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트 타운젠드
덤프버전 : (♥ 0)
분류
1. 개요[편집]
영국의 기타리스트, 싱어송라이터. 영국의 전설적인 밴드 더 후의 리더이자 리듬 기타리스트이다.
록 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있는 아티스트 중 하나이다. 특히나 가장 존경받는 기타리스트 중 하나인데, 동 시대 활약했던 키스 리처즈와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듬 기타리스트로 꼽힌다. 파워 코드의 대부분을 만들어 하드록과 헤비 메탈 장르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서 있는 사람이다.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 등 후대의 하드 록, 헤비 메탈 밴드들은 물론이고 지미 헨드릭스를 비롯해 동시대에 활동했던 쟁쟁한 여러 기타리스트들과 밴드들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기타 연주 실력은 역사상 손에 꼽을 만하지만, 그는 테크닉뿐만 아니라 과격하고 역동적인 무대 퍼포먼스 측면에서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나이가 70대 중후반에 든 후에도 활발히 라이브 콘서트에 참여하는 노익장이기도 하다. 우드스탁 페스티벌부터 라이브 8까지 유명한 록 페스티벌에는 모두 참가한 록 음악의 살아있는 화석이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피트 타운젠드는 영국 서런던의 치스윅의 병원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음악가 집안이였는데, 아버지는 재즈 밴드의 색소폰 연주자였고 어머니는 오케스트라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렸던 관계로 다소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했다. 아버지는 연주를 위해 자주 집을 나갔는데, 이때 어머니가 자주 바람을 피웠다고 하며, 이 때문에 피트가 어렸던 시절 부모님은 별거에 들어갔고 그는 할머니의 집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2년 뒤 다시 재결합하였고 유대인 및 폴란드인 가족들과 함께 집을 공유하며 여러 경험을 쌓았다.
타운젠드는 어릴때 친구가 없었고 당시 유행하던 모험소설을 좋아했었다고 한다. 또한 맨 섬이나 해변으로 가는 여행을 좋아했는데, 1956년에 여행을 가서 "록 어라운드 클락"이라는 영화를 보았고 록 음악에 빠지게 되었다.
이후 11개의 시험을 통과해 액튼 카운티 문법 학교에 들어갔는데 큰 코때문에 자주 왕따를 당했고, 이 일이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11살이었던 1956년 크리스마스 때 외할머니가 싸구려 스페인 기타를 사주셨는데, 재즈 아티스트였던 그의 아버지가 코드를 몇개 알려주셨고 피트는 혼자 작곡하는법을 배웠다. 이 때문에 그는 지금까지도 악보 읽는 법을 모른다고 한다.[2]
고등학교 친구인 존 엔트위슬과 재즈그룹을 만들기도 했으나, 비틀즈가 미국 시장을 갈아 엎어버리면서 본격적으로 록 음악의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트는 그룹의 드러머와 싸운 것을 계기로 그룹을 탈퇴한다. 그는 특히 클리프 리처드의 노래를 좋아했다.
이후 피트는 학교 성적이 준수하지 않았던 관계로 대학교에 들어가기 힘들어서 음악학교와 디자인 학교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결국 디자인 학교인 일링 미술대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프레디 머큐리 역시 이 학교 출신이며, 피트는 대학생 시절 롤링 스톤스의 멤버가 되는 로니 우드와 같이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2.2. 데뷔 전[편집]
1961년 말에 그는 스키플 밴드였던 디투어즈(Detours)에 가입했다. 비틀즈와 마찬가지로 리듬 기타와 리드 기타를 분리했는데, 로저 달트리는 리듬 기타를 맡았고, 존 엔트위슬은 베이스를, 더그 샌덤(Doug Sandom)은 드럼을, 그리고 피트는 리드 기타를 맡았다. 그 당시 밴드의 리더는 로저 달트리였다. 본래 보컬은 콜린 도슨(Colin Dawson)이라는 사람이었지만, 리듬 기타보다는 보컬이 적성에 맞았던 로저 달트리가 콜린 도슨과 자주 싸웠다. 1962년 콜린 도슨이 밴드를 나가버림에 따라 로저 달트리가 보컬로 포지션을 옳겼으며, 따라서 피트 타운젠드가 유일한 기타리스트가 되었다. 1964년, "디투어즈"가 이미 다른 밴드에서 쓰던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새 밴드명을 고려하던 중, 피트 타운젠드의 대학교 룸메이트였던 리처드 번스(Richard Barnes)라는 사람이 "더 후"라는 이름을 생각해내서 그대로 밴드명이 되었다.
이름을 바꾼지 얼마 안가 키스 문이라는 한 드러머가 술을 먹고 잔뜩 먹고 들어와 더 후의 공연을 보던 도중 드러머 더그 샌덤을 팬 다음 쫓아내 마구 드럼을 친(...) 해프닝이 있었는데, 이때의 드럼 연주가 너무 마음에 들었던 멤버들은 키스 문을 밴드의 멤버로 들이면서 더 후의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이후 그는 밴드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대학교를 중퇴한다.
2.3. 더 후[편집]
1965년, 매니저 키트 램버트(Kit Lambert)를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데뷔 앨범인 My Generation을 발매하게 된다. 더 후의 첫 앨범이었던 My Generation이 대성공을 거둠에 따라 더 후는 단숨에 비틀즈, 롤링 스톤스와 함께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주도하는 거대 록밴드가 되었다.
1968년, 피트 타운젠드는 메헤르 바바를 만나 인도 철학에 심취하였고, 얼마 뒤 Tommy라는 앨범을 제작해 평론가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1970년에는 더 후 최고의 라이브 앨범이라고 불리는 Live in Leeds를 발매했다. 이런 성공가도는 1971년 정점에 다라, Who's Next 앨범을 발매해 1970년대 최고의 앨범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특히나 Baba O'Riley는 더 후 최고의 히트 곡이 되었다.
그는 1972년 이후 신경쇠약 등 여러 질병을 얻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적인 커리어를 멈추지 않고 더 후의 라이브 공연과 새 앨범을 준비하였다. 1978년, 밴드의 핵심 멤버였던 키스 문이 숨졌고, 더 후는 사실상 해체 상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아 현재까지 로저 달트리와 함께 여러 라이브 콘서트에 참여하고 있는 중이다.
자세한 행적은 더 후 문서 참고.
2.4. 솔로 커리어[편집]
더 후 외에도 솔로 커리어를 밟았는데, 1970년대 초반에는 메헤르 바바의 가르침에 영감을 받은 음악을 많이 만들었다. 1980년 이후로는 여러 음악가들과 협업을 하는 식으로 솔로 커리어를 지속하고 있다. 에릭 클랩튼, 폴 매카트니, 존 본햄 등 여러 아티스트와 손발을 맞췄고, 현재까지도 왕성히 활동하는 중이다. 특히 1985년에는 핑크 플로이드의 데이비드 길모어와 함께 딥 엔드(Deep End)라는 슈퍼그룹을 결성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소아성애 논란을 빚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무죄로 풀려나면서[3] 이후에도 록 음악의 살아있는 전설로 여겨지고 있다.
3. 음악적 특징[편집]
그가 태어나기 얼마 전에 2차대전이 끝났던 점도 있었고, 정치적으로 공산주의를 지지하기도 했기 때문에, 그는 전후 트라우마가 자신의 송라이팅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작곡가로서도 더 후의 대부분의 노래를 작곡했으며, 처음의 거칠고 강렬한 앨범뿐만 아니라 뒤로 갈수록 실험적인 노래들을 선보였고, 'Baba O'Riley'나 'Won't Get Fooled Again'같이 매우 세련된 노래도 작곡했다.I wasn't trying to play beautiful music. I was confronting my audience with the awful, visceral sound of what we all knew was the single absolute of our frail existence—one day an aeroplane would carry the bomb that would destroy us all in a flash. It could happen at any time.
저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드려고 하지 않았어요. 저는 우리 모두가 폭탄을 가득 실은 비행기 한대로 완전히 파괴될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생각에 제 콘서트를 보러온 팬들을 볼때마다 끔찍하면서도 본능적인 사운드로 대했어요. 전쟁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니까요.
또한 가끔씩 직접 보컬을 맡는 노래[4] 도 있었고, 로저와 같이 부르는 노래도 아주 많다. 백 보컬도 주로 했는데[5] 젊은 시절에는 상당히 잘 불렀지만 2010년대 들어서는 목소리가 잘 안 나온다.[6] 그래서 이제는 로저 달트리나 피트의 동생 사이먼이 피트의 백보컬 파트까지 부를때도 있다. 위 동영상은 2016년 하이드 파크에서의 Baba O'Riley 라이브 공연 영상인데, 자신의 파트를 부를 때 끊어 부를 정도로 꽤나 힘들어하는 것을 볼 수 있다.[7]
또한 피트 타운젠드는 키스 리처즈, 말콤 영과 마찬가지로 리드 기타리스트가 아닌 리프를 중시하는 리듬 기타리스트이지만, 실제로 그는 여러 리드 기타리스트들 못지 않게 화려한 솔로잉도 즐겨하는 편이었다.
3.1. 음악가들의 평가[편집]
Pete Townshend was definitely the first. But not being that good a guitarist, he used to just sort of crash chords and let the guitar feedback. He didn't get into twiddling with the dials on the amplifier until much later. He's overrated in England, but at the same time you find a lot of people like Jeff Beck and Hendrix getting credit for things he started. Townshend was the first to break his guitar, and he was the first to do a lot of things. He's very good at his chord scene, too.
피트 타운젠드는 확실한 "최초"였어요. 훌륭한 기타리스트였던것은 아니지만, 크래쉬 코드 같은 것을 연주하고 기타 연주에 대한 피드백을 해주고는 했어요. 그는 한참 후에야 앰프의 다이얼을 만지작거렸죠. 그가 영국에서 과대평가 되어있지만, 동시에 그는 그가 이룬 "최초"의 것 때문에 제프 벡이나 지미 헨드릭스와 같은 기타리스트들과 비슷한 선에서 평가를 받고 있죠. 타운젠드는 기타를 박살낸 퍼포먼스의 창시자였고, 다른 최초의 것들도 많이 했어요. 코드 잡는것도 아주 잘합니다.
Pete Townshend's a god of guitar and always will be!
피트 타운젠드는 기타의 신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거에요.
3.2. 퍼포먼스[편집]
존 엔트위슬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도 그렇지만 피트 타운젠드는 다혈질이었고 거친 퍼포먼스를 자주 했다. 록밴드의 전반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 기타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
공연 도중에 실수로 기타가 천장에 부딪혀 박살 났는데, 관중들이 환호하자 다음부터는 아예 기타를 모조리 부숴버리기 시작했다. 이에 영감(...)을 받은 지미 헨드릭스는 아예 공연장에서 기타에 불을 붙여 박살을 내기도 했다.
케이온!!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히라사와 유이는 이분과 존 레논을 섞어서 만든 캐릭터로 보인다. 애니메이션 내에서 특유의 윈드밀 퍼포먼스를 시전하기도.
4. 논란[편집]
아동 포르노 소지 혐의로 체포된 적이 있다. 하지만 자신은 소아성애자가 절대 아니고 아동 학대를 진중하게 다루는 책을 쓰기 위해 봤을 뿐이라고 해명했고 로저 달트리를 비롯한 주변인들도 피트는 아동 성범죄를 할 만한 사람이 절대 아니라고 증언하여 풀려났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피트 타운젠드의 컴퓨터에서 아동 포르노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풀려난 것이다. 링크. 그가 문제의 사이트에 접속하여 신용카드 결제를 한 기록은 있으나, 사진을 다운받은 증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주변인들의 증언이 통한 것도 그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수사가 진행 중임을 미리 알고 있지 않은 한, 사전에 증거를 인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하드에서 이미지가 한 장이라도 발견되었다면 게리 글리터와 같은 말로를 맞았을 것이다.
5. 기타[편집]
- 성격은 더 후의 멤버들이 그렇듯이[9] 과격하고 다혈질적이다. 또한, 성격이 매우 직설적이어서 친구인 로저 달트리의 짜증나는 일면들을 모조리 폭로(...)한 적도 있었다.[10] 허나, 이런 성격과는 별개로 사교성은 좋은 듯한데, 여러 음악가들과 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장 그가 친한 음악가들로는 동시대의 존 레논, 폴 매카트니, 믹 재거, 지미 헨드릭스,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배리 깁, 데이비드 보위, 데이비드 길모어 등이 있으며, 심지어는 조니 마, 노엘 갤러거 같은 까마득한 후배들과도 아주 친하다고 한다. 노엘 갤러거와 같이 노동자 자선 공연을 하기도 했다.
- 영혼의 파트너인 로저 달트리가 레드 제플린을 매우 좋아하는 것과 달리 피트 타운젠드는 레드 제플린을 매우 싫어한다고 한다. 더 후의 메탈 음악에 대한 업적을 모두 가로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레드 제플린의 모든 음악들도 싫어한다고 한다. 그런데 레드 제플린의 리더인 지미 페이지와도 친하고, 존 폴 존스와 존 본햄과는 음악 활동을 같이 하기도 하는 등 저 부분에서만 싫어하는 듯하다.
- 가장 좋아하는 밴드로는 롤링 스톤스를 뽑았다. 동시대에 활동했으나 롤링 스톤스를 매우 존경한다고. 특히 믹 재거를 매우 좋아해서 1960년대에 성적인 관계까지 맺었다고. 피트 타운젠드는 본인은 이성애자지만 유일하게 섹스한 남자가 믹 재거였다고 밝혔으며, 믹 재거의 물건의 생김새까지 인터뷰에서 말하기도 했다.[11]
- 어릴때 꿈은 기자였다. 그래서인지 필력도 상당하다. 출판사를 운영한적도 있었고, 롤링 스톤에 기사를 투고한적도 있으며, 책도 몇권 낸 적도 있다.
- 배리 깁을 존 레논에게 소개시켜 준 적이 있다. 피트 타운젠드가 배리 깁에게 존 레논을 만나게 해 준다고 했기에 피트 타운젠드는 존 레논에게 "존, 이쪽은 비 지스의 배리 깁이야."라고 소개했고, 존은 뒤도 보지 않고 "Howyadoin"이라고 했고 곧바로 "Pleased to meet you"라고 한 후 다른 사람과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결국
-배리 깁의 동생 모리스 깁은 존 레논에게 술을 배우기도 했는데- 배리는 존 레논을 뒷모습으로만 만나게 되었다.
- 핑크 플로이드의 첫 공연과 마지막 공연을 모두 지켜본 사람이다. 핑크 플로이드가 1966년 UFO 클럽에서한 첫번째 공연에서 시드 바렛 및 로저 워터스와 몇마디를 나눴으며, 이후 무려 40여년이 지난 2005년 라이브 8에서 핑크 플로이드가 마지막 공연을 하기 전의 순서로 Who Are You 와 Won't Get Fooled Again을 연주한 바 있다.
- 조니 마에게 깁슨 레스폴을 줬고, 조니 마는 나중에 그걸 노엘 갤러거한테 빌려줬는데 노엘 갤러거가 난입한 관중이랑 싸우다 부숴버렸다(...). 그리고 조니 마는 노엘 갤러거에게 The Queen Is Dead에서 사용했던 레스폴을 하나 더 빌려주었고, 그건 아직도 노엘이 갖고 있다. 참고로 피트 타운젠드가 조니 마에게 주고 노엘 갤러거가 부숴버린 그 레스폴은 1960년 썬버스트 레스폴이라 안그래도 비싼 일반 깁슨 레스폴보다 몇배는 더 비싸다. 한화로 따지면 최소 1~2억원을 호가한다.[12] 더 황당했던건 그 부숴먹은 기타는 노엘이 뉴욕의 기타점에서 수리를 하긴 했는데, 수리점에서 듣기로 순정 넥이 아니었다고 한다. 조니 마가 피트에게 받기 전에도 이미 한번 부숴졌던 기타였다는 거였다. 역시 기타 부숴먹은거로 따지면 피트의 전매특허인지라 이미 피트가 부쉈던 기타가 아닌가 한다고.
- 폴 매카트니가 주최한 캄푸치아 자선 공연 당시 만취 상태로 공연해 곡의 코드까지 다 틀린 엉망진창 공연을 했고, 결국 폴 매카트니가 머리 끝까지 화가나 피트 앞에서 대놓고 멍청이라며 피트를 욕한 촌극을 일으키게 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이후에는 폴 매카트니의 원만하고 사교적인 성격 탓에 잘 화해(?)를 한 듯 하다.[13]
- 과거 TV 라이브 도중 키스 문이 드럼을 터뜨려 청력이 손상되는 사고가 일어난 적이 있는데 이분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자기가 부수던 기타를 계속 부쉈으며, 심지어는 MC가 메고 있던 어쿠스틱 기타까지 박살내버렸다.
- 매우 진보적인 정치성향으로 유명하다. 젊은 공산주의자 연맹(Young Communist League)에 들어간 공산주의자인데, 영국 연예계에서 좌파 운동가로 둘째라면 서러운 존 레논, 로저 워터스보다도 더 급진적인 정치관을 가진 셈. 더 후가 상업적으로 성공하면서 진지하게 공산주의를 주장하지는 않게 되었지만, 여전히 공산주의를 이상적인 이념으로 생각하고 지지한다고 한다. 또 공산당이 해체되기 전까지 영국 공산당의 당원이었는데, 공산당이 재창당된 현재 다시 공산당에 입당했는지는 불명이다. 더불어 브렉시트에도 굉장히 부정적이고, LGBT 인권에도 큰 관심을 보이는 등 아주 진보적인 정치관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14] 이렇듯 좌파 성향의 인물이긴 하지만 Baba O'Riley 같이 히피나 혁명 등을 비판하는 곡을 썼던 적도 있다. 이런 것을 보면 그렇게 철저한 구좌파에 가까운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