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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려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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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제6대 군주
依慮王 | 의려왕
출생연대 미상
부여
사망285년 추정
부여
능묘미상
재위기간제6대 군주
~ 2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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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해(解)
의려(依慮)
부왕마여왕
자녀해의라
왕호의려왕(依慮王)


1. 개요
2. 기타



1. 개요[편집]


부여의 군주. 마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시점은 알 수 없으나 당시 나이는 불과 6세. 신라 혜공왕, 고려 충목왕, 충정왕과 함께 쌍벽을 이룰 만한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285년, 세력을 확장하던 모용선비모용외가 부여를 공격했고, 부여는 이 싸움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의려는 패배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도성은 파괴되고 부여인 1만여 명이 모용 선비에게 끌려가게 되었다.

의려왕의 자제들은 옥저로 도피하였다. 이때 옥저로 도피한 부여 망명인들이 동부여를 건국했다는 설이 있으며, 의려왕이 죽고 왕위는 아들 의라왕으로 이어지게 된다.


2. 기타[편집]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사망 당시에 아들 의라왕이 왕위를 이은 것을 보면 최소 20대 ~ 30대의 나이였던 걸로 추측된다.

신채호조선상고사에서 비록 국방에 힘을 쓰지 않아 나라를 위망에 빠트린 죄가 있지만 목숨을 구차하게 구걸해서 항복하느니 죽겠다고 의기를 갖고 조선 역사상 최초로 순국한 왕이었다고 평가했다.[1][2]다만 의려왕의 사망과 의라왕의 승계 자체는 역사적인 사실이지만, 조선 상고사에서 의려왕이 재위한지 41년이나 지났다고 언급한 점[3]이나 의라왕이 태자였다고 언급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 기록의 출전은 야사를 참고한 것으로 추정된다.

환단고기 열렬신자들의 주장으로는 의려왕이 죽지 않고 일본으로 건너가 효령천황이 되었다는 괴설이 있다. 다만 사서에서 자결로 확실히 죽었다고 나온 점과 죽지 않았다면 아들인 의라가 즉위하는 일 자체가 벌어지기 어렵고 근거가 위서로 분류되는 환단고기를 가지고 자의적으로 해석한거라 당연히 신빙성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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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려왕이 국방에 힘쓰지 못해 나라를 위망에 빠뜨린 죄가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항복하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의기를 갖고 조선 역사상 최초로 순국한 왕이 되어 피로써 후세에게 교훈을 주었다. ‘성하(城下)의 맹(盟)’1)을 체결하여 구차하게 목숨을 보존하려 한 용렬한 임금들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 조선상고사 -[2] 여담으로, 실제 조선 역사상 최초로 순국한 왕은 왕검성 전투에서 항복을 거부하다가 암살당한 고조선의 마지막 군주 우거왕이다.[3] 이를 역산하면 의려왕은 244년에 즉위한 것이 된다. 이 해에 관구검고구려 침공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