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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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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홍필주.jpg
자 / 호사량(士良) / 자은(紫隱)
본관풍산 홍씨[1]
출생1857년 9월 7일
충청도 온양군 동하면 세교리
(현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세교리)[2]
사망1917년 12월 12일
경기도 경성부
묘소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상훈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홍필주는 1857년 9월 7일 충청도 온양군 동하면 세교리(현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세교리)에서 부친 홍재모(洪宰謨)와 모친 안동 권씨 권철전(權喆銓)의 딸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작은아버지인 생원 홍가모(洪可謨)에게 입양되었다. 1896년 1월 안동군수 겸 안동부사를 역임했으며, 안동부 참서관을 거쳐 1896년 3월 안동 재판소 검사를 겸임했다.

1896년 8월 현풍군수로 부임한 그는 농상을 권하고 수리(水利)를 잘 다스려, 1896년 8월에 현풍에 사는 백성들이 만인산(万人傘)을 지어 올렸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1898년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2년간 역임하였다. 1900년 1월 대구관찰사 겸 대구 군수를 역임하였으며, 1901년 중추원 칙임 참의관을 역임했다.

1904년 5월 30일 한일의정서가 체결되고 일본이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나철·오기호·이기(李沂) 등 3명과 함께 신사소청(紳士疏廳)을 설치하여 상소를 올리는 한편 규탄선언서를 국민에게 발표했다. 1905년 6월 나철·오기호·이기 등과 함께 일본 도쿄로 건너가서 이토 히로부미 등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라고 요구하였으며, 천황과 이토 히로부미에게 장문의 서신을 보내어 한일 양국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할 것을 충고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실시되자, 그는 장지연이 주동이 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평의원이 되어 동회의 회보를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국민정신을 계몽하며 선도하였다. 1907년 3월 오기호·나철·이기 등과 함께 이완용을사오적을 주살하기로 결의하고 실행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1909년 3월 대한자강회가 해산당하자 장지연·권동진과 함께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조직하고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일진회를 성토하면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규탄하였으며 <대한협회보(大韓協會報)>의 편집과 발행인이 되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0년 6월 일본 도쿄에 재차 건너가 일본 대신들을 만나 한국 침략을 비판였으며, 그곳에서 이홍장이 특파한 양계초와 만나 일본의 식민정책을 비판했다. 이후 대한협회에서 설립한 기호흥학원(畿湖興學院)의 초대 학무부장(學務部長)으로 취임하여 후진을 양성하는데 앞장서면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17년 9월 7일 경성부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홍필주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1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19세 주(周) 항렬.[2] 판돈녕부사를 지낸 만퇴당(晩退堂) 홍만조(洪萬朝)의 종가가 이 마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