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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권 ~ 22권은 표에 해당, 23권 ~ 30권은 서에 해당. 사기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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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한의 6대
황제.
휘는 유계(劉啓)이고,
문제와
효문황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래 제위와 거리가 멀었지만, 아버지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은 기원전 179년 황태자로 책봉이 되었다. 본디 유학을 공부했으나
도교에 심취했던 어머니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성격은 다혈질에 괄괄한 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를 들자면, 공신이었던
주아부, 부친의 측근이었던 등통 등을 죽음으로 몰고간 일화가 있고, 태자 시절 오나라 왕
유비[1] 삼국지의 유비와 동명이인으로 한자도 다르고 시대도 다른 인물이다. 고조의 둘째 형 합양후 유중의 아들로 경제의 오촌 아저씨였다.
의 세자 유현
[2]과 함께
바둑[3] 쌍륙과 비슷한 게임으로 추정되는 육박이라는 설도 있다.
을 두던 중 승부가 잘 안풀리자 홧김에 바둑판을 던져 거기 맞은 유현이 사망한(...) 일화도 있다. 물론 죽일 의도가 전혀 없던지라 무척 당황해했고 공식으로 사과도 했지만 후일 유비가
오초7국의 난을 일으키게 된 것은 아들을 죽게 만든 경제에 대한 원한도 컸다고 한다.
[4] 사후처리가 미흡했다는 말도 있다. 시신을 유비에게 보내고 장례식 치르게 궁으로 오라고 했다고.(...)
경제는 그의 아버지
문제의 치세를 이어 즉위 후 산업을 부흥하는데 큰 힘을 쏟았는데, 덕분에 국고에는 재화가 가득차서 그것들을 묶은 줄이 끊어질 정도였고, 백성들은 모두
노새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이러한 두 부자의 덕치를
문경지치라고 칭한다. 또한 그는
오초7국의 난을 진압해
군국제를 고쳐 황제가 지배하는
중앙집권적 군현제도의 기틀을 닦았다. 아버지의 치세를 물려 받아 이를 완성시켰다는 점에서
청나라 옹정제와 비교되기도 하는 인물이다.
한경제의 본처였던
박 황후는 어찌된 것인지 적자를 낳지 못했다. 이에 효문황후는 넌지시 경제의 동생인 양왕 유무를 다음 황제로 정할 것을 권했으나, 경제는 거절하였다.
이후 경제의 할머니인
고황후 박씨가 죽자, 경제는 고황후의 조카 박 황후를 황실을 번성치 못한 죄로 폐하였고, 새로운
황후를 정하려고 했다. 그런데 본래 가장 유력한 인물은 경제의 장남 유영을 낳았고 총애도 많이 받은
후궁 율희(栗姬)였으나, 어쩌다보니 최종적으로 황후가 된 건 다른 후궁인
왕지였다. 그리고 이 왕지의 아들이 바로 훗날
한무제가 되는 유철.
사연을 들여다보면 이러한데, 유계가 황제로 즉위하자 경제의 장남 유영은 황태자가 되었다. 그런데 경제의 유일한 친누나 관도공주
[5] 이름은 유표. 효문황후 소생의 자녀는 2남 1녀인데, 장녀가 관도공주, 장남이 한경제이다. 한경제 때는 황제의 누이라서 '장공주'였기 때문에(공주를 참고하면 알겠지만 중국은 공주를 구별했는데, 한국에서는 특별히 구분하지는 않았다.) '관도장공주'라고 불렸다.
는 자신의 딸
진아교를 유영에게 시집 보내려고 하였지만, 율희는 평소 경제에게 여자들을 소개하는 관도공주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 그런데 왕지는 궁내에서 영향력이 상당한 관도공주와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관도공주의 딸 진아교는 유영과의 혼담이 깨진 후 유철과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이에 관도공주는 어찌보면 당연하게도 이후 경제에게 매일 율희를 참소하고 왕지의 아름다움을 칭찬했다. 경제도 유철이 똑똑하다고 여겼고 상서로운 징조도 있어서 결국 유영을 태자에서 폐하여 임강왕으로 삼고 유철을 황태자로 삼았다. 이에 율희는 한스러워하다가 분사했다.
[6] 다만 그렇게 무제와 결혼한 진아교도 끝이 좋진 않았다. 효무황후 진씨 항목 참조.
제후왕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조조[7] 위에서 언급한 오나라 왕 유비의 경우처럼 삼국지의 조조와 동명이인이다. 한자로 하면 鼂錯로 삼국지의 曹操가 아니다.
를 어사대부로 등용해서 권력을 높이고 제후들의 영토를 삭감해 중앙에 편입시키는 정책을 강행하던 중
오초칠국의 난을 불러일으켰다. 7국은 조조를 죽이면 끝내겠다고 해서 경제는 조조를 거짓으로 입궐하라고 했다. 그러나 수레는 황궁으로 향하지 않고
사형장이었던 동쪽 시장으로 갔고 여기서 조조는
참수당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들의 난은 계속되었고 경제는
주아부 등의 활약으로 이를 진압한다. 유비는 동월로 달아났는데 거기서 창에 찔려 죽고 머리만 한나라로 배달되었으며 유비의 아들 유구는 민월로 도주했다.
능은
시안 교외에 위치한 양릉(陽陵)인데, 발굴 현장을 보존하여 현대식 지하 박물관이 만들어져 있다.
론리플래닛에서는
병마용과 함께 서안에서 반드시 가봐야 할 유적지로 손꼽고 있으니, 시안에 여행갈 기회가 있으면 한번 가보자. 많은 도굴구멍이 있고, 실제로 황금과 보석류의 유물은 거의 도굴되었지만 그 외의 유물들은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었다. 순장 대신 많은 토용들이 발굴되었는데, 인체의 1/5 크기 정도이다.
아들이 무려
14명이나 되며, 이는 전한 황제들 중 가장 많은 수다.
[9] 한서에서는 황제가 되지 못한 황제의 아들들의 전기를 묶어 한 권으로 만드는데, 고5왕(회남여왕 유장은 별전으로 따로 나오지만), 문3왕, 경13왕, 무5자, 선+원6왕이다.
그리고 그 아들들도 후손들이 많은 편이었다.
수백 년 뒤긴 하지만 후한을 시작한
광무제 유수가 이 사람의 7남인 장사정왕 유발의 후손이다.
왕망을 토벌했던
경시제 유현도 장사정왕의 후손이다. 정확히는 유수가 조부 대에서 작은집이었고 유현이 큰집이었다.
촉한의 소열제
유비도 경제의 9남인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었고, 후한 삼국시대엔 이를 내세워 마침내는 새로운 한나라(촉한)를 건국하기까지 했으니 참으로 파란만장하다. 경제의 4남인 노공왕(魯恭王) 유여(劉餘)의 후손은 바로 삼국지의
유표와
유장이다. 종합하면, 유씨 집안에서
전한·
후한·
촉한 황족의 분기점이 바로 경제다.
사실 유발의 경우 하룻밤 사고로 계획에 없이 생긴 아들이다 보니 경제가 신경쓰지 않았고 유승의 경우 워낙 위에 형들이 많고 아버지 경제가 한무제를 총애한지라 관심을 못 받았다. 한마디로 이들은 말만 황자일 뿐 실제로는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었고, 신하들이 경제에게 "그래도 폐하의 아드님들인데 신경 좀 써 주시죠"라는 말을 한 적도 있을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