서》 제63권 #
그러나 동시대 인물이자 허난설헌의 남동생인 허균의 말에 의하면 생전에 경번으로 불린 것은 사실로 보인다. 아래는 허균의 성소부부고에서 나온 기록이다.
그리고 경번의 의미는 임상원 (任相元, 1638~1697)의 저서 <교거쇄편>에서 밝혀졌다.난설헌(蘭雪軒)의 이름은 초희(楚姬)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니, 초당(草堂) 엽(曄)의 딸이며 서당(西堂) 김성립(金誠立)의 아내이다.
ㅡ 《성소부부고》 제26권 / 부록 학산초담 #
난설헌은 『태평광기(太平廣記)』를 즐겨 읽었다. 그 긴 이야기를 다 외웠으며, 중국 초나라 번희樊姬를 사모했기 때문에 호까지도 경번(景樊)이라고 지었다.
ㅡ 《교거쇄편》 제1권 [출처1]
2.2. 허매씨[편집]
《해동역사》 제49권에서 허난설헌의 시를 소개하면서 허난설헌을 "허매씨"라고 불렀다.#
3. 생애[편집]
자세한 내용은 허난설헌/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논란[편집]
자세한 내용은 허난설헌/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작품[편집]
자세한 내용은 허난설헌/작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기타[편집]
- 허난설헌의 생가는 강원도 강릉시에 있는데, 남동생은 임진왜란 때 강릉으로 피난 가 있으면서 학산초담(鶴山樵談)에 강릉은 산과 물이 아름답고 정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정기를 받았던 누나의 재능이 뛰어났었던 거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재미있게도 신사임당과 이이 두 모자도 허난설헌과 같은 강릉 출신이다. 실제로 오죽헌과 허난설헌 생가 터는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 다만 허균과 허난설헌의 동복 형제 허봉이 율곡 이이를 탄핵하다가 유배를 당하는 등 정치적인 문제가 엮여서 가문 간 관계는 좋지 않았다. 참고로 이곳은 나중에 다른 집안에서 건물을 헐고 새로 다시 집을 지었기 때문에 허난설헌 생가터라는 이름으로 문화재 등록이 되어있다.
7. 대중문화에서[편집]
자세한 내용은 허난설헌/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관련 다큐[편집]
- 2007년 12월 8일 KBS에서 허난설헌에 대한 다큐멘터리 "한국사전 23회 – 왜 조선에서 여자로 태어났을까, 허난설헌"을 방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