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난도 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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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과이 제56대 대통령
페르난도 아르미도 루고 멘데스
Fernando Armindo Lugo Méndez
파일:Fernando_Lugo_Mendez.jpg
출생1951년 5월 30일 (73세)
파라과이 이타푸아 주 산솔라노
국적파일:파라과이 국기.svg 파라과이
정당파일:파라과이 기독교민주당.png 파라과이 기독교민주당
임기제56대 대통령
2008년 8월 15일 ~ 2012년 6월 22일
종교가톨릭
배우자없음[1]
경력파라과이 제56대 대통령 ,(2008~2012),
남미국가연합 의장 ,(2011~2012),[2]
파라과이 상원의원,(2013-현직),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가톨릭 주교 출신의 파라과이 전 대통령이다.


2. 생애[편집]


아순시온 남쪽 400km 떨어진 산솔라노에서 태어났다. 1970년 3월 1일, 말씀의 선교 수도회에 입적하며 성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아순시온 성모 마리아 가톨릭 대학교에 입학하여 종교학을 전공했다.

1977년 8월 15일,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에콰도르로 건너가 볼리바르 교구의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1994년 3월 5일, 파라과이 산페드로 교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주교로 재직하면서 빈민과 원주민의 권리를 옹호하고 토지 개혁을 주창하며 빈민가 구호 활동을 별여 '빈민의 아버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2006년 수도 아순시온의 대규모 반정부 집회를 주도하면서 정치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으며, 빈민층의 인기를 받게 되면서 2008년 대통령 선거의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좌파계열 8개 정당과 여러 사회단체의 연합체인 '변화를 위한 애국동맹'(Alianza Patriótica por el Cambio, APC)의 대선 후보로 추대되어, 2008년 4월 대선에 출마하여 41%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3]

한편 그는 정치활동에 전념하기 위하여, 2005년 주교직을 사임하기로 하였고, 2006년 정식으로 교황청에 주교 사임을 요청하였으나, 교황청에서는 이를 승인하지는 않았고, 일단 사목활동을 할 수 있는 자격만 일시적으로 정지시켜 놓았다. 그러나 2008년 4월 대통령에 당선되자 결국 2008년 7월 교황청은 루고의 사제직 사임을 수용하였다

그의 당선으로 파라과이를 61년간이나 통치하던 우파 성향의 콜로라도당 정권은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파라과이에도 좌파 성향의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급진적인 좌파 정책을 추진하지는 않겠다는 뜻을 내비치며 불안감을 잠재우려 했고, 당선자 신분으로 대한민국을 방문한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인 것으로 분석되었다. 2008년 6월 1일부터 6월 5일 사이에 방한하여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고 여러 산업시설을 둘러보았다. 한편, 2012년 5월 여수 엑스포에 참석하기 위해 대한민국을 다시 방문하기도 했다.

취임에 앞서 실시된 여론 조사에서 90% 이상의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여 국민들의 그에 대한 기대는 매우 컸고, 2008년 8월 15일 정식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취임 후 정파 대립과 경제난을 해결하지 못하여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가톨릭 성직자로 있으면서 여성 신도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자녀까지 낳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도덕적으로도 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2012년 6월 15일, 쿠루과티 지역에서 경찰이 빈농민에게 총을 발포해 농민 10명, 경찰 7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에 대해 콜로라도 당이 국정운영 능력을 문제삼아 하야를 요구했다. 콜로라도 당이 다수를 점한 의회에서는 그에 대한 탄핵을 추진했다. 2012년 6월 21일, 루고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하원을 통과한 데 이어 6월 22일, 상원에서도 통과되자 그는 이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면서도 사임을 발표하였다. 대통령직은 정통급진자유당 소속인 페데리코 프랑코 부통령이 승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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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톨릭 사제이기 때문이다. 퍼스트레이디는 여동생인 메르세데스 루고 데마이다나가 수행했다.[2] 회원국의 대통령이 돌아가면서 의장직을 겸임한다.[3] 과반 득표를 받진 못했지만 여당인 콜로라도당에서 후보가 2명이 나와 표가 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