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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FIFA 월드컵 멕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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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70년 멕시코에서 개최된 9번째 FIFA 월드컵. 1970년 5월 31일부터 6월 21일까지 멕시코에서 열렸다. 멕시코 시티 등 5개 도시의 5개 경기장에서 16개국이 총 32경기를 치렀다. 브라질은 이 대회에서 펠레, 자이르지뉴, 호베르투 히벨리누, 토스탕 등 당대 최고의 선수진을 앞세워 최초의 3회 우승을 달성하며 쥘 리메 트로피를 영구 보관하게 되었다.
컬러 TV 생중계가 최초로 이뤄진 대회로[1][2] 이는 월드컵의 열기가 전세계로 확산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브라질의 경기가 전 세계에 중계되며 '축구는 브라질'이라는 그들의 명성을 알린 대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대회에서 최고의 폼을 보여준 펠레가 축구 황제의 자리에 등극한 대회이기도 하다.
경기 내적으로도 변화가 많았는데, 옐로 카드와 레드 카드의 도입이라거나 선수 교체 제도 등 선수 보호를 위한 제도들이 도입된 것이 가장 큰 변화다. 선수 교체 제도는 잉글랜드 리그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던 제도[3] 를 확대하며 가져온 것이고, 카드 제도는 1966년 월드컵 8강전에서 아르헨티나 주장 안토니오 라틴과 루돌프 크라이틀라인 주심 간에 있었던 '언어 폭력' 퇴장 판정 때문에 도입된 것이다.[4]
최초의 월드컵 공인구가 도입된 것도 이 대회로, 아디다스에서 제작한 텔스타가 공인구로 사용되었다. 특히 이 공이 우리가 생각하는 축구공의 이미지와 일치하는 최초의 공인구로 검은 오각형과 흰 육각형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2. 개최지 선정[편집]
1964년 10월 8일 도쿄에서 열린 FIFA 총회에서 개최지가 결정되었다. 멕시코와 아르헨티나가 경합하여 투표 결과 멕시코가 56 : 32로 아르헨티나를 여유있게 따돌리고 개최를 확정지었다. 유럽/남미가 아닌 곳에서 최초로 개최된 월드컵이 되었다.
3. 지역예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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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4. 경기장[편집]
월드컵이 열린 구장이 있는 도시와 구장 이름은 다음과 같다. 총 5개의 도시와 5개의 구장에서 열렸다.
- 멕시코 시티 - 에스타디오 아스테카 (Estadio Azteca) (107,247명) - 개막전, 결승전 개최
- 과달라하라 - 에스타디오 할리스코 (Estadio Jalisco) (71,100명)
- 푸에블라 - 에스타디오 콰우테모크 (Estadio Cuauhtémoc) (35,563명)
- 톨루카 - 에스타디오 루이스 도살 (Estadio Luis Dosal) (26,900명)
- 레온 - 에스타디오 노우 캄프 (Estadio Nou Camp) (23,609명)
5. 참가 감독[편집]
6. 대회 진행[편집]
6.1. 조별 리그[편집]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조별 리그 1조&2조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조별 리그 3조&4조
조편성은 다음과 같다. 굵은 글씨가 결선 토너먼트 진출팀.
- 1조: 소련, 멕시코, 벨기에, 엘살바도르
- 2조: 이탈리아, 우루과이, 스웨덴, 이스라엘
- 3조: 브라질, 잉글랜드,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 4조: 서독, 페루, 불가리아, 모로코
6.2. 결선 토너먼트[편집]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8강 이후 참고.
6.3. 우승[편집]
7. 최종 순위[편집]
8. 수상[편집]
- 페어플레이상 - 페루
8.1. 베스트 골[편집]
9. 기타[편집]
-
쥘 리메 컵이 사용된 마지막 월드컵이다. 이 월드컵이 끝나자 우승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영구 증정되었는데, 1983년에 도난당했다.
- 이 때 브라질 대표팀의 감독이었던 마리우 자갈루는 선수로도 1958년과 1962년에 이미 월드컵 우승을 했었기에 선수와 감독으로 월드컵 우승을 경험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기준으로 선수와 감독으로서 월드컵을 모두 우승한 인물은 이 사람과 프란츠 베켄바워, 디디에 데샹까지 총 3명이다.
-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은 축구에서 경고와 퇴장을 알려주는 옐로우 카드와 레드 카드 제도가 처음으로 적용된 대회이기도 하다. 이 제도는 영국의 축구 심판 조지 케네디 애스턴의 아이디어로 1970년 멕시코 월드컵부터 처음으로 도입되었는데 신호등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카드가 도입되기 이전에는 심판이 직접 이유를 설명하면서 경고와 퇴장을 명령했지만, 길게 이야기를 하지 않고 간결한 수신호로 쉽게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는 표현을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 후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하는 아나톨리 비쇼베츠는 이 대회에 소련 대표팀 선수로 출전했고, 무려 4골을 기록했다.
- 브라질은 이 대회 이후 펠레가 은퇴하면서 결승 문턱이나 8강에서 물을 먹는 등 오랫동안 암흑기를 겪다가 24년 후 1994년 미국 월드컵을 통하여 24년 만에 정상에 등극한다.
- 브라질의 마리우 자갈루 전 감독은 주 국적과 복수국적을 통틀어 최초이자 유일하게 아시아 국가의 국적을 가지고 있는 감독으로서 월드컵 우승을 경험했는데 그는 레바논 이민자의 후손이라 레바논 복수국적을 가지고 있다.
[1]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은 딱 1년차로 컬러중계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영국의 컬러방송이 시작된 시점이 1967년이기 때문[2] 참고로 올림픽은 1964 도쿄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컬러중계되었다.[3] 다만 잉글랜드 풋볼 리그의 경우 교체 선수가 각 팀 당 1명으로 제한되어 있었다.[4] 카드를 노란색과 빨간색으로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영국 심판 조지 케네디 애스턴의 아이디어인데, 1966년 라틴 퇴장 사건 당시 중계석에 대기하다가 경기가 너무 지연되자 필드에 내려가서 몸소 라틴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고 (당시 경기 중계화면에도 등장한다), 1962년 월드컵의 그 유명한 '산티아고 전투' 당시 직접 주심을 맡았던 인물인지라 '선수-주심 간 의사소통'에 대해 상당히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다. 여러모로 축구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인데 현대에 이르러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5] 1929년생, 40세.[6] 1951년생, 19세.[7] 1935년생, 35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