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ØW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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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81년 결성되어 1988년에 해체한 일본의 전설적인 록밴드. 1980년대 호황기 일본의 록밴드 붐의 중심에 서 있었던 밴드로, 일본의 초창기 대형 록밴드 중 하나로 일컬어진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본 록 씬에 변혁을 불러일으킨 전설의 밴드로서 그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다.
2. 멤버[편집]
좌측부터 호테이 토모야스 (기타), 타카하시 마코토 (드럼), 마츠이 츠네마츠 (베이스), 히무로 쿄스케 (보컬).
2.1. 히무로 쿄스케[편집]
- 이름인 히무로 쿄스케는 가명으로 본명은 테라니시 오사무. 성인 히무로(氷室)는 1970년에 연재되었던 만화 '악(ワル)'의 주인공의 이름에서 따왔으며, 이름인 쿄스케(京介)는 원래 한자만 다른 狂介였지만 데뷔 후 점쟁이에게 이름이 좋지 않다는 조언을 듣고 개명하였다.
- 학창시절에는 군마 출신의 유명한 폭주족으로, 블랙 엠페러[1] 에 소속했었다는 얘기도 있었다. 당시 동네에서도 소문난 싸움꾼으로, 한 주먹하는 수많은 일본 락 밴드 보컬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정도였다고 한다. 호테이가 그의 주먹이 무서워서 밴드 가입을 거절못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 호테이 왈, 고향에서 제왕급의 존재로서 악명이 널리 퍼져있었으나 이미 가창력 만큼은 프로급이었다고. 본인도 음악을 하지 않았다면 야쿠자가 되었을 거라고 인정하기도 했다.
- '데스 패널티', '스피니치 파워' 등의 밴드를 거쳐 데뷔했으나 소속사와의 갈등 및 애인과의 이별 등으로 결국 음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애인이 사준 티켓으로 RC 석세션의 무대를 보고 영감을 얻고, 오디션에서 결승에서 맞붙었던 밴드에 속해있던 호테이를 기타로 영입하고 고향의 친구들을 불러모아 BOOWY를 결성한다. 이 시절에 '아스트라 테라니시'라는 가명으로 철완 아톰(1980)의 삽입곡을 부르기도 했었다.
- 솔로 활동부터는 작사를 관뒀지만 BOOWY 활동 당시에는 대부분의 작사를 맡았다. 데뷔 당시인 MORAL에선 반사회적이고 비틀린 가사가 많았지만, 2집 이후로는 저항 정신을 담은 유려하고 로맨틱한 표현력으로 BOOWY 특유의 음악관을 만드는데 큰 공을 세웠다. 영어나 프랑스어를 활용한 비유적인 언어구사로 인해 가사가 난해하다는 평도 있었다.
- 주로 호테이가 작곡을 맡고 있었으나 가끔 작곡을 하기도 했는데, 활동 당시 호테이가 교제하던 야마시타 쿠미코의 세션을 뛰느라 작곡을 소홀히 하자 이에 대한 반발심으로 작곡에 매진했다고. 이후 솔로 활동 후로는 반대로 작곡을 메인으로 삼고 작사는 외주로 맡기곤 했다.
- 퇴폐적이고 날카로운 인상과 오늘날의 락 씬에서는 당연시되는 거칠게 세운 머리스타일, 파워풀한 라이브 퍼포먼스, 장 폴 고티에 등의 명품 브랜드를 무대 의상에 사용하는 등 비주얼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밴드 결성 당시에 고향에서 흔한 일본 폭주족 스타일이었던 히무로가 갑자기 호스트같은 서양 록커 차림을 하고 있어서 호테이가 놀랐다고.
- 밴드의 프론트맨으로서 전성기 당시 굉장한 인기를 자랑했으나, 상대적으로 미디어 출연은 상당히 적다. 결성 당시의 반항적 이미지에 대해 소속사나 신문사들과의 잦은 마찰 등으로 인해 거부감이 생긴 모양.[2] 초창기 아마추어 시절에는 일본 드라마나 영화 등에 카메오 출연하기도 했으나 확실하게 가수로서 자리를 잡은 솔로 활동 이래로 미디어 출연은 사실상 전무한 편. 모 토크쇼에서는 '이 방송을 마지막으로 TV는 안나온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호테이나 타카하시가 활발하게 미디어에 출연하는 것과는 반대.
- 데뷔를 위해 도쿄로 올라갔을 때 같이 따라와서 동거하던 애인이 있었는데, 히무로가 아르바이트에서 사고를 치거나 해서 혼자 수입을 감당하는 빈곤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단 에피소드가 있다. 이 에피소드로 인해 탄생한 곡이 보위의 대표곡 중 하나인 CLOUDLY HEART. 본인은 이 때의 시절을 '끝내주는 소꿉놀이(イカしたままごと)'라고 MC에서 칭하기도 했다.
- 똑같이 보위의 대표곡이자 마지막 라이브 곡이었던 Dreamin' 또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꿈을 쫓는 저항적이고 희망찬 가사였던 Dreamin'에 대해 "나는 꿈이 없습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아요" 같은 비관적인 내용의 팬레터를 받고, 이들을 위한 노래로 'Stranger'라는 곡을 제작하여 솔로 활동 첫 앨범에 수록하기도 했다. 본인은 이에 대해 '꿈을 꾸는 이에게는 Dreamin', 꿈을 제대로 꾸지 못하는 이에게는 Stranger.'라고 언급했다.
2.2. 호테이 토모야스[편집]
- 슬림하고 날렵한 스타일과 190을 넘는 장신의 다리로 신나게 스텝을 밟으면서도 화려한 연주를 선보이며 당시 BOOWY의 인기를 보컬인 히무로와 양분했다. BOOWY의 대부분의 곡을 작곡하였으며, 활동 초기의 전형적인 펑크 스타일에서 벗어나 점점 8비트의 뉴웨이브를 기반으로 한 팝 스타일을 완성시키며 BOOWY 특유의 스타일을 구축시키는데 성공했다. 해체 이후로도 다양한 스타일을 접목시키며 일본을 대표하는 프로듀서 겸 기타리스트로 정력적으로 활동 중이다.
- 히무로와 같은 군마 출신으로, 고향에서 오디션 결승에서도 맞붙기도 했던 '블루 필름'에 속해 있었지만 차후 히무로에 의해 보위에 가입했다. 본인의 언급에 따르면 당시 별로 면식이 없던 히무로가 갑자기 자기를 부르자 히무로의 악명을 떠올려 도쿄로 가서 빈둥거리고 살던 자기를 쥐어패려는게 아닌가(...)라고 생각해서 겁을 먹었다고. 실제로는 히무로와 마츠이가 호테이의 집에 자주 놀러가거나 병문안을 오는 일도 있었다는 둥 제법 교류는 있었던 모양. 이후 음악의 지향성이 비슷하단 걸 알게된 둘은 겨우 밴드를 결성하게 되었다고.
- 기타 외에도 코러스를 맡았는데, 특유의 울림있는 굵직한 목소리로 히무로의 파워풀한 미성과 시너지를 이루어내어 호평이 많았으나 솔로 활동 당시에는 오히려 특유의 음색 때문에 메인 보컬로서 호불호가 갈리게 되었다.
- 지명도가 낮던 활동 초기에는 연극이나 타 밴드의 세션으로 참가하거나 애니메이션 스톱!! 히바리군!과 바람계곡의 나우시카[3] 의 사운드 트랙에도 참여했다. 이 때의 인연으로 타카하시 마코토가 드럼으로 재적하게 되며 보위 앨범의 피쳐링을 시작해서 차후 COMPLEX로 듀오를 맺게되는 킷카와 코지, 야마시타 쿠미코, 스즈키 마사유키, 나카지마 미유키 등의 프로듀싱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중 야마시타 쿠미코와 교제를 시작하여 1986년에 결혼에 골인하기도 했다.
2.3. 마츠이 츠네마츠[편집]
- 활발하게 무대를 움직이며 존재감을 뿜내는 히무로와 호테이와는 상대적으로, 리젠트 헤어에 눈썹 하나 까딱 안하는 엄근진한 표정과 제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직립부동 상태에서 묵묵하게 베이스를 연주하며 또 다른 존재감을 뿜는 인물로, 딱히 사운드가 부각되진 않지만 타 멤버들 못지않은 엄청난 베이스 실력의 소유자이다.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운 피킹 속주의 달인으로서 그의 무시무시한 실력은 그가 작곡한 WORKING MAN의 베이스 솔로에서 볼 수 있다. 특유의 단단하며 속도감 있는 주법은 차후 일본 록의 베이시스트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Janne Da Arc의 베이시스트 ka-yu가 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히무로와 호테이와 똑같은 군마 출신으로, 히무로와는 유치원 시절부터의 친구로서 같이 여러 번 밴드를 결성했었다. 이후 오다 테츠로의 밴드 등의 여러 밴드를 전전하다가 실력 부족으로 쫓겨나는 등의 고난를 겪다가 옛 친구인 히무로와 호테이가 보위를 결성한단 소식을 듣고 합류한다. 해산 이후에도 꾸준히 솔로 및 라이브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타 멤버들의 앨범 제작이나 호테이의 라이브에도 참여하는 등 타 멤버들과의 교류가 가장 많다.
- 라이브에서의 과묵하고 무게감있는 인상과는 달리 유쾌하고 말하기 좋아하는 성격으로, TV 출연이나 인터뷰 등에서 그의 밝은 인상을 볼 수 있다. 라이브에서는 히무로에게 중후한 남자(渋い男)라고 자주 소개 받곤 한다.
2.4. 타카하시 마코토[편집]
- BOOWY의 링고 스타라고 불리는 BOOWY의 맏형이자 드러머로서 정확한 비트감과 파워풀하고 타이트한 사운드로 BOOWY의 스타일에 타 멤버 못지않게 큰 영향을 준 인물. 라이브에서도 활동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 해체까지의 4인 멤버 중 가장 늦게 합류한 멤버로, 결성 초기의 라이브를 구경하다 드럼을 모집한단 소식을 듣고 오디션 없이 세션을 뛰고나서 정식 멤버로 합류했다. 당시 대기실에서 무섭게 생긴 히무로, 커다란 호테이, 과묵한 마츠이 등 하나같이 개성 강한 멤버들을 처음 보고선 무서운 놈들이라고 생각했다고. 해체 후에도 마츠이와 마찬가지로 새 밴드를 결성하는 등 현재에도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방송에서 관련 특집을 할때마다 드러머로서 참여하는 등 BOOWY 관련 행사에서 자주 참여한다. 그 외에도 SNS나 유튜브 활동도 활발해서 BOOWY 당시의 에피소드를 푸는 등 호테이와 더불어 팬들과의 소통이 활발한 편.
- 하나같이 개성 강한 BOOWY의 멤버들 가운데에서 가장 친근하고 푸근한 이미지의 소유자였다. 히무로 또한 라이브 중 멤버들을 소개할 때 타카하시에 다해 '다정하고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이다.'라는 멘트를 통해 그의 인성에 대해 인증한 바 있다.
- 항상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어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는데, 원래 활동 초기에는 안경을 끼고 있었으나 호테이의 조언으로 착용하게 되었다고. 1집 이후로는 그가 선글라스를 벗는 모습은 보기 힘들다.
3. 역사[편집]
1981년 보컬의 히무로 쿄스케, 베이스의 마츠이 츠네마츠, 기타의 호테이 토모야스와 모로보시 아츠시(諸星アツシ), 색소폰의 후카자와 카즈아키(深沢和明), 드럼의 키무라 마모루(木村マモル)[4] 와 함께 '폭위(暴威)'를 결성하여 데뷔했다. 첫 투어 이후 키무라가 탈퇴하고 타카하시 마코토가 가입하고, 1982년에 발음만 똑같은 BOØWY로 개명했다.[5] 이렇게 해서 초창기 멤버는 총 6명이었는데, 1982년 모로보시와 후카자와가 탈퇴하여 우리가 아는 4인조 구성이 되었다.
메이저 데뷔하면 계약금으로 차와 여자친구에게 줄 반지를 사고, 해외여행 가보는 것과 하루 종일 술을 마셔보는 게 꿈이었던 소박한 소년들이었으나, 대도시 도쿄는 냉혹했다. 집에 전화도 없어서 급한 일이 생기면 목욕탕의 공중전화로 연락을 했고, 커튼도 냉장고도 없는 이케부쿠로의 하숙집, 굶기는 밥먹듯이…[6] 거기다 돈을 벌어오는 건 마츠이와 타카하시 둘뿐이라 돈에 쪼들리는 생활은 덤이었다.[7] 여러 에피소드[8] 를 겪으며 꿈을 키워나갔던 BOØWY는 1982년 마침내 첫번째 앨범 MORAL을 들고 레코드사의 문을 두드렸으나, 가는 데마다 가사 이미지가 더럽다면서 퇴짜.[9]
우여곡절 끝에 발매는 했어도 음악 팬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1983년에 나온 두번째 음반 INSTANT LOVE는 소속사인 저팬 레코드가 도쿠마 저팬으로 병합되는 과정에서, 홍보는 커녕 포스터 한 장조차 안 만들어 줬다고 한다.
전국의 라이브 하우스를 돌면서, 오로지 실력 하나로 스스로를 알려갔던 BOØWY. 뒤늦게 음악 관계자들에게 알려져 TOSHIBA EMI와 새로운 계약을 맺고, 1985년 독일(당시 서독)에서 녹음한 3집 BOØWY가 대성공을 거둔다. 호테이는 그 해 페르난데스에서 자신의 Telecaster 모델이 제작되자[10] 감격의 눈물을 닭똥처럼 떨어뜨렸다고 한다. 같은 해, 스튜디오 세션을 해주러 다니다 만난 야마시타 쿠미코와 결혼을 발표한다.
1986년 'JUST A HERO' 앨범[11] 과 'BEAT EMOTION' 앨범[12] , 그리고 1987년 PSYCHOPATH[13] 앨범으로 정점을 찍으며 쾌진격을 거듭하던 BOØWY는 1987년 12월 24일 시부야 공회당에서 해산을 선언하였고[14] , 1988년 4월 4일, 5일 이틀 간의 도쿄돔에서의 라이브로 BOØWY로서의 활동을 끝냈다. 해산을 결정한 밤, 호텔에서 아침까지 울었다던 호테이. 팬에게의 최후의 인사로서 발표한 2일간의 라스트 도쿄돔 기그는 10분만에 95,000장 전 티켓이 매진 되었다. 심지어는 예약 개시일 일부 지역의 전화 회선이 고장나기도. 이 때의 라이브를 담은 앨범인 'LAST GIGS'는 라이브 앨범으로서 이례적인 150만장을 팔아치우며 신기록을 갱신했다.
BOØWY가 일본 록계에 있어 미친 영향은 엄청난 것으로 특유의 세련된 음악성과 미디어를 전혀 이용하지 않는 강인하고 반항적인 자세, 참신한 비주얼과 스타일, 절정기에서 해체를 맞이한 행적 등이 주로 높이 평가된다. 그동안 매니아층에게만 호응을 얻었던 '록 음악'이란 장르가, BOØWY로 인해 대중성을 갖추게 되었다고 평가를 받는다. 종종 "BOØWY 이전" "BOØWY 이후"라고 표기되고, 현재도 BOØWY를 추종하는 후배 뮤지션들이나 카피 밴드가 수없이 등장하고 있다. 사실 일본 록의 꺾고 떠는 뽕삘 나는 창법은 히무로 쿄스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일설도 있을 만큼 큰 영향력을 가진 밴드였다. BOØWY 해산 이후, 히무로는 일본의 거물 보컬리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로서 지금도 투어를 개최하면 관객석이 만석을 채우는 등의 성공적인 솔로 커리어를 쌓았으며 호테이는 일본을 넘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타리스트 중 하나가 되었다. 베이시스트 마츠이나 드러머 타카하시도 히무로나 호테이만큼 화려하진 않아도 나름대로의 음악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호테이가 처음에 히무로의 밴드에 가입하게 된 이유가 '주먹이 무서워서'였다는 말이 있다. 호테이가 외모나 키, Yoshiki와의 일화 때문에 한 주먹을 했을 거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호테이는
훗날 타카하시의 자서전을 통해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당시 첫번째 아내였던 가수 야마시타 쿠미코의 세션 활동을 병행하던 호테이가 마츠이에 이어 타카하시까지 그녀의 라이브 공연에 백 밴드로 서줄 것을 권유하면서 멤버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고 한다.[18] 타카하시는 이건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19] 리더이자 보컬인 히무로에게 고민 끝에 이 사실을 알리게 되었다고.
한편 호테이의 자서전에서 직접 구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확실히, 해산을 먼저 입에 올린 것은 나였다. (중략) 하지만, 결성 이래 계속 흔들렸던 밴드가 붕괴되지 않도록 노력했던 것도 나였다. (중략) 마지막의 마지막에 내가 악역을 자청했을 뿐이다. 내게는 '해산해야만 하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무덤까지 가져갈 예정이다.' [20][21]
이들이 해체한 해에 태어난 야구선수 호소야 케이가 이들의 광팬이라고 한다. 등장곡과 응원가 모두 이들의 노래로 해 놨을 정도다. 또 모닝구무스메 OG 아베 나츠미도 보위를 매우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모닝구무스메로 데뷔하게 된 계기인 오디션 프로그램 'ASAYAN'에 참여한 것도, 원래는 프로그램 우승시 록 밴드의 보컬로 데뷔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4. 영향력[편집]
핫피 엔도가 일본어 록 음악을 처음 제시한 이후, 캐롤, 사잔 올 스타즈와 같은 밴드가 일본에서 록으로 큰 성공을 거두기 시작하고 RC 석세션과 같은 밴드가 록의 정신과 로커의 문화를 일본에 주입했다면, 보위는 그 다음 세대로서 멜로디나 음악 형식적 측면에 있어 일본적 팝 록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전까지 일본적 록이라 하면 청자들은 포크 음악이나 블루스, 혹은 헤비메탈에 기반한 음악들만을 떠올렸지만, 보위의 등장으로 비로소 록의 범주에 있으면서도 팝적인 감성을 갖춘, 이후 일본 록의 표준이 되는 '대중적인 하드록'이 생겨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80년대 세계 전체를 휩쓸던 뉴웨이브적 접근이나 일렉트로닉 도입, 멜로디를 중시하는 경향성 등을 표현하면서도 록의 하드함은 잃지 않은 채, '현대적 감수성'을 일본 록에 이식한 밴드로 평가된다. 그들이 없었다면 L'Arc~en~Ciel이나 GLAY 같은 밴드도 지금과 같은 시원시원한 음악이 아니라 훨씬 고전적인 음악을 하는 밴드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음악뿐만 아니라 그들의 라이브 퍼포먼스나 분장, 의상 또한 차세대 밴드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 초창기 비주얼계의 상당수 밴드(대표적으로 BUCK-TICK)가 그들의 음습하고 도회적인 이미지를 모방하기도 했다. 또한 그들의 상업적 성공으로 인하여 일본에 록 음악을 듣는 청자가 크게 늘어났고, 그것을 넘어서 대중음악 전반에 록적인 음악이 확산되는 계기도 되었다. 물론 이것은 이들 외에도 이들의 후발주자들의 꾸준한 성공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그들의 새로운 성공은 70년대의 일본 록과 80년대의 일본 록을 구분짓는 '2세대 J-Rock'의 시대를 열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록은 저항적 음악이고 일본 내에서는 듣는 사람만 들었으며, 그러한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록밴드들은 다양한 시도를 했다. 계속해서 지적이고 저항적 기조를 유지하며 마이너함에 머물러 있었던 RC 석세션[22] , 정신적 측면을 아예 포기하고 듣기 쉬운 록을 추구했던 캐롤이나, 해외의 하드 록/메탈을 참고하여 음악적 완성도에만 집중했던 LAZY(훗날 LOUDNESS 등으로 이어지는), 반대로 록적인 하드함을 포기하고 조금 더 일본적인 형식으로 다가가는 사잔 올 스타즈 등이 그러했다. 예시에서 알 수 있듯이 보위 이전의 유명한 일본 록 밴드들은 60-70년대의 고전적인 록 음악 형식(로큰롤, 포크, 블루스 등에 기반을 둔)을 구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23]
반면 보위는 록적이고 현대적인 사운드(80년대 최신의, U2, 폴리스 등을 위시한 뉴웨이브 계열)를 유지하면서도[24] 일본적인 접근(특히 멜로디의 측면에서)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25] , 그것으로 큰 대중적 성공을 이루어냈기에, 일본 록의 새로운 세대를 연 밴드로 평가받는다.
요약하면, 여전히 록이 일반 대중 및 시대와 괴리가 있던 이전의 일본 록의 흐름에서 거의 최초로 현대적 록 사운드를 유지한 음악으로 큰 성공을 거둠으로서 이후 일본에 등장할 수많은 록 밴드들이 성공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 놓은 것이 바로 보위라고 말할 수 있다.
보위의 성공에는 전 플라스틱스의 멤버였던 프로듀서 '사쿠마 마사히데'의 공도 빠질 수 없다. 1985년 BOØWY의 히트에는 그의 프로듀싱도 크게 공헌하였으며, 그는 이후 GLAY, JUDY AND MARY 등 후배 모던 락밴드를 프로듀싱하면서 'J-Rock의 대부'로 불리기까지 했다.
해산 후에도 그들의 영향력은 현재도 일본 내에 건재하여 그들의 카피밴드나 트리뷰트 앨범이 아직도 나올 정도며 기념 특집 방송이나 재결성 루머도 현재까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5. 해체 이후의 멤버 관계[편집]
갑작스런 해산 이후 급격히 적어진 멤버 간 교류로 인해 이런저런 나쁜 루머가 떠도는 등 멤버 간의 관계에 대한 말이 많은 편[26] 이지만, 멤버들은 이를 부정하고 있으며 서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밴드의 주축이었던 히무로와 호테이가 해산 후 서로에 대해 공식적으로 언급한 내용들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히무로 : '잡지에서는 라이벌이라는 표현을 쓰곤 했지만, 나는 호테이를 단 한 번도 라이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나는 호테이를 최고의 기타리스트라고 생각했다.'[27]
'멤버를 라이벌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절대로 그 밴드는 잘 될 수가 없다' [28]
'일본에서 제일 멋있는 기타리스트' [29]
호테이 : 밴드 시절 누구나 느꼈듯이 히무로와 호테이는 음악적으로나 퍼포머로서나 호적수이긴 했지만, 같은 배를 탄 운명공동체였다. 하지만 해체한 그 순간부터 나에게 있어 히무록(히무로의 애칭)은, 정말로 라이벌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30]
'보위라는 밴드에는, 좋든 싫든 대중들에게 강력하게 어필할 수 있는 히무로 쿄스케라는 보컬리스트가 있었다.' [31]
'하지만 보위에게는 그 히무록이 있었지.'[32]
'해체 결정 이후로 내 기타는 변한 것 같다. 분노나 거친 마음을 샤우팅하듯 내지르던 시절과는 달리 늑대의 하울링 같은, 슬픔을 품은 소리로. 히무록을 잃은 것은 내 심장의 절반을 잃은 것과도 같았다.' [33]
'물론 히무록은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빛의 오오라에는 아무도 저항할 수 없었을 것' [34]
'히무록을 스타일링하는 것이 즐거웠다. 머리카락이 얇아서 일단 스프레이와 물로 머리를 헝클어 놓고, 공들여서 머리를 세워줬다.' [35]
(히무로의 은퇴선언이 보도된 후) '만약에 정말로 그가 무대에서 자취를 감춰버리는 거라면, 마지막 무대는 단 한 곡만이라도 곁에서 기타를 치고 싶다는 바람 뿐'[36]
2001년 말에 호테이와 마츠이가 보위의 해산선언이 있었던 라이브 『1224』를 자택에서 함께 시청했던 사실이 알려졌다. 두사람 모두 계속 수중에 DVD를 가지고는 있었지만 '혼자서 보는 것이 두려웠다'고. 시청 후 호테이, 마츠이 둘 다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포옹을 했다고 한다. 호테이는 울면서 속으로 '해산 같은거 하지마!' 라고 외쳤다고 하며, 마츠이는 '해산 후 솔로 활동을 하면서, 무대 정중앙에 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실감했다. 밴드의 전면에 나서서 무언가를 말로 전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가혹한 일이었을 것이다'[37] 라며 당시 팬들 앞에서 직접 해산을 발표해야만 했던 프론트맨 히무로가 짊어진 중압감의 무게를 헤아리는 코멘트를 본인의 자서전에 남겼다.
히무로의 라이브 은퇴무대가 된 2016년 돔 투어의 마지막날, 호테이는 공연을 관람하고 본인의 공식 블로그에 존경어린 감상문[38] 을 남기기도 했다. 호테이 뿐만 아니라 마츠이 츠네마츠, 타카하시 마코토까지 보위 멤버 전원이 각각 찾아와 히무로의 마지막 무대를 배웅하였다. #
또한 2020년 히무로의 60세 생일을 맞아 호테이는 본인의 공식 인스타그램에 두사람의 보위 시절 투샷과 함께 축하의 메세지를 게시하였다. #
마지막 순간까지 극도로 티비 출연을 꺼렸던 히무로와는 달리 호테이는 예나 지금이나 활발한 예능 활동을 하고 있는데, 최근에도 각종 프로그램에서 히무로를 언급하는 경우가 많으며 '히무록'이라는 별명으로 칭하거나 '파트너'[39] 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단, 호테이는 현재 영국 런던에 거주 중이며 히무로는 미국 LA카운티 베벌리힐스에 거주 중[40] 인 관계로 직접 만난 지는 오래된 듯 하다.
타카하시가 2020년 인터뷰에서 밝힌 보위 멤버들의 포지션은 다음과 같다. '나는 보케 담당이었어요(웃음). 호테이는 평소에도 재미있기 때문에 츳코미 담당. 언제나 츳코미를 당했었지요. 히무로는 리더 타입으로 두목 역할. 마츠이는 부하 역할(웃음).'[41] 또한 늘 히무로와 호테이에게만 집중되던 스포트라이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멋진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 '결국 BOOWY는 <히무로와 호테이가 멋있는> 밴드인 겁니다. 튀는 건 두명이면 돼요. 밴드는 칼이니까. 칼끝이나 칼날 부분이 히무로와 호테이고, 나와 마츠이는 코등이와 칼자루 역할. 칼자루가 없으면 칼을 들지도 못하잖아. 우리가 토대고, 리듬부대[42] 가 제대로 해주면 뭘 해도 모양이 난다. 그런 역할 분담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43]
타카하시는 해산 후에도 모든 멤버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2023년 5월, 극렬 좌파로서의 트위터 논객 활동을 지속해온 타카하시에게 8살 연하인 호테이가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지 마라' 라는 댓글을 달았다가 삭제하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를 놓칠 리 없는 일본 주간지들은 재빠르게 '히무로와 호테이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해 줄 유일한 존재인 타카하시가 호테이와 충돌하다니 보위의 재결합은 더더욱 절망적' 이라는 둥의 관련 기사[44] 를 냈으며[45] 이를 지켜보는 현지 팬들의 심경은 복잡한 모양.
6. 디스코그래피[편집]
6.1. 정규 앨범[편집]
6.2. 베스트 앨범[편집]
6.3. 싱글[편집]
6.4. 라이브 앨범[편집]
6.5. 박스 세트[편집]
정규 디스코그래피 이외에 유명 라이브로는 84년에 신주쿠 LOFT에서 이루어진 LOFT 2 DAYS, 86년에 이루어진 JUST A HERO 투어, 87년 자신들의 전곡을 4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연주했던 것으로 유명한 CASE OF BOØWY, 해산 선언을 했던 1224, 고별 기념 콘서트인 LAST GIGS가 있다.
LOFT 2 DAYS 에서의 GIVE IT TO ME 라이브
JUST A HERO 투어에서 동명의 곡을 연주
CASE OF BOØWY에서의 B.BLUE
1224에서 해산 선언 이후 연주된 MEMORY
LAST GIGS에서 연주된 그들의 대표곡 MARIONET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