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승 충헌공(忠憲公) 조사석 趙師錫 |
출생 | 1632년 4월 13일 (음력 인조 10년 2월 24일) |
사망 | 1694년 1월 19일 (향년 61세) (음력 1693년, 숙종 19년 12월 24일) |
시호 | 충헌(忠憲) |
본관 | 양주 조씨 |
자 | 공거(公擧) |
호 | 만회(晩悔), 만휴(晩休), 향산(香山), 나계(蘿溪) |
부모 | 부친 - 조계원(趙啓遠, 1592 ~ 1670)[1] 모친 - 평산 신씨(1592 ~ 1655)[2] |
형제자매 | - 7남 4녀 중 4남 [ 펼치기 · 접기 ]
형 - 조진석(趙晉錫, 1610 ~ 1654) 누나 - 조효강(趙孝姜, 1612 ~ ?) 형 - 조구석(趙龜錫, 1615 ~ 1665) 형 - 조희석(趙禧錫, 1622 ~ ?) 누나 - 조종강(趙終姜, 1625 ~ ?) 누나 - 조희강(趙喜姜, 1627 ~ ?) 남동생 - 조가석(趙嘉錫, 1634 ~ 1681) 이복 남동생 - 조후석(趙厚錫, 1657 ~ ?) 이복 남동생 - 조유석(趙裕錫, 1658 ~ ?) 이복 여동생 - 조보강(趙保姜, 1663 ~ ?)
|
부인 | 권후(權垕)의 딸 안동 권씨 |
자녀 | 장남 - 조태로(趙泰老, 1658 ~ 1717) 차남 - 조태구 3남 - 조태기(趙泰耆) 장녀 - 윤재(尹宰)의 처 |
조선 후기의 문신. 육촌누나가
예송논쟁의 한복판에 말려든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이다.
1660년 진사가 되고, 1662년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관직과 주서 등을 거쳤다. 당적은
서인으로, 숙종 7년에 시발된 노소분당에서 중립을 지켜
노론에겐
소론으로, 소론과
남인에겐 노론으로 인지되어 공격 당했으며, 이로 인해 육촌누나
장렬왕후가 사망하고 1년 뒤 벌어진
기사환국 후 숙종의 외면을 받던 중에 남인에게 종조카
김석주와 한 패란 이유로 탄핵되었다. 결국은 유배되어 사망.
사후인 숙종 말~경종 때 적장남
조태구가 소론 당수가 되어
소론 완론(온건파) 시조가 됐기에
소론에 자동 합류됐다. 정사 기록이 일반 공개로 전환되기 전까지 《
연려실기술》을 숙종 때까지의 조선사를 연구하는 1차 고증사료로 채택해왔던 구 사학계에서
남인이라 잘못 규정했던 탓에 왜곡된 정보가 널리 퍼져 여전히 잔재하고 있다.
[3] 한편으로는 육촌 누나인 대왕대비 장렬왕후가 남인 출신의 희빈 장씨를 예뻐했기 때문인것도 있다. 그때문인지 조사석은 서인임에도 장희빈과 다소 가까웠으며 이는 남인이라 규정된 이유 중 하나이다. 인현왕후의 폐위와 세자 책봉에는 반대했지만 애초에 전자는 남인들도 반대했을만큼 폐출 명분이 억지였던데다 후자라도 당시는 장렬왕후의 상중이기도 했기에 장희빈과 가까운걸 떠나서 반대하는게 맞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