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T-34-85/실전 (문단 편집) === [[6.25 전쟁]]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kcm.kr/39de75328bfa517563555a8d1e8c9149.jpg|width=100%]]}}} || || '''서울 시청 앞의 조선인민군 육군 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땅크사단 소속 T-34-85 "215번차"'''[* 174번 공장 생산 차량이다. 참고로 이 사진은 한국사 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사진 중 하나이기도 하다.] || T-34-85는 북한군에게 개전 전까지 242대(1947~1949)가 공여되었다는 것이 소련 문서로 확인되고 있다. 1950년엔 0대, 1951년엔 25대, 1952년엔 47대, 1953년엔 0대, 1954년엔 30, 1955년엔 90, 1956년엔 88대, 1957년도엔 몇대, 주루룩 이렇게 1959년까지 총합 312대를 지원받았다.(1955년도부터 소련은 북한에게 T-34를 무료 공여하지 않고 돈받고 판매를 시작했다.) 다만 북한군은 T-34-76도 사용했는데, 소련 문서엔 T-34-76, T-34-85 이렇게 세분화하지 않아 몇년도에 소련이 북한에게 76mm 주포 장착형 T-34를 줬는지 알 수 없다. 소련의 군정이 시작되고 소련은 미국과는 달리 북한군의 전력을 강화시키는 데 상당히 투자했고 기갑전력 또한 강화시켰다. 208전차 훈련연대를 창설해 전차병들을 양성하기 시작한 것과 더불어 T-34-85 전차와 [[SU-76M]] 자주포를 견학시키며 전차 운용법을 가르친다. 1948년 소련은 미군정을 철수시키기 위해 소련군을 철수시키고 북한에 잔류하던 10전차사단 또한 철수했다. 하지만 북한군의 기갑세력의 확대개편을 위해서 한인2세인 표들 중좌와 300명의 전차병을 군사고문단으로 남겨두고 242대의 T-34-85 전차를 인계했다. 208전차 훈련연대가 10월말 수료했고 최초 208전차 훈련연대의 인원을 주측으로 15전차연대를 창설했다. 15전차연대는 최초 10대의 T-34-85를 인계받고 표들 중좌 연대가 철수하면서 T-34-85 전차 60대와 [[SU-76M]]자주포를 30대, 모터사이클 60대를 인계받은 뒤 기갑전력을 강화시켰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 김일성은 소련에 T-34 전차 500대 분량을 2개 전차사단을 편성하기 위해 판매 요청했다. 이때 T-34 전차를 구매할 대금으로 철광석과 금괴, 은을 비롯한 각종광물을 보내기로 합의했다. 500대의 T-34 전차는 2개전차사단을 편성할 수 있는 수량이지만 소련 군사고문단이 미 군사고문단과 마찬가지로 한반도는 전차기동이 유럽과는 달리 불편하다고 판단해 항공기 지원으로 바꾸고 절반가량인 총 242대의 T-34 전차를 인수해 [[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 땅크사단|제9 전차여단]]이 창설되었다. 그리고 이 T-34전차는 전쟁초기에 대전차화기가 모자라던 국군에게 엄청난 위협이였고 북한군이 엄청난 속도의 진군하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당시 대한민국 육군이 가지고 있던 대전차화기는 무반동총, 2.36인치(66mm) 바주카, 6파운더의 미국 라이센스 57mm 대전차포였는데 무반동총과 바주카는 측면에서 트랙을 끊어 전투불능을 시키는 격파[* 격파라는 용어를 듣고나서 이를 마치 적의 완전한 파괴를 의미한다는 식으로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는 격파라는 것은 적의 전투력 상실을 의미할 뿐이며 적을 완전히 파괴하든 당장 전투력만 상실시키든 똑같이 격파라 할 수 있다. 6.25 초기 바주카로 측면에서 T-34를 격파했다는 전과를 찾아보면 어김없이 바주카로 측면에서 T-34를 격파했으나 곧 북한군이 회수해갔다는 내용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어있는데 이 경우 실제로 T-34를 파괴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으며 북한군에 회수되었다면 수리하여 재배치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실질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낮다고 봐야한다.] 전과를 얻는게 최선인 수준이었고 57mm 대전차포는 철갑탄도 충분히 보급되지 않았으며[* 백선엽 장군의 회고에는 철갑탄 자체가 없었다고 하지만 정작 대전차포 운용병들의 회고에는 철갑탄을 써서 격파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철갑탄보다 고폭탄을 더 많이 받았다고 이야기하는걸로 봐서 충분한 수량은 아니었던듯 싶은데, 실제로 개전 당시 사단 화력 부족으로 연대 지원화기로 사용했었던 터라 고폭탄은 넉넉했으나 철갑탄 보유량은 1문 당 70여 발만 지급해 줄 수 있을 수준이었다.] 철갑탄을 쓰더라도 500m 밖에서는 그 어떤 피해도 줄 수 없고 320m 근처까지 끌어들여야 정면 관통이 가능한 부족한 화력이었다. 개전 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유일한 기갑차량이었던 [[M8 그레이하운드]] 37mm M6 포로 T-34를 저지해보려는 시도가 있었고 [[철갑탄]]을 발사하여 T-34의 궤도를 파괴하여 소수의 T-34를 격파(궤도파괴=기동불능=전투력 상실=격파)할 수 있었으나 37mm 포도 통상사격으로는 전차의 무한궤도나 파괴할 정도로 절대적으로 위력부족이며, 그나마 철갑탄까지 부족한데다가, 매복 후에 1대가 [[무한궤도]]를 사격한 후 전차의 조종수가 전차 전면에 있는 조종수 해치를 여는 순간 그 곳에 핀포인트 사격을 가하는 특이한 사항이 아니면 실질적인 파괴가 불가능하므로 결국 적 전차의 반격으로 손해만 입고 말았다. 문제는 당시 한반도에 초기에 투입된 미 육군도 보병용 대전차화기는 대한민국 국군의 것과 거의 동일했다는 점이다. 다른 곳에 갈 필요도 없이 이 문서에서도 많이 증거 자료를 찾아 볼 수 있듯 미군은 이미 2차대전 당시 소련에게서 T-34-76을 받아와서 그 스펙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 T-34로 T-34의 이런저런 장단점에 대해 충분히 테스트도 해보았다. 당시 미군 지휘부도 T-34 전차에 대해 엔진필터가 안 좋으니 소련 공업기술력과 장갑재 관련 사항들을 다 알고 있었으며 여기에 한국 특유의 산악지형까지 합쳐져 미국은 한국 같은 산악지형에 전차는 필요없고 T-34 같은 전차는 바주카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전력으로 오판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국군이 수없이 바주카로는 도저히 T-34 전차를 상대할 수가 없다고 보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이를 무기의 능력부족이 아닌 대한민국 국군의 낮은 훈련도 때문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미 육군 중 최초로 전투에 돌입한 스미스 특임대대는 처음에는 자신만만 했으나 바주카로 아무리 쏴도 파괴가 불가능하자 대혼란에 빠진 것도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미국은 특임대가 출동했으니 북한군이 쫄거나 이들이 공세를 멈추기를 기대했으나 그런 것은 없었고 곧 전투에 투입된 스미스 특임대는 T-34의 측면에서 궤도를 끊는 것과 후면에서 엔진을 멈춰서 총 4대의 전투력을 일시적으로 상실시켜 격파한 것 외에는 아무런 전과를 내지 못했는데 특히 정면에서는 T-34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못했으니 결과적으로 패하고 말았으며 북한군은 미제놈들 별거 아니다라는 인상을 주는 바람에 더더욱 기고만장해지며 쾌진격을 하게 되었다. 이 전투로 미국은 미군이 사용해도 바주카로는 도저히 T-34를 상대로 실질적인 전과를 내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스펙상으로는 바주카로도 T-34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지만 바주카의 집중사격에도 T-34가 버텨내는 결과가 나왔으니 스탈린이 북한에 장갑을 더 두껍게 한 T-34를 보냈다는 소문[* 이후 노획해서 재봤는데 똑같았다.]이 퍼졌고, 이후로도 탄두가 오래된 불량품이었다는 등의 설이 존재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다소 미스터리지만 어쨌건 미국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T-34를 상대할만 하면서도 좀 더 배치하기 용이한 병기를 찾게 되는데 이것이 일본에 있던 75mm 포 탑재 경전차인 M24 채피 경전차로 일단 저렴한데다가 가까운 일본에 이미 배치되어 있어 재배치가 용이했고 구형 셔먼과 동등한 수준의 75mm 포를 갖춰서 75mm 장착형 셔먼 전차가 독일의 3, 4호 전차를 상대할 수 있었던 것처럼 T-34 역시 상대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으며 경전차라 가볍고 빠르기 때문에 산지에서 운용하기도 적절하다고 판단되어 50년 7월 4일 빠르게 배치된다. 단, 설령 채피가 역부족임을 알았다고 한들, 전후 군축에 영향으로 주일미군의 부품 수급도 제때 되지 않아 돌려막기를 하거나 오키나와 등의 격전지에 유기된 장비들 수거해서 동류전환하는 처지였다. 그럭저럭 부대단위로 굴러가던 채피를 제외하면 셔먼과 퍼싱의 가동률은 %가 아니라 다섯 손가락으로 세야 했었을 만큼 막장이었던 지라 선택지는 채피밖에 없었다.[* 그나마 퍼싱은 어찌저찌 몇대를 굴려 가게끔 만들었는데, 일본 현지의 공작기기를 이용해서 급조한 부품을 쓴 탓에 부산항에 하역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고장났다는 기록도 있다.] 채피가 배치되자 땅에 떨어져 있던 대한민국 국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 다시 솟아올랐고 미군 채피 전차병들은 기세좋게 T-34와 전차전을 벌였다. 그러나 충격적이게도 채피 부대는 T-34와의 모든 전투에서 처참한 패배를 겪게 된다. 심지어 T-34 1대가 반파되는 동안 채피 7대가 몰살당하는 등 압도적인 열세에 시달리게 되었다. 결국 채피의 75mm 포는 T-34를 실질적으로 전혀 관통하지 못했으며 기것해야 T-34 한두대의 궤도를 끊어서 잠시 진격을 멈추는 정도의 전과가 다였다. 예상과 달리 채피가 처참한 교전비로 T-34에게 아주 간단하게 털려나가자 이를 예상하지 못한 미국은 당황하며 뒤늦게야 한국 지형은 쓸모가 없니, T-34의 성능이 어떠니 하는 주장을 완전히 버리고 가능한 빨리 대량의 전차를 쏟아붙는데 열중하게 되는데 이 사건 이후 배치되는 것이 2차대전 말기에 생산되었던 최신형 전차 [[M26 퍼싱]]과 76mm포를 장착한 [[M4 셔먼|M4A3E8]]으로 이 전차들은 대거 부산항으로 들어왔다. 이로 인해 M26 퍼싱은 2차대전에서 타이거 전차 등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중전차여서 셔먼보다 더 좋은 화력과 내구성을 갖춘 전차였고 퍼싱전차를 필두로 한 미국 기갑부대는 T-34를 완전히 압도할 수 있었다. T-34와 같은 체급인 이지에잇 셔먼도 76mm구경 전차포 덕에 T-34/85의 장갑을 뚫을수 있었고 승무원들은 2차대전에서 셔먼 조종이 다수인 베테랑 전차 승무원들이였기에 신들린 조종과 빠른 판단력으로 우월한 전적을 내는 등 개전 초기 채피의 참극을 완전히 씻어낼 수 있었다. 이어서 [[센추리온 전차|센추리온 Mk.III]], [[M46 패튼]] 같은 전차들이 배치되자 T-34는 초반의 기세를 완전히 잃고 UN군 전차에게 압도적으로 패퇴하고 만다. 개전 초기 한국 육군은 대대급 훈련을 받은 부대가 최정예였던 시절이었을 만큼 훈련도가 부족했고 전차에 대한 무지도 겹쳐 일방적으로 밀렸다. 갓 태어난지 얼마 안된 한국 육군은 사기도 낮고 준비도 부족했던 만큼 많은 걸 바랄 수 없었다. 당장 전차를 격파했다고 알려진 사례의 상당수가 [[SU-76M]] 같은 상부개방형 [[자주포]]였을 정도로 당시의 한국 육군은 전차와 자주포도 구분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포천 전투]]에서 미군에게 공여받은 [[대전차포]]로도 어쩌지 못하자 결국 화염병이나 수류탄을 집어들고 궤도나 해치 안에 쑤셔넣는 속칭 육탄돌격으로 처절한 전술[* 이로인해 대전차 총검술 전술이라는 말이 있으나 일본제국은 당시 국군보다 대전차화기를 개발할 수 있었음에도 안 하다가 인명 갈아넣기로 간 것이지만 국군은 대전차화기 개발할 여건조차 안 되었고 T-34를 타고 북한군이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으로 밀고 들어오니까 유일한 수단인 육탄전술로 간 것이다.]로 대항해야 했다. 것도 그럴 것이 전차의 기관총 사격 화망을 무릅쓰고 접근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전술로, 거의 자살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실제 전과를 확인해 봐도 실질적인 피해는 줄 수 없었던 것 같다. 1952년에 집계된 256대 파괴전과 중 전차포 97(37.9%), 북한군 유기 63(24.6%), 로켓포 및 [[무반동총]] 35(13.7%), [[항공기]] 29(11.3%), 포병 28(10.9%), [[수류탄]] 3(1.2%), 미군 [[지뢰]] 1(0.4%)다. 또한 미약하나마 L-4, L-5, [[노스 아메리칸 T-6 텍산|T-6]]같은 연락기나 훈련기도 간이 무장을 달거나 후방석 승무원이 폭탄 등을 던져 T-34를 몇대 해치웠다.[* 항공기에 의한 기갑 차량 격파 전과는 국가를 가리지 않고 과장이 많을 수 밖에 없었으니 감안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빠른 속도로 한번 공격 후 지나가는 공습의 특성상 피해 평가와 적 장비 식별을 정확히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폭탄과 로켓탄 덕에 밑에는 연기와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적은 십중팔구 공황에 빠져 흩어지니 격파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단단한 장갑으로 보호받는 전차는 직격탄이 아니면 쉽게 완파당하지 않았고 전차가 아닌 차량(6.25 발발 전 북한은 T-34 뿐만 아니라 SU-76도 공여받았고 전차처럼 전선에서 보병을 지원하는 용도로 운용했는데, 이는 적 장비 식별에 혼란을 더했을 것이다), 심지어 이미 파괴된 차량을 가동 중인 적 전차로 오인하는 경우도 흔했다. 2차 대전 중 동부 전선에서 특히 대전차 확산탄, 37mm/40mm 기관포, 심지어 50mm 대전차포나 75mm 야포 등 각종 항공기 탑재용 대전차 무기가 사용된 것이 이러한 교훈을 통한 각종 연구 때문이었고, 6.25 전쟁 중에는 의외로 네이팜으로 엔진룸부터 승무원 탑승 공간까지 싹 태워버리는 게 효과가 좋았다고 한다. 기갑에 대한 공습이 이러한 문제를 딛고 지상군의 전과를 넘어설 정도로 높은 치명도와 정확도 높은 피해 평가가 같이 이뤄지기 시작한 시점은 LGB, 매버릭, TOW 등 효과적인 유도 무장과 타게팅 포드, 레이더 등을 활용한 표적 및 전과 확인이 실전에서 널리 쓰인 걸프전부터라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럼에도 코소보 사태 때는 작정하고 숨어 다니며 각종 기만용 더미(통나무, 판자, 풍선 등을 갖고 만든 가짜부터 이미 전력으로써의 가치는 없는 구형 기갑 차량 등)를 뿌려대는 세르비아군과 세르비아계 민병대에게 제대로 낚여 전과를 실제보다 몇 배 이상 오판하였다.] 물론 육탄특공에서 크게 성공한 경우들도 있는데 이때는 T-34의 약점부위를 정확하게 알고 공략하여 전차를 무력화시켰다. 일단 해치가 열려있을 경우 안에 수류탄이나 화염병을 던져넣는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었고, 해치가 잠겼을 경우엔 궤도에 박격포탄을 밀어넣어 파괴해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포탄이 불발이 날 경우는 취약한 엔진 상판부위를 노리기도 했고, 연막 등을 이용해 관측을 방해하여 강제로 해치를 열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도로정비가 되지 않아 거칠고 울퉁불퉁하며 좁은 길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곳에서 앞을 보지 못하고 마구 운전하다가 전차가 돈좌 또는 전복돼서 기동력을 상실하면 치명적이었다. [[http://blog.daum.net/rosiere/8114114|국방부 전쟁사 관련]] 다른 기록들에 따르면 T-34의 또 다른 취약부위는 관측용 잠망경이었는데, 여기에 진흙을 발라 앞을 가리는 방식으로 무력화한 사례도 있다. [[http://koreastory.kr/bbs/board.php?bo_table=6_25&wr_id=15|수기]] 잠망경 부분이 의외로 마무리와 내구도가 허술해 전차에 달려있는 보수용 망치나 돌 등으로 강하게 때리면 비틀려서 공간이 생기는데, 이 약점을 이용해서 공격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http://www.bobaedream.co.kr/board/bulletin/view.php?code=army&No=72252|기타 참고자료]] 다른 취약점은 통풍구 부분이었는데 이곳을 노려 안에다 수류탄이나 화염병 등을 집어넣는 방식의 공격도 행해졌다. 그러나 북한 육군의 전차운용 방식과 훈련미숙 등의 병크 덕분에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소모되던 중 미 육군이 M4A3E8에 이어서 본격적으로 [[M26 퍼싱]]이나 [[M46 패튼]] 등의 고성능 전차를 투입한 이후엔 풍비박산이 났다. 만약 북한 육군이 개전 초의 절대우세에 전차를 집중적으로(일명 기갑웨이브) 운용했다면 [[낙동강]] 전선이란 말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국군에게는 정말 다행스럽게도 북한 육군의 전차운용은 능숙하지 못했다. 한국전쟁 초기의 탱크 쇼크 효과에 맛을 들인 북한 육군은 전선 강행돌파시에 전차를 자주 동원했다. 이는 소련군의 작전기동군 교리에서 많은 점을 참조한 것이나 문제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 충분한 화력지원과 후속 증원부대의 신속한 투입이라는 점은 빼먹고 기습과 탱크 쇼크의 시너지만을 고집하여 충분한 화력지원 없이 전차와 자주포, 보병만 일회성으로 덜렁 보내곤 했다. 전사를 살펴보면 야간에 전차나 자주포가 뜬금없이 튀어나와 대한민국 국군과 UN군이 필사적인 항전을 펼치는 사례가 많이 발견되지만 포격이 동반되거나 돌파구를 후속부대가 확장하여 전선 깊숙히 침입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이에 반해 한국전쟁 초기의 혼란을 수습한 대한민국 국군은 낙동강 전선이라는 천혜의 방어막과 UN군의 막강한 지원화력을 십분 활용, 강행돌파 예상지점에 화망을 미리 구축해놓고 T-34가 걸려들기만 하면 문자 그대로 있는 화력을 모두 끼얹어 버렸다. 특히 낙동강 방어전 당시 북한 육군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광복절]]까지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여 적화통일을 이루고자 초조하게 서두르고 있었기에 이는 큰 효과를 불러 일으킬 수 있었다. 이후 [[인천상륙작전]]으로 미군이 본격적으로 개입한 이후 북한 육군의 전차는 미 육군의 [[M26 퍼싱]]이나 [[M46 패튼]], 영국 육군의 [[센추리온 전차]] 등의 고성능 전차들에게 다 터져나갔다. 그 영향으로, 전쟁이 소강기에 들어갈 시점이 되면 대한민국 국군은 이지에잇 셔먼이나 퍼싱 여러대와 보병들이 서로를 엄호하며 이동했는데, 북한군은 [[탱크 데산트|끽해야 이 차량 한대에 보병 30명이 달라붙어 이동했을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다.]] 추가적으로, 북한군의 전차는 1950년 겨울 즈음엔 거의 전부 소모된 상태였으나, 중공군이 개입할 당시 T-34-85와 IS-2를 챙겨 참전해서 전선에는 계속 나타났다. UN군은 T-34-85를 "캐비어 깡통"이라 불렀는데, M26 퍼싱이나 M46 패튼 등의 신형 전차에게 무자비하게 포탑이 사출되어 활활 불타며 격파당하는 모습이 우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3.5인치(89mm) [[바주카#s-2.6|슈퍼 바주카]]의 보급에 힘입어 바주카포로도 전차의 전면에서 충분한 타격을 줄 수는 있게 되었다. 물론 미 육군의 퍼싱이나 영국 육군의 센추리온 같은 신형 전차들이 왔으니 T-34/85는 더이상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T-34는 현재 한국 육군의 전략, 전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전차로 [[K-1 전차]]의 개발과 배치를 위시한 대한민국 국군 전차전력의 강화엔 이 T-34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한국전쟁 초기 T-34를 앞세운 북한 육군의 빠른 공세에 아무 것도 못하고 밀려난 경험은 지금까지 대한민국 국군에 트라우마로 남아 있고, 그것이 [[국방과학연구소]]가 주도하는 각종 신형 전차와 대전차무기의 개발과 배치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리고 경기도나 강원도에서 볼 수 있는 대전차 방호벽 또한 이때의 경험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으로 북한 육군 기갑부대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있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