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축구 국가대표팀/FIFA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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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월드컵 전적 순위: 40위
③
자세한 내용은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조별리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뒤늦게 간신히 스위스에 도착한 2진 선수들을 주축으로 터키와의 2차전을 치른 대한민국은 무기력한 경기 끝에 부르한에게 해트트릭을 허용하며 7:0 참패를 기록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의 첫 월드컵 무대는 마무리되었고, 터키는 역사상 첫 월드컵 본선 승리를 기록했다.
이후 대한민국은 다시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기까지 무려 3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이 두 팀은 48년 후 월드컵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튀르키예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성산동에 위치한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렸다. 상대는 이번에 처음 올라온 중국이었다. 중국은 이미 2패로 탈락이 확정되었고, 2차전까지 1무 1패를 기록한 튀르키예는 3차전에서 반드시 중국을 3골 차 이상으로 이기고 브라질 vs 코스타리카의 경기를 지켜봐야 한다. 만에 하나 브라질과 코스타리카가 서로 비겼을 경우에는 튀르키예가 중국을 아무리 큰 점수 차[5] 로 꺾어도 코스타리카에 승점 1점이 뒤져서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게 된다. 마침 이 날 홈 관중인 한국 축구팬들은 모두 이웃나라인 중국이 아니라 형제의 나라 튀르키예를 열렬히 응원했다.
멀리서 원정 응원을 온 자국 축구팬들과 아울러 형제의 나라 한국 축구팬들의 응원을 등에 업은 튀르키예는 초반부터 중국을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마침내 전반 6분, 공격형 미드필더 하산 사슈가 중국 수비수들의 마크를 따돌리고 자신의 개인기로 페널티 박스로 진입해 오른발 강슛을 날려 선제골을 뽑아냈다. 그렇게 1 : 0으로 앞서갔다. 아직 튀르키예엔 2골이 더 필요했기에 하산 사슈는 골 셀레브레이션도 마다하고 볼을 집어 센터 서클로 운반해 조금이라도 빨리 경기를 속개하려고 했다. 그리고 불과 3분 후, 전반 9분에 튀르키예의 프리킥 찬스에서 공격에 가담한 센터백 뷜렌트 코르크마즈가 헤더 골을 터뜨리며 순식간에 스코어는 2 : 0으로 벌어졌다.
같은 시각에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브라질과 코스타리카의 경기에선 전반 10분과 13분에 스트라이커 호나우두가 연속으로 골을 터뜨려 2 : 0으로 앞서갔다. 이제 실시간 순위에서 브라질이 3전 전승(승점 9점)으로 1위를 굳혔고 튀르키예와 코스타리카는 1승 1무 1패(승점 4점)로 동률을 이루었으나 골 득실에서 튀르키예가 +1, 코스타리카가 0이 되어 드디어 순위 역전에 성공했다. 하지만 전반 35분에 수문장 뤼쉬튀 레츠베르 골키퍼가 공중볼 선방 도중 착지 미스로 햄스트링 부상을 당해 후보 골키퍼 외메르 차트크츠로 교체하는 불운을 겪었다. 결국 전반전은 튀르키예가 2 : 0으로 앞선 채 끝이 났다. 같은 시각 수원에서는 전반 38분에 브라질의 에드미우손이 1골을 더 넣었으나 불과 1분 후에 코스타리카의 공격수 파울로 완초페가 만회골을 터뜨려 브라질이 3 : 1로 앞선 채로 끝이 났다.
후반전이 되자 튀르키예는 서서히 페이스를 조절하며 토너먼트를 위한 체력 안배를 하며 여유를 부렸다. 한편, 중국은 어떻게든 1골이라도 넣어서 체면이라도 살리겠다고 발악을 했다. 그러나 중국의 축구 실력이 워낙 형편없었기에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못했다. 오히려 후반 13분, 하프 타임 때 교체 투입된 중국 미드필더 사오자이가 엠레 벨뢰졸루에게 백태클을 하다가 주심에게 적발되어 곧바로 퇴장당하며 수적 열세에 빠뜨리며 스스로 팀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당시 대회를 앞두고 FIFA에서 백태클을 강력하게 제재하라는 지침을 내렸기에 사오자이는 그렇게 다이렉트 퇴장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같은 시각에 수원에서 코스타리카의 공격수 로날드 고메스가 또 만회골을 터뜨려 스코어를 3 : 2로 좁혔다는 비보가 접해졌다. 이제 튀르키예와 코스타리카는 승점과 득실 차까지 동률이 되었는데 다득점에서 코스타리카가 5득점 4실점, 튀르키예가 4득점 3실점이 되어 다시 코스타리카가 조 2위로 올라가게 되었고 튀르키예는 3위로 떨어졌다. 이제 튀르키예는 1골이 더 필요해졌다. 만약 코스타리카가 동점골을 넣어버리면 아무리 중국을 큰 점수 차로 털어버려도 튀르키예는 16강 진출이 좌절되고 만다. 다시 발등에 불이 떨어진 튀르키예는 중국을 향해 맹렬하게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코스타리카가 스코어를 3 : 2로 좁히고 불과 6분 만에 히바우두가 다시 추가골을 넣었고 또 2분 후에 호나우두가 굿바이 골을 박아넣으며 스코어를 5 : 2로 벌렸다. 이로서 코스타리카의 골 득실은 -1로 떨어졌고 튀르키예는 다시 심적 여유를 찾게 되었다. 그리고 후반 40분에 선제골의 주인공 하산 사슈가 중국 진영 좌측을 쇄도하다가 우측의 위미트 다발라가 노마크 상태인 걸 확인하고 반대편으로 길게 크로스를 올렸고, 다발라는 노마크 상태에서 마치 슈팅 연습하듯 편안하게 오른발 땅볼 강슛을 날려 승부의 쐐기를 박았다. 그리하여 스코어는 3 : 0으로 벌어졌다. 3골 차로 벌어지자 중국 선수들은 전의를 상실한 듯 거의 경기를 포기하다시피 하며 제발 한 골만이라도 넣어 달라는 치우미들의 마지막 소망마저 외면하였고, 그렇게 경기는 튀르키예의 3 : 0 승리로 끝났다. 같은 시각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브라질이 코스타리카를 5 : 2로 대파하면서 브라질이 3전 전승(승점 9점)으로 조 1위를 굳혔고, 튀르키예와 코스타리카는 1승 1무 1패(승점 4점)로 동률을 이루었으나 골 득실에서 튀르키예가 +2, 코스타리카가 -1이어서 튀르키예가 조 2위로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반면, 중국은 3전 전패(승점 0점), 무득점 9실점이란 참담한 기록만 남기고 첫 월드컵을 이렇게 망쳤다.
이 경기를 앞두고 튀르키예는 1차전에서 믿었던 한국인 주심 김영주가 치명적인 오심으로 미드필더 하칸 운살을 퇴장시킨 것 때문에 일시적으로 반한 감정을 품었지만, 이 경기에서 한국인들이 대형 튀르키예 국기까지 흔들어가며 열렬하게 자국을 응원하자 잠시 쌓였던 응어리를 풀고 다시 형제의 나라로서의 우정을 과시하며 "함께 결승전에서 만나자."는 덕담까지 주고 받았다. 반면 중국은 한국인들이 '이웃나라이자 형제의 나라(?)'인 자신들을 응원해주지 않고 멀리 떨어진 튀르키예를 응원한 것에 크게 분노했다.고구려가 돌궐 응원하지 당나라 응원하냐? 이후 자신들과 동급(?)이라고 여겼던 대한민국이 다음날 포르투갈을 1 : 0으로 꺾고 2승 1무의 성적으로 조 1위를 차지해 16강에 오른데다 16강에서 자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표팀 중 하나인 이탈리아를 2 : 1로 꺾고 8강에 올랐으며 또 8강에서 스페인을 승부차기 끝에 꺾고 4강까지 오르자 샘이 날대로 샘이 났다. 그 질투심과 열폭을 이기지 못한 중국인들은 '한국의 심판 매수설' 같은 시덥잖은 루머나 퍼뜨렸다.
자세한 내용은 히딩크호/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터키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강전에서 브라질에 석패한 튀르키예는 결국 결승전 진출에 실패하고 3위·4위전을 치르러 다시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3위·4위전 상대는 역시 4강전에서 독일에 0 : 1로 석패한 형제의 나라 대한민국이었다. 두 팀이 월드컵에서 재회한 것은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이후 무려 48년 만의 일이다. 월드컵 당시에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튀르키예인 참전용사 할아버지들이 월드컵을 보러 한국에 왔는데 모두 "형제의 나라인 한국과 튀르키예가 결승전에서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비록 결승전은 아니지만 3위·4위전에서라도 만나면서 결국 형제국 간 대결이 성사되었다. 1954년 당시 튀르키예는 대한민국을 상대로 7 : 0으로 대승을 거두었는데 당시 대한민국은 출전국 중 최약체였을 뿐 아니라 경제 사정이 어려워 스위스까지 오는 데만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해 제 실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 당시 대한민국과 지금의 대한민국을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다. 어쨌든 이렇게 대한민국과 튀르키예 두 팀의 이번 월드컵 마지막 경기가 대구광역시 수성구 대흥동에 위치한 대구스타디움에서 열렸다.
한편, 대한민국은 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독일 등 막강한 상대들과 맞붙으며 이미 체력과 정신력이 소모될대로 소모되어 있었다. 경기가 시작되자 이 소모된 체력과 정신력을 온전히 다 극복하지 못했는지 우왕좌왕 하는 모습을 보였다.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고 한국의 선축으로 킥오프를 할 때 유상철이 홍명보에게 백 패스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홍명보가 볼을 끌며 우물쭈물했다. 그 모습을 공격수 하칸 쉬퀴르가 재빨리 볼을 가로채 선제골을 터뜨렸다. 골이 터진 시간은 경기 시작 후 불과 11초였다. 종전까지는 1962 FIFA 월드컵 칠레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바츨라프 마세크가 멕시코를 상대로 15초 만에 득점한 것이 최단시간 득점 기록이었는데 하칸 쉬퀴르가 40년 만에 그 기록을 갱신한 것이다. 이런 어이없는 초반 실점에 한국 축구팬들은 매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어이없는 실점이 이어진 후 다시 한국의 반격이 들어왔다. 그리고 전반 9분에 튀르키예 진영 페널티 에어리어 우측 외곽 지역에서 프리킥 찬스를 얻었다. 킥커로 한국의 미드필더 이을용이 나섰다. 휘슬이 울리자 이을용은 멋진 왼발 감아차기로 동점골을 성공시켰다. 뤼쉬튀 레츠베르 골키퍼가 방향 예측에 실패했던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6] 다시 스코어가 1 : 1 원점으로 돌아가자 양팀은 다시 한 번 치열하게 맞섰다. 하지만 강팀들과 연달아 대전하며 지칠대로 지친 한국 선수들은 이전과 달리 계속해서 수비에 허점을 노출했고 튀르키예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전반 13분에 미남 스타 일한 만시즈가 다시 앞서가는 골을 넣으며 스코어를 2 : 1로 벌렸다. 그리고 전반 32분에 또 다시 일한 만시즈가 쐐기골을 넣으며 스코어는 3 : 1로 더 벌어졌다. 이렇게 전반전이 마무리 되었다.
후반전이 되자 한국의 거스 히딩크 전 감독은 전반전 선제 실점의 빌미를 제공한 주장 홍명보를 빼버리고 김태영을 교체 투입해 수비의 강도를 높였다. 그리고 동점골의 주인공 이을용도 후반 20분에 빼고 공격수 차두리를 투입해 공격의 강도를 높였고 후반 34분에 설기현을 빼고 최태욱을 투입했다. 이에 세뇰 귀네슈 전 감독은 잠그기로 응수하며 지능적으로 시간을 질질 끌었다. 그렇게 어느 새 90분이 모두 지나고 추가시간 4분이 적용되었다. 후반 추가시간 3분에 튀르키예 진영으로 쇄도해 들어가던 한국의 라이트백 송종국이 강력한 중거리슛을 날렸다. 이 때 뤼쉬튀 레츠베르 골키퍼는 볼의 궤적이 왼쪽으로 오는 걸 보고 그 쪽으로 자세를 잡았다. 그런데 볼이 오던 중에 갑자기 한국 공격수 차두리의 엉덩이에 맞고 굴절되면서 반대쪽으로 방향이 바뀌는 게 아닌가? 볼의 방향이 오른쪽으로 바뀌자 그대로 속절없이 실점하고 말았다. 그렇게 스코어는 3 : 2로 좁혀졌다. 하지만 시간은 거의 다 지났고 튀르키예는 남은 시간 동안 수비적으로 스코어를 지켜냈다. 그렇게 경기는 튀르키예의 3 : 2 승리로 끝이 나며 튀르키예는 대회 3위가 확정되었다.
경기가 끝나자 튀르키예 선수들은 패배로 망연자실해 있던 한국 선수들에게 다가가 하나하나 일으켜 세우며 어깨동무를 하며 나란히 관중석으로 다가가 관중들에게 인사했다. 경기 시작 전 한국 관중들도 튀르키예 국가가 연주될 때 튀르키예에도 없는 초대형 튀르키예 국기를 꺼내며 함께 응원해주는 훈훈한 모습을 보였다. 수비수 투가이 케리몰루는 경기를 관전하러 온 자신의 아들을 그라운드로 데려와 감동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었고 레츠베르 골키퍼와 알파이 외잘란은 나란히 태극기와 튀르키예 국기를 들고 그라운드를 돌며 관중들에게 화답했다. 이렇게 경기 후에 서로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나란히 관중들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은 FIFA에도 역시 인상적으로 보였는지 이 경기를 가장 페어플레이하고 모범적인 경기로 선정해 월드컵 때마다 이 경기처럼 하라고 교과서처럼 반복해서 영상을 틀어주고 있다.
그리고 21년 후, FIFA U-20 월드컵에서 이스라엘이 2002년 튀르키예의 전철을 거의 완벽하게 밟았다.
한일 월드컵 이후로는 유럽예선에서 번번히 물만 먹고 있는 중이다. 특히 월드컵 본선과 가장 근접했던 카타르 월드컵은 또다시 32강 본선 문턱에서 좌절하고 말았다.
48강 본선으로 확대되는 월드컵이며, 만약 이때 48강 본선 진출에 성공하면 '튀르키예'라는 국명으로서 정식으로 진출하게 된다(1954년과 2002년 진출 당시 국명은 '터키'였다).
1. 역대 기록
1. 역대 기록[편집]
역대 월드컵 전적 순위: 40위
③
2. 1954 스위스 월드컵[편집]
2.1. 16강 조별리그 서독전 - 1 : 4 패[편집]
2.2. 16강 조별리그 대한민국전 - 7 : 0 승[편집]
자세한 내용은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조별리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뒤늦게 간신히 스위스에 도착한 2진 선수들을 주축으로 터키와의 2차전을 치른 대한민국은 무기력한 경기 끝에 부르한에게 해트트릭을 허용하며 7:0 참패를 기록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의 첫 월드컵 무대는 마무리되었고, 터키는 역사상 첫 월드컵 본선 승리를 기록했다.
이후 대한민국은 다시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기까지 무려 3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이 두 팀은 48년 후 월드컵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2.3. 16강 조별리그 재경기 서독전 - 2 : 7 패[편집]
3. 1958 스웨덴 월드컵 ~ 1998 프랑스 월드컵[편집]
4.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편집]
4.1. 32강 조별리그 브라질전 - 1 : 2 패[편집]
4.2. 32강 조별리그 코스타리카전 - 1 : 1 무[편집]
4.3. 32강 조별리그 중국전 - 3 : 0 승[편집]
튀르키예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성산동에 위치한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렸다. 상대는 이번에 처음 올라온 중국이었다. 중국은 이미 2패로 탈락이 확정되었고, 2차전까지 1무 1패를 기록한 튀르키예는 3차전에서 반드시 중국을 3골 차 이상으로 이기고 브라질 vs 코스타리카의 경기를 지켜봐야 한다. 만에 하나 브라질과 코스타리카가 서로 비겼을 경우에는 튀르키예가 중국을 아무리 큰 점수 차[5] 로 꺾어도 코스타리카에 승점 1점이 뒤져서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게 된다. 마침 이 날 홈 관중인 한국 축구팬들은 모두 이웃나라인 중국이 아니라 형제의 나라 튀르키예를 열렬히 응원했다.
멀리서 원정 응원을 온 자국 축구팬들과 아울러 형제의 나라 한국 축구팬들의 응원을 등에 업은 튀르키예는 초반부터 중국을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마침내 전반 6분, 공격형 미드필더 하산 사슈가 중국 수비수들의 마크를 따돌리고 자신의 개인기로 페널티 박스로 진입해 오른발 강슛을 날려 선제골을 뽑아냈다. 그렇게 1 : 0으로 앞서갔다. 아직 튀르키예엔 2골이 더 필요했기에 하산 사슈는 골 셀레브레이션도 마다하고 볼을 집어 센터 서클로 운반해 조금이라도 빨리 경기를 속개하려고 했다. 그리고 불과 3분 후, 전반 9분에 튀르키예의 프리킥 찬스에서 공격에 가담한 센터백 뷜렌트 코르크마즈가 헤더 골을 터뜨리며 순식간에 스코어는 2 : 0으로 벌어졌다.
같은 시각에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브라질과 코스타리카의 경기에선 전반 10분과 13분에 스트라이커 호나우두가 연속으로 골을 터뜨려 2 : 0으로 앞서갔다. 이제 실시간 순위에서 브라질이 3전 전승(승점 9점)으로 1위를 굳혔고 튀르키예와 코스타리카는 1승 1무 1패(승점 4점)로 동률을 이루었으나 골 득실에서 튀르키예가 +1, 코스타리카가 0이 되어 드디어 순위 역전에 성공했다. 하지만 전반 35분에 수문장 뤼쉬튀 레츠베르 골키퍼가 공중볼 선방 도중 착지 미스로 햄스트링 부상을 당해 후보 골키퍼 외메르 차트크츠로 교체하는 불운을 겪었다. 결국 전반전은 튀르키예가 2 : 0으로 앞선 채 끝이 났다. 같은 시각 수원에서는 전반 38분에 브라질의 에드미우손이 1골을 더 넣었으나 불과 1분 후에 코스타리카의 공격수 파울로 완초페가 만회골을 터뜨려 브라질이 3 : 1로 앞선 채로 끝이 났다.
후반전이 되자 튀르키예는 서서히 페이스를 조절하며 토너먼트를 위한 체력 안배를 하며 여유를 부렸다. 한편, 중국은 어떻게든 1골이라도 넣어서 체면이라도 살리겠다고 발악을 했다. 그러나 중국의 축구 실력이 워낙 형편없었기에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못했다. 오히려 후반 13분, 하프 타임 때 교체 투입된 중국 미드필더 사오자이가 엠레 벨뢰졸루에게 백태클을 하다가 주심에게 적발되어 곧바로 퇴장당하며 수적 열세에 빠뜨리며 스스로 팀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당시 대회를 앞두고 FIFA에서 백태클을 강력하게 제재하라는 지침을 내렸기에 사오자이는 그렇게 다이렉트 퇴장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같은 시각에 수원에서 코스타리카의 공격수 로날드 고메스가 또 만회골을 터뜨려 스코어를 3 : 2로 좁혔다는 비보가 접해졌다. 이제 튀르키예와 코스타리카는 승점과 득실 차까지 동률이 되었는데 다득점에서 코스타리카가 5득점 4실점, 튀르키예가 4득점 3실점이 되어 다시 코스타리카가 조 2위로 올라가게 되었고 튀르키예는 3위로 떨어졌다. 이제 튀르키예는 1골이 더 필요해졌다. 만약 코스타리카가 동점골을 넣어버리면 아무리 중국을 큰 점수 차로 털어버려도 튀르키예는 16강 진출이 좌절되고 만다. 다시 발등에 불이 떨어진 튀르키예는 중국을 향해 맹렬하게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코스타리카가 스코어를 3 : 2로 좁히고 불과 6분 만에 히바우두가 다시 추가골을 넣었고 또 2분 후에 호나우두가 굿바이 골을 박아넣으며 스코어를 5 : 2로 벌렸다. 이로서 코스타리카의 골 득실은 -1로 떨어졌고 튀르키예는 다시 심적 여유를 찾게 되었다. 그리고 후반 40분에 선제골의 주인공 하산 사슈가 중국 진영 좌측을 쇄도하다가 우측의 위미트 다발라가 노마크 상태인 걸 확인하고 반대편으로 길게 크로스를 올렸고, 다발라는 노마크 상태에서 마치 슈팅 연습하듯 편안하게 오른발 땅볼 강슛을 날려 승부의 쐐기를 박았다. 그리하여 스코어는 3 : 0으로 벌어졌다. 3골 차로 벌어지자 중국 선수들은 전의를 상실한 듯 거의 경기를 포기하다시피 하며 제발 한 골만이라도 넣어 달라는 치우미들의 마지막 소망마저 외면하였고, 그렇게 경기는 튀르키예의 3 : 0 승리로 끝났다. 같은 시각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브라질이 코스타리카를 5 : 2로 대파하면서 브라질이 3전 전승(승점 9점)으로 조 1위를 굳혔고, 튀르키예와 코스타리카는 1승 1무 1패(승점 4점)로 동률을 이루었으나 골 득실에서 튀르키예가 +2, 코스타리카가 -1이어서 튀르키예가 조 2위로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반면, 중국은 3전 전패(승점 0점), 무득점 9실점이란 참담한 기록만 남기고 첫 월드컵을 이렇게 망쳤다.
이 경기를 앞두고 튀르키예는 1차전에서 믿었던 한국인 주심 김영주가 치명적인 오심으로 미드필더 하칸 운살을 퇴장시킨 것 때문에 일시적으로 반한 감정을 품었지만, 이 경기에서 한국인들이 대형 튀르키예 국기까지 흔들어가며 열렬하게 자국을 응원하자 잠시 쌓였던 응어리를 풀고 다시 형제의 나라로서의 우정을 과시하며 "함께 결승전에서 만나자."는 덕담까지 주고 받았다. 반면 중국은 한국인들이 '이웃나라이자 형제의 나라(?)'인 자신들을 응원해주지 않고 멀리 떨어진 튀르키예를 응원한 것에 크게 분노했다.
4.4. 16강전 일본전 - 1 : 0 승[편집]
4.5. 8강전 세네갈전 - 1 : 0 승[편집]
4.6. 4강전 브라질전 - 0 : 1 패[편집]
4.7. 3위 결정전 대한민국전 - 3 : 2 승[편집]
자세한 내용은 히딩크호/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터키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강전에서 브라질에 석패한 튀르키예는 결국 결승전 진출에 실패하고 3위·4위전을 치르러 다시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3위·4위전 상대는 역시 4강전에서 독일에 0 : 1로 석패한 형제의 나라 대한민국이었다. 두 팀이 월드컵에서 재회한 것은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이후 무려 48년 만의 일이다. 월드컵 당시에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튀르키예인 참전용사 할아버지들이 월드컵을 보러 한국에 왔는데 모두 "형제의 나라인 한국과 튀르키예가 결승전에서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비록 결승전은 아니지만 3위·4위전에서라도 만나면서 결국 형제국 간 대결이 성사되었다. 1954년 당시 튀르키예는 대한민국을 상대로 7 : 0으로 대승을 거두었는데 당시 대한민국은 출전국 중 최약체였을 뿐 아니라 경제 사정이 어려워 스위스까지 오는 데만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해 제 실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 당시 대한민국과 지금의 대한민국을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다. 어쨌든 이렇게 대한민국과 튀르키예 두 팀의 이번 월드컵 마지막 경기가 대구광역시 수성구 대흥동에 위치한 대구스타디움에서 열렸다.
한편, 대한민국은 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독일 등 막강한 상대들과 맞붙으며 이미 체력과 정신력이 소모될대로 소모되어 있었다. 경기가 시작되자 이 소모된 체력과 정신력을 온전히 다 극복하지 못했는지 우왕좌왕 하는 모습을 보였다.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고 한국의 선축으로 킥오프를 할 때 유상철이 홍명보에게 백 패스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홍명보가 볼을 끌며 우물쭈물했다. 그 모습을 공격수 하칸 쉬퀴르가 재빨리 볼을 가로채 선제골을 터뜨렸다. 골이 터진 시간은 경기 시작 후 불과 11초였다. 종전까지는 1962 FIFA 월드컵 칠레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바츨라프 마세크가 멕시코를 상대로 15초 만에 득점한 것이 최단시간 득점 기록이었는데 하칸 쉬퀴르가 40년 만에 그 기록을 갱신한 것이다. 이런 어이없는 초반 실점에 한국 축구팬들은 매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어이없는 실점이 이어진 후 다시 한국의 반격이 들어왔다. 그리고 전반 9분에 튀르키예 진영 페널티 에어리어 우측 외곽 지역에서 프리킥 찬스를 얻었다. 킥커로 한국의 미드필더 이을용이 나섰다. 휘슬이 울리자 이을용은 멋진 왼발 감아차기로 동점골을 성공시켰다. 뤼쉬튀 레츠베르 골키퍼가 방향 예측에 실패했던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6] 다시 스코어가 1 : 1 원점으로 돌아가자 양팀은 다시 한 번 치열하게 맞섰다. 하지만 강팀들과 연달아 대전하며 지칠대로 지친 한국 선수들은 이전과 달리 계속해서 수비에 허점을 노출했고 튀르키예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전반 13분에 미남 스타 일한 만시즈가 다시 앞서가는 골을 넣으며 스코어를 2 : 1로 벌렸다. 그리고 전반 32분에 또 다시 일한 만시즈가 쐐기골을 넣으며 스코어는 3 : 1로 더 벌어졌다. 이렇게 전반전이 마무리 되었다.
후반전이 되자 한국의 거스 히딩크 전 감독은 전반전 선제 실점의 빌미를 제공한 주장 홍명보를 빼버리고 김태영을 교체 투입해 수비의 강도를 높였다. 그리고 동점골의 주인공 이을용도 후반 20분에 빼고 공격수 차두리를 투입해 공격의 강도를 높였고 후반 34분에 설기현을 빼고 최태욱을 투입했다. 이에 세뇰 귀네슈 전 감독은 잠그기로 응수하며 지능적으로 시간을 질질 끌었다. 그렇게 어느 새 90분이 모두 지나고 추가시간 4분이 적용되었다. 후반 추가시간 3분에 튀르키예 진영으로 쇄도해 들어가던 한국의 라이트백 송종국이 강력한 중거리슛을 날렸다. 이 때 뤼쉬튀 레츠베르 골키퍼는 볼의 궤적이 왼쪽으로 오는 걸 보고 그 쪽으로 자세를 잡았다. 그런데 볼이 오던 중에 갑자기 한국 공격수 차두리의 엉덩이에 맞고 굴절되면서 반대쪽으로 방향이 바뀌는 게 아닌가? 볼의 방향이 오른쪽으로 바뀌자 그대로 속절없이 실점하고 말았다. 그렇게 스코어는 3 : 2로 좁혀졌다. 하지만 시간은 거의 다 지났고 튀르키예는 남은 시간 동안 수비적으로 스코어를 지켜냈다. 그렇게 경기는 튀르키예의 3 : 2 승리로 끝이 나며 튀르키예는 대회 3위가 확정되었다.
경기가 끝나자 튀르키예 선수들은 패배로 망연자실해 있던 한국 선수들에게 다가가 하나하나 일으켜 세우며 어깨동무를 하며 나란히 관중석으로 다가가 관중들에게 인사했다. 경기 시작 전 한국 관중들도 튀르키예 국가가 연주될 때 튀르키예에도 없는 초대형 튀르키예 국기를 꺼내며 함께 응원해주는 훈훈한 모습을 보였다. 수비수 투가이 케리몰루는 경기를 관전하러 온 자신의 아들을 그라운드로 데려와 감동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었고 레츠베르 골키퍼와 알파이 외잘란은 나란히 태극기와 튀르키예 국기를 들고 그라운드를 돌며 관중들에게 화답했다. 이렇게 경기 후에 서로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나란히 관중들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은 FIFA에도 역시 인상적으로 보였는지 이 경기를 가장 페어플레이하고 모범적인 경기로 선정해 월드컵 때마다 이 경기처럼 하라고 교과서처럼 반복해서 영상을 틀어주고 있다.
그리고 21년 후, FIFA U-20 월드컵에서 이스라엘이 2002년 튀르키예의 전철을 거의 완벽하게 밟았다.
5. 2006 독일 월드컵 ~ 2022 카타르 월드컵[편집]
한일 월드컵 이후로는 유럽예선에서 번번히 물만 먹고 있는 중이다. 특히 월드컵 본선과 가장 근접했던 카타르 월드컵은 또다시 32강 본선 문턱에서 좌절하고 말았다.
6. 2026 북중미 월드컵[편집]
48강 본선으로 확대되는 월드컵이며, 만약 이때 48강 본선 진출에 성공하면 '튀르키예'라는 국명으로서 정식으로 진출하게 된다(1954년과 2002년 진출 당시 국명은 '터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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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에는 전세계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과 동시에 한국전쟁까지 일어나서 튀르키예는 16개국 본선 1950월드컵에 진출을 확정지었으나, 결국 기권하였고, 튀르키예를 비롯하여 직전에 기권하는 팀들도 많아서 13개국이 본선에 진출하여 13강 조별리그와 조 1위 4강 리그(조별리그 방식) 진출 제도로 진행되었다.[2] 당시 유럽예선에서 스페인을 탈락시키고 1954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했으며, 16강 조별리그에서 한국과 같은 조에서 만나 7:0으로 이겼다. 서독과 1승 1패로 승점이 같아 재경기 끝에 대회 9위로 8강 실패했다. 재경기도 FIFA 공식기록에 포함.[16개국] 본선 월드컵에 진출 실패했다.[24개국] 본선 월드컵에 진출 실패했다.[32개국] A B 본선 월드컵에 진출 실패했다.[3] 48년만의 월드컵에서 4강 진출하였고 4강전 브라질에게 탈락하여 3, 4위전에서 48년만에 대한민국을 만나서 승리하여 3위를 달성[4] 월드컵 본선 진출 비율[5] 예-튀르키예가 중국에 10:0으로 승리[6] 아이러니하게도 이 골은 한국의 월드컵 최단시간 득점 기록이기도 했다. 즉, 한 경기에 최단시간 실점과 최단시간 득점을 모두 기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