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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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연기력
2.1. 연기 스타일
2.2. 그 외 특징
3. 90년대의 위상과 인기
3.1. 당시 자료들
3.2. 왜 몰락했는가?
3.2.1. 긴 공백기와 복귀작의 흥행 실패
3.2.2. 매니저이자 친형 한선규
3.2.3. 까다로운 시나리오 선정
3.2.4. 신인감독 고집
3.3. 결론
4. 한석규에 대한 언사



1. 개요[편집]


배우 한석규에 대한 평가를 정리한 문서.

2. 연기력[편집]


“가장 선하고, 가장 악하고, 그야말로 천의 얼굴을 보여준 배우.”



한석규라는 남자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건 점점 요원해진다. ‘부드러운 도시 남자’면서 동시에 질 낮은 ‘밑바닥 인생’이기도 한 남자, 멜로를 잘 연기하는 사람이면서도 날 선 히스테리로 관객의 긴장을 확 잡아당기는 배우.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한석규는 ‘이 사람에게 이런 면도 있었나?’라고 새삼 놀라게 되는 배우다. 1991년 문화방송 《우리들의 천국》으로 데뷔한 이래 23년, 한석규는 그를 어느 한 작품의 지배적인 이미지로 기억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배반해왔다.

한석규는 누구나 호감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고 그처럼 보이고 싶을 만큼 인상이 좋지만, 동시에 외모나 아우라에 질려 감정이입을 포기할 정도로 독특한 인상의 소유자는 아니다. 그것은 그의 연기로도 이어지는데, 일상적인 톤을 잃지 않으면서도 순간순간 피로나 외로움, 날 선 신경과 같은 요소들을 드러내 보이며 인물에 리듬과 질감을 부여하는 한석규의 연기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인물의 내면으로 쉽게 진입하게 만드는 동시에 감탄하게 만든다.


한국 남자 배우들 중 연기력으로는 단연 손가락에 꼽히는 배우 중 한 명이다. 애초에 MBC 공채 배우 연수 과정에서 동기들 중 전체 1등을 할 정도로 눈에 띄는 연기력을 갖고 있었고, 데뷔 초창기때부터 드라마에 활약하며 이름을 알렸던 이유가 아들과 딸, 서울의 달 등에서의 모습을 통해 연기력을 인정받아서였다. 드라마계 신성이 된 곧바로 충무로에 입성한 것은 물론 최전성기 시절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평가받으며 그 정도의 대중적 인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도 배우 본연의 매력과 함께 그 중심에 탄탄한 연기력이 뒷받침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90년대 그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흔히 말하는 잘생긴 외모를 가진 정통적인 미남파 배우는 커녕 매력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인기가 많은 것에 의아해하는 이들이 상당했던 만큼 배우로서는 다소 평범한 마스크를 지니고 있지만, 그 단점을 상쇄할만큼 연기력은 진퉁.(...)#[1]

실제로 연기자로서 데뷔가 늦었던 한석규가 이러한 탄탄한 연기를 바탕으로 급속도로 입지를 키웠음을 주요 시상식의 후보 및 수상 실적을 통해 단적으로 알 수 있는데, 무려 데뷔 이후 2년만에 아들과 딸&파일럿을 통해 MBC 연기대상의 신인상을 수상 및 백상예술대상 신인상 후보에 오르고 난 뒤 이듬해인 1994년에는 서울의 달을 통해 MBC 연기대상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한 것은 물론 백상 최우수연기상 후보에 올랐다. 그리고 1995년에는 '영화 데뷔작'인 닥터 봉을 통해 청룡영화상에선 신인상도 아닌 남우주연상 후보에 곧바로 오르기도 했으며 백상에선 신인연기상을 수상한 다음, 이듬해에 곧바로 초록물고기를 통해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기까지 했다.[2]# 그리고 이 영화 데뷔작으로 신인연기상을 받고 이듬해에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한 기록은 백상은 커녕 주요 시상식 중에서도 남녀배우 통틀어 한석규가 유일하게 세웠으며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또한 연기력과 작품의 시너지가 최고조였던 90년대 전성기 시절에는 5년 연속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었다. 무엇보다 1997년에 초록물고기로는 그 해 국내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독식하여 남자 배우 '최초'로 한국 3대 영화상 남우주연상 트리플 크라운을 한 번에 달성하기도 했다. 그리고 남자 배우 기준으로 이 트리플 크라운 기록은 한석규 이후로 딱 3에 더 나오지 않았는데, 아직까지도 그가 달성한 최연소 트리플 크라운 달성 기록(만 33세)은 깨지지 않고 있다.

2.1. 연기 스타일[편집]


시나리오를 주의깊게 보는 만큼 단순 감정 연기뿐만아니라 캐릭터에 대한 디테일한 연구와 설정에 공을 들이는 편이다. 이 때문에 현장에서도 독자적인 아이디어를 자주 내며 이것이 실제 극중에 활용되는 경우가 상당하다. 대표적으로 시신으로 돌아온 광평을 본 세종이 '차마 믿지 못하겠다'며 광평의 팔을 계속 머리 위로 올렸다가 떨어뜨리는 장면은 원래 대본대로라면 그냥 광평의 시신을 태운 가마 앞에서 오열하는 장면이었지만, 한석규의 요청으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원숭이들이 동료의 죽음을 그렇게 확인한다는 것에서 따왔다고.# 또한 이만원씬으로 유명한, 젊은 세종(송중기)과 함께 등장하는 장면은 대본에 아예 그 자체가 없었지만, 한석규의 제안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 뿌리깊은 나무의 장태유 PD는 한석규의 연구를 통해 반영된 장면이 매회 한두 신은 꼭 있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구타유발자들문재가 계속 침을 뱉는 버릇은 시나리오에 없었고, 첫 촬영 당시 한석규의 순수한 아이디어에서 생긴 설정이다.# 이는 시나리오 후반부에 문재가 쥐약을 용각산으로 착각하여 먹는 모습이 등장하는만큼 침을 뱉는 버릇을 통해 호흡기가 안 좋다는 캐릭터의 특징을 잡은 것인데, 덕분에 이 설정이 없었더라면 용각산 먹는 장면이 상당히 뜬금없을 뻔했다. 또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속 백성찬의 백발도 그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다. 일반적인 형사 캐릭터와 전혀 다른 개성을 살리고 싶었다고 하는데, 이 백발 요소로 동물적인 본능의 검거율 100%의 형사가 지니는 날카로운 이미지가 더욱 강조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WATCHER의 도치광이 껌을 자주 씹는다는 소소한 캐릭터 설정 또한 독자적인 아이디어다.#

이러한 세세한 캐릭터 연구를 바탕으로, 대본대로 정석적인 연기를 펼칠 것이라는 세간의 이미지와는 달리 은근히 애드리브도 많이 치는 스타일이다. 그때 그 사람들 촬영 당시 "연기를 막 해달라. 대신에 잘 해달라"는 임상수 감독의 말을 듣고 촬영 현장에서 즉석으로 여러가지 애드립을 치면서 연기를 즐겼다고 밝히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각하를 할아버지로 말한다든가, 헌병을 화이바로 표현한 것.# 혹은 영화의 대표적인 웃음 포인트 중에 하나인, 부하에게 "너 IQ 몇이냐?"가 묻는 질문도 모두 그의 애드리브였다.[3]# 극 중에서 여러번 언급되기도 하며 한석규가 맡은 주 과장의 캐릭터성이 깊게 드러나는, '껌을 계속 씹는다'는 설정 또한 그의 아이디어에서 왔다. 오죽하면 김혜수이층의 악당 촬영 당시를 회상하며 “한석규는 워낙 점잖은 이미지여서 애드립을 안 할 줄 알았는데 그의 촌철살인 애드립에 웃음을 참지 못해 NG를 낸 적도 있다. ‘어떻게 이런 애드립이 나올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놀라웠다.”라고 밝혔을 정도.# 실제로 이층의 악당 속 집주인과 다투다가 주민등록번호 읊는 것이나 지하실에 갇혀 배가 고파서 과자봉지 냄새 맡으며 허기를 달래는 모습 등이 모두 애드리브였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애드리브는 잔재주일뿐 배우가 알아서 마음껏 하고 싶은 연기를 할 수 있도록 믿고 기회를 준, 무대를 만들어준 감독에게 고맙다고 말을 돌렸다.# 뿌리깊은 나무의 이만원씬에서 젊은 날의 자신을 향해 자기모멸의 극단적 행위였던 침을 뱉는 행위도 그의 애드리브였다. 또한 WATCHER에서는 13살 차이나는 허성태와 친구 역할이였지만 감독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보이는 것에 대해 걱정하자, 한석규는 첫 촬영때 곧바로 "너 형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라는 애드리브 대사를 치며 실제로 둘 사이가 형동생/선후배 관계이라고 상황 정리를 하는 등, 작품과 극 중 캐릭터는 물론 캐릭터들 간의 관계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한 상태에서 애드리브를 얹는 양상을 보인다.# 각종 메이킹 영상을 보며 이러한 면모를 더욱 잘 볼 수 있는데, 이같이 한석규의 섬세한 연기 스타일은 캐릭터의 매력과 작품의 디테일을 더해준다.
파일:한석규 연기스타일.jpg
또한 연기를 할 때는 감독이 원하는 스타일로 한 번, 본인의 프리스타일로 다시 한 번 연기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 후 감독이 택일을 하는데, 후자가 채택된 대표적인 예가 프리즌에서 걸어오면서 바나나를 먹는 장면이다. 원래 감독은 아무 것도 없이 그냥 걸어오라는 주문을 했다고 한다. 이 장면을 통해 나홀로 바나나를 먹으며 유유자적 활보하는 모습을 통해 교도소에서 교도관없이 혼자 다녀서는 안된다는 독보 금지의 규칙을 깰 수 있을 만큼 교도소 내 익호의 제왕적인 입지를 단편적으로 알 수 있다. 근데 본인은 감독님이 원하는 걸 좀 안좋게 연기한다고 고백했다.(...)#

2.2. 그 외 특징[편집]


성우 출신답게 목소리가 굉장히 좋다. 깊고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는 서울 사투리가 묻어나오는 말투와 함께 한석규의 트레이드 마크. 실제로 '일반인들은 연예인 중 누구의 목소리를 선호하고 가장 멋지다고 느낄까'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에서 남자 배우 중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덕분에 배우 데뷔 초부터 좋은 목소리로 주목을 받아 극중 나레이션을 자주 맡았다.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의 이호재 감독은 "한석규 배우를 캐스팅하며 내레이션을 하지 않는다는 건 낭비"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한석규와 함께 목소리 좋은 대표적인 배우, 이병헌 역시 여러 배우들 중에서 한석규의 목소리를 최고로 언급한 바 있다.#

목소리와 함께 배우로서 한석규의 가장 큰 장점이자 특징으로 꼽히는 발성은 그 어느 배우와 비견당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역대 반열 중에 한명으로 꼽힌다. 공채 아나운서 출신인 한석준은 "듣는 상대가 마이크든지 혹은 화면밖에 있는 화자든지 그 장소에 있는 사람이든지 관계없이 듣는 사람의 귀에 정말 정확하게 날라와요. 내가 지금 딴 짓을 하고 있어도 그 분의 목소리나 발성이 들리는 순간 그 쪽으로 고개를 확 돌릴 수밖에 없는, 집중할 수밖에 없는 그런 에너지와 힘이 있다."라고 한석규의 발성을 설명하면서 그를 남자 배우 최고의 목소리/발성으로 꼽았다. 심지어 "발성계의 반칙"이라고 평하기까지.# 그리고 이러한 발성은 극장 사운드가 별로 좋지 못했던 90년대 극장가에 사정과 맞물려 그의 장점이 특색을 빚어 더욱 빛을 보게 만들었다.

한편, “노래를 통해서는 발성을 배웠고 성우를 할 때에는 소리의 중요함, 발음, 국어의 바른 사용을 많이 공부했다. 배우는 결국 말을 많이 하는 일 아닌가.”라고 본인이 직접 언급할 만큼 가요제 출전 및 수상에 성우 데뷔까지 배우로서는 다소 특이한 경력도 그의 연기에 많은 영향을 주며 장점으로 작용하는데, 대표적으로 한석규가 말하는 대사들을 유심히 들어보면 대부분 장단음을 구별해서 발음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우시절 평소에 사전을 가지고 다니면서 자신이 쓰는 단어 발음이 정확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는 등 발음 연습도 상당히 하였고, 실제로 몇 안되는 단점으로 꼽히는 대사에서 묻어나오는 서울 사투리와 늘어지는 말투의 소유자임에도 신기하게도 딕션 문제는 거의 제기되지 않는다. 단적인 예로 영화 우상의 경우 전체적으로 대사가 안 들린다는 불만이 상당히 많이 제기되었지만 출연진 중 한석규만 거의 유일하게 대부분의 대사를 알아듣겠다는 평이 상당하다.

연기 스펙트럼도 꽤 넓어서 맡아 본 역할이 굉장히 다양하다. 최전성기 시절만 놓고봐도 홀아비 치과의사, 석판 공중부양 화가, 최고를 꿈꾸는 깡패,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 PD, 시한부의 사진사, 한국 정보기관 OP 특전부대, 강력반 형사이며 그 장르도 각기각색이여 로맨틱 코미디, SF 판타지, 갱스터, 멜로, 고어 스릴러, 액션 첩보물까지 모두를 폭넓게 아우른다.
안경을 썼을 때안경을 쓰지 않았을 때
1997년 영화 《접속》 中1999년 영화 《쉬리》 中
1998년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中1997년 영화 《초록물고기》 中
안경을 썼을 때와 쓰지 않았을 때의 이미지 차이가 심한 배우 중 한 명이다. 전자의 경우 선하고 부드러우며 차분/따뜻한 인텔리의 이미지인 반면에 후자의 경우 날카로우면서도 쎄한, 선이 굵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이러한 특색을 부각할 수 있는 멜로 작품이나 CF 등에서는 안경을 쓰고 액션&스릴러 작품 등이나 악역을 맡을 때에는 대부분 안경을 벗고 나온다. 특히나 안경을 안 쓰고 CF를 촬영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본인도 이 점을 알고 있는지 굉장히 신경쓰며 영리하게 잘 활용하곤 하는데, 실제로 안경 쓴 배우의 대표격이기도 하고 대중들이 평소의 한석규를 생각할 때 안경을 쓴 이미지를 먼저 떠올림에도, 안경을 벗고 작품에 임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특히나 영화 우상에서는 처음으로 안경을 끼고 악역을 연기하였는데 덕분에 시민들 앞에서는 온화하지만, 궁지에 몰리자 비겁하게 변하는 야누스적인 연기와 그 이중적인 면모가 더욱 강조되기도 했다.

3. 90년대의 위상과 인기[편집]


1990년대 중후반의 한석규만큼 스타 시스템을 확고히 구축했던 배우도 드물다. 한석규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쓰고, 한석규를 캐스팅하기 위해 사활을 걸었으며, 한석규가 출연해 흥행에 성공하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으로 이슈화에도 성공했던 이 기이한 스타의 존재는 한국 영화사에서도 흔하지 않다.


영화 데뷔작인 닥터 봉을 시작으로 은행나무 침대, 초록물고기, 넘버 3,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 쉬리, 텔 미 썸딩까지 1995년부터 1999년사이 총 5년간 8편 연속 대흥행을 기록하면서 199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계를 완벽하게 지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작품들 모두 흥행과 작품성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아내는 영화들이였는데, 한석규 역시 작품의 매력을 한껏 더해주는 본인의 캐릭터 소화력 및 연기력을 증명해냈다. 실제로 90년대 한석규가 찍은 모든 영화들은 모두 그해 한국영화 흥행순위에서 10위권 밖으로 나와본 적이 없다. 그마저도 청소년 관람불가초록물고기(10위)와 넘버 3(6위)를 제외하면 나머지 작품들의 흥행순위는 모두 3위권 안이다. 1990년대 출연작 총 관객수가 무려 1,370만명. 또한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의 접속, 청룡영화상 최우수 작품상의 초록물고기와 8월의 크리스마스,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작품상의 초록물고기, 8월의 크리스마스, 쉬리 등 출연 영화들 모두 각종 영화상을 챙겨받았다. 덕분에 한석규는 일종의 믿고 보는 배우이자 흥행 보증 수표라는 별명의 시초쯤으로 여겨지며 그만큼 90년대 어마어마한 티켓 파워를 보유하였다. 오죽하면 이 시기 충무로의 모든 시나리오가 한석규에게 제일 먼저 갔다는 말이 나왔는데 이것이 과언이 아니였다. 이후에 그가 거절한 시나리오는 후순위의 다른 배우들이 받아 보는 경향이 업계에서도 당연시 여겨졌다. 물론 당연히 다른 배우들에게는 전혀 유쾌한 현상이 아니었기에, 당시에도 "한석규의 티켓 파워는 인정하지만 같은 배우로서 참 서글프더라."라는 후일담도 전해진다. 이러한 명성으로 쉬리를 통해서 한국 배우 중에서는 최초로 러닝개런티를 받기도 했다.# 또한 3여년간의 긴 공백기를 가질 동안에도 남배우 중에는 여전히 캐스팅 1순위였으며 개런티도 한국 배우들 중에 가장 고액을 받았을 정도.#

또한 이러한 이유들로 한석규의 출연 여부가 곧 투자의 성패를 가르기도 했다. 실제로 한석규는 시나리오를 고를 때 누구나 좋아할 만한 무난한 작품보다는 무언가 새로운 구석이 있는 작품들, 다시 말해 기획 단계에서 투자자들로부터 환대를 받은 예가 드문 작품들을 대개 택했는데, 한석규의 출연 확정 소식이 알려지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적극적인 영화 투자를 받을 수 있었을 정도였다. 대표적으로 접속8월의 크리스마스가 있다. 쉬리의 경우 그보다 더 했는데, 워낙 대작으로써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시발주자라 이를 회의적으로 보는 시선도 있었을 뿐더러 제작 당시 외환 위기 직후였던지라 전작 은행나무 침대의 대성공으로 충무로에서 입지가 상당했던 강제규 감독도 투자까지 받을 정도는 되지 못했다. 그러나 한석규의 출연 소식이 전해지자 마자 삼성영상사업단에서 막대한 제작비를 투자했고 무사히 영화 제작을 마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시기 동안에는 씨네21에서 조사한 '충무로 파워 50인'에서도 최소 10위권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최고 순위는 1998년에 조사한 4위. 제작, 배급, 상영, 투자, 비평, 정책 등 영화를 둘러싼 전 분야를 고루 포함하는 영화계의 파워 게임에서 배우가 4위를 기록한 것은 매우 이례적일만큼 당시 영화계에서의 한석규의 입지와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웬만한 유명 제작자와 감독도 한석규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 심지어 한창 공백기를 갖고 있던 2002년에도 영화제작자들이 뽑은 관객동원력 1위의 남배우로 꼽히기도 했다.#

영화 산업적인 면에서 1990년대는 1950년대부터 내려오던 전통적인 충무로의 질서가 해체되고 영화계 외부에서 수혈된 새로운 인력들과 대기업과 금융권의 참여로 제작과 유통환경이 개선되면서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모두 한국 영화가 한 단계 도약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 영화는 주먹구구식 가내수공업에서 문화 산업으로 환골탈태한다. 그리고 이 흐름의 최선두에서 흥행과 비평 모두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인 한석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한석규는 한국 영화계를 완벽하게 지배하면서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실제로 한석규 덕분에 그동안 외면당하고 있었던 한국영화는 국민들의 관심을 되돌려놓게 되고 멀티플랙스에 보급과 시너지 효과를 내며 비약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시기별 주요 배우들로 보자면, 1980년대에는 안성기충무로황제로 영화계 전반을 장악하던 흐름이 90년대에 와서 문성근, 박중훈, 최민수, 이경영 등 신진의 등장으로 점차 파이가 분할되어지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다양성이 발화되던 영화판을 일시적으로 한석규 1인의 시대로 봉합했으니 말 다했다. 물론 한석규의 전성기가 끊긴 2000년대로 가서는 이 파이가 다시 충무로 트로이카(송강호, 설경구, 최민식)로 나뉘게 되며 그 이후로 김윤석, 황정민, 이병헌, 하정우 등 후발주자들이 추가로 대거 등장하면서 춘추전국시대로 돌입한다.

요약하여 그의 전성기는 5년 정도라는 다소 짧은 편이긴하나, 후술할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터지며 배우로서 오랜 기간 하락세와 슬럼프를 맞이했음에도 송강호, 전도연에 이어 지난 30년을 빛낸 배우 3위에 뽑힐 정도로 이 전성기때의 임팩트와 영향력, 장악력은 한국 영화 역사상 길이 남을 정도로 전무후무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즉, 현재의 수많은 탑배우들의 존재감을 오롯이 혼자 보유하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3.1. 당시 자료들[편집]


파일:1998년 연예인 인기순위.png

파일:코바코1위 김희선 한석규.png

1999년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 '광고주' 실태조사
선호하는 남자 광고모델
1위
한석규
2위
김국진
3위
최불암
4위
안성기
5위
차승원
6위
송승헌
7위
박중훈
8위
유동근
9위
박상원
10위
배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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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가장 좋아하는 남자 영화배우'
연도순위득표율링크
1999년1위31.0%#

한국대학신문 '가장 좋아하는 영화배우'
연도순위득표율링크
1997년1위34.0%#
1998년1위19.4%#
1999년2위25.8%#
2000년2위-[4]#
2001년3위10.2%#

경향신문 '독자가 뽑은 광고 모델'
연도순위득표율링크
1996년1위14.0%#

3.2. 왜 몰락했는가?[편집]


그러나 90년대와 00년대 이후 들어서의 한석규의 위상은 확연히 다르다. 물론 한석규가 한때 하락세를 겪었던 원인은 연기력이 좋지 못했던 것도 본인의 행실이 나빴거나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영화계 독보적인 '원탑' 한석규가 갑작스러운 추락을 맞이한 것을 넘어 10년이라는 긴 기간동안 침체기 내지 슬럼프를 겪은 것에 의아함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쉬리의 빅히트로 한석규의 아성이 더욱 공고히 되자 충무로에 "포스트 한석규" 시대를 열어나갈 새로운 얼굴의 '출현'에 대한 바람이 슬며시 고개를 들고 있다. "이젠 새로운 '대안'이 있어야 하고, 그들을 통해 1인 독주를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것. 이는 빅스타 탄생에 대한 시새움 차원을 떠나서 견제와 경쟁이 빅스타의 장수는 물론 연예계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물론 영화계 내에서는 이전부터 한석규 원탑체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던 것이 사실이다. 배우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기반으로, 시나리오와 캐스팅은 물론 제작 전반적인 과정에 참여하는 등 한석규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도 스포트라이트는 오로지 한석규만 받아가는 구조속에서 한석규를 아니꼽게 보는 업계인들의 시선이 점점 늘기 시작했던 것. 게다가 영화 홍보에 소극적이며 방송 출연은 커녕 매체 인터뷰마저 꺼리는 한석규의 연기적 신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CF 촬영에는 선호했던 성향 역시 이러한 좋지못한 시선에 한 몫했다. 제작비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출연료의 경우, 어찌보면 배우들의 전체적인 개런티가 극적으로 높아지게 된 것도 원탑 체제속에서 높은 개런티를 받은 한석규가 사실상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당연히 업계에서는 이런 한석규를 좋게 볼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업계내에서의 단순한 반감에 그쳤지 그 충무로의 흥행보증수표 한석규가 언젠가 영화도 몇번 실패하고 하락세를 가지더라도 10여년간의 긴 기간동안 대침체기를 겪으며 '퇴물'이라는 소리를 들을 날을 예상한 사람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한석규가 그런 일들을 겪으며 몰락하기까지는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섞여있었고,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다.

3.2.1. 긴 공백기와 복귀작의 흥행 실패[편집]


이러한 한석규의 공백을 두고 세간엔 여러가지 불평어린 핀잔이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한석규가 좋은 작품을 고르기 위해 절치부심중이라 해도, 스타배우 하나가 모자라 허덕이고 있는 열악한 우리 영화계를 생각할 때, 한석규의 지나친 여유부림은 영화계 현실을 외면하는 너무나도 매정한 이기주의적 행동이라는 것이다. 한국영화계 최고의 흥행보증수표라는 강력한 브랜드를 지닌 배우가 1년 내내 영화판에서 떨어져 지낸다는 건 그의 지금의 위치에서 보면 너무나 명백한 직무유기라는 주장이다.


어느 쪽 입장이든간에 여하튼 한석규의 신작을 올해 안에는 보지 못하고 지나가야 된다는 사실이 아쉬운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의 차기작이 SF영화 '제노사이드'가 되든 아니든간에 그의 오랜공백의 결과가 어떤 작품으로 나타날 것인지 두 눈 크게 뜨고 평가해 줄 팬들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걸 한석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한석규란 배우 하나 없어도 아무렇지 않게 제대로 잘 굴러가는 그런 한국영화판을 기다리는 건 너무나 순진한 바람일까?


한석규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5]

그의 복귀가 또 그만큼 늦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진중한 선택을 나무랄 순 없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 나름일 것. 현장을 떠난 배우는 물을 떠난 물고기와 같다. 또 연기력은 작품을 통해 늘지 않는가. 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를 두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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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서 그를 만나기 위해 꼬박 4년을 기다렸다. 설경구가 건들거리며 문소리와 사랑에 빠질 때도, 차승원이 숟가락 하나로 교도소를 탈출해 '분홍의 립스틱'을 불러제낄 때도, 송강호가 덜 떨어진 선비로 나와 베쓰볼을 할 때도, '당신의 아내로 죽는 것 괜찮습니까?'하고 묻는 장백지 덕분에 착한 눈물을 흘리는 최민식을 보며 덩달아 울 때도 내 마음은 일편단심 민들레였다. 연기력으로 마음을 흔드는 남자 배우들이 스크린에 수없이 나타나도 내가 극장에서 가장 만나고 싶은 배우는 오로지 한석규였으며, 내가 가장 보고 싶은 영화는 그가 선택해 출연한 영화였다. 몇 번인가 시나리오 검토가 끝나고 곧 영화에 출연할 거라던 소문만 무성하게 일어났다가 사라진 다음, 영화 <이중간첩>의 로케이션을 위해 프라하로 날아간 한석규를 봤다. 그 때부터 날짜 꼽으며 기다린 것이 바로 이 영화 <이중간첩>이다. 개봉일이 정해지자마자 인터넷으로 예매를 했고, 드디어 오늘 극장에서 그를 만났다. 개봉일이라 더 그랬겠지만, 극장은 사람들로 만원이었고 로비에서 영화 시간을 기다리는 이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은 기대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결과는 어땠느냐고? 그가 너무 오래 쉰 것이 아닌가 하는 장탄식을 나도 모르게 뱉고 말았다면, 답이 되겠는지…. 영화를 함께 본 친구가 말했다. "야, 한석규 시나리오 보는 눈도 다 된 모양이다."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이중간첩> 홈페이지에 가서 게시판에 올려진 비판글들을 보고 난 지금, 한석규의 팬으로서 안타깝다. 너무 길게 쉬면 안 될 것 같다는 조급증이 이 모자란 시나리오를 그냥 용인하게 해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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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동안의 기다림, 그 답은 배신?[6]
그동안 쌓아왔던 "흥행보증수표"라는 이미지와 필모그래피(흥행 성적, 작품성 등)가 한 순간에 무너뜨릴정도로, 몰락의 가장 큰 요인이다. 물론 재충전을 위한 공백기라는 사유는 충분히 감안할만 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 공백기가 2년을 넘어 3년이 넘어가는 등 길어지면서, 그 천하의 한석규도 점차 대중들 사이에서도 잊혀지기 시작했다. 현재 최정상 배우로서 입지를 가지고 있는 송강호, 최민식, 이병헌 등의 차기작 텀을 보면 웬만해선 필모의 공백을 1년 넘게 갖으려 하지 않는 것과는 굉장히 대조적이다. 게다가 인터넷도 발달되어 있는 지금과 달랐던 당시는 대중들에게 잊혀지기 더더욱 쉬웠다.

무엇보다 00년대 들어 영화 산업 시장도 굉장한 성장을 거듭하면서 한석규의 그늘에서 그동안 빛을 못 보던 다른 배우들의 도약이 조금씩 시작되었고, 그 결과 굳이 한석규가 아니더라도 연기나 흥행 면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만한 배우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실제로 그 3년 2개월 동안 송강호, 최민식, 설경구가 충무로 트로이카로 묶이며 한석규의 자리를 완전히 대신하게 되면서 그로서는 조금씩 설 자리를 잃게 된 셈이 되고 말았다. 송강호는 반칙왕으로 씬 스틸러 조연급을 넘어 주연 데뷔에 성공적으로 안착, 공동경비구역 JSA로 자리를 확실하게 잡았으며 최민식은 쉬리를 통해 슬럼프를 완전히 씻어내고 해피 엔드파이란으로 정상의 자리를 공고히 다졌다. 설경구는 99년 박하사탕으로 혜성같이 등장하여, 2002년에는 1997년의 한석규처럼 공공의 적, 오아시스, 광복절 특사를 연속으로 히트시킨다. 3년 2개월의 공백기 동안 세대교체가 순식간에 이뤄지게 된 것이다. 특히나 송강호와 최민식의 경우 그전까지만 해도 한석규가 주연으로 나온 초록물고기, 넘버 3과 같은 작품들에서 조연 내지 단역으로 출연했던 것을 생각하면 굉장한 격세지감이다.

물론 그 3년여년의 기간동안 한석규도 마냥 쉬기만 한것은 아니였다. 해마다 30여편의 시나리오를 선별해나가면서도[7] 선술했듯 직접 시나리오 공모전을 열기도 했으며 당선작들 중에서 직접 출연하려는 작품들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 여러가지 사정으로 제작 무산되는 등의 비운을 겪으며 어쩌다보니 공백기가 길어지게 된 것. 그러나 그때의 대중들이 이 사실을 알리도, 딱히 이해해줄 리도 없었다.

게다가 그 긴 공백기를 뚫고 개봉한 영화인 이중간첩이 흥행에 대실패하면서 한석규의 커리어에 있어 더 큰 치명타가 됐다. 실제로 이중간첩으로 복귀하기 전년의 조사에서도 관객동원력 1위를 기록해 건재를 과시했지만, 이중간첩이 개봉 및 흥행 실패를 하고난 해에는 무려 12계단이나 떨어진 13위에 위치했다.# 이 때문에 데뷔 이후로 인터뷰를 꾸준히 피하는 것으로 기자들 사이에선 악평이 자자하기도 했고 한 시대를 상징했던 배우의 극적인 실패만큼 자극적인 기사소재가 없으므로, 여러 매체에선 "한석규 시대의 종언"과 같은 표현을 쓰기까지 하며 한석규를 집중적으로 매도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90년대의 커리어마저 현재로 따지면 물로켓론과 다를 바 없는 거품 취급을 받을 정도로 전체적으로 '퇴물'의 이미지가 씌어지며 기존까지의 명성의 추락은 가속화되었다.

한편 한석규는 이중간첩 촬영 도중 진행한 인터뷰에서 '왜 공백기를 가졌냐'고 묻는 기자의 말에 한석규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있다.
작품 선택을 주저했던 것은 흥행이나 성공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나. 혹은 연기의 상투성에 대한 지적 등을 의식했나.
→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왜 3년을 쉬었는지. 나만의 영화관을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힘들다. 그저 내가 지금껏 했던 여덟 작품이 나의 영화관이다. 배우란 감독이 자신의 영화관에 맞는 영화를 만들어주지 않으면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는, 어떻게 보면 수동적인 위치다. 선택될 때까지 3년이란 시간이 걸렸더라. 3년이 정말 훌러덩 지나가버렸다.

10여년의 시간이 지난 뒤, 2014년 12월 11일 JTBC 뉴스룸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는 한국영화의 거대한 거품이 낀 시기고 이 거품이 다 빠져나간 후에서나 진짜 작품 활동을 해야 할 것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2001년~2003년은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어 가는 감독, 작품, 배우들이 봇물 터지듯이 터져나온 시기였다(…). 특히 2003년은 박찬욱올드보이, 봉준호살인의 추억, 김지운장화, 홍련이 한꺼번에 출현했던 한국 영화 사상 최고의 황금기로 꼽힌다. 물론 2014년 12월 JTBC 뉴스룸 인터뷰에서는 '부흥기였지만 동시에 거품이 굉장히 많은 시기였다'는 표현을 통해 정정했다. 실제로 앞선 영화들을 제외한 메인스트림에서는 오직 수익만 노리는 개그+신파+조폭이라는 코드로 묶을 수 있는 2000년대 초중반의 B급 이하의 영화들이 무더기로 양산된 시기이기도 했다. 재밌는 것은 이러한 작품들의 대박 흥행 때문에 조폭미화물 양산이 가속화되었다. 이런 류의 작품들을 토대로한 장르마저 새로 만들어도 될 정도로 비슷한 아류작들이 양산되었고 이런 작품의 주연들이 온갖 예능에 출연해서 개봉 1~2주간 후딱 벌어먹고 빠지는 식의 쓰레기스러운 현상이 지속되었던 시기였다. 또한 상술한 명작들도 많았지만, 망작의 대명사인 긴급조치 19호,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주글래 살래, 클레멘타인 모두가 한석규의 휴식기~복귀 시점인 2002년~2004년에 나온 것이기도 하다.

3.2.2. 매니저이자 친형 한선규[편집]


당시 한석규의 매니저를 맡은 친형 한선규는 한석규에게 들어오는 시나리오를 1차 검토하는 역할도 맡았다. 하지만 그렇게 시나리오를 판단하는 역할만 했으면 좋으련만, 본인의 능력을 넘어선 영화 제작에까지 관여하다 보니 정작 한석규 본인이 하고 싶었던 작품은 시나리오 선별 작업에서 퇴짜를 놓는 경우도 상당했다. 때문에 김기덕 감독의 악어와 같은 좋은 작품들을 놓치게 되면서 한석규는 한동안 형과 많이 싸우기도 했다고 밝혔었다. 또한 은행나무 침대를 통해 생긴 제작자 이승재와의 인연으로 인샬라의 주인공으로 물망에 오르기도 했었지만, 한선규가 상대 여배우 캐스팅 및 제작에도 간섭을 하는 바람에 제작진 내에서 불만이 표출되면서 결국 최종 캐스팅에서 탈락되었다. 충무로 입성 초기 닥터봉이 크게 성공하여 수많은 시나리오가 들어올 무렵에는 사전에 한석규와 상의없이 무조건 출연한다고 했다가 나중에 출연 번복을 하거나 개런티가 적다며 퇴짜를 놓기도 했다.

이외에도 한선규는 한석규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만행들을 여럿 보이곤 했는데, 대표적으로 영화잡지 월간 스크린에서 주최한 핸드프린팅 행사건이 있다. 이때 행사제의를 처음 들은 한석규는 '형과 상의해서 제게 말씀해 주세요.'라고 해서 잡지사에서 한선규에게 다시 제의를 했더니, 한선규는 '이런 건 박신양 같은 애들이나 해야 한다.'라며 타 배우의 간접비하는 물론 실명 거론까지 했다. 그리고 이는 1999년 해당 잡지내에 언급을 통해 그대로 박제가 되면서 해당 발언의 당사자도 아닌 한석규가 억울하게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르락내리락하였고[8] 업계 내에서 평판이 매우 안좋아지면서 한석규를 기피하는 제작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한선규는 심지어 그 동안 한석규가 벌어 준 돈 수십억 원으로 영화사를 차려서 제작까지 했으나 촬영 도중 제작이 중단되거나 개봉을 하더라도 손익분기점을 못넘으서 손실도 상당히 많이 봤다.

다만 훗날의 한선규의 인터뷰를 들어본다면, 단순히 한선규가 혈연으로 한석규의 매니저를 맡아 막무가내로서 사고치고 말아먹기만 했다기엔 나름대로의 고충도 심했던듯 하다. 특히나 한석규가 이미 드라마로도 커리어를 나타냈고 닥터봉, 은행나무 침대를 연이어 성공을 거뒀음에도 충무로 관계자들 중 사이에선 그때까지도 "한석규가 영화 몇 편 찍었다고 무슨 배우냐? 쟤는 탤런트지."라고 영화판에서 한석규를 은근히 깔보는 상황도 많이 겪었다고 한다.[9] 이 때문에 한석규가 계속 작품을 흥행시키며 몸값이 수배로 올라가자 상황이 반전되자, 갑질하던 영화 제작사들과 관계자들을 역으로 을질을 했다는 것. 게다가 계약상 러닝개런티를 한국 배우 최초로 도입한 것 역시도 한선규의 아이디어여서 한석규가 수억의 개런티를 챙길 수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한선규 역시 과만 있는 것은 아니다.

3.2.3. 까다로운 시나리오 선정[편집]


인간관계, 의리, 출연료 등을 떠나 시나리오가 우선. 시나리오를 수정, 다시 의뢰해와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1년여를 끌어온 작품도 형과의 의견 일치가 이뤄지지 않으면 퇴짜. 흥행 보증이 확실한 감독이 권유해도 시나리오가 마음에 차지 않으면 NO. 때문에 그는 '깐깐한 배우'의 차원을 넘어 '매정한 X', '의리없는 XX'로 오해를 사기도 했다.


충무로의 모든 시나리오가 한석규에게 제일 먼저 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90년대 한석규의 위상은 어마어마했지만, 그만큼 그 당시에도 한석규는 까다로운 시나리오 선정으로 유명했다.# 물론 배우가 시나리오를 선별하는 능력은 중요하지만, 그 까다로움이 너무 지나쳤다는 것이 당시 업계인들의 주된 평가이다. 실제로 영화 접속의 경우, 제작이 확정 나기 전부터 여러번 시나리오가 수정되었는데 한석규가 처음 기획서를 보았을 때는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다가 수정된 시나리오를 보고는 출연에 망설였고 스무번째 수정된 시나리오를 보고는 "못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결국 시나리오는 다른 남자 배우들에게 거쳐갔지만 '한석규가 거절한 시나리오'라는 딱지가 붙은 영화에 출연을 결정한 배우들은 없었고, 거의 2년을 채우는 시간이 지나 25번 고쳐 쓴 마지막 시나리오를 보고나서야 한석규는 출연 결정을 했다. 그리고 한석규가 출연을 결정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에 가속화가 붙었을 정도다.# 이는 한석규 본인이 좋은 시나리오에서 좋은 영화가 나온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어서였고, 실제로 직접 시나리오 공모전까지 열었을 정도로 시나리오는 한석규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였다.

이러한 한석규의 깐깐한 시나리오 선정은 그의 전성기를 완성시키면서도 더 견고히 만들어주었지만, 동시에 양날의 검으로 돌아왔다. 시나리오 선정에 너무 오래 걸리면서 많은 각본가/감독/제작자들의 불만이 쌓여갔던 것. 실제로 한석규의 출연 여부에 따라 투자의 여부가 갈렸기 때문에 일단 한석규에게 먼저 시나리오를 보내기는 하지만 한석규의 출연 의사가 결정나기 전까지 대부분의 제작이 올스탑되어야 했기에 관계자들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였다. 게다가 안그래도 한석규 본인이 (시나리오를 꼼꼼히 보기에) 영화 출연을 결정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이미 흥행보증수표 한석규에게 모인 시나리오가 굉장히 상당했으므로 시나리오를 고르는 시간이 중첩되면서 시나리오를 수락 내지 거절하는 과정까지 굉장히 오래 걸렸다. 게다가 한석규가 수락할 가능성이 있기에 그 사이 다른 배우들에게 시나리오를 건내주지도 못했다. 심지어 이런 일련의 과정을 오래 걸치고 나서 본인들의 영화 시나리오를 한석규가 거절했더라도 영화 제작은 계속해야 하므로 후순위의 다른 배우들을 대신 캐스팅하려 했지만, 선술했듯 '한석규가 거절한 시나리오'를 기피하는 배우들이 상당했다. 물론 이것은 배우 스스로의 자존심 문제도 있을 뿐더러 시나리오를 꼼꼼히 보고 잘 고르기로 유명한 한석규가 거른 영화는 졸작 내지 망작 일 것이라는 인식이 배우들 사이에서 파다했기 때문이다. 캐스팅에서부터 난항을 겪은 영화는 결국 제작 자체에 큰 차질을 빚은 것이다. 이 덕에 8월의 크리스마스때부터 차츰 영화계 산업속 한석규 원탑 구조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져만 갔다. 이런 와중에 선술한 한선규와 관련해 업계 평판이 점차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긴 공백기 동안 한석규를 대체할만한 떠오르는 라이징 스타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굳이 그 고난을 겪으면서까지 한석규를 쓸 이유가 없으니 시나리오가 자체가 잘 안 가게 되었다. 시나리오가 적게 가니 동시에 좋은 시나리오도 기존에 비해 적게 받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3.2.4. 신인감독 고집[편집]


사실 시나리오를 잘 고르는 배우 분야에서 가장 먼저 호명되던 이는 한석규였다. 스크린 데뷔작 <닥터 봉>에서 <쉬리>에 이르기까지, 속칭 ‘되는 영화’만 잘 고르던 그는 <이중간첩> 이후 과거의 영광이 무색할 만큼 시나리오를 못 고르는 배우 쪽으로 기울었다. 한석규는 신인감독의 작품을 집착에 가깝게 선호한다. 바로 여기에 한석규의 성공과 실패의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사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장윤현(<접속>), 이창동(<초록물고기>), 송능한(<넘버 3>), 강제규(<쉬리>) 등 새로운 감성의 신인감독들이 충무로를 이끌던 시기였다. 이 같은 분위기를 타고 한석규는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대형 제작사의 등장과 기획영화의 범람 속에서 신인감독들은 기능공의 역할을 맡으며 제 개성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한선규는 자신만의 원칙 속에서 그런 변화를 제때 감지하지 못한 것 같다.


대부분의 흥행배우들을 보면 감독과 배우들이 인맥으로 같이 가는 경우가 많은데, 한석규의 경우 신인 감독과의 작품을 고집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박찬욱, 김지운, 이창동, 봉준호 감독 등 검증된 감독과 작품을 하는 최민식, 송강호, 이병헌이라든지, 강우석, 윤제균 감독 및 그 연출부 출신들과 작업을 하는 설경구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한석규의 경우, 데뷔작을 같이 했던 이광훈 감독은 닥터 봉 이후 패자부활전, 자귀모, 천년호라는 영화 팬들은 알만한 최악의 작품을 연속으로 연출하며 2003년을 끝으로 영화계에서 자취를 감췄고 현재 뉴욕에 거주중이다. 그리고 은행나무 침대와 쉬리를 같이했던 강제규는 현재 제작에만 전념하며 가뭄에 콩 나듯 연출하다가 마이웨이의 실패와 한중합작영화 제작 실패 등등의 악운이 겹쳤으나 다시 영화연출을 하게 되었다. 한편 초록물고기의 이창동 감독과 8월의 크리스마스의 허진호 감독은 활발하게 작업을 하는 감독이 아니고, 접속과 텔 미 썸딩을 같이 했던 장윤현 감독은 그 후 썸, 황진이, 가비가 연속으로 실패해버렸다. 거기에 넘버 3의 송능한 감독은 아예 영화계를 떠났다. 즉, 8편 연속 흥행으로 1990년대 전성기를 가져다 준 감독 중 현재에도 활발하게 작업을 하고 있는 감독들이 거의 없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한석규에게 유명 감독들과의 협업할 기회가 전무하지도 않았다. 앞서 데뷔작인 초록물고기이창동 감독의 후속작 박하사탕의 경우, 설경구가 맡은 김영호 역 자체가 한석규를 염두에 두고 만든 캐릭터로서 한석규에게 먼저 캐스팅 제의가 갔었다. 하지만 한석규는 장윤현 감독의 후속작 텔 미 썸딩의 촬영 기간과 겹쳐 고사하였다. 당시 스릴러 영화가 매우 찍고싶어서 거절한 것이였지만 나중에야 놓쳐서 매우 아쉽다고 밝혔으니 말 다했다.# 덕분에 신인인 설경구에게 역할이 넘어갔는데, 설경구는 박하사탕을 계기로 공공의 적, 실미도, 오아시스까지 연타석으로 성공하면서 충무로 트로이카로 이름을 날렸고 한석규의 입지를 한자리 차지했다는 점이 상당히 아이러니하다. 게다가 만약 한석규가 박하사탕을 찍었더라면 그때의 설경구처럼 이창동과의 협업을 연달아 하여 오아시스도 이어 촬영할 기회도 매우 높았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더라면 한석규가 최소한 10여년 간의 깊은 슬럼프를 겪지는 않았을 것 이라는 게 정설이다. 또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의 경우, 상대 배우인 최민식의 강력한 추천도 있었을 뿐더러 박찬욱 감독이 구상한 이우진 역의 캐스팅 1순위가 바로 한석규였다.# 하지만 한석규는 이 역시도 서브 주연이라는 역할의 성격과 영화의 소재 때문에 고사하였다. 물론 그 당시에는 한석규를 제외하고도 매우 많은 배우들이 거절하여 돌고 돌아 유지태에게 향한 것이였으며 그 유지태마저 마지막까지 출연을 고민하긴 했다. 박찬욱 감독의 경우 복수는 나의 것에도 송강호 역에 캐스팅 제의를 받았으나 이 역시도 거절했다고 박찬욱 감독이 직접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한석규의 신인감독 선호 기질에도, 한석규의 필모그래피를 통틀어서 역대 최다 관객수를 동원한 영화는 짝패, 부당거래 등으로 이미 스타 감독 배열에 선 류승완 감독과 함께했던 베를린이라는 것이 아이러니할 따름이다. 물론 한석규가 최전성기를 보냈던 90년대 영화들은 지금과 달리 영화 산업이 많이 발달되지 않았으며 관객수 역시 제대로 집계되지 않았다는 당시 상황을 감안해야겠지만,[10] 00년대와 10년대 출연 작품들 중에서 총 관객수 500만명은 커녕 300만명을 동원한 작품이 베를린밖에 없다는 점은 생각해볼만한 부분.

한편 한석규는 스스로가 신인 감독과의 작업을 '물물교환'이라고 표현하며 "배우에게는 아무리 변신을 하려해도 '덩어리 이미지'라는 게 분명히 있다. 배우로서 그 이미지를 어떻게 변주하느냐가 큰 고민(이다). 신인 감독 분들은 그런 고민을 배우 이상으로 함께 해준다. 내가 빠지기 쉬운 함정에서 건져주는 셈. 그래서인지 신인 감독과의 작업이 많고, 그런 면에서 보람이 크다."라고 밝힌 바 있는 데, 이에 따르면 원래부터 신인 감독을 선호하는 성향인 듯 하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2017년 역시나 신인 감독 나현과 함께한 작품인 영화 프리즌 관련 인터뷰에서는 "늘 나의 다른 면을 고취시켜주기에 신인 감독과의 작업이 좋다. 내가 빠질 수 있는 함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도전해볼 수 있는 게 장점이다. 모든 걸 거는 신인 감독들과 작업하면서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게 중요하구나’를 날로 생각하게 된다."라고 여전히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2019년 우상때는 "신인 감독들의 장점이다. 모든 걸 다 걸고 한다. 자신의 모든 걸 다 쏟아 붓는 거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3.3. 결론[편집]


이러한 이유들로 90년대 영화계의 아이콘이였던 한석규는 1996년 6월 프리미어에서 선정한 한국 배우 평가에서 여러 배우들을 제치고 당당히 1위를 차지하였지만, 2001년 10월 프리미어에선 과대평가받은 배우 2위로 뽑혔다.#[11] 또한 기자들끼리 선정한 최악의 배우 순위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하더니, 2004년 프리미어에선 흥행성 없음을 이유로 과대평가된 배우 5위에 선정되는 불명예를 안게 된다.# 이처럼 2002년까지 티켓파워 1위를 기록했던 그가 2000년대 침체기 이후에는 언론에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으며, 가끔 하는 설문조사 순위권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이러한 한석규의 위상의 추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로는 영화 악마를 보았다 캐스팅 비하인드가 있다. 당시 영화 제작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면서도 한석규의 절친한 관계인 최민식의 제안으로 한석규는 영화 출연에 동의했지만, 영화 제작자의 반대로 출연이 무산되었다는 굴욕을 당한 것. 아마 제작자 입장에서는 한석규가 2000년대 들어 이 영화를 비롯해 대부분의 영화에 흥행 부진을 겪고 있었던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한석규를 대신해서는 이병헌이 캐스팅되었다.

그리고 뺀찌당한 한석규는 결국 영화판에서 드라마판으로 눈을 돌렸고,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세종 역을 택하며 16년만에 드라마 복귀를 감행하기까지 한다. 물론 결과론적으로 악마를 보았다는 흥행에 실패하였고 그 대신하여 한석규가 차선으로 택한 뿌리깊은 나무가 초대박이 나면서 부활이라 칭할만큼 커리어에 큰 전화위복이 되긴했지만, 한석규의 출연 여부로 투자의 여부가 갈려 모두가 그의 출연을 바라며 캐스팅을 하기 위해 어떻게든 노력했던 과거를 생각했을 때 제작자의 반대로 영화 출연이 무산되었다는 그 사실만을 놓고보면 씁쓸하기 그지없다. 실제로 이 뿌리깊은 나무의 대 성공전까지 배우로서 한석규는 어려운 시기를 겪어야 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 것이라는 말들을 많이 하지요. 저도 조금 아쉬웠던 게 사실이구요. 그런데 주위 분들이 '언젠가는 겪어야 될 일'이라며 충고해주시더라구요. 어차피 평생 배우를 할 작정인데 일희일비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제 연기가 발전하는 데 좋은 밑거름이 됐다고 생각해요.”



“잇단 시련의 시간들이 있었지만 평생을 연기에 건 사람에게 그런 1∼2년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생각해요. 그리고 지금은 뭐 제가 최고도 아니잖아요? 전에는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최고’라는 말이 불편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편해요.”


한편 한석규는 이러한 자신의 침체기 내지 슬럼프 기간에 대해 어찌보면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며 나름대로에게는 뜻깊은 시기였다고 언급했다. 중심에서 물러나는 경험도 해보고 또다시 여러 작품들을 통해 다양한 도전을 거듭하면서 많은 생각들 속에서 스스로 변화를 겪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배우가 된 후 계속해서 스스로 물어왔던 ‘나는 연기를 왜 하나?’라는 질문에 겨우 ‘내가 느끼고 싶어서 연기한다’라는 답을 내리게 되었는데, 이같은 깨달음도 2000년대 넘어가면서 소위 슬럼프 기간을 겪는 동안 얻을 수 있었다고. 90년대처럼 승승장구만 했다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살았을지도 몰랐고, 오히려 그때 그만큼 나빴기 때문에 지금이 좋다는 등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또한 이때부터 흥행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영화들을 눈치보지 않고 마음껏 할 수 있었다고 얘기했는데, 흥행 보증 수표라는 별명 내지 평가와 함께 주변 시선에 대한 부담감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넘버 3 출연 당시 초록물고기에 이어 또 깡패 영화를 찍냐는 소리를 들었고, 이 때문에 접속의 차기작을 고르다가 또 멜로 영화를 찍는다는 생각에 8월의 크리스마스 출연을 망설인 적도 있을만큼 나름대로 장르의 변화나 연기 변신에 대한 압박감을 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석규의 긴 침체기'라는 의견에 대해서는….
"침체기겠지. 밖에서 그렇게 얘기하면. '나는 아니다'라고 얘기해봐야 뭐하겠나. 연기로서도 침체기라고 하면 미치고 팔짝 뛸 일이겠지만. '흥행의 침체기'하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많은 관객과 함께 호흡하고 싶다는 바람은 늘 같지만, 매번 심기일전하는 수밖에 없다. 연기의 침체기라고 내가 스스로 느낀다면 그건 큰 문제가 될 것 같다. 하지만 아직은 그래도 연기에 대한 욕심,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은, 뭔가 더 해보고 싶은 열망 같은 게 분명히 살아 있다.

영화는 그게 참 좋다. 완성시켜 놓고 뚝 떨어져서 관객으로서 한석규라는 배우가 어떻게 연기를 하는지 지켜볼 수 있는 것. 관객을 위해서 잘 하고 싶다 하는 것도 있지만, 나 스스로 관객이 돼 내 모습을 보는 순간의 평가도 중요하다. 연기를 처음 해야겠다고 결심한 게 고등학교 때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보면서 느꼈던 감동이었으니까. 그 때 얻은 정서적 충격. 나도 내 모습을 보면서 관객으로서 그런 걸 느끼고 싶다. 그래서 힘들어도 계속 할 수 있는 것 같다."



4. 한석규에 대한 언사[편집]


  • 김혜수(배우 / 한지붕 세가족[A], 파일럿, 닥터 봉, 이층의 악당, 낭만닥터 김사부)
석규 오빠는 내 청춘의 영화 속 배우.#
‘이 사람은 연기도 잘 하고 목소리도 좋고 인간성도 훌륭하지?’ 하고 매번 감탄한다.#
  • 김운경(작가 / 서울의 달)[12]
석규는 감성이 풍부하고 표정 연기가 가능한 연기자중 한 사람이다. 가끔 대본에 있는 것보다 더욱 섬세한 내면연기가 나와 깜짝 놀라기도 했었다. 반짝 스타가 아니라 오래 남는 연기자가 될 걸로 본다. (중략) 어떤 역을 맡겨도 잘 해낼만큼 연기 폭이 무척 넓은 편이다. 미남이 아닌 평범한 얼굴이 오히려 이런 연기 개발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나는 한석규의 후광으로 성공했다.#
항상 똑같고 한결같은 사람이다. 연예계라는 동네에서 변함없는 철학과 자세로, 변함없는 톤으로 20, 50대 때나 한결같이 자신의 일에 매진하는 사람을 많이 본적이 없다. 비록 학교 후배지만 그런 동료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다.#
솔직히 이 영화가 아니었어도 석규와 함께라면 출연했을 겁니다. 역할을 따지는 건 아무 의미 없어요.#
그런 비유를 하고 싶어요. 탁구 치면 서브를 넣잖아요. 리시브해서 넘어오죠, 우리 쪽 네트로. 그게 어떨 땐 스핀으로, 어떨 땐 직구로 넘어오는데 그 랠리를 하는 맛이 있어요. 장시간 (촬영에) 막 지쳐가면서도 탁-탁 서로 왔다 갔다 하는 그 재미가 있어요. 예를 들어서 제가 스매싱을 했을 때 그쪽에서 못 받는다든지, 그쪽 스매싱을 제가 미처 못 받든지 하면 안 되는데 (한석규하고는) 아주 오랫동안 랠리 하는 재미가 있었어요. 그런 파트너였어요.#
  • 이범수(배우 / 은행나무 침대[B], 접속[B], 음란서생)
어떤 돌발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연기의 힘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며 ‘역시 한석규구나’ 생각했어요.#
대립되는 이미지를 조화시킬 줄 아는 연기는 쉽지 않다. 한석규를 높이 사는 것은 그런 점에서 거의 동물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전도연(배우 / 접속)[13]
그때 한석규씨는 사실은 당대 최고의 배우였었고, 한국 영화가 한석규씨가 나오는 영화, 그렇지 않은 영화로 나누어졌었기 때문에 한석규씨한테 이름도 잘 모르는 전도연이라는 배우를 캐스팅하는게 맞냐라는 우려들이 엄청 많았었죠.#
연기가 너무 아름다웠다. 촬영을 하면서도 쉽게 '컷'을 외치지 못했다.#
사실 ‘쉬리’ 때 한석규 선배님은 지금의 박보검, G-DRAGON을 모두 합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목소리도 여전하지 않나. 다시 한 번 영화 안에서 호흡을 맞추고 싶다.#
황정민은 함께 연기를 하고 싶은 배우로 단박에 한석규를 꼽았다. “제가 연극할 때 ‘쉬리’에 단역으로 출연을 한적이 있었다. 그 때 한석규 선배는 주인공이었다. 처음 뵙고 ‘너무 멋지다. 나도 저렇게 멋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도 영화를 계속 하고 형님도 영화를 계속 하고 계신데 그 이후로 다시 못 만났다. 정말 기회가 닿는다면 한석규 형님과 같이 도란도란 작품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럼 정말 미칠 것 같다. ‘쉬리’ 때는 말도 못하고 그랬는데 이제 형님이랑 같이 작품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너무 행복할 것 같다”고 털어놨다.#
영화사에선 한석규가 2% 더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고 좋아하더라. 크게 부활할 거라고 말이다. 첫 컷을 찍는 순간 저래서 스타구나 느끼게 해주더라. 큰 배우들 특히 한석규와 촬영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은 아쉽다.#
  • 김지수(배우 /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
박찬욱 감독님이 왜 여자 연기자 중에는 한석규처럼 개성있는 연기자가 없냐고 한탄한 적이 있다. 한석규 선배는 단순히 연기자 뿐 아니라 가정적으로도 완벽하다. 남자 친구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고,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한석규 선배가 출연한 '그때 그 사람들'이다.#
  • 변승욱(감독 /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
한석규 씨는, 괜한 얘기가 아니라, 타고 난 배우다. 한석규 씨는 머리를 비우고 와서, 그러니까 한 80% 정도만 채워와서 나머지 20%는 현장에서 만드는 배우다. 특히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처럼 사실적인 연기를 요구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 배우들의 연기 아닌 것 같은 연기. 그런 것을 하기 위해서 한석규 씨 본인이 그렇게 준비를 해온다. 현장에서 채우는 나머지 부분들을 보면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말투나 표정 그대로다. 다른 것도 다 마찬가지지만, 연기라는 창작은 암만 노력해도 안 되는 부분이 있거든. 그런, 다른 사람들이 안 되는 그 무엇을 갖고 있는 연기자가 한석규 씨다. 한석규 씨가 신인감독들하고 많이 작업을 하는데, 사실 신인감독하고 작업하는 게 어찌 보면 위험할 수도 있다. 신인이라 의욕은 앞서지만 어쩔 수 없이 처음이라는 데서 오는 시행착오가 있으니까. 그런 시행착오들을 한석규 씨 같은 노련한 배우들이 메워준다.#
한석규는 모든 감독들의 로망이다. 저 배우랑만 하면 내 인생이 풀릴 것만 같은. 일단 새로움이 보인다. 툭툭 하는데 굉장히 자연스러운 그런 연기자가 나타난 것.#
한석규씨는 초반 리딩 연습하는 것을 보면서 ‘내가 저런 연기자의 대사를 쓸 수 있는 기회구나’라고 생각했죠.#
한석규 선배님께 정말 많이 배웠다. 배우로서 연기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생활적인 부분도 배우면서 닮고 싶었고,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석규 선배는 차인표 박신양 선배와 확실히 다른 에너지더라고요. 저는 배우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풀에너지를 가동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부분에서 차인표 선배는 풀가동, 박신양 선배는 자신이 콘트롤하면서 에너지를 보충하는 배우거든요. 그런데 한석규 선배는 에너지를 조금만 쓰는데도 연기할 때 단번에 풀가동이 가능한 배우인 거예요. 순간 집중력이 진짜로 신기하더라고요.#
연기 잘하시는 선배님들의 장점은 다 배워보고 싶어요. 하지만 그 것을 제가 가져온다고 해도 제 것이 될 수 없어요. '뿌리 깊은 나무'에서 한석규 선배님과 부자지간으로 출연했는데, 주변에서 제게 한석규 선배님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닮았다고 하세요. 최고의 칭찬이지만 제가 따라할 수 없어요. 제가 그 분을 따라한다면 저는 대단한 사람인 거예요. 따라할 수도 없고 가져올 수도 없지만 한석규 선배님의 인격은 가지고 싶어요.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우러러 보게 되는 선배님이시거든요.#
작은 신 하나하나 대본에 씌여있는 대로 연기하는 게 아니라 항상 그 이상을 보여준다. 창의적이지만 공감하도록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몸으로 많은 것을 느꼈다. 아주 섬세한 부분까지 디테일하게 설명해주시니 과외 선생님이 따로 필요없을 정도였다.#
만약에 제가 투수로 공을 던져야 하는 상황이라면, 포수입장에서 가장 잘 리드해줄 수 있고 받아줄 수 있는 선배다. 안심하고 막 던질 수 있다.#
'뿌리깊은 나무'라는 드라마에서 한 선배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절대 한석규라는 배우에게 연기로 들이대지 말아라'. 근데 난 아주 간단하게 표현해서 들이대 보고 싶더라. 피하고 싶다는 느낌이 아니라 일단 막 해 보자는 생각이 더 강했다. 복싱과 비교를 하자면, 얼굴만 가리고 있다고 해서 상대방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눈을 뜨고 상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아야 공격을 할 수 있다. 맞아 봐야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그래, 눈 뜨고 맞아보자'라는 마음으로 한석규 선배에게 덤볐고 (연기적으로) 진짜 많이 맞기도 했다. 심지어 술을 마시고 연기한 적도 있다. 어떤 신은 내가 석규 형에게 절대 밀리면 안 됐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힘들어서 캔 맥수를 마신 후에 연기에 임했다. 근데 석규 형이 '좋았다'고 한 마디 해 주시더라. 난 그 말이 그렇게 좋았다. 연기를 일찍 시작한 선배이고, 누구라도 그의 연기에 대해 쉽게 평할 수 없는 그런 분 아닌가. '좋았다'는 말은 어떤 인정이라기 보다 '어쨌든 내가 저 사람에게 반응은 받았구나'라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무엇이든 계속 뚫어보려 노력했다. 막힐 때마다 멈추기 보다는 뚫으려고 했다. 그러다 보면 자기 나름대로 생각과 색깔이 생기고 어느 순간 '나름'이라는 것이 빠진다. 그렇게 성장하는 것 같다. #
한석규 선배는 워낙 베테랑이다. 뭘 준비해도 받아주실 걸 알았다.#
한석규 선배님의 연기를 보고 자랐다. 그런 분과 같은 영화에 출연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행복하다. (중략) 한석규 선배님은 스페셜한 배우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특별한 사람, 특별한 배우?(웃음) 연기를 할 때나 하지 않으실 때나 에너지에서 풍기는 특별함이 있더라구요. 뭐라 한 마디로 표현하기도 어려워요. 솔직히 제가 이렇다 저렇다 말할 입장도 아니고. 하하. 선배님이라 어렵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직접 겪지 않으면 모를 매력이 가득하시니까.#
우리 세대 때 한석규 선배님은 일종의 '로망'이다. 한국 영화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셨고 난 그 때 조수로 영화를 막 시작할 때였다. 한석규 선배님을 보며 막연하게 '저 배우와 함께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렸을 때 제가 한석규 선배의 영화를 보면서 자라온 세대이기 때문에 같은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다는 것 자체가 큰 영광이었죠.#
  • 최무성(배우 / 음란서생[B], 베를린)
촬영하면서 많이 배웠다. 그 장면을 꽤 긴 시간 찍었는데 ‘명배우와 내가 이렇게 만나 단둘이 작업을 하다니’ 그런 생각도 들더라. 즐거운 기억이다.#
어렸을 때부터 동경하던 배우와 함께 연기했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었다.난 한석규 선배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현장에서 스태프들과 배우들을 대할 때 진중해진 느낌이 든다.#
특히 한석규 선배님의 공이 굉장히 컸다. 앞서 영화 ‘상의원’ 찍을 때도 좋은 말씀 해주셨지만 특히나 이번에는 저와 직접 대립하면서 찍은 신이 많아서 여러 가지 조언을 많이 해주셨다. 지금 기억에 남는 건 ‘카메라에 대고 연기하지 말자’는 말씀을 해주셨던 것 같다. 카메라에 연기를 하는 거지만 배우들끼리 정말 집중해서 감정과 대사를 주고받아야 하는데 무의식적으로 카메라를 의식하는 순간이 있다. 같이 고민하면서 촬영해보자고 말씀하셨고, 넘치지 않게 연기할 필요 없다고 하신 적도 있다. (중략) 선배님이 갖고 있는 여유가 있으시다. 덕분에 시간에 쫓겨 촬영하던 와중에도 중간 중간 여유를 갖게 됐던 적이 있었다. 정말 놀라운 건 현장에서 많은 것들을 고민해서 오신다. 드라마 촬영하다보면 대사조차 숙지하기 쉽지 않은데 아무리 시간을 쫓기더라도 여러 고민을 놓지 않으시더라.
촬영하다보면 핑계가 생기는데 반성도 하게 됐다. 그런 점이 배울 점이었던 것 같다. 드라마 촬영하다보면 후배들에게 조언해주기 쉽지 않은데 끊임없이 조언해주시고 고민해주신다. ‘이렇게 해보자’, ‘저렇게 해보자’, ‘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거니’ 등 관심 가져주시고 조언 많이 해주셨던 선배님이었다.#
배우로 터닝포인트가 된 작품으로 '낭만닥터 김사부'를 꼽았다. 한석규를 통해 큰 깨우침을 얻었다고 했다. 유연석은 "들어가려던 영화가 엎어지면서 생긴 공백에 '낭만닥터 김사부'를 만났다. 한석규 선배와 연기하면서 스스로 돌아보게 됐다. 어느 날,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내 눈만 보고 연기해볼래?' 물으셨다. 충격이었다. 카메라와 시청자를 의식해왔다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연기하면서 느끼는 감정보다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한석규 선배가 '말하는 건 나인데 왜 포커스가 다른 데 가 있냐'고 담백하게 물으셨어요. 진정성에 대해 지적해주신 거죠. 아주 큰 의미로 다가왔어요. 선배처럼 오래 연기를 하신 분은 가만히 계시다가도 툭 대사가 나올 줄 알았는데, 그 상황에 몰입하기 위한 루틴이 있더라고요. 반성했고 이후 연기 생활 하는데 각성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한석규 선배와의 호흡은 오히려 편했어요. 상대방을 편하게 이끌어주세요. 연기할 때도 상대 배우가 잘 캐치할 수 있게 짙은 색깔로 감정을 전달해주시죠. 그럼 자연스럽게 반응이 이끌려 나와요. 정말 놀랐던 건 선배는 테이크마다 다른 연기를 하세요. 다양한 시도를 하시는 걸 보고 “이렇게 하신단 말이지?”하면서 저도 신나게 연기했던 것 같아요. 보면서 배우는 것도 재밌었고요. 여러모로 함께 있는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 주시는 분 같아요.#
일주일 전 한석규 선배님과 통화했는데 진지하게 ‘지금이 제일 좋을 때다. 넌 재능이 많고 훌륭한 배우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지금까지는 연습한 거다. 정말로 잘 해봐라’고 두 세번 얘기하시더라. 다시 한번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앞으로 할 게 많구나 하고 다시 한번 열정을 불태울 수 있게 됐다.#
설경구는 “롤모델 같은 사람이었다. 요즘 여러 배우가 있는데, 90년대 말에 오로지 투자가 되는 배우가 한석규였다. 꽤 긴 시간에 혼자 버텼다. 무조건 한석규한테 책이 갔다”며 “‘우상’ 촬영장이 쉽지 않았는데 (한)석규 형이 아울렀던 거 같다. 분위기 메이커였다”고 말하며 호방하게 웃었다.#[14]
내 우상은 한석규 배우였다. 아마 많은 배우들도 그랬을 테다.#
코 끝이 찡한 느낌이 있다. 제가 아무래도 처음 도전하는 장르물에 쉽지 않은 캐릭터라 우왕좌왕 할 때마다 잡아주신다. 눈빛만 보면 아시는 것 같다. 힘들어 할 때마다 조언해 주신다. '나는 어디까지 와있고, 후배들에게 어떤 모습일까' 배우 생활을 돌아보게 하는 선배다. 한석규 선배와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 류연석(배우 / WATCHER[B] )
-롤모델은 누구인가

“’8월의 크리스마스’ 작품을 정말 좋아한다. 배우가 되고 싶다는 영감과 자극을 받았다. 한석규 선배님처럼 되고 싶다. 단역 때 OCN ‘왓쳐’를 했다. 형사 중 한 명이었는데 한석규 선배를 만났다. 작업을 대하는 태도나 연기나, 사람으로서 배울 점이 정말 많은 분이다. 넋놓고 봤다. 팬이자 롤모델이다. 저는 쭉 같이 해온 느낌이지만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작품에서 꼭 뵙고 싶다.”#
배우가 캐릭터를 만들어간다는 의미를, 프로들의 세계는 이런 거구나를 처음 공연한 한석규 선배님을 통해 깨달았어요. 압도적인 도치광 연기로 인한 화면 장악력에 놀랐어요. 자신이, 인물이 어떻게 보이는지 너무 잘 아셔서 신기하고 한편으론 영광이었죠.#
초반에 캐릭터를 잡는 게 힘들었다. 과거의 사건과 그에 따른 트라우마 등에만 초점을 뒀다. 한석규 선배가 봤을 때 내가 해매고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절대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분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수연이가 이런 느낌이겠지?”라며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해주셨다. 선배가 도치광을 만드는 모습을 보면서 더 많은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선배는 촬영하면서 시도하는 스타일이다. 한 번은 대본대로, 또 한 번은 프리스타일로 계속 다르게 하셨다. 도치광이 미치광이를 만드는 걸 직접 눈으로 봤다. ‘아 저렇게 하는 거구나’라고 깨달았다.#
캐릭터를 세밀하게 분석하고 색깔을 입히는 한석규 배우의 열정은 정말 대단하다. 누구보다 도치광을 사랑하고 있음을 느낀다. 상대 배우에 대한 배려까지도 완벽하다. 그런 한석규의 연기를 카메라에 담아내고 있음이 영광.#
정아름 대표는 다시 함께 작업해보고 싶은 배우로 한석규를 꼽으며 "너무 존경하고 좋아한 배우다. 함께 작품을 해볼 수 있을까 꿈꾸던 배우인데 이 작품을 함께 하게 되면서 너무 존경스러웠고 인품도, 연기도 너무나 좋았다. 아예 장르를 확 바꿔서 한번 더 작품을 같이 해보면 너무 좋을 것 같다. 스펙트럼이 넓으시니까 영감이 계속 떠오르게 하는 배우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는 "사실 너무 좋아하는 배우라 그 나이 때 작품이 있으면 선배님께 무조건 드려야겠다 했는데 원작을 보자마자 '이건 한석규야' 생각해서 제안을 드렸다. 주변 모두가 '그래 처음에 한석규 배우님 보여드리고 거기서부터 다음 단계로 가라'고 했다. 아무도 선배님이 이걸 할거라고 생각을 안한거다. 다들 '창피함은 너의 몫이니까 도전해라'라고 했다. 그런데 선배님이 하루이틀 정도 만에 '이 작품을 나한테 주겠다고 용기 내주고 무대를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문자를 주셨다"라고 밝혔다.#
정말 울림통이 큰 배우라는 것을 느꼈다. 그전까지는 한석규 씨가 여유있고 편안한 연기를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번에 작업하면서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울림통을 가진 배우임을 알게 됐다. 그가 연기하면 '둥 둥 둥' 공명이 되더라. 행동 하나, 눈빛 하나에 천가지 말을 담아내더라. 정말 대단한 배우다.#
한석규 배우가 연기하는 김사부가 곧 돌담병원의 세계관이자 이 드라마를 켜고 끄는 스위치 같은 존재다. 그저 매 순간이 감동이었다. 한석규 배우가 의사 가운을 입는 순간 우리 모두가 돌담병원이 존재하는 그곳으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순간 이동이 돼버렸다. 눈빛 하나, 말투 하나, 손짓 하나까지 가르침이 되고, 모두를 이해시키고, 한방에 설득시켜버리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배우가 만들어 낸 캐릭터의 힘이란 이런 것이구나! 압도당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사부님은 항상 스태프에게든 배우에게든 항상 '너는 이 일을 어쩌다가 하게 됐냐'고 물어보신다. 그런 이야기를 물어보시고 들으시면서 스스로를 한번 뉘우치게 되고 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된다고 하시더라. 아직까지 저 위치에 계시면서도 끝까지 본인에 대한 성찰을 놓치지 않고 끌고 가시는 면이 존경스러웠다. '이 정도면 연기 잘한 것 같은데?' 하는 순간이 한 번도 없었다고, 본인의 연기를 못 보겠다고 하시더라. 후배 배우로서 엄청나게 반성을 했다. '내 연기에 만족하면서 연기를 한 적이 있나? 나도 경계를 하고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귀감이 많이 되어주셨다. 사생활적인 것도 많이 물어봐주셨다. 제가 아쉬웠던 건 존경하는 선배님과 시즌3에서는 같이 붙는 신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거다#
김민재 역시 시간이 흘러 한석규처럼 배울 수 있는 선배가 되길 희망한다. 김민재는 "후배들을 이끌어주고 현장을 이끌어주시는데 너무 멋있다. 사실 현장에서 선배님을 많이 보고 있다. 연기하실 때도 '어떻게 저렇게 하시지?' 보고, 자꾸 눈이 간다. 신기하게도 그냥 보게 되더라. 그런데 전체적으로 그런 분위기다. 배우뿐만 아니라 스태프들까지 안 그런 사람이 없다. 저의 표현력이나 감성은 다를지 몰라도 그런 선배님이 되고싶기는 하다."며 자신 역시 선배의 품격을 쌓아가고 싶다고 전했다.#
열다섯 살 ‘서울의 달’을 보며 도저히 모를 어른들의 세상과 나도 어른이 되면 저 무서운 세상에 나가야 하는 걸까 두려운 생각을 했고 열여덟 살 화공들이 그린 닮은 듯 닮지 않은 정겨운 영화 간판이 걸려있던 단일 극장에서 ‘초록물고기’ 막둥이 보고 내가 왜 그리 서러웠는지 눈물을 훔쳤고 열아홉 ‘8월의 크리스마스’ 초등학교 운동장에 앉은 정원의 뒷모습 수줍은 웃음 그리고 순간순간의 침묵 그리고 조용한 태풍처럼 마지막을 준비하는 정원의 용기는 나에게 새로운 정서의 영역을 선물해 주었다.
이제는 화면이 아닌 같은 공간에서 너무나 아름답고 커다란 사람 “낭만닥터 김사부”의 모습으로 동료와 후배들과 함께 계신다.
그리고 요즘 나는 매 순간이 기적이다.#
한석규 선배님에게 너무 많은 배움을 받고 있다. 한석규 선배는 나의 멘토다. 선배님은 모르실 수 있는데, 혼자만의 짝사랑같다. 연기를 임하는 자세에 대해서도 많이 알려주시고 선배님의 말을 듣고 있으면 배울게 너무나 많다. 웃음이 절로 난다. 같이 연기하는게 즐겁고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한석규라는 배우는 저희 세대의 로망 아니냐. 한국 영화의 중흥을 견인했고, 좋아하는 작품에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 한석규 선배 측에서 긍정적인 대답이 왔을 때 다른 생각을 할 여지 자체가 없었다. 한석규라는 배우와 이야기를 하다보니 대화 안에서 느껴지는 감성이 너무나 아날로그적이고 따뜻했다. 우리가 잊고 있던 어떤 것을 떠올리게 만드는 결이 있었다.#
한석규는 내가 연출을 꿈꾸던 시절에 열심히 보고 들었던 훌륭한 작품에 항상 계셨던 배우다. 현재 진행형 레전드인 배우다. 함께 작품을 하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볼 때마다 내가 가장 가슴 뜨거웠던 시절을 상기시켜주고 계신다. 벅차게 작업하고 있다.#
한석규 배우의 연기는 세 시즌을 거쳤는데도 계속 놀라움을 줬다. 같은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인물의 연속성과 변화를 표현해 주셨다. 역시 대배우라고 느꼈다.#
돌담병원 사람들이 이상하다. 하나 같이 너무 따뜻하다. 그 온기가 어떤 사람한테서 나오는 빛, 따뜻한 그런 기운이 있다. 저도 그렇지만 모든 식물과 자연들도 해가 없으면 자라날 수가 없지 않나. 한석규 선배님은 태양 같은 분이었다. 선배님을 바라보고 연기를 하면 그 태양 온기에 자라나는 느낌이었다. 선배님이 어떤 조언을 해주시면 그 조언을 먹고 자라나는 느낌이었다. 만물을 비추는 태양 같았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선배님과 한마디라도 더 나누고 싶어 했다. 분명히 선배님 분량과 하시는 거에도 힘드시고 피곤하실텐데 항상 모든 사람들을 챙기셨다. 잠깐 출연하시는 분들, 스태프 한 명 한 명과도 가벼운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고 진중한 이야기로 몇 시간이고 대화도 하신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선배님께서 연기 생각하시더라도 힘이 없으실 것 같은데 어떻게 후배들, 현장 스태프들을 챙기시고 보조 출연자들과도 대화하고 모든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챙기시나 싶었다. 덕분에 모두가 온기에 자라나고 있는 느낌이었다.#
현장 분위기는 최고다. 한석규 선배님이 기둥을 잘 잡아주시기 때문에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선배님이 현장에서 막내 스태프 이름도 꼬박꼬박 불러준다. 저런 선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런 선배님이 대상을 받게 돼서 너무 기뻤다.#
한석규씨 정말 좋아해요. 한석규씨. 그런 어떤 평범함 속에 있는, 진짜 있을 것같은 그런 사람. 너무 잘생기거나 너무 훤칠하거나 뭐 이러면 저 사람이 진짜 현실에 있을 것 같지 않잖아요. "아, 저 사람 그냥 나오는 영화구나" 라던가. 근데 한석규씨의 예전 작품들을 쭉 지켜보면 "어, 진짜 저 사람은 있을 법하구나..." 초록물고기같은 거 보면 "아, 진짜 저 사람은 그렇구나.." 란 생각이 들어서... 그냥 녹아드는 것 같아요. 어떤 영화를 보면 "아, 저 사람 참 멋있긴 한데 영화지."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한석규씨 하시는 작품보면 그런 생각을 제가 못해봤어요. 그래서 제일 좋아해요. #[15]
글쎄요, 저는 일단 연기 롤모델보다 그 분의 연기를 대하는 자세가.. 사실 전 한석규 선배 옛날부터 되게 좋아했었거든요. 얼마전에 그 어떤 프로에 나와서 얘기한 것도 봤는데, 어렸을 때부터 사실 한석규 선배님 너무 좋아해가지고 롤모델이라 연기를 대하는 자세나 이런 거의 제 롤모델은 한석규 선배님.#[16]
-롤모델은.

“한석규 선배다. 선배만이 가지고 있는 부드러우면서 묵직한 카리스마를 배우고 싶다. 사실 어렸을 때는 강렬한 카리스마를 원했는데, 한석규 선배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었다(웃음). 선배 영화를 보면서 배우의 꿈을 키우곤 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연기를 하고 싶다. 작품에서 튀기보다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배우가 됐으면 좋겠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배우 한석규가 그의 롤모델인 이유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선배님께서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어린 마음에 가슴이 무너졌다. 작중 인물이 온전히 내게 다가온 느낌이었는데 그는 작품에서 딱 한 번 화내고 그 외엔 늘 웃고 지낸다. 그런 일상적인 감정을 담아내는 모습을 보고 막연하게 동경하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코믹부터 악역까지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가진 한석규 선배님을 존경해요. 서두르지 않고 자신만의 연기 폭을 넓혀가는 모습도 부럽고요.#
[1] 정작 본인은 한창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시절에 리포터가 이와 관련해 언급하자 "그놈의 평범한 얼굴..."이라고 다소 투덜거리면서도 속상해하는 반응을 보이는 등, 이같은 수식에 대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애초에 개성없이 평범한 외모라는건 돌려말해 배우로서는 매력없는 마스크를 지녔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니 배우입장에선 이런 반응이 당연하다. 그것도 모자라 미디어에선 허구한 날 당대 최고의 미남 배우들과 외모 비교를 당했으니... 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그러한 미남 배우들의 대표적인 배우격인 장동건은 되려 무슨 역할을 맡든 자연스럽고 어울린다는 점에서 한석규의 외모를 좋아했다는 것이다.[2] 닥터 봉이 개봉한 건 1995년이지만 이때 백상은 이듬해인 1996년에 진행되어 수상했기에 1년 차이가 맞다. 그리고 사실 신인상을 받고 곧바로 최우수연기상을 받은 것이 2년 차이라 해도 어마무시한 기록이며 이 기록에 가까운 남배우는 현재까지도 나오지 않고 있다. 여배우조차 1990년 거인을 통해 신인연기상을, 1992년 여명의 눈동자를 통해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한 채시라밖에 없다![3] 거사 직전, "똑똑한 놈 세 놈만 있으면 된다"는 중앙정보부장의 말에 부하를 선별하면서 내뱉는 말이다.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절박한 마음이 담긴 대사.[4] 기사 자체는 2001년 조사 기사이며 2000년 조사 기사는 확인할 수 없지만, 본문에 2000년에 2위를 차지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다만 이 때문에 정확한 득표율은 알 수 없다.[5] 한석규가 긴 공백기를 갖기 이전에 찍은 마지막 작품, 텔 미 썸딩이 개봉한지 정확히 1년이 지난 2000년 11월 14일에 작성된 기사이다. 1년의 공백기를 가진 시점에서도 이렇게 강도높고 날선 비판의 기사가 나온 것이다. 그런데 한석규는 여기서 2년하고도 2개월을 더 공백기를 가졌으니... 당시 영화계와 대중들이 한석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어느정도 짐작 가능하다. 참고로 여기서 언급되는 SF 영화 '제노사이드'는 한석규가 주최한 막동이 공모전에서 당선된 각본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인데, 시나리오 수정 문제로 영화 제작이 무산되었다.[6] 나름 메이저 신문에서 올라온 사설기사치고는 굉장히 비약적이며 과장적으로 영화의 내용에 대해 비판하는 글이긴 하지만 당시 개봉한 영화와 한석규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을 대강 알 수 있다.[7] 이 당시 한석규의 위상을 감안하면 생각보다 적은 양라고 생각될 수도 있고 실제로 이를 한석규가 차기작에 적극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게 한석규의 형이자 매니저를 자처한 한선규가 먼저 1차적으로 검토한 뒤 한석규에게 전달된게 이정도 양인 것이다!#[8] 사실 당시 한석규는 개인의 품성은 둘째치고 인터뷰나 방송 노출을 극도로 꺼리고 CF에 전념하였기에 이 모습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도 점차 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한선규의 행동들 덕에 언론에 더더욱 찍히면서 결국 한석규의 사소한 행동마저 조금씩 구설수에 오를 정도가 되고 말았다.[9] 당시에는 희극배우는 코미디언, 드라마 배우는 탤런트이고 오직 영화배우만 배우 타이틀을 사용해야한다는 문화가 아주 심했고, 배우병 항목을 보면 알듯이 아직도 영화배우와 드라마배우 사이에 급을 나누는 영화인들은 많은 편이다.[10] 실제로 쉬리의 경우 지금의 관객수로 환산하여 계산하면 천만 영화라는 것이 반쯤 정설이다.[11] 재미있는 것은 이때 또다른 항목인 '한국의 최고 배우'에서도 한석규는 4위에 랭크되었다는 점이다.[A] 이때 한석규는 단역을 맡았다.[12] 한석규와 최민식의 캐스팅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무척 실망했지만, 이내 연기를 보곤 마음을 돌리고 두 배우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실제로 김운경 작가는 서울의 달이 다 끝나고 얼마 안 가 일약 스타가 되버린 한석규를 향해 이런 멘트를 남겼다.[B] A B C D 이때 상대 배우는 단역을 맡았다.[13] 유 퀴즈 온 더 블럭 출연 중 영화 접속의 캐스팅에 대한 코멘트이다. 전도연은 이 날 이것외에도 영화 해피엔드의 출연 이유로 "그때 당시는 이제 한석규씨가 나오는 영화와 나오지 않는 영화 두가지로 나뉘었다고 그랬잖아요, 근데 그냥 어린 나이에 나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래서 선택한 작품이였다."라고 얘기하며 한석규를 다시 한 번 언급하기도 했다. 그때 그의 위상이 어느정도였는지 대강 알 수 있는 부분.[14] 이후 한석규, 천우희도 함께했던 씨네21 인터뷰에서도 "제가 영화하기 전에 저희들의 우상은 한석규였죠. 한석규처럼 되고 싶은 게 롤모델이었고 오롯이 혼자서 한국영화를 짊어졌던 시절이 있었거든요. 투자가 되는 배우는 한석규만 되던 시절이 있었어요. 꽤 길게."라고 비슷한 발언을 했었는데, 한석규는 해당 발언을 듣자마자 "중요한 건 다 날아가버린 과거의 일이다."라며 웃었다.#[15] 영상 클립 27초부터 해당 발언이 나온다.[16] 영상 클립 30초부터 해당 발언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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