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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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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미국의 교육자, 법률학자, 상원 의원. 남북전쟁과 재건 시대 사이에서 공화당 급진파의 지도자 중 한명이었으며, 남북전쟁의 원인으로 여겨지는 사건 중 하나인 찰스 섬너 상원의원 구타 사건에서 연설 도중 당시 미국 남부 출신 민주당 하원의원 프레스턴 브룩스에게 구타당한 것으로도 나름 알려진 인물이다.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보스턴에서 하버드 대학 출신 변호사이자 노예해방론자인 찰스 핑크니 섬너와 플리머스 식민지의 지도자 윌리엄 브래드퍼드의 후손이자 부유한 가문 출신 재봉사 릴리프 제이콥의 아들로 태어났다. 찰스는 아버지 핑크니 섬너에게 "해방된 흑인 노예가 미국 사회에서 평등하게 대우받는 것이 옳다"는 말을 자주 들었으며 아버지처럼 노예해방론자로 자랐다.
2.2. 법률학자 시절[편집]
찰스는 보스턴 라틴 스쿨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보내고 1830년 고등학교 졸업후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해서 법을 공부했다. 하버드 법학전문대학원에서 법을 공부하면서 법정 기록을 잡지에서 출판했다.
2.3. 교육자 시절[편집]
1836년과 1837년 사이 찰스는 하버드 법학전문대학원에서 교수로서 법 강연을 했다. 1840년대 법 강연을 하면서 유명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와 교류했다.
2.4. 공화당 급진파 지도자 시절[편집]
2.4.1. 남북전쟁 이전[편집]
1840년부터 1848년까지 휘그당 소속 당원으로 일했으며 1848년에서 1851년까지 자유토지당에서 당원으로 일하다가 매사추세츠 소속 상원 의원으로 선출되어서 자유토지당 소속 상원 의원으로서 1854년까지 재임했다.
미국 공화당 창당 이후 공화당 급진파 소속 상원으로서 1854년부터 1870년, 1872년부터 1874년까지 재임했다. 1856년 찰스 섬너 상원의원 구타 사건에서 연설 도중 남부 하원 의원 브룩스에게 구타당하면서 1859년까지 상원에 출석하지 못했지만 계속해서 공화당 소속 상원 의원으로 재임했다.
2.4.2. 남북전쟁 이후[편집]
Andrew Johnson is the impersonation of the tyrannical slave power. In him it lives again. He is the lineal successor of John C. Calhoun and Jefferson Davis; and he gathers about him the same supporters.
앤드루 존슨은 압제적인 노예 권력의 인격화이다. 그 안에서 노예제는 다시 살아났다. 그는 존 C. 칼훈과 제퍼슨 데이비스의 직계 후계자이며, 똑같은 지지자들을 모으고 있다.
남북전쟁 이후 재건 시대 동안 남부연합 출신 주들에게 평등한 권리를 주면서 해방 노예들에게 평등권과 투표권을 주는 것을 지지하는 법안들을 마련했다. 여러 법에서 새디어스 스티븐스 등 공화당 급진파 인물들과 뜻을 같이 했으며 앤드루 존슨 탄핵 재판 과정을 주도했지만 남부연합 지도자들이 사형당하거나 감옥에 가두는 것은 반대했다.
1869년 공화당 급진파 동료였던 율리시스 S. 그랜트 미국 대통령이 도미니카 공화국과 미국을 합병하면 광물 자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자 제국주의자나 할 소리라고 반대하면서 대립하게 되었다. 또 공화당 급진파에서 부패 스캔들이 터지자 쇄신을 주창하며 공화당 온건파 등과 협력하기도 했다.
1874년 워싱턴 D.C.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 여담[편집]
파일:찰스 섬너 1850년대 사진.jpg
위의 1850년대 찍은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젊었을 때는 미남이었다. 에이브러햄 링컨 전기 작가 앨버트 베버리지(Albert Beveridge)는 섬너를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Sumner knew that he was able, knew that he was learned, and he was not unaware that he was handsome...
섬너는 스스로가 유능하다는 것을 알았고, 박식하다는 것도 알았으며, 미남이라는 것 또한 모르지 않았다...
앨버트 베버리지의 말. #
의외로 링컨과 친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1866년 9월 메리 토드 링컨이 링컨의 전기 작가 윌리엄 H. 헌든(William H. Herndon)과 인터뷰를 했는데 메리는 섬너와 링컨이 "서로 알게 된 이후 절친한 친구였다(great chums after they became acquainted)”고 말했으며, “(링컨이) 죽을 무렵에는 남자 아이들처럼 가까이 지냈다(like boys during his last days)”고 말했다. 그리고 남북전쟁이 끝난 후 "전쟁이 끝나서 같이 기뻐했다(were so glad the war was over)"라고 말했다. #
4. 매체에서[편집]
쿠 클럭스 클랜의 탄생을 다룬 흑백영화 국가의 탄생(1915)에서 등장한다. 배우는 샘 드 그레이즈. 하지만 영화가 공화당 급진파를 폄하하고 노예제 남부를 지지하는 내용이라서 재건 시대 남부에서 폭정을 하는 급진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역사 애니메이션 유튜버 OverSimplified가 만든 남북전쟁을 다룬 영상에서 단역으로 등장한다. 찰스 섬너가 브룩스 의원에게 구타당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 묘하게 웃긴건지 밈이 되었다. #
역사 코미디 유튜버 Comedy Central도 찰스 섬너가 브룩스 의원에게 폭행당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