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레/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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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펠레의 클럽 경력에 대해 서술하는 문서이다.
읽기 전에 미리 알아두면 좋은 부분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Campeonato Paulista):
* 산투스가 속한 상파울루 주립 리그.
* 연마다 하반기에 개최.
* 1902년~현재
*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히우-상파울루 컵, Torneio Rio-São Paulo):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캄페오나투 카리우카의 상위 4~5 팀끼리 경쟁했던 대회.
* 연마다 상반기에 개최.
* 1952년~1966년
* 타사 브라지우(Taça Brasil):
* 브라질 전국의 주립 리그 우승팀끼리 맞붙는 컵대회.
* 연마다 하반기에 개최.
* 1959년~1964년의 우승팀은 다음 시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진출.
* 1965년 대회는 확인이 불가능함.
* 1966년~1967년의 우승&준우승팀은 다음 시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진출.
* 1968년 대회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출전 자격을 결정짓는 대회였는지 아니었는지 확인이 불가능함.
* 1959년~1968년
* 토르네이우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or컵, Torneio Roberto Gomes Pedrosa):
*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의 명맥을 이은 대회.
*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와 마찬가지로 연마다 상반기에 개최.
* 1967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출전 자격을 결정짓는 대회가 아니었음.
* 1968년~1969년 대회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출전 자격을 결정짓는 대회였는지 아니었는지 확인이 불가능함.
* 1970년 우승팀은 다음 시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진출했음.
* 1967년~1970년까지 브라질 전국 리그의 역할을 담당함
* 현 브라질 전국 리그.
* 상반기에 개최하여 연말에 종료.
* 우승팀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참가.
* 상파울루 주립 리그에서 5위 이상이면 진출 가능.
* 1971년~현재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1960~1965 Copa de Campeones de América, 1966~P Copa Libertadores):
* 남아메리카의 대륙 최상위 컵대회.
* 유럽의 유러피언컵과 대응하는 개념으로, 각 나라 전국 리그or컵대회의 우승팀 또는 준우승팀이 참가.
* 1948년 창설, 1948년 중단, 1960년 재개막~현재
* 인터컨티넨탈컵(1960~1979 Intercontinental Cup, 1980~2004 Toyota Cup):
* 대륙 컵 우승팀끼리 맞붙는 경기.
* 현대의 FIFA 클럽 월드컵과 비슷한 개념. 1960년 창설~2004년 폐지
2. 산투스 FC[편집]
2.1. 1956(2군)[편집]
펠레는 바우데마르 지브리투의 추천을 통해 1956년 산투스 FC에 입단했다. 입단하자마자 엄청난 성장세를 보이며 보통 선수들보다 훨씬 빠른 15살이라는 나이에 SC 코린치안스와의 경기에서 득점을 올렸다. 펠레라는 이름이 브라질 전체로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다만 공식 리그 기록에는 없는 경기이다. 일종의 친선 경기 또는 리저브 매치였다.
1956시즌: 0경기 0골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0경기 0골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 0경기 0골
2.2. 1957[편집]
1957년에는 상파울루 주립 리그가 두 시즌으로 나뉘어 열렸다. 세리 브랑쿠와 세리 아줄이 그것인데, 영어로 바꾸면 White Series와 Blue Series이다. 20개 팀 중 예선 리그에서 상위 10팀, 하위 10팀을 갈라 상위 10팀은 세리 아줄에 진출했고 하위 10팀은 세리 브랑쿠에 진출하는 방식이었다. 펠레는 예선 리그에서 14경기 19골을 집어넣으며 득점 선두에 올랐고, 산투스는 이런 펠레의 활약 덕에 13승 1무 5패를 기록하여 전체 2위를 기록했다. 당연히 세리 아줄에 나가게 되었다. 펠레는 세리 아줄에서 15경기 17골을 터뜨리며 득점왕을 차지했다. 산투스는 코린치안스에 밀려 우승을 놓쳤지만, 슈퍼 유망주 한 명을 건졌다. 당시 펠레의 나이는 만 17세가 된지도 얼마 안 된 상태였다. 펠레의 공식 리그 데뷔는 1957시즌이었는데, 데뷔 시즌에 최상위 리그의 득점왕을 차지하는 케이스는 펠레와 이탈리아의 펠리체 보렐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 또한 이런 미친 활약 덕에 1957년부터 셀레상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당연히, 대표팀 내 최연소 선수였다.
1957시즌: 38경기 41골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4+15경기 19+17골 (득점왕)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 9경기 5골
2.3. 1958[편집]
1958년 시즌에는 주립 리그 38경기에서 58골을 때려박았다. 압도적인 기록이었다. 득점왕은 당연지사였다. 산투스는 3년만에 주립 리그 트로피를 들어올렸으며, 펠레는 본인의 첫 클럽 트로피를 만져보았다. 1958년 주립 리그에서의 산투스는 정말 대단했다. 38경기에서 143득점을 기록했으며 40실점을 기록했다. 득실차는 무려 +103이었다. 펠레가 세운 58골 기록의 경우, 국가대표팀, 클럽팀, 공식경기, 비공식경기를 가리지 않고 엄청나게 뛰는 도중에 공식전에서만 58골을 만들어냈다는 의미이므로 더 값진 기록이다. 브라질 리그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더욱 선수들에 대한 복지가 좋지 않았으며 혹사가 아주 심했다.
1958시즌: 46경기 66골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8경기 58골 (득점왕)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 8경기 8골
2.4. 1959[편집]
산투스는 1959년 8월 2일 주립 리그에서 유벤투스를 4대 0으로 눌렀는데, 펠레는 이 경기에서 아주 아름다운 골을 득점했다. 이 골은 영상으로 남지 않았지만 너무 아름다운 득점 장면이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이 골을 그래픽으로 다시 복원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1959년 시즌 주립리그에서 44골을 넣어 또 득점왕에 오르는 한편 정규 리그 공동 1위를 차지했다. 산투스의 성적을 보자. 득실차에서 2위 파우메이라스에 월등하게 앞섰으나 승점이 같았고, 당시의 상파울루 주립 리그는 득실차를 적용하여 우승자를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플레이오프를 따로 진행하여 우승자를 결정하게 되었다. 1차전에서 펠레는 한 골을 득점하며 1-1무승부에 공헌했다. 2차전에서는 산투스의 페페가 선제골을 터뜨렸으나 파우메이라스가 제툴리우와 치네시뉴의 골로 역전하여 2-1이 되었다. 경기 80분경 페페가 다시 동점을 만들며 2-2로 무승부가 나왔다. 3차전. 양팀은 이를 바득바득 갈고 나왔다. 펠레는 경기 14분만에 선제골을 터뜨렸다. 하지만 줄리뉴가 동점골을 터뜨렸고 호메이루가 48분 역전골을 넣었다. 경기는 그대로 끝났고, 산투스는 골득실이 1위 팀에 비해 20 이상 앞서는데도 준우승을 차지하고 말았다. 펠레의 심정은 정말 답답했을 것이다.
주립 리그의 우승팀들이 모여 브라질 최고의 축구팀을 가리는 타사 브라지우가 1959년에 개막했다. 브라질의 초기 전국 대회였던 이 대회에서도 펠레는 아주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산투스가 속한 리그인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는 브라질에서 가장 강한 리그에 속했기 때문에 다른 리그 우승팀들과 달리 예선을 거치지 않고 준결승전에 곧장 진출했다. 주립 리그에 엄청나게 자주 출전하며 지칠 대로 지쳤던 펠레는 그레미우를 맞이한 준결승 1차전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투스는 4-1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준결승 2차전은 0-0으로 무승부였고 합산 스코어 4-1로 그레미우가 탈락했다. 산투스는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전은 세 차례에 걸쳐 열렸다. 결승 1차전에서 펠레는 앞서가는 한 골을 터뜨렸다. 그러나 3골이나 얻어맞으며 3-2로 패했다. 2차전은 산투스의 승리. 펠레는 2-0으로 앞서가는 추가골을 득점했다. 하지만 결승전 상대 EC바히아는 결코 만만한 팀이 아니었다. 1960년 3월에 진행된 3차전에서 펠레는 무득점을 기록했으며, 1-3으로 패하며 전국 리그 우승을 내주었다. 최종 성적 4경기 2골.
주립 리그와 전국 대회에서 모두 콩을 기록하며 트로피를 놓쳤지만, 히우-상파울루 컵에서는 우승을 차지했다. 펠레는 결승전에서 3:0으로 앞서가는 쐐기골을 득점하는 한편 7경기에서 6득점을 기록하며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산투스는 1959년 친선 경기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경기를 펼쳤고, 이 경기에서 당해 발롱도르 수상자이자 세계 최고의 선수였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펠레가 조우하기도 했다. 둘의 나이는 무려 14살 차이난다.
1959시즌: 43경기 53골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2경기 45골 (득점왕)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 7경기 6골
타사 브라지우: 4경기 2골
2.5. 1960[편집]
1960년에도 어김없이 골파티를 벌인 펠레. 30경기에서 33골을 때려넣으며 또다시 주립 리그 최다득점자가 되었다. 산투스는 주립 리그 타이틀을 파우메이라스에게서 탈환하는 데에 성공했고, 1961년 타사 브라지우 참가 자격을 얻어냈다.
히우-상파울루 컵에서는 3경기를 뛰었고 골은 넣지 못했다.
대륙 대회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가 1960년 재개막했지만 산투스가 1959년의 전국대회에서 EC 바히아에 밀려 준우승에 그쳤기 때문에 참가할 수 없었다.
1960시즌: 33경기 33골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0경기 33골 (득점왕)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 3경기 0골
타사 브라지우: 0경기 0골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0경기 0골
인터컨티넨탈컵: 0경기 0골
2.6. 1961[편집]
1958년 월드컵 이후, 레알 마드리드, 유벤투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등 유럽의 강호들이 남미 최고의 스타인 펠레를 영입하겠다고 나섰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브라질 정부는 유럽 빅클럽들이 미리 움직이기 전에 손을 썼다. 1961년[2] , 펠레는 그렇게 브라질의 국보가 되었다.
펠레와 산투스는 상파울루 주립 리그에서 파우메이라스를 제치고 또 우승을 차지했다. 펠레는 주립 리그에서만 26경기 47골을 터뜨리며 압도적인 차이로 득점왕에 올랐다. 경기당 득점 비율로 따지면 1961년이 펠레 커리어 최고의 해였다.
히우-상파울루 컵에서도 만점 활약을 펼쳤다. 특히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열린 플루미넨시와의 경기에서 100m가 넘는 거리를 홀로 드리블해 상대 선수를 전부 제치고 골을 만들어냈다. 이 골은 정말 역사에 남을 골장면이었지만 당시 경기장 내에서 영상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상으로 남지 못했다. 그러나 이 장면이 워낙 인상적이었던지라 사람들의 뇌리에 깊게 박혔고, 마라카낭 구장 앞에 청동패를 만들어 이 골을 기념했다.
![파일:GOL-DE-PLACA_ARQUIVO.jpg](http://obj-kr.the1.wiki/d/5b/78/3505ca2fbc35f87530e323434f0744f9ae9912017124e441a53e96d6362b1e08.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