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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FIFA 월드컵 브라질/지역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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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문서: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
14개 팀을 뽑는 지역 예선에서 14개팀 본선 진출권 배당은 아래와 같다.
지역예선에는 총 32개 팀이 참가하였고, 이 중 14개 팀이 본선에 진출하였다.
여기에서 살아남은 팀은 예상대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였다. 하지만 스코틀랜드는 대회 시작 전부터 FIFA에 1등이 아니면 월드컵에 나가지 않겠다고 이야기했고, 자기네 홈에서 했던 마지막 경기에서 로이 벤틀리의 결승골로 잉글랜드에 패하자 브라질에 가는 것을 포기하였다.
튀르키예가 시리아를 크게 꺾고 최종 라운드에 진출하였다. 원래 2차전도 열렸어야 했지만 시리아의 포기로 치러지지 않았다.
오스트리아가 기권하는 바람에 튀르키예가 월드컵 본선에 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튀르키예 역시 나중에 기권하고 말았고, FIFA는 그 자리를 6조에서 스페인에 밀려 탈락한 포르투갈에게 주려 했지만 거절당했다. FIFA는 더 이상 다른 팀을 물색하지 않았고, 팀이 부족한대로 대회를 치렀다.
홈 앤 어웨이로 치렀던 두 경기에서 양 팀이 모두 1대 1로 비기는 바람에 중립 지역에서 최종전을 치러야 했다.
전반과 후반에 각각 한 골씩 1분 간격으로 골을 주고받아 2대 2로 정규시간을 마친 양 팀은 연장전에 돌입했고 연장 후반 9분에서야 크로아티아 출신 스트라이커 제이코 차이코프스키[13] 의 골로 유고슬라비아가 혈투의 최종 승자가 되었다. 여기에서 정말 아쉽게 떨어진 프랑스도 FIFA로부터 기권팀이 생겼으니 브라질에 가겠냐는 제의를 받았고 처음에는 수락했지만 나중에 거절하였다.
스위스가 룩셈부르크를 두 경기 다 이김으로서 최종예선에 진출하였다.
벨기에가 기권하는 바람에 스위스가 자동으로 본선에 합류하였다.
핀란드가 지역 예선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기권하였고 스웨덴이 본선에 진출하였다. 아일랜드 역시 나중에 FIFA 측으로부터 기권팀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초청을 받았지만 거부하였다.
이베리아 반도의 라이벌전에서는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꺾고 월드컵 본선에 합류하였다. 포르투갈 역시 나중에 FIFA 측으로부터 기권팀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초청을 받았지만 거절하였다.
아르헨티나가 이 월드컵 개최권을 브라질에게 준 것에 불만을 품고 그 이유로 기권하여 볼리비아와 칠레가 무혈입성하였다.
에콰도르와 페루가 기권하여 파라과이와 우루과이가 무혈입성하였다.
멕시코와 미국이 본선에 진출하였다.
원래 버마와 인도가 한 조, 필리핀과 인도네시아가 한 조를 이루어 승자가 최종 라운드에 진출하여 최종 라운드의 승자가 브라질에 가는 구조였지만 버마, 필리핀, 인도네시아가 모두 기권하여 인도가 무혈입성하였다. 하지만 인도는 FIFA에 월드컵에서 맨발로 축구를 하고 싶다고 졸랐고 FIFA는 선수 보호를 이유로 당연히 거부하였다. 이에 화가 난 인도는 FIFA에 배째라로 나왔고 FIFA는 진짜로 인도의 배를 쨌다. 하지만 다른 팀의 물색도 여의치 않았던 관계로 FIFA는 아쉬운대로 세 팀이 부족한 대로 대회를 진행하였다. 또 다른 이유로는 나라 형편 상 브라질까지 갈 돈이 없어서 출전을 고사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도 있다.[24]
- 순위표에서 이름이 굵은 글씨로 적힌 팀은 본선에 진출한 팀을 의미한다.
1. 진출권 배당[편집]
14개 팀을 뽑는 지역 예선에서 14개팀 본선 진출권 배당은 아래와 같다.
지역예선에는 총 32개 팀이 참가하였고, 이 중 14개 팀이 본선에 진출하였다.
2. 예선[편집]
2.1. 1조(유럽)[4][편집]
여기에서 살아남은 팀은 예상대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였다. 하지만 스코틀랜드는 대회 시작 전부터 FIFA에 1등이 아니면 월드컵에 나가지 않겠다고 이야기했고, 자기네 홈에서 했던 마지막 경기에서 로이 벤틀리의 결승골로 잉글랜드에 패하자 브라질에 가는 것을 포기하였다.
2.2. 2조(유럽)[편집]
2.2.1. 1라운드[편집]
튀르키예가 시리아를 크게 꺾고 최종 라운드에 진출하였다. 원래 2차전도 열렸어야 했지만 시리아의 포기로 치러지지 않았다.
2.2.2. 최종 라운드[편집]
오스트리아가 기권하는 바람에 튀르키예가 월드컵 본선에 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튀르키예 역시 나중에 기권하고 말았고, FIFA는 그 자리를 6조에서 스페인에 밀려 탈락한 포르투갈에게 주려 했지만 거절당했다. FIFA는 더 이상 다른 팀을 물색하지 않았고, 팀이 부족한대로 대회를 치렀다.
2.3. 3조(유럽)[편집]
2.3.1. 1라운드[편집]
2.3.2. 최종 라운드[편집]
홈 앤 어웨이로 치렀던 두 경기에서 양 팀이 모두 1대 1로 비기는 바람에 중립 지역에서 최종전을 치러야 했다.
전반과 후반에 각각 한 골씩 1분 간격으로 골을 주고받아 2대 2로 정규시간을 마친 양 팀은 연장전에 돌입했고 연장 후반 9분에서야 크로아티아 출신 스트라이커 제이코 차이코프스키[13] 의 골로 유고슬라비아가 혈투의 최종 승자가 되었다. 여기에서 정말 아쉽게 떨어진 프랑스도 FIFA로부터 기권팀이 생겼으니 브라질에 가겠냐는 제의를 받았고 처음에는 수락했지만 나중에 거절하였다.
2.4. 4조(유럽)[편집]
2.4.1. 1라운드[편집]
스위스가 룩셈부르크를 두 경기 다 이김으로서 최종예선에 진출하였다.
2.4.2. 최종 라운드[편집]
벨기에가 기권하는 바람에 스위스가 자동으로 본선에 합류하였다.
2.5. 5조(유럽)[편집]
핀란드가 지역 예선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기권하였고 스웨덴이 본선에 진출하였다. 아일랜드 역시 나중에 FIFA 측으로부터 기권팀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초청을 받았지만 거부하였다.
2.6. 6조(유럽)[편집]
이베리아 반도의 라이벌전에서는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꺾고 월드컵 본선에 합류하였다. 포르투갈 역시 나중에 FIFA 측으로부터 기권팀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초청을 받았지만 거절하였다.
2.7. 7조(남아메리카)[편집]
아르헨티나가 이 월드컵 개최권을 브라질에게 준 것에 불만을 품고 그 이유로 기권하여 볼리비아와 칠레가 무혈입성하였다.
2.8. 8조(남아메리카)[편집]
에콰도르와 페루가 기권하여 파라과이와 우루과이가 무혈입성하였다.
2.9. 9조(북아메리카[22] )[편집]
멕시코와 미국이 본선에 진출하였다.
2.10. 10조(아시아)[편집]
원래 버마와 인도가 한 조, 필리핀과 인도네시아가 한 조를 이루어 승자가 최종 라운드에 진출하여 최종 라운드의 승자가 브라질에 가는 구조였지만 버마, 필리핀, 인도네시아가 모두 기권하여 인도가 무혈입성하였다. 하지만 인도는 FIFA에 월드컵에서 맨발로 축구를 하고 싶다고 졸랐고 FIFA는 선수 보호를 이유로 당연히 거부하였다. 이에 화가 난 인도는 FIFA에 배째라로 나왔고 FIFA는 진짜로 인도의 배를 쨌다. 하지만 다른 팀의 물색도 여의치 않았던 관계로 FIFA는 아쉬운대로 세 팀이 부족한 대로 대회를 진행하였다. 또 다른 이유로는 나라 형편 상 브라질까지 갈 돈이 없어서 출전을 고사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도 있다.[24]
[1] 브리티쉬 홈 챔피언쉽이 통째로 예선의 한 조가 되었다. 브리티쉬 홈 챔피언쉽은 1884년부터 1984년까지 무려 100년간 열렸던 영국 홈네이션 4개국 간의 축구 대회로 원래는 순수한 자기네들끼리의 대회였지만 FIFA의 편애 배려로 인해 여기에서 1,2위 팀이 1950년 월드컵 본선권을 갖게 되었다.[2] 1949년에 멕시코에서 열린 북아메리카 챔피언십으로 대체되었다.[3] 튀르키예와 러시아, 이스라엘, 시리아는 지리적으로는 아시아지만 거리상으로는 유럽과 더 가깝기 때문에 유럽 지역 예선에 집어넣었다. 당시 시리아를 제외한 중동 국가들이 월드컵 예선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구분이 더 현실적이었다. 그리고 튀르키예와 이스라엘은 현재에도 유럽 지역 예선을 통해 월드컵에 참가하고 있다[4] 브리티쉬 홈 챔피언쉽이 통째로 예선의 한 조가 되었다. 브리티쉬 홈 챔피언쉽은 1884년부터 1984년까지 무려 100년간 열렸던 영국 홈네이션 4개국 간의 축구 대회로 원래는 순수한 자기네들끼리의 대회였지만 FIFA의 편애 배려로 인해 여기에서 1,2위 팀이 1950년 월드컵 본선권을 갖게 되었다.[5] 1949년에 800년만에 영국의 손에서 독립한 아일랜드 대표팀 중 지금의 북아일랜드 지방은 북아일랜드라는 이름으로 따로 출전하였고 브리티시 홈 챔피언쉽에 참가하였다. 아일랜드지만 영국과 친했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월드컵 예선에서는 아일랜드 자유국이라는 이름으로 출전했었다[6] 패널티킥[7] 카디프 시티의 전 홈구장. 현재 카디프 시티는 2009년에 건축된 카디프 시티 스타디움을 사용하고 있다[8] 스코틀랜드의 프로축구팀 퀸스 파크의 홈구장. 2012-13시즌에 국내 축구팬들의 혈압을 올리고 속을 박박 긁던 QPR과는 다르다. QPR과는!!![9] 맨체스터 시티의 옛날 홈구장. 1949년까지 올드 트래포드가 전쟁에 휘말려서 꽤 부서져버렸기 때문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이 구장에서 잠시 더부살이를 했었다. 맨체스터 시티는 2003년 이후로 시티 오브 맨체스터 스타디움-현재의 이름은 스폰서 계약으로 에티하드 스타디움을 사용하고 있다[10] 튀르키예의 국부 아타튀르크의 지도 아래 튀르키예 독립전쟁이 시작된 1919년 5월 19일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이름이다[11] 세르비아의 대표적인 축구팀인 파르티잔 베오그라드의 홈구장. 1959년부터 1963년까지는 지역 라이벌 레드스타 베오그라드도 같이 사용했었다. 1951년부터 1989년까지는 JNA 스타디온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었고 현재의 이름은 스타디온 파르티자나. 영어로는 파르티잔 스타디움이 된다[12] 1938년 월드컵에서 결승전을 치렀던 당시 프랑스의 메인 스타디움이었다[13]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준우승했던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의 핵심 멤버였다[14] 스위스의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축구팀의 홈구장[15] 1949년에 800년만에 영국의 손에서 독립한 아일랜드 대표팀으로 북아일랜드와는 완전히 결별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상태라 영국의 홈네이션들처럼 한 나라에 두 팀이 따로 출전하였다. 하지만 영국에 대한 뿌리깊은 증오로 1조의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다른 조들과 예선을 치렀다.[16] 1958년 월드컵의 결승전을 치르기도 했던 스웨덴 축구 대표팀의 메인 스타디움이었다. 2012년 10월 27일부로 프렌즈 스타디움이 로순다 스타디온에서 1Km 떨어진 곳에 새로 개장하였다[17] 패널티킥[18] 패널티킥[19] 패널티킥[20] 누에보-nuevo는 스페인어로 '새로운'이라는 뜻이다. 옛날에 쓰던 차마르틴 경기장을 대체하기 위해 새로 지은 경기장으로, 1955년에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그 이름은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이다[21] 특정 프로팀이 소유하고 있지 않고 포르투갈 대표팀의 A매치가 치러지는 경기장이다. 포르투갈 대표팀이 A매치를 가장 많이 치른 경기장이며 2014년부터 대대적으로 보수에 들어갔다.[22] 1949년에 멕시코에서 열린 북아메리카 챔피언십으로 대체되었다.[23] 멕시코의 프로 축구팀 크루스 아술의 홈구장이다[24] 6.25 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아예 작살나다시피했던 한국의 형편이 1950년대에 매우 안 좋았던 것은, 한국인이라면 다 알 만한 이야기. 하지만 당시 우리보다 국민소득이 더 떨어지는 나라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인도였다. 참고로 그 정도 거리까지의 비행기값이 2019년 현재 1인당 편도 기준 최소 150만 원이라는 무시무시한 가격을 자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