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34-85/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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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T-34-85 및 하위 파생형들의 실전 일람 문서.
해당 전차는 파생형을 모두 포함하여 도합 48,950량이 제작되었고, 세계 각지로 팔려 나갔기에 약 80여년간 20여개 이상의 분쟁에 참전한 경력이 존재한다.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도 1량이 등장하여 주목을 받기도 하였으며, 명불허전 불멸의 전차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중이다.
2. 대전기[편집]
2.1. 제2차 세계 대전[편집]
2.1.1. 독소전쟁[편집]
그렇지만 별다른 활약은 보이지 않아 이듬해까지 소량만 생산하고 있었는데, 상술했듯 날이 갈수록 판터와 티거의 수량이 증가하며 화력의 증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한 소련 군부에서 포탑과 포를 재설계하고 전차장석을 증설해 포수와 전차장을 나눈 양산형을 만들어 생산했다.
개발사에서 상술했듯 소련군에게 고화력의 주력 전차가 생겼다는 일은 그야말로 호재 중의 호재였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T-34-85가 대량으로 투입되었다는 사실은 티거나 판터 입장에서는 절대로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76mm 탑재형 T-34 상대로는 정면에서는 중단거리에서도 견딜 수 있는 티거와 판터였지만 T-34-85가 출현하면서 티거는 500 m~600 m 정도의 중단거리에서는 정면장갑이 관통당할 수도 있는 위험에 처했고, 판터는 정면은 80 mm 경사장갑이라 실제는 140 mm의 수직장갑 수준의 방어력을 가져서 정면은 안전하다 해도 약점인 측면과 포방패는 더 쉽게 관통당할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다.
판터와 티거를 정면에서 관통 가능하며, 이전과 다르게 좀 더 넓어진 T-34-85는 만주, 유럽을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하며 마치 좀비와 같이 한대가 격파 당하면 그 다음에는 2대, 그 다음에는 4대, 그 다음에는 8대가 나타나며 독일군들을 충격과 공포에 빠지게 만들었다.
개별적으로야 훨씬 우세한 티거와 판터였지만, 생산물량이 독일군보다 크게 우세한 소련군의 입장에서는 예전의 76mm 탑재형의 숫자만큼 85mm 탑재형 T-34-85를 엄청난 물량으로 밀고올 것인데 중단거리에서 위험에 안 노출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독일군 지휘관들과 전차장들이 제일 먼저 알아챘다. 거기에 더해 티거와 판터는 전력 손실이나 보충에 불리했다. 이런 문제들이 IS-2의 존재와 같이 티거2를 개발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실질적인 주력 전차였던 4호 전차 입장에서는 사형선고나 같았다. 이미 T-34/76과의 싸움에서도 물량차이 때문에 우세를 점하기 어려워하고 있었는데, 7,5cm KwK 40 48구경장보다 우위에 있는 85 mm를 가진 전차가 오로지 숫자로 밀고 나왔으니, 물량에 지쳐서 우세를 점하기 힘들게 된 것이다. 44년부터는 4호 전차도 소모전에 휘말려 들어가서, 나중에서는 포탑 회전 모터 제거를 비롯한 염가형 버전인 4호 전차 J형이 등장하게 됐다.
2.1.1.1.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편집]
2.1.1.2. 우만-보토샤니 공세[편집]
2.1.1.3. 바그라티온 작전[편집]
2.1.1.4. 오글레두프 전투[편집]
2.1.1.5. 베오그라드 공방전[편집]
2.1.1.6. 동프로이센 공세[편집]
2.1.1.7. 드레스덴 공세[편집]
2.1.1.8. 베를린 공방전[편집]
이 시기, 독일군의 기갑전력이 상당히 감소한 대신, 판처파우스트 등의 보병용 대전차화기의 위협이 증가하였는데 이로인해 사진처럼 철망을 가져다가 4호 전차의 쉬르첸처럼 증가장갑을 부착하고 운용한 사례도 많았으며,[5] 슬랫아머의 시초로 볼 수 있다.
이후 승전 기념식에 참전하여 서방 세계에 그 위용을 보여주었으며, 이는 서방 세계 측에서 T-34-85에 대하여 위협적으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1.1.9. 오스트리아 전선[편집]
2.1.1.10. 모라비아-오스트라바 공세 작전[편집]
2.1.2. 계속전쟁[편집]
2.1.3. 라플란드 전쟁[편집]
2.1.4. 소련-일본 전쟁[편집]
2.1.4.1. 만주 전략 공세 작전[편집]
만주는 그야말로 허허벌판이라 은신도 불가능하며, 넓은 들판에서 서로 대규모 전차전을 벌이는 형태였는데, 일본군의 신포탑 치하의 47mm 1식 전차포로는 정면에서 뚫을 수 조차 없었으며, 측면을 노리려고 해도 상술했듯 뻥 뚫린 전장에서 우회를 한다는 행동 자체가 자살 행위에 가까운데다, 설령 맞췄다고 해도 도탄되거나 포탄의 품질이 좋지 않아 아예 탄이 깨져버리는 일도 있었다.
결국 관동군들은 탈영하거나, 항복을 지속했고, 일부 부대는 저항하였지만 결국 무의미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2.1.5.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T-34-85 에이스 명단[편집]
-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보흐코프스키
- 이온 라자레비치 레겐
-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마르코프
- 표트르 미하일로비치 카슈니코프
3. 냉전[편집]
대전 직후에는 6.25 전쟁 당시 북한에게 공급되며 북한군의 운영 미숙으로 인한 전쟁 후반부의 추태로 명성에 흠집이 갔지만, 약 60~70년대까지도 85mm 포의 위력은 무시할 수 없던 수준이었기에 서방 세계의 악몽 중 하나가 "우크라이나를 넘어 T-55와 함께 끝도 없이 까마득하게 밀려오는 T-34-85들"이었다.
소련은 T-34-85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종전 후 얼마 안 되어 T-55가 등장하며 중형전차에서 경전차로 재편성한 뒤에 1958년까지 1선 장비로 사용했다. 이후 60년대에 치장 장비로 전환되었으며, 소련이 해체된 지금도 퍼레이드에서 간간히 등장하는 정도.
1950년대~60년대 소련은 공산국가끼리의 친목과 단합을 유도하려 체코와 유고에 위탁생산을 맡겨 친밀한 관계의 국가들에게 저렴한 값으로 뿌리고 다녔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이 국가들 중엔 후에 아프가니스탄과 같이 공산정권이 붕괴되며 소련에게 포를 들이미는 상황이 생기기도 했다. 비슷한 예로는 AK-47나, RPG-7 등이 있다.
3.1. 6.25 전쟁[편집]
소련의 군정이 시작되고 소련은 미국과는 달리 북한군의 전력을 강화시키는 데 상당히 투자했고 기갑전력 또한 강화시켰다. 208전차 훈련연대를 창설해 전차병들을 양성하기 시작한 것과 더불어 T-34-85 전차와 SU-76M 자주포를 견학시키며 전차 운용법을 가르친다. 1948년 소련은 미군정을 철수시키기 위해 소련군을 철수시키고 북한에 잔류하던 10전차사단 또한 철수했다.
하지만 북한군의 기갑세력의 확대개편을 위해서 한인2세인 표들 중좌와 300명의 전차병을 군사고문단으로 남겨두고 242대의 T-34-85 전차를 인계했다. 208전차 훈련연대가 10월말 수료했고 최초 208전차 훈련연대의 인원을 주측으로 15전차연대를 창설했다.
15전차연대는 최초 10대의 T-34-85를 인계받고 표들 중좌 연대가 철수하면서 T-34-85 전차 60대와 SU-76M자주포를 30대, 모터사이클 60대를 인계받은 뒤 기갑전력을 강화시켰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 김일성은 소련에 T-34 전차 500대 분량을 2개 전차사단을 편성하기 위해 판매 요청했다. 이때 T-34 전차를 구매할 대금으로 철광석과 금괴, 은을 비롯한 각종광물을 보내기로 합의했다. 500대의 T-34 전차는 2개전차사단을 편성할 수 있는 수량이지만 소련 군사고문단이 미 군사고문단과 마찬가지로 한반도는 전차기동이 유럽과는 달리 불편하다고 판단해 항공기 지원으로 바꾸고 절반가량인 총 242대의 T-34 전차를 인수해 제9 전차여단이 창설되었다.
그리고 이 T-34전차는 전쟁초기에 대전차화기가 모자라던 국군에게 엄청난 위협이였고 북한군이 엄청난 속도의 진군하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당시 대한민국 육군이 가지고 있던 대전차화기는 무반동총, 2.36인치(66mm) 바주카, 6파운더의 미국 라이센스 57mm 대전차포였는데 무반동총과 바주카는 측면에서 트랙을 끊어 전투불능을 시키는 격파[12] 전과를 얻는게 최선인 수준이었고 57mm 대전차포는 철갑탄도 충분히 보급되지 않았으며[13] 철갑탄을 쓰더라도 500m 밖에서는 그 어떤 피해도 줄 수 없고 320m 근처까지 끌어들여야 정면 관통이 가능한 부족한 화력이었다.
개전 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유일한 기갑차량이었던 M8 그레이하운드 37mm M6 포로 T-34를 저지해보려는 시도가 있었고 철갑탄을 발사하여 T-34의 궤도를 파괴하여 소수의 T-34를 격파(궤도파괴=기동불능=전투력 상실=격파)할 수 있었으나 37mm 포도 통상사격으로는 전차의 무한궤도나 파괴할 정도로 절대적으로 위력부족이며, 그나마 철갑탄까지 부족한데다가, 매복 후에 1대가 무한궤도를 사격한 후 전차의 조종수가 전차 전면에 있는 조종수 해치를 여는 순간 그 곳에 핀포인트 사격을 가하는 특이한 사항이 아니면 실질적인 파괴가 불가능하므로 결국 적 전차의 반격으로 손해만 입고 말았다.
문제는 당시 한반도에 초기에 투입된 미 육군도 보병용 대전차화기는 대한민국 국군의 것과 거의 동일했다는 점이다.
다른 곳에 갈 필요도 없이 이 문서에서도 많이 증거 자료를 찾아 볼 수 있듯 미군은 이미 2차대전 당시 소련에게서 T-34-76을 받아와서 그 스펙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 T-34로 T-34의 이런저런 장단점에 대해 충분히 테스트도 해보았다. 당시 미군 지휘부도 T-34 전차에 대해 엔진필터가 안 좋으니 소련 공업기술력과 장갑재 관련 사항들을 다 알고 있었으며 여기에 한국 특유의 산악지형까지 합쳐져 미국은 한국 같은 산악지형에 전차는 필요없고 T-34 같은 전차는 바주카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전력으로 오판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국군이 수없이 바주카로는 도저히 T-34 전차를 상대할 수가 없다고 보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이를 무기의 능력부족이 아닌 대한민국 국군의 낮은 훈련도 때문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미 육군 중 최초로 전투에 돌입한 스미스 특임대대는 처음에는 자신만만 했으나 바주카로 아무리 쏴도 파괴가 불가능하자 대혼란에 빠진 것도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미국은 특임대가 출동했으니 북한군이 쫄거나 이들이 공세를 멈추기를 기대했으나 그런 것은 없었고 곧 전투에 투입된 스미스 특임대는 T-34의 측면에서 궤도를 끊는 것과 후면에서 엔진을 멈춰서 총 4대의 전투력을 일시적으로 상실시켜 격파한 것 외에는 아무런 전과를 내지 못했는데 특히 정면에서는 T-34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못했으니 결과적으로 패하고 말았으며 북한군은 미제놈들 별거 아니다라는 인상을 주는 바람에 더더욱 기고만장해지며 쾌진격을 하게 되었다.
이 전투로 미국은 미군이 사용해도 바주카로는 도저히 T-34를 상대로 실질적인 전과를 내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스펙상으로는 바주카로도 T-34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지만 바주카의 집중사격에도 T-34가 버텨내는 결과가 나왔으니 스탈린이 북한에 장갑을 더 두껍게 한 T-34를 보냈다는 소문[14] 이 퍼졌고, 이후로도 탄두가 오래된 불량품이었다는 등의 설이 존재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다소 미스터리지만 어쨌건 미국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T-34를 상대할만 하면서도 좀 더 배치하기 용이한 병기를 찾게 되는데 이것이 일본에 있던 75mm 포 탑재 경전차인 M24 채피 경전차로 일단 저렴한데다가 가까운 일본에 이미 배치되어 있어 재배치가 용이했고 구형 셔먼과 동등한 수준의 75mm 포를 갖춰서 75mm 장착형 셔먼 전차가 독일의 3, 4호 전차를 상대할 수 있었던 것처럼 T-34 역시 상대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으며 경전차라 가볍고 빠르기 때문에 산지에서 운용하기도 적절하다고 판단되어 50년 7월 4일 빠르게 배치된다.
단, 설령 채피가 역부족임을 알았다고 한들, 전후 군축에 영향으로 주일미군의 부품 수급도 제때 되지 않아 돌려막기를 하거나 오키나와 등의 격전지에 유기된 장비들 수거해서 동류전환하는 처지였다. 그럭저럭 부대단위로 굴러가던 채피를 제외하면 셔먼과 퍼싱의 가동률은 %가 아니라 다섯 손가락으로 세야 했었을 만큼 막장이었던 지라 선택지는 채피밖에 없었다.[15]
채피가 배치되자 땅에 떨어져 있던 대한민국 국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 다시 솟아올랐고 미군 채피 전차병들은 기세좋게 T-34와 전차전을 벌였다. 그러나 충격적이게도 채피 부대는 T-34와의 모든 전투에서 처참한 패배를 겪게 된다. 심지어 T-34 1대가 반파되는 동안 채피 7대가 몰살당하는 등 압도적인 열세에 시달리게 되었다. 결국 채피의 75mm 포는 T-34를 실질적으로 전혀 관통하지 못했으며 기것해야 T-34 한두대의 궤도를 끊어서 잠시 진격을 멈추는 정도의 전과가 다였다.
예상과 달리 채피가 처참한 교전비로 T-34에게 아주 간단하게 털려나가자 이를 예상하지 못한 미국은 당황하며 뒤늦게야 한국 지형은 쓸모가 없니, T-34의 성능이 어떠니 하는 주장을 완전히 버리고 가능한 빨리 대량의 전차를 쏟아붙는데 열중하게 되는데 이 사건 이후 배치되는 것이 2차대전 말기에 생산되었던 최신형 전차 M26 퍼싱과 76mm포를 장착한 M4A3E8으로 이 전차들은 대거 부산항으로 들어왔다. 이로 인해 M26 퍼싱은 2차대전에서 타이거 전차 등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중전차여서 셔먼보다 더 좋은 화력과 내구성을 갖춘 전차였고 퍼싱전차를 필두로 한 미국 기갑부대는 T-34를 완전히 압도할 수 있었다. T-34와 같은 체급인 이지에잇 셔먼도 76mm구경 전차포 덕에 T-34/85의 장갑을 뚫을수 있었고 승무원들은 2차대전에서 셔먼 조종이 다수인 베테랑 전차 승무원들이였기에 신들린 조종과 빠른 판단력으로 우월한 전적을 내는 등 개전 초기 채피의 참극을 완전히 씻어낼 수 있었다. 이어서 센추리온 Mk.III, M46 패튼 같은 전차들이 배치되자 T-34는 초반의 기세를 완전히 잃고 UN군 전차에게 압도적으로 패퇴하고 만다.
개전 초기 한국 육군은 대대급 훈련을 받은 부대가 최정예였던 시절이었을 만큼 훈련도가 부족했고 전차에 대한 무지도 겹쳐 일방적으로 밀렸다. 갓 태어난지 얼마 안된 한국 육군은 사기도 낮고 준비도 부족했던 만큼 많은 걸 바랄 수 없었다. 당장 전차를 격파했다고 알려진 사례의 상당수가 SU-76M 같은 상부개방형 자주포였을 정도로 당시의 한국 육군은 전차와 자주포도 구분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포천 전투에서 미군에게 공여받은 대전차포로도 어쩌지 못하자 결국 화염병이나 수류탄을 집어들고 궤도나 해치 안에 쑤셔넣는 속칭 육탄돌격으로 처절한 전술[16] 로 대항해야 했다. 것도 그럴 것이 전차의 기관총 사격 화망을 무릅쓰고 접근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전술로, 거의 자살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실제 전과를 확인해 봐도 실질적인 피해는 줄 수 없었던 것 같다. 1952년에 집계된 256대 파괴전과 중 전차포 97(37.9%), 북한군 유기 63(24.6%), 로켓포 및 무반동총 35(13.7%), 항공기 29(11.3%), 포병 28(10.9%), 수류탄 3(1.2%), 미군 지뢰 1(0.4%)다.
또한 미약하나마 L-4, L-5, T-6같은 연락기나 훈련기도 간이 무장을 달거나 후방석 승무원이 폭탄 등을 던져 T-34를 몇대 해치웠다.[17]
물론 육탄특공에서 크게 성공한 경우들도 있는데 이때는 T-34의 약점부위를 정확하게 알고 공략하여 전차를 무력화시켰다. 일단 해치가 열려있을 경우 안에 수류탄이나 화염병을 던져넣는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었고, 해치가 잠겼을 경우엔 궤도에 박격포탄을 밀어넣어 파괴해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포탄이 불발이 날 경우는 취약한 엔진 상판부위를 노리기도 했고, 연막 등을 이용해 관측을 방해하여 강제로 해치를 열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도로정비가 되지 않아 거칠고 울퉁불퉁하며 좁은 길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곳에서 앞을 보지 못하고 마구 운전하다가 전차가 돈좌 또는 전복돼서 기동력을 상실하면 치명적이었다. 국방부 전쟁사 관련 다른 기록들에 따르면 T-34의 또 다른 취약부위는 관측용 잠망경이었는데, 여기에 진흙을 발라 앞을 가리는 방식으로 무력화한 사례도 있다. 수기 잠망경 부분이 의외로 마무리와 내구도가 허술해 전차에 달려있는 보수용 망치나 돌 등으로 강하게 때리면 비틀려서 공간이 생기는데, 이 약점을 이용해서 공격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기타 참고자료 다른 취약점은 통풍구 부분이었는데 이곳을 노려 안에다 수류탄이나 화염병 등을 집어넣는 방식의 공격도 행해졌다.
그러나 북한 육군의 전차운용 방식과 훈련미숙 등의 병크 덕분에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소모되던 중 미 육군이 M4A3E8에 이어서 본격적으로 M26 퍼싱이나 M46 패튼 등의 고성능 전차를 투입한 이후엔 풍비박산이 났다. 만약 북한 육군이 개전 초의 절대우세에 전차를 집중적으로(일명 기갑웨이브) 운용했다면 낙동강 전선이란 말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국군에게는 정말 다행스럽게도 북한 육군의 전차운용은 능숙하지 못했다. 한국전쟁 초기의 탱크 쇼크 효과에 맛을 들인 북한 육군은 전선 강행돌파시에 전차를 자주 동원했다. 이는 소련군의 작전기동군 교리에서 많은 점을 참조한 것이나 문제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 충분한 화력지원과 후속 증원부대의 신속한 투입이라는 점은 빼먹고 기습과 탱크 쇼크의 시너지만을 고집하여 충분한 화력지원 없이 전차와 자주포, 보병만 일회성으로 덜렁 보내곤 했다. 전사를 살펴보면 야간에 전차나 자주포가 뜬금없이 튀어나와 대한민국 국군과 UN군이 필사적인 항전을 펼치는 사례가 많이 발견되지만 포격이 동반되거나 돌파구를 후속부대가 확장하여 전선 깊숙히 침입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이에 반해 한국전쟁 초기의 혼란을 수습한 대한민국 국군은 낙동강 전선이라는 천혜의 방어막과 UN군의 막강한 지원화력을 십분 활용, 강행돌파 예상지점에 화망을 미리 구축해놓고 T-34가 걸려들기만 하면 문자 그대로 있는 화력을 모두 끼얹어 버렸다. 특히 낙동강 방어전 당시 북한 육군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광복절까지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여 적화통일을 이루고자 초조하게 서두르고 있었기에 이는 큰 효과를 불러 일으킬 수 있었다.
이후 인천상륙작전으로 미군이 본격적으로 개입한 이후 북한 육군의 전차는 미 육군의 M26 퍼싱이나 M46 패튼, 영국 육군의 센추리온 전차 등의 고성능 전차들에게 다 터져나갔다.
그 영향으로, 전쟁이 소강기에 들어갈 시점이 되면 대한민국 국군은 이지에잇 셔먼이나 퍼싱 여러대와 보병들이 서로를 엄호하며 이동했는데, 북한군은 끽해야 이 차량 한대에 보병 30명이 달라붙어 이동했을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다.
추가적으로, 북한군의 전차는 1950년 겨울 즈음엔 거의 전부 소모된 상태였으나, 중공군이 개입할 당시 T-34-85와 IS-2를 챙겨 참전해서 전선에는 계속 나타났다.
UN군은 T-34-85를 "캐비어 깡통"이라 불렀는데, M26 퍼싱이나 M46 패튼 등의 신형 전차에게 무자비하게 포탑이 사출되어 활활 불타며 격파당하는 모습이 우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3.5인치(89mm) 슈퍼 바주카의 보급에 힘입어 바주카포로도 전차의 전면에서 충분한 타격을 줄 수는 있게 되었다. 물론 미 육군의 퍼싱이나 영국 육군의 센추리온 같은 신형 전차들이 왔으니 T-34/85는 더이상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T-34는 현재 한국 육군의 전략, 전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전차로 K-1 전차의 개발과 배치를 위시한 대한민국 국군 전차전력의 강화엔 이 T-34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한국전쟁 초기 T-34를 앞세운 북한 육군의 빠른 공세에 아무 것도 못하고 밀려난 경험은 지금까지 대한민국 국군에 트라우마로 남아 있고, 그것이 국방과학연구소가 주도하는 각종 신형 전차와 대전차무기의 개발과 배치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리고 경기도나 강원도에서 볼 수 있는 대전차 방호벽 또한 이때의 경험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으로 북한 육군 기갑부대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있는 것이다.
3.1.1. 폭풍 작전[편집]
3.1.2. 서울 함락[편집]
3.1.3. 춘천-홍천 전투[편집]
춘천-홍천 전투에서 패배하며 인민군은 전쟁 수행에 크나큰 차질을 빚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는 부산으로 정부 수반과 피난민들이 떠날 수 있도록 시간을 벌 수 있게 되었다.
3.1.4. 대전 전투[편집]
3.1.5. 낙동강 전선[편집]
3.1.5.1. 왜관 전투[편집]
3.1.5.2. 창녕·영산전투[편집]
3.1.6. 인천 상륙작전[편집]
3.1.7. 9.28 서울 수복[편집]
3.1.8. 폭찹힐 전투[편집]
이하는 중국인민공화국국방부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215번 전차에 대한 내용.
1953년 7월 중국인민지원군은 여름 반격을 개시했고 우리 전차 2사단 4연대 2중대는 미 육군 스옌동의 베이산 진지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나는 중대의 평범한 병사로서 215호번차의 영웅적인 위업을 목격했다. 당시 215번은 의용병 67사단 200연대에 미리 배속되어 베이산 스옌동 남쪽으로 몰래 잠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7월 6일 공격 명령을 받은 215번 전차는 먼저 벙커에서 뛰어 나와 스옌동의 베이산을 향해 돌진했다. 적군은 215번 전차를 파괴하기 위해 모든 화력을 사용했다. 장마철이라 땅이 진흙 투성이였는데 아쉽게도 215번 전차가 분화구에 떨어져 움직이지 못하고 흙먼지가 배플을 넘었다. 적의 위치에서 불과 1km 거리에 있어 숨는 것이 쉽지 않았다. 선택을 해야만 했다. 생존을 위해 전차를 버릴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싸울 것인가? "양아루" 전차장과 그의 동료들은 탱크와 공존하고 죽는 것을 선택했다. 적의 집중 포격, 폭우 속에서 차량 전체의 지휘관들은 야간 엄폐물과 지형을 결합하여 215번을 작은 고분으로 위장하고 적의 코 밑에 그대로 숨었다.
둘째 날 저녁, 8자구대전법[26]
을 펼치려던 찰나, 346.6 고지대에 갑자기 적 전차 3대가 나타났다. 즉시 제거하지 않으면 베이샨을 방어하는 보병들이 큰 손실을 입게 될 것이었다. 포수 "쑤즈창"은 신속하게 적 탱크의 위치에 맞춰 포를 조준했고 전차장 "양아루"가 명령을 내렸다. "쏴!". 적의 포병이 재빨리 나에게 반격하자 215호가 완강하게 대응했고, 또 한 발의 포격이 있었고, 적의 두번째 전차에도 불이 붙었다.나머지 탱크들의 상황이 여의치 않자 급히 벙커에 숨어있던 215호가 10발 이상을 연이어 폭파해 벙커를 산산조각냈고, 적 탱크의 몸통도 두 갈래로 쪼개졌다. 치열한 전투 끝에 215번 전차가 완전히 노출되자 적군은 215번을 향한 광란의 반격을 시작했다. 속담에 군인은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조종수였던 "첸웬쿠이"는 밤이라 시야가 어두운 것을 이용해, 그 자리에서 탱크에 시동을 걸고 스로틀을 세게 높인 다음 천천히 스로틀을 낮춰서 엔진 소음이 커졌다가 작아지게 하였고 적들은 우리 전차가 이미 퇴각했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215번호차의 후퇴 경로를 확보하기 위해 집중 사격을 했다. 215번호차는 탈출에 성공했다.
7월 9일 상급 명령이 철회되었다. 수렁에 빠진 215번을 빨리 구출하기 위해 전우들은 잡초와 진흙을 스스로 묶고 적의 소이탄에 그을린 산비탈을 이리저리 기어다니며 쓸만한 통나무를 찾아 끌고 갔다. 산허리에서 다양한 두께의 통나무가 하루에 70개 이상 수집되었고, 연대 공병중대 8분대의 협력으로 마침내 215번 전차가 깊은 진흙 구덩이에서 구출되어 전장에서 성공적으로 후퇴할 수 있었다.
미국의 침략전쟁과 한국원조를 위한 전쟁[27]
에서 215번 전차는 적 중전차 5대 파괴, 차량 1대 부상, 적 박격포 9대, 차량 1대 파괴, 적 벙커 26개, 터널 1개, 지휘소 1개 파괴를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보병 전투 임무로 7회. 그의 뛰어난 군사 공적을 인정하여 중국 인민의용군 사령부는 215번 전차에 "인민영웅전차"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수여했다.오늘날, 영광스럽게 퇴역한 215번 전차는 사람들이 방문하고 감상할 수 있도록 중국 인민 혁명 군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해당 일화에 따르면, 미군은 M4A3E8 혹은 M46 패튼과 병력수송장갑차를 투입한 것으로 보이며 미군측 기록에는 장갑차량의 전투 중 손실이 확인되지 않는다.
해외에서도 앞뒤가 안 맞고 너무 과장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인 것으로 보인다. 예시로 월드 오브 탱크의 해외 유명 유저였던 "사일런트스토커(SilentStalker)"가 작성한 관련 글을 참고하자.
3.2. 1953년 동독 봉기[편집]
3.3. 헝가리 혁명[편집]
3.4. 피그만 침공[편집]
하지만 배치가 막 끝난 쿠바군의 T-34-85와 IS-2는 도합 20량 밖에 되지 않았고, 포는 122mm 곡사포 사단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반면, 이에 맞서는 반정부군은 최신 경전차인 M41 워커 불독 5대를 지니고 있었다.
피델 카스트로가 작전 통수권을 맡았고, 해가 저물자 밀리티아노 장군 산하의 보병 대대는 마침 제 시간에 도착한 여러 T-34-85 전차의 지원을 받아 플라야 라르가 방향으로 진격하려 했으나 섬의 늪지대에 진입이 불가능했던 탱크들은 고속도로를 따라 일렬로 움직여서 진격 중이었다. 이때 2506 여단은 전차 중대가 진입하는 것을 포착하자 미군에게 받은 3문의 바주카로 34명의 병사들을 처치했으며, 카스트로 산하의 쿠바군은 잠시 후퇴했다.
익일인 18일, 122mm 곡사포를 이용한 포격 이후 쿠바군은 다시 방어전을 시작했다. 아침 10시 30분까지 T-34-85들은 플라야 라르가의 해안으로 가서 해안에 상륙하려하는 상륙정들을 공격했다. 2506 여단은 급하게 SOS를 쳤으나, CIA는 그들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어 결국 상륙하기도 전에 2506 여단은 M41 워커 불독 5대를 사용하지도 못한채로 바다 속에 수장시킬 수 밖에 없었다.
전세가 확실히 기운 4월 19일 오후 5시 30분에 쿠바군은 2506 여단의 마지막 방어 지점인 플라야 기로나에 공세를 가했다.
플라야 기로나에 처음으로 진입한 것은 T-34-85 전차 중대였고, 이 중 최선두 전차에는 사령관인 피델 카스트로 본인이 탑승하고 있었는데, 이는 군대의 사기를 고취하기 위함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카스트로 본인이 이 일에 매우 분노하며 반란군놈들을 직접 전차를 끌고 가서 머리통을 다 날려버리고 싶어 하였기에 이런 선택을 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플라야 기로나에서 반정부군의 마지막 두대의 워커 불독이 격파되면서 침공은 반정부군의 대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침공 당시 쿠바군의 기갑차량 피해는 6대의 T-34-85 전차가 격파되는 것에서 그쳤으며, 반정부군은 모든 기갑차량을 망실하면서 쿠바군의 대승리로 막을 내렸다.
3.5. 중동전쟁[편집]
3.5.1. 수에즈 위기[편집]
3.5.2. 6일 전쟁[편집]
그러나 혁혁한 전과는 세우지 못하였고, 어떻게든 악착같이 버티기를 시전했으나 이스라엘군의 숏이나 M-50, M-51에 대다수가 격파당하고 시리아군은 패주하였다.
3.5.3. 욤 키푸르 전쟁[편집]
3.6. 프라하의 봄[편집]
3.7. 1974년 키프로스 쿠데타[편집]
3.8. 키프로스 전쟁[편집]
누가 봐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같았고, 실제로도 튀르키예군들은 구식전차를 몰고나온 키프로스 방위군을 비웃었다.
그러나 전투 결과 키프로스 방위군은 T-34-85CZ 12량을 손실했지만, 튀르키예군의 패튼은 무려 19대가 파괴되었다.
하지만 개떼같이 몰려오는 수량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고, 방어전에 실패하며 퇴각하게 되었다.
교환비로 치면 손실은 키프로스가 더 컸으나 군사력이 훨씬 우위에 있던 튀르키예에게는 엄청난 굴욕이었다.
한 줌도 안되는 매우 적은 수량의 구식전차가 MBT를 상대로 맞붙어서 동급의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은 매우 이례적이었는데, 특히 남키프로스의 전차병들은 예비군 수준의 훈련만 받아서 매우 빈약하였다 평가받았었다.
그러나 전투에서 패배하였지만 나름 강국의 정규군인 튀르키예군을 상대로 큰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은 침략당하여 절망에 빠져있던 키프로스 시민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큰 사기를 북돋아주었다.
3.9. 레바논 내전[편집]
투입 된 일부 차량은 이스라엘 방위군에게 노획 당하기도 했으며, 대다수의 차량들은 전차전보다는 자주포 용도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3.10. 베트남 전쟁[편집]
3.10.1.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편집]
정글의 특성상 대형 전차는 활약하기 힘들었기에 크기가 작은 T-34들이 기습을 하고 도망치는 등 일종의 대전차 자주포 역할을 행했다.
부활절 공세나 1975년 남베트남 몰락 당시에도 북베트남 전차 전력의 일부로 일선에 투입되었다.
3.10.2. 라오스 내전[편집]
3.11. 로디지아-부시 전쟁[편집]
3.12. 예레반 동물원 코끼리 탈출 사건[편집]
3.13.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편집]
아프간 전쟁이 소련의 철수로 종결된 후에는 남겨진 차량들이 수습되어 90년대까지 사용되었다.
3.14. 베트남-캄보디아 전쟁[편집]
한때 북베트남의 동맹이었던 크메르 루주 정권의 폴 포트는 국경 내에서 베트남인과 캄보디아 내의 친베트남 공산당원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시작했으며 심지어 베트남에 대한 소규모 공습을 시작하게 된다.
1977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 2주년 기념일에 크메르 루주 군대는 베트남 군대가 느슨해질 시기를 이용하여 베트남을 침공해 수 백명의 베트남 시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그 후 약 1년 동안 긴장이 고조되었고 베트남에 대한 산발적인 도발이 지속되었는데, 이에 베트남 측에서도 1978년 6월 공군을 동원하여 캄푸치아의 목표물을 폭격하기 시작하는 반격에 나선다.
동년 연말, 캄푸치아군은 75,000명의 군인을 캄푸치아 남부-베트남 북부 국경지대에 배치하는 도발을 지속했고, 결국 베트남에서는 분노하여 단기간 내에 민주 캄푸치아군을 완전히 해체시키고, 장기적으로는 크메르 루주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선전포고를 한 뒤 공격을 감행했으며, 이 때 당시 불과 몇 년 전에 영광스럽게 베트남의 통일을 주도했던 T-34-85가 다시 한번 참전하게 되었다.[36]
오합지졸인 캄푸치아군은 순식간에 무너졌으며, 1979년 1월 7일 베트남군이 수도 프놈펜에 진입하여 민주 캄푸치아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설립시켰다.이후 1989년 베트남군이 철수하며 전쟁이 끝이 났다.
베트남군의 T-34-85는 일선에서 싸우지 않고 후방에서 보병을 보조하는 역할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3.15. 중국-베트남 전쟁[편집]
1979년, 민주 캄푸치아가 무너지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베트남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중국은 민주 캄푸치아와 동맹 관계에 있었기에, 이를 묵과할 수 없다는 명분으로 베트남을 침공하게 되었다.
이때 당시 중국군은 북부에 주둔한 베트남군을 포위, 섬멸하는 작전을 세웠지만, 이미 10년 전 베트남전 당시 미국에게도 이겼을 정도로 게릴라전에 도가 튼 베트남군은 오히려 T-34-85를 이용해 중국군에게 우회 타격을 하고 재빠르게 도망치거나 하는 등의 전법으로 역으로 중국군을 수세에 몰리게 하는 대활약을 하였으며, 1979년 3월 5일, 침공은 지지부진했던데다가 피해가 심해지자 중국 측에서는 "목표를 달성했다"라고 발표하고 빠르게 철수하게 되면서 중월전쟁에서 베트남군이 승리하게 되었다.
비단 베트남군 뿐만 아니라, 중국군 측에서도 제54군단 산하 제11기갑여단에 배속되었다고는 하나, 실질적인 전투 없이 후퇴하였다고 전해진다.
3.16. 앙골라 내전[편집]
전량 T-34-85M으로, 혁혁한 전과는 세우지 못했는지 찍힌 사진 중 다수가 격파되거나 남아프리카 공화국군에게 노획된 것이다.
3.17. 남아프리카 국경 전쟁[편집]
3.18. 오가덴 전쟁[편집]
3.19. 탄자니아-우간다 전쟁[편집]
이밖에도, 이디 아민과 친한 사이였던 무하마르 알 카다피가 리비아군에 명령하여 T-34-85CZ 소대를 국경지대에 배치하였으나, 전투 없이 복귀시켰다고 한다.
3.20. 루마니아 혁명[편집]
4. 현대전[편집]
1991년, 소련이 붕괴되고 난 이후에도 수많은 차량들이 각국의 소속으로 활약했다. 이 중에는 3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헌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차량도 있으며, 전란의 화마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중이다.
4.1. 걸프 전쟁[편집]
이라크가 다국적군의 항공작전을 방해하려고 쿠웨이트의 유전에 자주포를 동원한 포격으로 화재를 일으켰는데, 일반적인 소방차로는 도저히 화재를 진압할 수 없게되자 헝가리의 MB 드릴링이라는 회사가 이전에 소련군이 퇴역한 전투기에서 엔진만 떼어내 물청소를 한다는 사실에 착안, 쿠웨이트 정부에 달려가 구상한 계획을 설명했고, 찬 밥 더운 밥 가릴 상황이 아니었던 쿠웨이트에서는 당장 헝가리에 치장되어있던 T-34-85를 가져와서 개조를 허용했다고 한다.
이후 일반 소방차가 진압하기 힘든 화재를 가뿐히 제압하며 그 명성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4.2. 유고슬라비아 내전[편집]
유고 연방군은 소련과 라이센스 계약을 통해 T-34를 수천대 보유하고 있었고, 할리우드 영화 철십자 훈장(영화)에 나오는 T-34는 모두 유고슬라비아에서 로케이션을 한 것일 정도로 관리도 잘하고 있었는데, 유고 연방이 일부 붕괴되면서, 대다수의 T-34는 유고슬라비아에 의해 크라이나 세르비아 공화국이나 스릅스카 공화국 손에 넘어갔고, 내전에 사용되었다.
내전의 성격상 중화기가 쓰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병들을 상대로 의외로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유고 내전에 동원된 T-34-85들은 유고 내에서 자체적으로 개조한 것으로, 일명 T-34B라고 불리운다. 이 T-34B는 T-55의 보기륜과 야간 투시 장비, 그리고 M2 중기관총을 장착한 사양으로 원본보다 더 높은 전투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가로, 참전 차량들의 사진을 보면 고무로 된 장갑판이 부착된 차량이 많은데, 이는 공장 내의 컨베이어 벨트를 절단하여 리벳 등으로 접합한 것으로, 기록에 따르면 40mm 박격포탄과 12.7mm 중기관총은 물론 RPG-7까지도 막아낸 적이 있다고 한다.
4.2.1. 크로아티아 독립전쟁[편집]
4.2.2. 보스니아 전쟁[편집]
4.3. 모잠비크 내전[편집]
4.4. 헝가리 반정부 시위[편집]
이에 대해 흔히 아무 관리도 되어 있지 않던 T-34에 기름을 넣었더니 움직이는 경이적인 신뢰성을 보였다는 잘못된 정보가 많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고, 박물관에서 관리 다 해놓고 기름까지 채워 정비해놓아서 가동 준비가 되어 있는 차량이었다. 다만 아무나 시동을 걸지 못하게 배터리를 빼놨을 뿐. 그런데 마침 시위대에 지나가던 헝가리군 T-34 조종수였던 노인이 있었는데 이 퇴역 군인이 배터리 없이 시동거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 T-34에는 비상시에 공기압으로 시동을 걸 수 있는 장치가 있다.[44]
시위대는 마침 시위도 한창이겠다 싶었는지 타고 나와서 다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전시물이었기에 엔진은 있었더라도 포탄이나 기관총탄은 없었으므로 사격은 불가능한 상태였으며, 동영상을 보면 인명 피해가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운전자의 실력이 수준급인데 위의 조종수 출신 할아버지께서 직접 조종하셨기 때문이다.
이 탱크는 수백 미터를 시위대와 함께 행진했다고 하며, 고무탄과 최루탄을 막는 등 시위대에게 유용하게 쓰였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흥분한 시위대들이 너무 많이 올라타고 몰려드는 바람에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다는 조종수 노인의 판단하에 전차는 유기되었고, 후에 경찰들은 빈 전차에다 수 많은 최루탄을 쏟아부은 다음 이 전차를 회수했으며 전차는 엔진을 제거한 후 다시 박물관에 돌아갔다고 한다.
한편 전차를 조종한 노인은 다음날 체포되었다가 조사 뒤에 무혐의로 풀려났다고 한다.
4.5. 예멘 내전[편집]
4.6. 리비아 내전[편집]
4.6.1. 제2차 리비아 내전[편집]
4.7.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편집]
4.7.1. 돈바스 전쟁[편집]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방의 루간스크 인민공화국 소속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이 박물관에 안치되어 있던 차량을 재생시켜 슬랫 아머를 달고 참전했다고 한다.
현재 해당 차량의 행방은 불명이다.
4.7.2.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편집]
우크라이나의 도시 리시찬스크에서 전시용으로 주추 위에 올려져 전시되던 T-34-85M 한 량[48] 이 우크라이나군에 의해 주추에서 내려진 후 주차되었다가 러시아군에 노획되어 바리케이드 및 기만용으로 배치되었으며, 이 밖에도 직접 참전하지 않았지만, 일부 개체가 러시아군의 공격에 의하여 손상을 입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2차 세계대전 중 라이벌이었던 4호 전차 또한 이로부터 1여년이 지난 2023년 10월 기만용으로 투입되며, 양 측 모두 기갑전력의 심각한 부족을 겪고 있다는 설이 점차 부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