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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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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丁未義兵
1907년(정미년)에 정미 7조약으로 인한 군대 해산 및 고종의 강제 퇴위에 반발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 구한말 시기 일어난 수차례의 의병 활동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활동을 펼쳤으나[3]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대표되는 일제의 강경한 탄압으로 인해 결국 붕괴된다. 이후 잔존한 의병 세력은 만주와 같은 국외로 탈출하여 독립군으로 재편성된다.
2. 배경[편집]
1905년 을사조약을 통하여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한다. 이에 대항하여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3명의 특사를 파견하여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최후의 저항을 시도해보지만, 끝내 무산됐고 이를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황위에 앉힌다. 고종의 강제 퇴위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어 정미 7조약으로 해산된 대한제국군의 합류로 정미의병이 일어난다.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이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자결하자, 분노한 병사들이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며, 지방의 진위대에서도 각종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 이러한 무장 봉기들은 압도적인 화력을 갖춘 일본군에 의하여 실패했지만 다수의 시위대와 진위대의 군사들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신식 무기를 가지고 탈영하여 각 지방의 의병 부대[4] 로 참가했고 그 결과 의병들은 기존보다 훨씬 강한 전투력을 보유하게 됐다.
3. 전개[편집]
1907년 8월 1일 군대해산에 반발해 봉기한 대한제국군 시위대의 남대문 전투로 정미의병은 시작된다. 다음 날인 8월 2일 원주에서도 진위대 장병들이 여주 파견대 장병들 및 의병들과 함께 무기고를 점령하고 봉기를 일으킨다. 이어 강화 분기대와 진주 분견대, 안동 분견대, 홍주 분견대 등 각 지역의 진위대 장병들의 봉기 및 무장 탈영이 속출한다. 탈영한 군인들은 을사의병 때 일어났던 각 지역의 의병 부대에 참여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이러한 움직임은 한반도 전역에 걸쳐 일어난다.
같은 해 9월에는 전국에 산개된 의병을 하나의 지휘 체계로 합치자는 주장이 펼쳐졌고 이는 13도 창의군으로 현실화된다. 하여 서울을 공략하기 위한 서울 진공 작전이 펼쳐졌으나 일본의 압도적인 전력 앞에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13도 창의군은 해산하여 다시 각자의 본거지로 돌아가 게릴라전을 펼치게 된다.
정미 의병의 활동이 격화되어가자, 일본은 대한제국을 합병하기 이전에 의병 세력을 완전히 뿌리뽑을 결심을 하게 되고 문자 그대로 초토화 작전을 실시해버린다. 그리고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를 차례로 진압하고 전라도를 대상으로 한 마지막 진압이 남한 대토벌 작전. 오늘날의 남한 지역에서는 이 남한 대토벌 작전 덕분에 말 그대로 의병 활동이 궤멸되어 버렸고, 이후 의병투쟁의 2대 중심지는 황해도 평산과 경상북도 북부의 일월산 주변이 되었고, 각종 섬 지역에도 들어가 게릴라 전을 펼쳤다. 그러나 북한 지방에서 활동하던 의병들 역시도 1909년 후반으로 접어들면 서서히 고사되기 시작한다. 1910년대에는 한반도에서는 일본에 전면적으로 대항하는 무장 조직이 실질적으로 소멸됐으며,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 소수의 의병들은 국경을 넘어 만주로 이주해 독립군을 구성한다.[5] 특히 1907년 결성된 독립운동단체 신민회는 일찍이 국외 무력투쟁 기지건설을 주요 활동 목표로 설정하여, 한일병합 전후로 이들이 진출한 간도지방에 본격적인 국외 독립운동 역사가 시작된다.
한편 이 의병 활동을 막기 위해 일본은 총포급 화약단속법(銃砲及火藥團束法)이란 법률을 제정했다. 의병들의 무장을 막기 위해서 만든 법으로 총, 화약의 소지와 판매를 제한하는 법률이다. 이 법을 통해 한국의 민간인이 가지고 있는 각종 무기들을 대량으로 압수하고, 폐기 처분했다. 이 과정에서 총과 화약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 보존하고 있던 전통 활, 화살, 칼, 갑옷까지 대량으로 압수되었다. 현대에 한국에서 남아 있는 전통 무기 유물의 양이 의외로 적은 이유가 이 때문이다.
3.1. 남대문 전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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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시위 1연대 1대대장 참령 박승환이 군대해산에 저항하는 뜻으로 유서를 남긴 채 자결하였다. 이에 격분한 남상덕, 이준영 참위 등이 지휘하는 시위 1연대 1대대, 2연대 1대대 등 약 1,500여 명으로 추정되는 해산군인들이 군대해산을 거부하며 남대문 근처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이미 일본군이 탄약고 및 주요 화기들을 선점하였던 터라 탄약과 화력의 부족으로 패배하였다. 이후 전투에서 탈출에 성공한 수백 명의 병사들이 의병에 합류하며 본격적인 정미의병이 시작되었다.
3.2. 원주 진위대 봉기[편집]
3.3. 강화 진위대 봉기[편집]
3.4. 진주 진위대 봉기[편집]
3.5. 서울 진공 작전[편집]
3.6. 울산 의병[편집]
한의사였던 서병희는 울산 양산 경주 사람으로 구성된 의병을 조직하여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였고, 울산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와 열박재에서 전투, 밀양주둔 일본 수비대가 울산으로 넘어오는 이천리 양쪽에서 기습하여 전과를 올렸다. 1908년 2월 22일에는 문수산 전투를 치뤘고, 이후 웅촌 대양리 전투 등 울산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
3.7. 남한 대토벌 작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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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의병 목록[편집]
- 강재천, 강기동(장성)
- 권득수(용문산)
- 기삼연(장성)
- 김덕제(평창)
- 김병길(양주)
- 김수민(장단)
- 김춘수(홍천)
- 민긍호(원주)
- 박동의(지리산)
- 양회일(화순)
- 연기우(제물포)
- 이익삼(용인)
- 임행숙(여주)
- 정용대(인천)
- 정주원(죽산)
- 조인환(용문산)
5. 맥켄지의 정미의병 인터뷰 일화[편집]
러일전쟁 종군기자로 활동했던 영국인 프레드릭 아서 맥켄지(Frederick A. Mackenzie)는 1906년부터 1년 6개월 동안 다시 한국에 머물며 일제의 침탈과 독립운동, 항일 의병들의 활동상을 직접 취재하고 1908년 발간한 ‘대한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에서 양근(지금의 양평)에서 만난 의병 일화를 소개한다. 상단에 소개된 의병 사진의 인물들이다.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맥켄지는 이천, 충주, 제천, 원주, 양근 등 의병이 출현했던 지역을 찾아간다. 외국 언론인에 대한 탄압과 방해공작을 겪으면서도 의병을 직접 만나기 위해 충주로 발길을 잡았던 맥켄지는 이천에서 일본군들이 많은 부락을 태워버렸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이천으로 향하는 길에서 70~80호 정도의 마을과 제천이 일본에 의해 폐허가 된 것을 목격했다. 충주에서 제천에 이르는 마을 중 4/5 정도가 참혹하게 불타버렸다. 경기도 이천에서는 일본군이 의병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을을 불태워 폐허로 만들었다. 일본군에 쫓겨난 사람들은 마을로 다시 돌아와 거적으로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살았다. 의병 활동과는 무관한 마을이라도 일본군의 약탈, 살육, 방화를 피할 수 없었다. 일본군이 휩쓸고 지나간 마을에서 의병부대로 자진해 들어가는 사람들이 점점 증가했다.
이를두고 맥켄지는 “일본군이 한 마을을 평정하고(폐허로 만들고) 나면 순진한 수백 가구가 의병에 투신했다”고 밝힌 맥켄지는 “(폐허가 된) 마을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자신의 생업을 조용히 누리는 것 뿐”이라며 “적어도 어느 한 지방은 초토화 작전으로 그토록 유복하던 곳이 폐허가 되었고 의병의 수는 날이 갈수록 증가했는데, 이때 뿌려진 증오의 씨앗을 뿌리 뽑기 위해서는 수 세대가 지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천을 거쳐 원주로 향하면서 불과 몇 시간 전에 의병과 일본군이 지나갔다는 증언도 들었다. 실제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르는 위험한 곳이기 때문에 짐꾼들이 더 이상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일이 잦아졌다. 원주 백성들을 통해 20마일 쯤 가면 의병을 만날 수 있을 거란 말을 들었다. 양근에 도착해 숙소를 정하고 저녁을 짓고 있는데 의병들이 나타났다. 누더기 한복을 입고 있는 사람, 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 한복에 군복 바지를 입고 있는 사람 등이 있었다. 들고 있는 총은 제각기 다른 종류로 어느 것 하나 성한 것이 없었다. 인터뷰에 응한 의병들은 별다른 조직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부대들은 허술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고, 각지의 부호들이 은밀하게 모아준 자금을 가지고 활동한다고 했다. 의병들은 무기를 구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지만 종군기자는 어느 편도 들 수 없다며 요구를 거절했다.
맥켄지는 “군인(의병)의 영롱한 눈초리와 얼굴에 감도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았을 때, 나는 확연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며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표현 방법이 잘못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동포들에게 애국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라고 기록했다.
또한 ‘전투를 이끌었던 장교’로 표현한 의병장이 보람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는 것을 언급하며 이어 의병장의 말을 실었다. "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보다는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 #
또한 맥켄지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일본 당국이) 의병의 활동을 거의 공개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의병들은 단순히 백성을 뜯어먹는 무질서한 비적처럼 묘사하고 있다. (중략) 그리고 일본인 고위 관리는 당시 의병 진압을 위해 2만여 명이나 되는 일본군이 동원되었으며 전국의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이 작전지역임을 토로했다. 일본 당국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강한 저항을 했지만 1915년에 이르러 진압되었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산악인들과 평야의 젊은이들, 호랑이 사냥꾼, 그리고 구한국군(대한제국군) 출신의 의병들이 겪은 고초를 어렴풋이 상상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를 무시하기 위한 일본인, 그리고 이를 모르는 다른 외국인이 한국인을 일러 비겁하다거나 자기의 운명에 대해 무심하다는 식으로 해 온 조롱은 설득력을 잃을 것이다.#
6. 둘러보기[편집]
[1] 원 출처는 영국 신문인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프레더릭 맥켄지(Mckenzie, F. A.) 기자가 당시 한국의 상황을 취재한 뒤 저술한 <조선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에 실린 사진이다. 그는 경기도 양근군 (오늘날의 양평군) 지역에서 이 사진을 촬영했다. 출처 중앙에 대한제국군 육군의 제복을 입은 의병이 있다.[2] 이 사진이 찍힌 정확한 위치는 양평 어디쯤이라고만 알려져 있다가, 2021년 향토사학자인 이복재 경기도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에 의해 정확한 위치가 밝혀졌다.경강일보[3] 이전의 을미의병과 을사의병을 의병 운동 정도로 부르는 것과 다르게 정미의병은 의병 전쟁이라는 표현을 쓴다. 실제로 의병 측에서 국제 사회에 정식 교전 단체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고.[4] 비록 세력은 많이 약화됐지만 이 시기에도 을사의병들이 지방 곳곳에 산개해 있었다.[5] 참고로 국내 최후의 의병장은 1915년 평양에서 순국한 채응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