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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

덤프버전 :

한국 가톨릭 교회의 순교자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 (1984년 5월 6일 시성)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2014년 8월 16일 시복)

언어별 명칭
라틴어Martyres Corea CIII
영어Korean Martyrs
Andrew Kim Taegon, Paul Chong Hasang and 101 Companions[1]
프랑스어103 martyrs de Corée
독일어103 Koreanische Märtyrer und Märtyrerinnen
이탈리아어Martiri Coreani
스페인어Mártires Coreanos
중국어韓國殉道聖人

파일:attachment/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103martyr.jpg
103위 순교 성인화, 문학진, 1976년 ~ 1977년, 천주교 서울대교구 혜화동 성당



1. 개요
2. 연혁
2.1. 시복
2.2. 시성
2.2.1. 기적 심사 면제
2.2.2. 성인명 변경
2.2.3. 시성식 장소
3. 103위 성인
4. 참고 사이트



1. 개요[편집]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들'은 조선왕조가 천주교를 박해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 때 순교한 103위의 성인이다. 한국인 93명과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성직자였던 프랑스인 10명으로 구성된다. 1984년 5월 3일에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5월 6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시성식을 거행했다. 기념일은 9월 20일이며, 보편 전례력에 의무 기념일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 교구들에서는 이날을 대축일로 지낸다.

성인명이 길기 때문에 줄여서 '한국 103위 순교성인'(韓國103位殉敎聖人)이라고도 칭한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103위 성인의 탄생 이야기>(2009년, 푸른역사, 천주교 수원교구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 저)를 참고하기 바란다.


2. 연혁[편집]



2.1. 시복[편집]


기해박해 (1839년, 헌종 5년) 순교자 70위와 병오박해 (1846년, 헌종 12년) 순교자 9위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병인박해 순교자 24위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1925년, 1968년 2차례의 시복은 모두 기적 심사 면제령이 내려졌으며, 시복식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파일:external/www.catholictimes.org/P2907_2014_0810_1101.jpg
1925년 79위 시복화. 이탈리아인 화가 쥬스타니안이 그렸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명동대성당 좌측벽에 있는 소제대에서 볼 수 있다. 위의 성인화와 달리 앵베르 주교가 중앙에 있고 피에르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양 옆에 있다는 특징이 있다. 그 옆에 영대를 매고 꿇어앉는 이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채색 버전에는 이들 위에 있는 예수가 빠져 있다.

파일:aXzJCt9.jpg
1968년 시복식에서는 행사 때 사용하기 위해 성인들의 모습을 담은 상본을 단테라는 이탈리아인 화가가 그렸는데, 한국에 대한 무지로 상투촌마게처럼 표현하는 등 일본인과 유사한 모습으로 그리는 사단을 일으켰다. 상본이 공개되자 시복식에 참석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을 비롯한 한국 순례단이 매우 당황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시복식이 끝난 후 상본을 한국으로 가져가야 함에도 한국 순례단은 상본을 수령할 수 없었다. 나중에 시성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교황청을 방문한 한국 관계자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당시 관계자는, 자신이 본의 아니게 실수해 한국의 신자들을 실망시켰다며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2.2. 시성[편집]


한국 가톨릭은 1968년 시복식 후 기해·병오박해 79위 순교 복자와 병인박해 24위 순교 복자의 시성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978년 4월 13일 한국 103위 순교 복자에 대한 시성 청원이 시성성에 접수되어 교황 바오로 6세의 윤허를 받아 본격적인 시성 절차가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다른 시성 사례에서는 찾기 힘든 우대가 여러 차례 있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역할도 상당히 컸다. 당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시성 문제가 아니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행사 준비 때문에 교황청을 찾았다. 다른 사람들은 한참을 기다려야 만날 수 있는 시성성 고위 관료와 교황청 관계자들이 김수환 추기경이 로마에 왔다는 소식에 '멀리서 오셨으니 김수환 추기경께서 편한 시간에 저희가 일정을 맞춰드려야 한다'며 편의를 제공했고 김수환 추기경은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해 한국 천주교가 원하는 바를 교황에게 직접 말하기도 했다.


2.2.1. 기적 심사 면제[편집]


일반적으로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2가지의 기적 사례 보고가 요구된다. 복자로 인정되는데 하나, 성인으로 인정되는데 또 하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단 순교는 기적으로 간주되기에, 순교자는 1건의 기적 사례만 보고되더라도 시성을 받는 것이 이론상 가능하다.

다만 순교자가 시복되면서 기적 심사를 면제받았더라도 시성되기 위해서는 기적 심사를 받아야 한다. 1982년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기적 관면을 시성성에 요청했지만, 시복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기적 심사가 필요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한국 103위 순교자는 시복되면서 이미 기적을 면제받았는데 또 다시 기적을 면제받으면 다른 나라 천주교회들과의 형평성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에 시성성 장관 피에트로 팔라치니 추기경(Pietro Palazzini, 1912년 5월 19일 ~ 2000년 10월 11일)은 기적 관면이 아니라 기적 심사 관면을 내세우라고 조언했다. 그 조언에 따라 한국 주교단이 기적 관면 청원서가 아니라 기적 '심사' 관면 청원서를 교황청에 제출했다. 마침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복 시성에 있어서 지역 교회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도록 할 것을 골자로 한 지시를 내렸기 때문에 한국 천주교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를 받아들여 기적 심사를 면제함에 따라 기적 사례의 보고 없이 성인으로 인정받았다. 이는 선교사가 아니라 평신도 중심으로 자체적으로 신앙이 퍼져나간 소위 '신앙의 기적'이 가톨릭 역사상 조선이 유일하고,[2] 그 점이 높게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소위'라 표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자체가 기적으로 인정된 것이 아니라 기적 심사가 면제된 것일 뿐이다. 그래도 이 '신앙의 기적' 자체를 폄하할 수는 없다. 전세계적으로 사제에 의한 선교 없이 보통사람들이 모여서 자체적으로 성경을 공부하여 신자가 되고, 거꾸로 신앙에 대한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직접 사제를 찾아가 사제가 되거나 사제를 모셔온다는 것이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천주교 내부에서도 큰 화제가 됐으며, 훗날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 외벽에 수도회 창시자들만이 들어가는 전례를 깨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성상이 세워지게 됐다. 사실 19세기 당시 교황이던 그레고리오 16세는 목숨을 걸고 전해진 정하상의 조선 교구 설치와 사제 파견을 청원한 편지[3]를 직접 읽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동방에 기적이 일어났구나"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자발적으로 신자가 되다 못해 교구와 사제까지 요구하는 동양인이 있다는게 크게 기뻤기 때문.


2.2.2. 성인명 변경[편집]


당초 한국 103위 순교복자의 시성 청원서 제목에는 기해박해 때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사제들의 이름이 선두에 있었다.

한국 주교단은 103위 순교자 명칭이 한국의 성인들이 아니라 프랑스의 성인들을 연상시킨다 하여 시성 청원서 제목을 '복자 김대건 안드레아와 102위 동료 한국 순교자들'로 변경해줄 것을 청원했다.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기림과 동시에, 정하상 바오로를 통해 한국 천주교에서 평신도의 비중이 컸음을 나타내려는 의도였다.

이에 대해 시성성에서 나왔던 반대 의견으로는 비록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사제들이 프랑스인일지라도 조선 땅에서 순교했으므로 한국의 성인이기에 제목을 바꾸지 않아도 되며, 이미 정한 제목을 바꾸었을 때 파리외방전교회의 입장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 등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한국 주교단의 청원이 받아들여져 축일 명칭을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로 결정했음을 시성성이 통보했다.


2.2.3. 시성식 장소[편집]


어떤 의미에서는 기적 심사 면제나 성인명 변경보다도 더 큰 파격이었다. 시성식은 교황이 직접 주재하는 것이어서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만 거행하는 것이 수세기 동안 이어진 원칙이었는데, 아비뇽 유수 때를 제외하고 이 원칙이 깨진 첫 번째 사례가 바로 한국 103위 순교복자 시성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 가톨릭에서는 "교황 방한에 맞춰 시성식을 한국에서 열 수 없겠느냐?"라고 교황청 시성성에 청원했지만, 한국 103위 순교 복자 시성에 매우 협조적인 태도를 보여준 시성성도 시성식 장소에 대해서만큼은 "성 베드로 대성당 외의 장소에서 시성식이 열릴 경우 다른 지역 교회들과의 형평성 문제 때문에 그 상징성이 퇴색할 수 있다."라며 완강한 입장을 견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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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03위성인시성식_전경-1984-0435-001.jpg

그런데 시성성의 입장과 상관없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 방문 때 시성식을 열겠다고 친히 결정하면서 '한국에서 거행된 시성식'은 어디까지나 1984년 교황 방한 때의 부대 행사이지 주된 행사가 아니고, 시성성의 동의 없이 교황의 의지로 관철한 극히 예외적인 사례이므로 이는 시성식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대한 변경이 아니며, 다른 나라 교회가 한국의 사례를 들어 자기 나라에서도 시성식을 거행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구조가 정립되었다. 실제로 시성성 장관 피에트로 팔라치니 추기경, 차관 트라이안 크리샨 대주교(Traian Crișan, 1918년 5월 21일 ~ 1990년 11월 6일), 차관보 파비얀 페라야 주교(Fabijan Veraja, 1923년 1월 20일 ~ 2014년 10월 28일)는 한국에서 열린 시성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3. 103위 성인[편집]


성인신분출생사망나이순교 사적비고
001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신부, 순교자1821.08.21.1846.09.16.26세군문 효수형[4]
기해박해(1839년) 순교자 7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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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성 정하상(丁夏祥) 바오로신학생, 순교자1795.1839.09.22.45세참수형[1]
003성 이호영(李――) 베드로회장, 순교자1803.1838.11.25.36세옥사[2]
004성 정국보(丁――) 프로타시오상인, 순교자1799.1839.05.20.41세옥사
005성녀 김아기(金阿只) 아가타과부, 순교자1787.1839.05.24.53세참수형
006성녀 박아기(朴阿只) 안나부인, 순교자1783.57세참수형
007성녀 이소사(李召史) 아가타과부, 순교자1784.56세참수형[3]
008성녀 김업이(金業伊) 막달레나과부, 순교자1774.66세참수형
009성 이광헌(李光獻) 아우구스티노회장, 순교자1787.53세참수형[4]
010성녀 한아기(韓阿只) 바르바라과부, 순교자1792.48세참수형
011성녀 박희순(朴喜順) 루치아동정 궁녀, 순교자1801.39세참수형[5]
012성 남명혁(南明赫) 다미아노회장, 순교자1802.38세참수형[6]
013성 권득인(權得仁) 베드로상인, 순교자1805.35세참수형
014성 장성집(張――) 요셉순교자1786.1839.05.26.54세옥사
015성녀 김(金) 바르바라과부, 순교자1805.1839.05.27.35세옥사
016성녀 이(李) 바르바라동정 순교자1825.15세옥사
017성녀 김노사(金老沙) 로사동정 순교자1784.1839.07.20.56세참수형
018성녀 김성임(金成任) 마르타과부, 순교자1790.50세참수형
019성녀 이매임(李梅任) 데레사부인, 순교자1788.52세참수형
020성녀 김장금(金長金) 안나과부, 순교자1789.51세참수형
021성 이광렬(李光烈) 요한동정 순교자1795.45세참수형[7]
022성녀 이영희(李英喜) 막달레나동정 순교자1809.31세참수형
023성녀 김누시아(金累時阿) 루치아동정 순교자1818.22세참수형
024성녀 원귀임(元貴任) 마리아동정 순교자1818.22세참수형
025성녀 박큰아기(朴大阿只) 마리아부인, 순교자1786.1839.09.03.54세참수형[8]
026성녀 권희(權喜) 바르바라부인, 순교자1794.46세참수형[9]
027성 박후재(朴厚載) 요한상인, 순교자1799.41세참수형
028성녀 이정희(李貞喜) 바르바라과부, 순교자1799.41세참수형
029성녀 이연희(李連熙) 마리아부인, 순교자1804.36세참수형[10]
030성녀 김효주(金孝珠) 아녜스동정 순교자1816.24세참수형[11]
031성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회장, 순교자1805.1839.09.12.35세옥사
032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Imbert Laurent)
주교, 순교자1796.03.23.1839.09.21.43세군문 효수형[12]
033모방 베드로
(Maubant Pierre)[13]
신부, 순교자1803.09.20.35세군문 효수형[14]
034성 샤스탕 야고보
(Chastan Jacques)
신부, 순교자1803.10.07.35세군문 효수형[15]
035성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역관, 순교자1791.1839.09.22.49세참수형[16]
036성녀 허계임(許季任) 막달레나부인, 순교자1773.1839.09.26.67세참수형
037성 남이관(南履灌) 세바스티아노회장, 순교자1780.60세참수형
038성녀 김유리대(金琉璃代) 율리에타궁녀, 순교자1784.56세참수형
039성녀 전경협(全敬俠) 아가타궁녀, 순교자1787.51세참수형
040성 조신철(趙信喆) 가롤로복사, 순교자1795.45세참수형[17]
041성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회장, 순교자1796.44세참수형[18]
042성녀 박봉손(朴鳳孫) 막달레나과부, 순교자1796.44세참수형
043성녀 홍금주(洪今珠) 페르페투아과부, 순교자1804.36세참수형
044성녀 김효임(金孝任) 골롬바동정 순교자1814.26세참수형[19]
045성녀 김(金) 루치아과부, 순교자1769.1839.07.71세옥사
046성녀 이(李) 가타리나과부, 순교자1783.1839.09.57세옥사
047성녀 조(趙) 막달레나동정 순교자1807.33세옥사
048성 유대철(劉大喆)[20] 베드로소년, 순교자1827.1839.10.31.13세교살[21]
049성녀 유(柳) 체칠리아과부, 순교자1761.1839.11.23.79세옥사[22]
050성 최창흡(崔昌洽) 베드로회장, 순교자1787.1839.12.29.53세참수형
051성녀 조증이(趙曾伊) 바르바라부인, 순교자1782.58세참수형
052성녀 한영이(韓榮伊) 막달레나과부, 순교자1784.56세참수형
053성녀 현경련(玄敬連) 베네딕타회장, 순교자1794.46세참수형[23]
054성녀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동정 순교자1797.43세참수형[24]
055성녀 고순이(高順伊) 바르바라부인, 순교자1798.42세참수형
056성녀 이영덕(李榮德) 막달레나동정 순교자1812.28세참수형
057성녀 김(金) 데레사과부, 순교자1796.1840.01.09.44세교수형[25]
058성녀 이(李) 아가타동정 순교자1823.17세교수형[26]
059성 민극가(閔克可) 스테파노회장, 순교자1787.1840.01.30.53세교수형
060성 정화경(鄭――) 안드레아회장, 순교자1807.1840.01.23.33세교수형
061성 허(許) 바오로군인, 순교자1795.1840.01.30.45세옥사
062성 박종원(朴宗源) 아우구스티노회장, 순교자1792.1840.01.31.48세참수형
063성 홍병주(洪秉周) 베드로회장, 순교자1798.42세참수형
064성녀 손소벽(孫小碧) 막달레나부인, 순교자1801.39세참수형
065성녀 이경이(李瓊伊) 아가타부인, 순교자1813.27세참수형
066성녀 이인덕(李仁德) 마리아동정 순교자1818.22세참수형
067성녀 권진이(權珍伊) 아가타부인, 순교자1819.21세참수형
068성 홍영주(洪永周) 바오로회장, 순교자1801.1840.02.01.39세참수형
069성 이문우(李文祐) 요한신학생, 순교자1809.31세참수형
070성녀 최영이(崔榮伊) 바르바라부인, 순교자1818.22세참수형[27]
071성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회장, 순교자1795.1841.04.29.47세교수형
[1]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차남, 복자 정철상 가롤로의 동생, 성녀 유 체칠리아(049)의 아들,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054)의 오빠.[2] 성녀 이소사 아가타(007)의 남동생.[3] 성 이호영 베드로(003)의 누나.[4] 성녀 권희 바르바라(026)의 남편, 성녀 이 아가타(058)의 아버지, 성 이광렬 요한(021)의 형.[5] 성녀 박큰아기 마리아(25)의 여동생.[6] 성녀 이연희 마리아(029)의 남편.[7] 성 이광헌 아우구스티노(009)의 남동생.[8] 성녀 박희순 루치아(011)의 언니.[9] 성 이광헌 아우구스티노(009)의 아내.[10] 성 남명혁 다미아노(012)의 아내.[11] 성녀 김효임 골롬바(044)의 여동생.[12] 한국 이름 범세형(范世亨),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13]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를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유학보냈다. 최방제는 도중에 죽었지만, 김대건과 최양업은 무사히 자라나 신부가 되었다.[14] 한국 이름 나백다록(羅伯多祿).[15] 한국 이름 정아각백(鄭牙各伯).[16] 성 유대철 베드로(048)의 아버지.[17] 성녀 최영이 바르바라(070)의 남편.[18] 성 김대건 안드레아(001)의 아버지.[19] 성녀 김효주 아녜스(030)의 언니.[20] 천주교 서울대교구 청담동 본당의 주보 성인이다.[21]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035)의 아들.[22]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아내, 복자 정철상 가롤로와 성 정하상 바오로(002),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054)의 어머니.[23] 성 현석문 가롤로(072)의 누나.[24]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성녀 유 체칠리아(049)의 딸, 복자 정철상 가롤로와 성 정하상 바오로(002)의 여동생.[25] 성 김대건 안드레아(001)의 당고모. 일설에는 김제신이라 이름이 전해지나 확실치는 않다. 남편 손연욱 요셉은 1823년 체포되어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26] 성 이광헌 아우구스티노(009)의 딸.[27] 성 조신철 가롤로(040)의 아내.
병오박해(1846년) 순교자 9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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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성 현석문(玄錫文) 가롤로회장, 순교자1797.1846.09.19.50세군문 효수형[1]
073성 남경문(南景文) 베드로회장, 순교자1796.1846.09.20.51세교수형
074성 한이형(韓履亨) 라우렌시오회장, 순교자1799.48세교수형
075성녀 우술임(禹述任) 수산나과부, 순교자1803.44세교수형
076성 임치백(林致百) 요셉포졸, 순교자1804.43세교수형
077성녀 김임이(金任伊) 데레사동정 순교자1811.36세교수형
078성녀 이간난(李干蘭) 아가타동정 순교자1814.33세교수형
079성녀 정철염(鄭鐵艶) 가타리나부인, 순교자1817.30세교수형
[1] 성녀 현경련 베네딕타(053)의 남동생.
병인박해(1866년) 순교자 24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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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성 유정률(劉正律) 베드로회장, 순교자1837.1866.02.17.30세장살
081성 베르뇌 시메온
(Berneux Simeon)
주교, 순교자1814.05.14.1866.03.07.52세참수형[1]
082성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Bretenieres Justus)
신부, 순교자1838.02.28.28세참수형[2]
083성 도리 베드로 헨리코[3]
(Dorie Pierre Henri)
신부, 순교자1839.09.23.27세참수형[4]
084성 볼리외 베르나르도 루도비코
(Beaulieu Bernard Louis)
신부, 순교자1840.10.08.26세참수형[5]
085성 남종삼(南鍾三) 세례자요한승지, 순교자1817.50세참수형
086성 전장운(全長雲) 세례자요한상인, 순교자1811.1866.03.09.56세참수형
087성 최형(崔炯) 베드로회장, 순교자1814.53세참수형
088성 정의배(丁義培) 마르코회장, 순교자1795.1866.03.11.72세군문 효수형
089성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번역가, 순교자1845.22세군문 효수형
090성 다블뤼 안토니오
(Daveluy Antoine)
주교, 순교자1818.03.16.1866.03.30.49세군문 효수형[6]
091성 위앵 마르티노 루카
(Huin Martin Luc)
신부, 순교자1836.10.20.30세군문 효수형[7]
092성 오매트르 베드로
(Aumaitre Pierre)
신부, 순교자1837.04.08.29세군문 효수형[8]
093성 장주기(張周基) 요셉회장, 순교자1803.64세군문 효수형
094성 황석두(黃錫斗) 루카회장, 순교자1813.54세군문 효수형
095성 손자선(孫――) 토마스농부, 순교자1844.1866.05.18.23세교수형
096성 정문호(鄭――) 바르톨로메오원님, 순교자1801.1866.12.13.66세참수형
097성 조화서(趙――) 베드로농부, 순교자1815.52세참수형[9]
098성 손선지(孫――) 베드로회장, 순교자1820.47세참수형
099성 이명서(李――) 베드로농부, 순교자1821.46세참수형
100성 한재권(韓――) 요셉회장, 순교자1836.31세참수형
101성 정원지(鄭――) 베드로농부, 순교자1846.21세참수형
102성 조윤호(趙――) 요셉농부, 순교자1848.1866.12.23.19세참수형[10]
103성 이윤일(李尹一) 요한회장, 순교자1823.1867.01.21.45세참수형
[1] 한국 이름 장경일(張敬一),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4대 교구장.[2] 한국 성 백(白).[3] 프랑스 뤼송교구 출신. 리슐리외 추기경이 사목하던 교구이다.[4] 한국 성 김(金).[5] 한국 이름 서몰례(徐沒禮).[6] 한국 이름 안돈이(安敦伊),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5대 교구장.[7] 한국 성 민(閔).[8] 한국 성 오(吳).[9] 성 조윤호 요셉(102)의 아버지.[10] 성 조화서 베드로(097)의 아들.


4. 참고 사이트[편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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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im Taegon과 Chong Hasang이라는 철자는 '김대건'과 '정하상'의 매큔-라이샤워 표기법 표기 Kim Taegŏn과 Chŏng Hasang에서 반달표(˘)만 제거한 것이다.[2] 비슷한 사례로 일본카쿠레키리시탄이 있지만, 이쪽은 일본 막부의 탄압으로 사제가 없는 상태에서 250여년 간 평신도 사이에 구전으로 전례가 이어진 것이 서양 선교사에 의해 발견된 사례이다. 이들은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기 전까지 공개적인 종교활동을 하지 못했기에 가톨릭 신앙이 퍼지지는 못했다.[3] 조선에서 청나라 마카오에 있던 교황청 소속 지부로 먼저 편지(한문)가 보내진뒤, 라틴어로 번역되어 로마 교황청으로 전달되었다.[4] 최초의 한국인 사제, 성 김제준 이냐시오(041)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