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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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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96년 시즌 전 하와이 전지훈련장에서 해태 타이거즈 선수들이 김응용 감독과 코치진에게 집단으로 항명한 사건.
2. 배경[편집]
1996년 초반의 해태는 전년인 1995년 시즌을 끝으로 김성한이 은퇴하고 코치 연수를 받으러 주니치 드래곤즈로 떠나고 에이스 투수 선동열도 주니치 드래곤즈에 임대선수로 이적하는 등 여러모로 전력유출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건배 구단주는 선동열의 이적 협상을 문제삼아 노주관 사장과 이상국[1] 단장을 해임시키고 마의웅 사장을 임명한다.[2]
이렇게 프런트가 대대적으로 물갈이 되는 상황 속에서 구단 내부에서는 흔들렸다. 김응용 감독은 인터뷰에서는 "어떻게 이런 팀으로 우승을 해, 올해 기대는 접어둬."라고 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당시 해태는 방위병이었던 이종범과 이대진의 복무가 끝날 예정이었고 조계현, 이강철, 김정수, 최해식, 이순철, 홍현우, 이건열,
그러나 문제는 당시 수직적이고 강압적인 코치진은 선수들에게 잦은 폭언과 폭행은 물론 빨래까지 맡기는 시대착오적인 팀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결국 훈련 중 선수들의 분노는 쌓여만 가는데....[3]
3. 전개[편집]
- 새벽 1시 30분
- 아침 6시
- 아침 8시
- 오후 1시
- 오후 3시
상술한 사건 흐름으로만 보면 하루 만에 사건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데, 당시 코치였던 김종모가 밝힌 바에 따르면 실제로 이 사건은 일주일 넘게 갔었다고 한다.
4. 이후[편집]
선수와 코칭 스탭은 더 이상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훈련을 끝냈다. 김응용 감독은 선수들에게 강하게 원성을 사던 김일권[6] 을 2군으로 내렸다.
어느 고참 선수는 "저도 처자가 있는 몸이니, 잘 좀 부탁 드린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1996년 해태는 3년만의 우승으로 체면을 살렸지만, 1996년 시즌 이후 김응용 감독과 타이거즈의 프런트는 가담한 선수들 모두에게 처절한 보복을 가했다.[7]
- 이순철 : 1996년 당시 해태의 최고참이자 이 사건의 주동자였다.[8] 1996년 시즌은 그래도 어찌어찌 주전 외야수 자리를 지켰고 6차전에서 결승득점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1997년에 2차 1라운드로 김창희가 입단하면서 급격히 자리를 잃었고, 결국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겪는다. 이 일로 김응용 감독과 사이가 틀어졌고 삼성에 자유계약선수로 입단했으나 1년만에 다시 삼성에서 방출되면서 은퇴했다. 그 뒤 삼성코치로 2년간 있었다가 2000년 시즌 후 김응용이 부임하자 해임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2001년에 연대 선배인 이광은의 부름을 받고 LG 트윈스로 이적했으며, 코치를 거쳐 2004년에 이광환의 후임으로 LG 감독이 되지만 알다시피 6668587667을 이끌어냈다. 그 뒤 엠스플에서 1년간 해설을 했으며, 우리 히어로즈 수석코치로 1년간 재임했다. 다시 엠스플에서 2011년까지 해설을 하다가 2012년에 선동열을 따라서 15년만에 타이거즈에 수석코치로 돌아왔다. 그러나 알다시피 2013년에 타어강이라는 용두사미 성적을 냈고, 결국 2년 만에 해임되었다. 2014년부터 SBS 스포츠에서 해설을 하고있다. 물론 이후에는 이런 일들에 대해 모두 화해를 했고 자주 식사도 하며 다시 깍듯이 모시고 있다.
- 송유석 : 송유석은 1995년 42경기 120이닝을 던지며 10승을 기록했으나 1996년에는 31경기 71이닝만 던지고 2승에 그쳤다.[9] 송유석의 증언에 따르면 포스트시즌를 앞두고 자신을 패전처리로 내보낸 다음 빈볼 사인을 냈고 위협구를 던지자 심판이 경고[10] 했음에도 결국 백스톱에 공을 던지며 퇴장당했다고 한다. 송유석은 '아 이것이 하와이 항명의 보복이구나''해태에서는 이제 끝이구나'를 직감하고 LG의 정삼흠 코치와 협의하여 결국 1996년 11월에 LG로 트레이드됐다. LG 구단에서도 불펜투수로 뛰면서 팀 특유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적당히 잡아주는 좋은 모습을 보였고, 1999년에는 선수단 투표로 주장이 되었으나 시즌 후 구단과의 FA 협상에서의 이견·선수협 문제 등으로 LG 구단의 눈 밖에 나 버렸다. 결국 2001년 시즌 도중 한화에서 조용하게 은퇴했으며, 이후로는 야구계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11]
- 이건열 : 1996년은 한국시리즈에 1루수로 출전하여 우승반지를 얻었지만, 1997년은 김응용 감독이 떠오르는 2년차 신인인 장성호를 주전 1루수로 밀어주면서 은퇴를 종용했다. 1997년에 방출되어서 은퇴했으며 김성한의 주선으로 군산상고-해태 선배인 김준환 감독대행이 있던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다. 2000년에 SK에서 2군 코치를 했으나 SK 구단의 쌍방울 색채 지우기 작업의 일환으로 물러났으며, 2001년 김성한 감독이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감독으로 취임하자 타격코치로 부임했다. 이후 2004년에 팀 선배였던 이순철을 따라서 LG 트윈스로 갔으며, 2006년까지 외야 수비코치를 맡았다. 다시 2007년에 기아로 돌아오나, 서정환의 라인을 쳐 낼때 잘린다. 2008~2009년 시즌은 화순고 감독을 맡았으며 2010~2012년 시즌은 다시 기아에서
공무원타격코치를 맡으면서 팬들에게 대차게 까였다. 2013년부터 동국대 감독으로 재임하면서 나름 괜찮은 지도력을 보이고 있다.타이거즈에 해준건 김호령을 추천 해준 것밖에 없다.[12]
- 조계현 : 1996년 시즌은 16승 + 2점대 초반의 방어율로 호성적을 올린다. 그러나 1997 시즌은 3점대 후반의 방어율 + 8승으로 전년대비 부진했다. 본인이 언론에 직접 삼성으로의 이적을 요청하며 결국 4억원에 삼성으로 이적했다. 정작 거기서 불만 지르다가 방출되었고, 김인식 두산 감독의 부름을 받아 두산으로 이적했다. 2000~2001시즌은 두산에서 팀의 베테랑으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었으며, 2002년은 KBS 해설, 2003년 ~ 2005년 시즌은 기아로 돌아와 투수코치를 했지만 투수진 발굴에 실패했으며 해임되었고 2006년 ~ 2009년 시즌에 선동열의 부름을 받아 삼성 투수코치로 갔으나 알다시피 조원수박차를 만들고 역시나 해임. 두산 베어스에서도 무능했다는 평을 받았지만 2012년 ~ 2014년에 LG 수석코치로서는 나름 괜찮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2015년부터 수석코치가 되어 다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었다.[13] 그 이후 KIA 타이거즈의 단장에 올랐다가 2021시즌 이후 경질되었다.
- 정회열 : 1996년 어느 정도 부상에서 회복되며 당시 주전이었던 최해식의 백업 역할을 수행했으나 이순철 송유석 이건열 조계현 등과 함께 1996년 당시 항명 사건의 주범으로 찍혀서[14] 다음 해인 1997년에는 고작 11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고 결국 그 해 시즌 후 해태에서 방출된 뒤 삼성으로 이적했지만 1999년 시즌 후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KIA에서 배터리 코치, 스카우트 팀장, 2군 감독, 1군 코치 등 다양한 보직을 맡았다. 그리고 아들이 KIA에 1차 지명을 받으며 입단했고 마무리 투수로 활약중이다.
- 김정수 : 1996년은 선동열의 후임 마무리로 뛰면서 잘했지만, 1997년 ~ 1999년 시즌은 4점대 방어율을 찍으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김정수를 빼면 좌완투수가 강태원 밖에 없었기에 계속해서 기용되었고 성적 자체가 기복이 심했어도 나이를 감안하면 성적이 괜찮았기에 계속 필승조로 등판했다. 한편, 1996년 항명 사건의 주동자 중 송유석, 이순철, 조계현, 정회열, 이건열이 1996년~1997년 사이 타 팀으로 이적하거나 쓸쓸히 은퇴했지만 김정수는 어느 정도 사건 수습을 했었던 이유 때문에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다[15] . 그 뒤 1999년에 FA를 신청했으나 구단에서 FA를 거부해, 울며 겨자먹기로 재계약했다가 SK로 트레이드 되었고 SK에서 방출되어 한화 이글스로 갔으며, 좌완 불펜으로서 잘해 주었다. 2003년에 다시 SK로 와서 은퇴했으며, 그 뒤 2004년 ~ 2005년은 한화의 2군 투수코치, 그리고 2006년 이래로 계속 기아에서 코치를 하고 있다. 다만 키운 투수도 없고, 1군 코치시절의 삽질도 있는지라 철밥통 취급이다. 그리고 2020년에 드디어 타이거즈를 떠났다. 2022년 선운지구에 본인의 레슨장을 오픈했다.[16]
- 유남호 : 코치진과 선수들과의 갈등의 중심이었던 유남호는 이후에도 해태에서 코치를 맡다가 김응용이 삼성으로 옮기면서 삼성의 수석코치를 맡게 되지만 김응용과의 마찰로 다시 KIA로 바뀐 타이거즈에 돌아오면서 2군 감독과 수석코치를 역임하게 된다. 2004년 김성한이 중도 퇴진하면서 감독대행으로 팀을 겨우 포스트시즌에 보내며 KIA의 정식 감독에 선임되었지만 2005년 꼴찌로 시즌 도중 경질되고 말았다.
5. 증언[편집]
이 하와이 항명 사건에 대해서 25년이 지난 2021년,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최해식, 김정수, 송유석,정회열(이상 당시 선수), 장채근, 김종모, 김일권(이상 당시 코치)가 각자의 관점에서 이 사건에 대해서 말을 남겼다.
5.1. 최해식[편집]
원래 캠프때 당시 아침 6시에 기상을 하여 의무적으로 산책을 해야 했었다.[17]
사건 전 날은 캠프의 휴식일이었고, 최해식의 생일이기도 했기 때문에 선수들은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면서[18]
놀고 있었는데, 코치들이 방마다 전화를 하고 그러다 보니 선수들은 화가 난 상태였다고 한다. 이후 아침에 갑작스럽게 유남호 수석코치가 선수단 최고참이었던 이순철의 뺨을 때린 일이 이 사건의 발단이었다고 증언했다. 이 당시 김정수가 주장[19] 이었는데, 유남호 코치가 이순철의 뺨을 때리자마자 바로 뛰어나갔다고 한다. 뺨을 맞은 이유도 전날에 술을 마신 건 아니었고, 2~3분 정도 늦게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선수들은 훈련을 보이콧했다고 밝혔다.[20]
5.2. 김종모[편집]
당시 3년차 타격코치였던 김종모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본인은 중립인 입장이었으며, 포수 최해식, 코치 김일권도 연결되어 있다고 밝혔다.[21]
아침에 항상 산보를 해야 하는 규칙이 있었고, 7시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산보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몰려오고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김종모가 걸어가고 있던 도중, 엘리베이터 앞쪽에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고 한다. 이후 유남호 코치가 서 있고, 이순철이 서 있는데 갑자기 유 코치가 이순철에게 어퍼컷을 날렸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김종모는 순간 아 이거 큰일날 상황이다라는 생각이 들어 상황이 더 진행 되면 안 되니 뛰어 들어가서 빨리 수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빨리 쫓아가니 그 곳에서 이야기가 나왔는데, 왜 선수들에게 잠 못 자게 늦게까지 전화를 하느냐라는 이야기를 하니 이후 욕이 나오고 이후 주먹이 들어갔다고 한다. 그 상황을 본 선수들이 쭉 나오다가 그 장면을 보고 산보를 자기들이 뭉쳐서 오른쪽으로 가야 하는 걸 산보를 할 때 원래는 오른쪽으로 갔어야 하는데, 왼쪽으로 가버렸다고 한다. 당시 코치들은 따로 갔는데, 선수들이 안 오니 기다리다가 화장실을 가면서 보니까 뒷쪽 문으로 선수들이 사복을 입고 나가고 있었다. 니들 훈련 안 해? 물어보니 선배님들이 이쪽으로 나오라는데요?라는 말이 나와 방에 갔다가 감독에게 상황 보고를 하니 뭐 이 XX들?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당시 캠프 숙소인 호텔에서 15 ~ 20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해변가가 있었는데, 그 쪽에 선수단이 다 모여 있었고, 코치들은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당시 트레이닝[22]
코치가 직접 본인이 해 보겠다라고 하여 선수단에게 가고 2시간 뒤 복귀를 하였는데 선수단의 입장을 물어보니 이런 상황에서는 도저히 야구 못 하겠다라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이후 다음 날 코치진들은 유니폼을 입고 나가 있는데, 선수단은 사복을 입고 뒷문으로 나가 팽팽한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다. 김종모 코치는 이 때 해태 프런트 홍보팀의 능력을 알았다고 증언했는데, 그 당시 전지 훈련에 기자들까지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분위기를 눈치채고 새벽부터 깨워서 차를 태워 못 보게 할려고 한 바퀴를 돌렸다고 한다.[23] 이후 4일이 지나고, 김응용 감독이 일어서서 직접 선수단에게 갔는데 선수단은 감독도 도저히 못 믿겠다. 사장을 불러달라. 아니면 우리 한국 가게 티켓을 빨리 달라라는 제안을 하고 매니저가 감독에게 이야기 하니 김응용 감독은 이를 악물더니 됐어, 가자 라는 말을 남기고 코치들이 있는 호텔로 복귀를 하였다.[24] 이후 코치들을 달랬다. 내가 감독으로써 해 볼테니 일단 한국 가자. 저 선수들을 패널티를 주던지 어쩌던지 한국 가서 하자[25] 라는 말을 남기고 귀국을 하게 되었다.
사실 김종모 당시 수비코치도 사건 당시 이순철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었다고 한다.[26]
문제 해결을 위해 당시 이순철이 김종모의 방으로 찾아왔는데 형님, 내가 선수들을 달려볼테니 형님이 좀 코칭스태프 안에서 이야기를 해 주소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화해의 모드를 잡을려고 했던 것.
이 다음 날, 산책하던 길에 다른 코치들에게 이 이야기를 그대로 말했고, 감독에게 보고 해보는게 어떻겠냐? 라는 입장을 말하니 당시 주 원인 제공자 중 한 명인 유남호 수석코치가 너도 똑같은 놈이네?라는 말 이후로 더 이상 말을 못했다고 한다. 이후 이순철을 불러 이러이러하게 됐다라고 이야기를 전해줬고, 기다려달라고 이야기를 했다.[27]
이 사건 동안에는 단체 훈련은 못 했고 개인 훈련식으로 했는데, 이순철이 선수단에게 이야기를 하여 "일단 훈련을 해야 한다."라고 하여 선수단을 끌고 나왔고, 이번에는 오히려 코치들이 열을 받아 전부 들고 일어섰다고 한다. 반대로 우리는 이제 쟤네들하고 도저히 훈련 못하겠다라고 들고 일어서니 감독이 코치들을 달래서 들어갔고, 이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타격코치 너만 타이머 들고 타격 연습 끝나면 시간만 불러줘라.", "다른 코치들은 전부 뒤에 서 있고!" 이러고 끝. 이런 식으로 2 ~ 4일간 줄창 진행을 했다고 한다. 이후 한국에 귀국하여 당시 해태 타이거즈 사장이 코치들을 모았고, 우리들이 수습을 할 테니, 야구는 하자라는 말을 하면서 코치들을 달랬고, 이후 사건이 잊혀졌다고 한다.[28]
5.3. 장채근[편집]
당시 배터리코치였던 장채근은 96년도 하와이 전지훈련 당시 분위기가 좋지 않았고, 안 좋은 생각만 났다고 이를 회고한다. 선수들보다 코치인 본인이 나이가 어렸으니까[29]
, 선수들이 바라는 것도 많았고, 김응용 감독은 센 분이었고 중간에서 막으려다 보니까 여러가지로 맞지 않아서 불화도 있었다고 밝혔다.
5.4. 송유석[편집]
우선적으로 송유석 본인이 억울한 사람 1호라고 주장했다. 그때 당시 타이거즈 모임의 총무를 맡고 있었으며 선수단 의견을 본인이 직접 전달을 해야 하는 역할이었다고 한다. 회장[30]
인 이순철의 경우 당시 사건을 일으켰던 장본인 중 한 명이었고 기분도 안 좋은 상태에서 나설 수 없으니 총무인 본인이 대부분을 담당했다. 선수들 의견을 듣고 거기서부터 이제 반대적으로 가게된 계기가 되었던 것이고 당시 김응용 감독으로선 시각으론 당연히 앞에 나서서 하는 사람이 눈에 가시로 보일거고 본인이 그 입장이 되었다고 밝혔다.
전지훈련을 가면 가끔 저녁에 한 번씩 점검을 한다.[31]
점검을 사건이 터진 전 날 한 번 했고, 점검을 이른 시간에 하면 되는데, 늦은 시간에 해버린 것이다. 선수단은 자고 있었는데 잠을 깨버리게 된 것. 자고 있는데 잠을 깨버리면 잠 이루기 힘든 사람들이 있다. 당시 12시 넘어서 점검이 들어와 잠이 깨버렸고 이에 대하여 이의제기를 하였으나 그 다음 날에도 점검을 또 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침에 나가 선수 주장으로써 강력하게 항의를 하다가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데 그러고 선수들이 거기에서 마침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오는 찰나에 그걸 목격하게 되었다.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되어 훈련이 일시 중지가 되었다. 거기서 산책을 안 나가고 선수들이 모여서 의논도 하고 이 사태를 어떻게 가야될까 근데 의논을 하게 되면 포괄적으로 전달하고 모든 것을 본인이 해야 한다고 하였다.
김종모의 증언과 같은 부분도 나왔는데, 당시 해태 타이거즈가 사건 관련 매스컴을 다 차단 시킨게 대단하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김종모의 증언때는 살짝만 언급되었고, 송유석의 입장에서는 자세하게 나왔는데 당시 선동열이 모친상을 당하였고, 국내에선 매스컴이 다 선동열에게 가다 보니 이 사건이 조금 묻히면서 해태의 매니저가 기자들하고 어울리면서 차단시켰다고 한다. 이 이후 선수들은 서로 모아서 따로 연습을 했고 감독 코치는 멀리서 바라보면서 진행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5.5. 정회열[편집]
내가 당시 이순철의 룸메이트였고 직접적인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돈 안다.(포괄적으론 아니어도) 지금은 핸드폰으로 기사가 바로 나가지만 그 당시에는 기자분들이 출장을 오면 보름 단위로 나눠서 온다고 한다. 처음에 와서 2~3일 취재를 싸악 하고 팩스로 한 번 보내고 일주일 정도 취재를 하며 휴식을 가지고 마지막 출국 들어가기 3일 전에 한 바퀴 싹 돌며 취재를 하고 보내는 방식이었다. 지금 같으면 기사로 바로 나갔다. 당시에는 기사를 막을 수 있는 여유가 어느정도 많았기 때문에 막을 수 있었던것 같았다.
5.6. 김일권[편집]
해태를 떠난지 8년만에 코치로 복귀했는데 하와이에서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선수들은 아침 산보 대신 서라벌식당에 집결[32]
하여 매니저를 불러오라고 했다. 사건을 유발시킨 유남호 코치는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고 계속 침묵하고 있고 매니저를 통해 전말을 알게 된 김응용 감독은 화가 나 있었다. 김일권 코치는 김응용 감독에게 "제가 8년만에 돌아왔으니 제가 총대를 매겠습니다. 제가 2군으로 내려가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말하였더니 김응용 감독은 "너가 하지도 않았는데 가만 있어!"하고 일축시켰다. 선수들의 훈련은 계속 진행되어야 하니 선수들과 나이 차이가 가장 적은 장채근 코치가 훈련을 지휘하고 김응용 감독은 멀리서 지켜보았다.[33]
귀국 후 광주 무등야구장에서 훈련을 지도하는 데 마무리 스트레칭을 최고참 이순철에게 지시하고 돌아오는데 돌아오자마자 유남호 코치는 김일권 코치에게 욕설을 하면서 코치실로 따라 들어오라고 했고 김일권 코치는 "제가 비록 4년 후배지만 그라운드에서는 사람들의 시선도 있고 그렇게 행동하시면 안 됩니다. 하와이 사건도 누구 때문에 발생한건데요?"하고 반문했다. 김응용 감독이 김일권 코치를 급하게 찾는다고 해서 갔더니 "너 유남호한테 항명 했다며?"하면서 김일권을 몰아붙이자 김일권은 "감독님은 어째서 선수때나 코치때나 나한테만 강합니까?"하며 처음으로 들이받았다. 김응용 감독이 "너 2군 가!"했고 김일권 코치는 "갈께요. 하와이에서 제가 2군 간다고 했잖아요"하면서 마무리지었다.
5.7. 이건열[편집]
하와이 항명 사건 이후 3경기를 하고 2군을 가라는 지시가 왔다. 마산[34]
까지 가려고 했더니 운영팀 직원 조찬관이[35] 광주에 있으라고 한다. 그 말을 들었는데 마산에 가지 않았다고 이걸 괘씸죄에 넣더니 벌금을 맞고 이건열이 기분이 상하자, 야구를 그만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운동을 안 나갔더니 절반도 안 되게 떼였다. 차영화 코치가 바람 쐬러 부산이나 갔다 오자고 해서 갔다가[36] 연습하고 도와주고 그랬지만 너무 억울했다. 너무 힘들어서 김응용 감독 집을 찾아갔는데, 이건열은 "마지막인데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저 하라고 해도 야구 안 합니다" 라고 밝혔더니 김응용 감독은 야구장으로 오라고 했다. 거기서 하와이 항명 사건을 얘기하면서 그렇게 생각하고 운동도 안나오고 얘기를 했고, 이건열 본인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만 둘건데 이런 식은 아니다" 라고 했더니 옆에 기자들도 있었다고 했으며, 나중에 해태가 5위에서 1위까지 하자 이건열의 말로는 김응용 감독이 "노장들 승부욕을 자극하기 위해 2군으로 보냈다" 고 돌렸는데, 진실이 뭔지 알고 싶다고 말했다.
5.8. 박재벌[편집]
하와이 항명 사건은 맨 처음 일어난 원인이 자신과 관련이 있다고 밝혔으며, 김일권 코치와도 관련이 있었다고 밝혔다.
6. 여담[편집]
- 이종범이 엠스플 텔레비전에서 술회하기를, 방위복무 중이던 이종범과 이대진은 하와이 전훈에 참가하지 못했는데 신인으로 하와이 전훈에 참가한 김종국과 안부전화를 하면서 '하와이 전훈은 할 만하냐?' 물었더니 '형님, 여기 지금 난리났어요'라는 말을 듣고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됐다고 한다.
- 당시 신인이었던 장성호도 사건의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제3자의 시점에서 이 사건에 대해 증언했는데 김종모의 말대로 해변가에서 선수단이 다 모여 향후 대책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고 김응용 감독이 호텔로 불러내서 선수단의 입장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김응용 감독이 직접 훈련을 진행하고 코치들은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다고 한다. 장성호는 이것에 대해 김 감독이 선수단과 코치진에게 편치 않은 느낌을 줘서 제대로 하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냈다고 추측했다. 마지막으로 장성호는 이 사건에 대해 야구 좀 한다는 선배들과 그보다 더 선배이면서 그 선배들보다 못지 않게 야구를 잘했던 코치들 사이의 자존심 싸움으로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