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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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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 육군의 군인.
2. 생애[편집]
일본령 조선 황해도 안악군에서 출생하였다. 이후 북한에서 평양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으로 길을 걸었다. 한국전쟁 때 북한군으로 참전하였고, 당시 신분은 조선인민군 육군 포병대 중좌였다. 그의 인생은 1950년 다부동 전투에서 국군에 투항하면서, 좋은 의미로 뒤바뀌게 되었다.
정봉욱은 다부동 전투 때, 상관의 명령에 따르게 되면 자신의 부대원들이 의미 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을 예상하고 항명하였다. 이때 정봉욱에게 남은 선택은 투항하거나 항명죄로 사형당하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 자신의 보좌관과 둘이서 투항하고 작전 지도를 대한민국 육군에 넘겨주어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투항 후 특별임관을 하여, 대한민국 육군 중령으로 군인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1][2] 인민군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던 정봉욱은 여러가지 전공을 세우며 승승장구하였고,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참여하면서 1965년 대한민국 육군 사단장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제7보병사단, 즉 칠성부대의 18대 사단장(1965.7.24~1967.7.15)으로 복무했으며 7사단장 시절인 1967년 4월 12일 7사단 예하 GP인 205GP가 3개 침투조 60여명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포병을 동원해 북한군을 응징한 바 있다.# 이 사건은 제3보병사단인 백골부대 박정인 장군의 1973년에 있었던 3.7포격사건보다 먼저 일어났던 일이다.[3]
이후 1968년 신설된 육군3사관학교의 초대 교장을 맡았다. 군인으로서 청백리와 같은 매우 청렴한 삶을 살았다고 평가받는다. 1970년 육군훈련소장에 임명되어 시절 부대 내 비리를 척결하고, 훈련 중심의 부대로 변화시켰다는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1973년 소장 예편 후 1978년까지 비상기획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평생을 공산주의에 반대하여 완고한 반공 성향을 드러냈으며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선 가진 자들이 더 베풀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2018년 3월 9일 별세,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장례식 사진
2000년 4월 10일 TV 내무반 신고합니다 육군3사관학교 편에 출연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