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길(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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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다만 우리는 이 조선 나라의 신하이므로, 나의 군부(君父)[4]
는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중국 조정만 위하는 것은 월진(越津)[5] 의 혐의가 없지 아니합니다. 만력 황제가 재조시켜 준 은덕은 우리나라 군신 가운데 누가 감격하여 추대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우리나라가 생사의 위기에 즈음하여 어찌 옛날에 중흥시켜준 것만 생각하고 스스로 망하는 길로 나가야 합니까? 이야말로 조선을 위하는 신하로서는 반드시 명나라를 위하여 내 나라를 망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의리로서 당당하여 실로 성현의 교훈에도 부합되는 것입니다.
장유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6]
그대 마음 굳은 바위 같아 끝까지 바뀌지 않거니와, 나의 도는 둥근 고리 같아 믿는 바에 따르네.[7]
(君心如石終難轉, 吾道如環信所隨).
이긍익(李肯翊, 1736년 ~ 1806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6, <심양옥에 갇힌 사람들>(瀋獄諸囚)
조선의 문관.
인조반정의 1등 공신 중 한 명이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대변되는 혼란의 시기에 주화파(主和派)[8] 를 대표했던 인물이었다. 호란 전후에도 현실을 직시하고 국가 개혁에 매진했다.
그의 힘으로 조선 왕조는 멸망하지 않고 250년을 더 버텼으며 임금도 신하도 백성도 살아남았지만 주화파의 운명이란게 흔히 그렇듯 훗날 사대부들에겐 남송의 간신 진회에 비유되기도 했다. 다만 후술되어 있듯 비교적 박한 평가를 내린 사관들조차 그럼에도 조선을 구한 명재상이라고 오락가락했던걸 보면 시대의 비운아라고 할 수도 있다. 손자 최석정이 조부인 최명길의 뜻을 이었다.
2. 생애[편집]
2.1. 초년[편집]
최명길은 성종의 5녀인 경순옹주의 5대손[9] 으로, 최기남의 5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인은 장만이었다. 매우 똑똑했으나 몸이 약하고 인물은 볼품이 없었다고 한다. 몸이 허약한 최명길을 장모는 평생 못미더워했다고 한다. 스승인 신흠도 최명길을 사위로 삼고자 생각했으나 몸이 약해 생각을 거두었던 바도 있다.
장유[10] , 조익[11] 과 함께 김장생에게 배운 바 있으며, 이후 이항복, 신흠[12] 아래에서 수학했다. 장유, 이시백, 조익과 평생 지기로 지내며 사우(四友)라고 불릴 만큼 가까이 지냈다.
포저(浦渚) 조공 익(趙公翼), 계곡(谿谷) 장공 유(張公維), 연양(延陽) 이공 시백(李公時白)과 더불어 도의(道義)의 교분을 맺어 절차탁마하였는데, 교의(交義)가 한결같아 늙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으니, 세상 사람들이 사우(四友)라고 일컬었다.
- 이민서, 《서하집》 16권, <영의정 완성부원군 최공 시장>의 일부[13]
1605년(선조 38년) 20세의 나이로 증광시 생원시에 1등 1위로 장원, 같은 해 증광시 진사시에 2등 3위로 입격, 같은 해 증광시 문과에 병과 22위로 급제했다. 조선 시대에서 45명에 불과한 한 해에 생원시, 진사시, 문과에 모두 급제한 사람 중 한 명.[14] [15]
2.2. 광해군 시기(1608~1623)[편집]
1609년(광해군 1년) 한림(翰林)에 천거되었다가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했다. 1610년(광해군 2년)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과 예조좌랑(禮曹佐郞), 1611년(광해군 3년)에 공조좌랑을 거쳐 병조좌랑이 되었다. 1612년에는 병조정랑이 되었다. 1614년 폐모론이 일어날 시기에는 정6품 병조좌랑을 맡고 있었는데 1614년 명나라 차관으로 인한 사건이 발생하여 파직당하고 말았다. 당시 서학 유생이었던 이홍임(李弘任)이라는 사람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중국인이 어디서 왔는가?' 라고 했다. 그러자 포도청 군사들이 이홍임을 체포하여 무고를 해 상을 타고자 했다. 최명길이 이 일을 조사해 이홍임의 죄가 없음을 알고 석방했는데 당시 집권당 대북의 실권자였던 이이첨이 이것을 꼬투리로 삼아 최명길을 잡아오게 했던 것이다. 이후 최명길은 하옥되었다가링크, 문외출송되었다.링크 부친 최기남도 당시 김제남의 옥사에 연루되어 영흥부사에서 삭직되어, 부자가 함께 지금의 북한강가의 가평 대성리로 가서 지냈다. 그곳의 지명이 최명길의 호가 된 지천(遲川, 더디내)이다. 최명길은 그곳에서 10년 가까이 야인으로 지냈는데 이때 《주역》을 수천 번 읽었다고 한다. 1616년 모친이, 1619년에 부친 최기남이 별세했다. 모친 삼년상을 마친 이듬해에 부친이 별세하여 6년간 상복을 입었고 몸이 많이 상했다.
1618년(광해군 10년) 이이첨의 대북이 인목대비의 작호 삭탈 및 서궁 유폐 여론을 일으키며 정청했으나 서인들은 참여하지 않아 대북의 미움을 샀다. 탄압이 더해가던 중 1620년 구굉과 이서가 쿠데타 논의를 첫 번째로 시작했다. 그들은 능양군을 추대하기로 결심하고, 구굉의 외사촌형인 신경진과 조카 구인후를 끌어들였다. 이들은 모두 무인으로 똑똑한 문신이 반정 계획을 빈틈없이 수립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마침 신경진이 체찰사인 장만의 종사관이 되었다가 그의 사위인 최명길을 눈여겨보고 끌어들였다. 그리고 신경진은 절친한 김류를 설득하여 대장으로 추대했고, 최명길은 이시백을 통해 이귀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16] 1622년 이귀는 평산부사가 되었고, 신경진이 중군(中軍)을 자원하여 거사 준비를 꾀했는데, 박승종이 이상하게 여겨 신경진을 효성령(曉星嶺) 별장(別將)에 임명하여 외곽으로 내보냈다. 최명길이 이후 거사 계획을 짜고 날짜를 정했다.[17] 거사 이전 다른 반정 참가자들이 능양군을 미리 뵙자고 했으나 최명길은 개인적인 만남을 갖지 않았다.
제공이 사저(私邸)에서 인조(仁祖)를 뵙고자 하였는데 공만 홀로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사사로이 뵙는 의리는 없다.” 하였다. 한참이 지나도록 논의가 제때에 결행되지 못하니, 공이 “시일을 오래 끌면 대사를 그르치기 십상이다.” 하고는 마침내 스스로 거사할 날짜를 잡고 계책을 정해 계해년(1623, 인조1) 3월 계묘일에 인조를 받들어 대통(大統)을 잇게 하고 대비를 서궁(西宮)에서 맞이하였다.
- 박세당, 최명길의 묘비명 일부-
2.3. 인조반정(1623)[편집]
1623년(광해군 15년) 3월 12일, 반정 당일 광해군은 연회에서 취해 있었다. 이이반이 길에서 친구 이후원을 만나 그에게서 오늘 반정이 있다며 함께 가자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뿌리치고 궐로 가서 고변했다. 그러나 취한 광해군은 무뎌져 있었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류희분과 박승종이 수차례 조사를 청하여 광해군은 당상관들과 포도대장을 부르고 도승지와 병조판서를 입직하게 했다. 또한 도감 대장 이홍립에게 궁성을 호위하라고 했으나 이미 사위 장신[18] 을 통해 반정 세력과 내통중이었던 이홍립은 이상 징후가 없다고 보고했다. 최명길은 반정 날짜를 정할 때 광해군의 폭음을 이용하여 자정을 넘긴 시간의 급습을 목표로 했다. 반정 세력은 홍제원에 초저녁에 집결하기로 했는데 대장인 김류가 나타나지 않아 분위기가 어수선하던 때 이성부(李聖符)가 이귀에게 지체할 수 없다고 했고, 이괄에게 주장을 맡아달라고 하며 본인이 선봉을 맡겠다고 자원했다. 이에 이괄이 주장이 되어 부대 배치까지 마쳤을 때에야 김류가 도착했는데, 이괄이 대장을 양보하려 하지 않자 이성부와 이귀가 달랬다.[19] 반정군이 도성으로 진군하면서도 지휘가 일사분란하지 않고 안정되지 않자 이성부가 다시 호령하며[20] 진정시켰다. 이성부는 최명길이 반정군에 합류시킨 사람으로 군율을 바로 잡도록 부탁도 했던 자이다.[21]
반정은 성공했고 최명길은 이귀, 김류, 김자점과 함께 반정 1등 공신 중 1명으로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지며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이조좌랑부터 시작해[22] 1년 만에 이조참판까지 올라갔으며 반정 공신 중 가장 똑똑하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기에 인조의 치세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대신이 되었다.[23] 당장 인조반정 이후 정사공신의 선정 과정에서 인조와 친견하여 대화하는 사람이 나이와 명망이 있었던 4대장(김류, 이귀, 신경진, 이서) 외에는 최명길 뿐이었다.실록 링크[24]
반정 이후 공신들이 전면에 나서 정치하는 것에 대한 내부 논쟁이 있었다. 김류 측의 명분주의와 이귀 측의 책임론에 기초한 현실주의가 대립했는데 최명길은 먼저 김류의 측에 섰다.[25] 김류 측의 의견이 먼저 받아들여져 이조판서 신흠 등의 용인(用人)으로 국사가 1년간 이루어졌다. 거사 이후 최명길은 이조좌랑에 임명되었으며 신흠의 건의로 조익 및 장유와 함께 명나라와의 외교 문서를 주관하게 되었다. 같은 해 여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겨울에는 1등 공신으로 녹훈되어 가의대부(嘉義大夫)로 품계가 또 오르고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다. 그리고 다시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고 비변사 제조(備邊司提調)를 겸하게 되었다.
당초에는 국사(國事)가 오늘에 이르도록 안정되지 않으리라고 생각도 못했습니다. 신흠이 이조판서가 되자 신이 김류(金瑬)에게 말하기를 ‘이제 사람 쓰는 일은 신흠에게 맡겨야 한다’ 하니 김류도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이귀에게 말하니 이귀가 말하기를, ‘옳지 않다. 일을 시작한 사람이 마땅히 일을 끝내야 한다. 우리들 스스로 맡아서 해야지 어찌 남의 손을 빌리겠는가?’라고 하였지만 신은 그의 말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신흠이 사람을 쓰는 것을 보니 옛날 방식대로만 하여 어려운 시대를 크게 구제할 솜씨가 못 되었습니다. 그 뒤에 당색이 다른 사람들은 합심하려 하지 않고 당색이 같은 사람도 공신 대하기를 사류(士類)와는 달리 보았습니다. 그래서 신이 아무리 힘을 다해 주선해도 모두 기꺼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의 손에만 맡겨두었더라면 사람을 등용할 때 필시 미진한 점이 많았을 것이니,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귀의 말에 소견이 없지 않았습니다.
광해군 시기에 후금과 직접 대적하고 외교를 담당한 평안감사 박엽의 능력을 높이 사, 반정 이후 그를 죽이지 않고 활용하도록 수차례 건의했으나 묵살되었다.[27] 결국 박엽은 학정을 행했다는 명목으로 살해되었다.
2.4. 이괄의 난(1624)과 정묘호란(1627)[편집]
인조반정 후 채 1년이 안 되어 핵심 공신이었던 이괄이 이괄의 난을 일으켰다. 최명길은 이괄이 인조반정의 대의에 공감해 참여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영달을 위해 참여한 것이라고 생각해, 인조가 이괄을 군사적 요충지인 평안도에 보내는 것을 반대했는데 최명길은 이괄을 위험한 인물로 판단하고 있었고 결국 그 예측이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28] 인조와 조정 중신들이 공주로 파천을 떠난 와중에 최명길은 총독부사(摠督副使) 직을 맡아 관군에 합류하여 사기를 고무하고 도원수 장만과 계책을 논의했다.[29] 관군이 안현 전투에서 대승하고 도망쳤던 이괄이 부하들의 손에 의해 목이 잘리면서 이괄의 난은 마무리되었고, 최명길은 한양으로 들어가 유언비어의 확산을 막고 민심 수습에 앞장섰다.
이괄의 난 이후 조정이 안정되자 최명길은 법제, 관제, 전제, 병제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안을 제출했는데, 조선의 각종 병폐들을 상당히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개혁을 촉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국대전》이 만들어진지 오래되어 현실과 맞지 않은 부분이 많고, 법이 수탈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으니 법을 정비해야 한다던지 비변사가 정국의 중심이 되면서 행정의 전문성이 사라지고 책임 소재가 불명확해지니 이를 개선해야 한다든지. 뿐만 아니라 양전 실시, 면세지 철폐[30] , 군적 시스템 재정비 등을 주장했다. 다만 <대동법>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이었고, <호패법>을 주장하여 실시했으나 큰 성과를 보지는 못했다.[31] 수십년 전 시대의 병폐를 진단한 율곡의 경장 노력이 거의 실현되지 못한 것과 비슷하다.[32] [33]
1626년 봄, 인조의 생모였던 인헌왕후(=계운궁)가 사망했다. 인조는 3년상을 치르려 했고, 신하들은 계운궁이 인조의 생모이기는 하나 왕자의 부인이기 때문에 3년상을 반대했다. 당시 부제학이었던 최명길 또한 처음에는 인조에게 반대했으나 생각을 바꾸었고, 대간에서는 공의를 따르지 않아 시비를 야기한다며 탄핵했다. 인조는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최명길은 차자를 올려 본인이 사직을 청했다. 인조는 다시 형조참판을 제수했다.
그리고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했다. 아이신기오로 아민의 후금군이 평양에 도착하여 조정에 글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당시 조정의 중론은 척화였기 때문에 누구도 화친을 선뜻 언급하지 못했다. 그러나 현실주의자였던 최명길은 먼저 화친을 주장했고[34] 이귀가 동의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이 의견이 옳다고는 생각했으나 결정하지는 못하는 상황이었고, 세자를 수행하여 전주에 내려가 있었던 도체찰사 이원익과 좌의정 신흠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들이 최명길의 말이 옳다고 하자 장유가 글을 작성하여 후금군에 보냈다. 당시 인조는 강화도에 가있었는데 후금의 사신 유해(劉海)가 접견을 요청하자, 조정에서는 화친을 청하면서도 진군을 멈추지 않고 경기도까지 도달했다며 이를 믿을 수 없다고 우려하는 견해가 컸다. 이때 다시 최명길이 그래도 만나자고 주장하여 인조가 유해를 만났다. 그리고 화친하는 것으로 결정이 된다. 후금군의 퇴각 이후 대간에서는 화친을 주장했다고 하여 최명길을 귀양보내라고 청했으나 인조는 거부했다.링크 최명길은 본인이 물러났다가 형조, 병조참판에 제수되며 다시 올라왔다. 가도의 명나라 장수인 모문룡의 문제로 조선 백성들의 부세 부담이 크기에 군량을 거두는 양을 줄이자고 건의했다.링크
1628년에도 대간의 배척은 지속되었고, 외직에 나가기를 청하여 경기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629년(인조 7년) 김류가 젊은 신료 몇 명을 붕당으로 거론했고, 이에 인조가 분노하여 박정, 유백증, 나만갑을 귀양보내고, 이들을 실드한 이조판서 장유를 나주목사로 발령했다. 이때 최명길은 차자를 올려 붕당이 아니라며 실상을 알렸다.링크 1630년에 우참찬이 되었다. 당시 가도의 진계성이 유흥치에게 살해당하자 조정에서는 이들의 죄를 묻고자 군사를 일으키려고 했다. 최명길은 지금은 때가 아니라며 반대했고 출병은 취소되었다. 1631년(인조 9월) 아들 최후상이 태어났다. 여름에 인조는 생부인 정원군을 추숭하고자 했고 조정의 의론은 반대였다. 하지만 이귀와 함께 최명길은 인조를 지지했다. 이에 인조는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이며 1632년에 추숭도감을 만들었고 최명길을 예조판서 겸 추숭도감 제조로 삼으며 정헌대부에 임명했다. 그리고 겨울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1633년에는 대제학을 겸임하게 되었고, 이조판서를 역임한 3년 동안 인재를 찾아 적절한 자리에 등용하는데 신중을 기했다.[35] 1633년 1월 후금이 과한 요구를 해오자 국교를 끊어버리자는 논의가 조정에서 발생했고, 결국 인조는 절화교서를 내렸다.링크 이 절화교서는 훗날 청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가 병자호란의 명목으로 언급하게 된다. 최명길은 홀로 이것이 올바른 계책이 아니라고 상소를 올렸으나 인조는 답하지 않았다.링크 2월에는 최명길과 함께 거의 유일하게 일관된 주화론을 주장하며 큰 힘을 보탰던 이귀가 사망했다.
1634년 정원군 추숭 논의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최명길은 다시 개혁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1634년 9월에 화폐 유통에 대한 건의를 시작했다.링크 12월에는 인조를 면대하여 늘어난 도둑과 도적에 대한 대응 방안을 건의했다.링크 삼사에서는 최명길이 혼자 왕을 대면했다고 하여 추고하도록 청했고링크, 최명길은 사직을 요청하여 이조판서에서 물러났다.링크 4개월 후인 1635년 4월 호조판서가 되어 상평청을 혁파하고 호조에서 재정 일원화를 담당하도록 요청하여 승인받았다.링크 7월 화폐의 부분 사용을 건의했고, 9월에 다시 화폐 통용을 건의했으나 수락받지 못했다.링크 1635년 겨울에 인열왕후가 사망했고, 국장도감 제조로 장지를 고르느라 도성 밖에 있다가 몸이 상하여 사직했다.
1636년 2월 청나라의 용골대와 마부대가 인열왕후의 상을 위로하는 명목으로 조선에 왔는데 정묘호란으로 맹약을 맺은 형제의 대등한 관계가 아닌, 조선이 아래라고 여기는 봉서의 내용으로 인해[36] 조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최명길은 인조에게 차자를 올려 아래와 같이 진언했다.
당초 화친을 맺을 적에 저들은 이미 우리를 의리가 아닌 일로 감히 강요하지 못했습니다. 또 저들은 큰 사막을 차지하면서 제재받을 대상이 없어 제멋대로 황제를 칭하였으니, 누가 다시 금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굳이 우리나라를 구실로 삼고자 하니 그 속셈을 혹 알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만약 그저 구두로만 답한다면 일의 자취가 불분명하여 증거가 없게 됩니다. 만일 교만한 오랑캐가 그 말을 뒤집어 천하에 우리를 무함한다면 장차 무엇을 가지고 스스로 해명하겠습니까.
지금 의례적인 답장 외에 따로 편지 한 통을 써서, 위호(僞號)를 참칭해서는 안 되고 신하의 절개를 바꿀 수 없음을 갖춰 진술하여, 대의(大義)를 밝히고 국체(國體)를 보존해야 합니다. 이어 오랑캐의 편지 및 우리나라의 답서를 가지고 도독부(都督府)에 자문을 보내어 황조(皇朝)에 전해 올려야 합니다. 또 팔방(八方)에 하유하고 병마(兵馬)를 훈련시켜 변란에 대비해야 합니다.
또 오랑캐 사신은 춘신사(春信使)와 조제(弔祭)를 명분으로 삼는데다가 한서(汗書; 청나라 황제의 글) 또한 별다른 뜻이 없습니다. 이른바 패서(悖書)라는 것은 바로 팔고산(八高山) 및 몽고 왕자(蒙古王子)의 편지입니다. 그들의 의례적인 편지에는 답하고 패서는 거절해야 군신(君臣)의 의리와 인국(隣國)의 도리가 둘 다 온전해질 것이니, 계책에 마땅할 것입니다. 오늘날 오랑캐의 정세상 시기가 차이가 있을 뿐이지 병화(兵禍)를 입는 것은 같습니다. 다만 불분명하게 처리하여 이용당해서는 안 되고, 지나치게 무시해서 병란을 재촉해서는 안 됩니다.
최명길의 차자를 본 비변사에서 인조에게 따로 답서를 작성하는 것을 요청했으나 인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비변사에서는 청나라 사신 일행을 타이르자고 했고, 승정원에서는 타이를 것 없이 우리가 잘하면 된다고 정신승리했다. 인조는 비변사의 말을 받아들였으나 용골대와 마부대는 화를 내며 그대로 돌아가버렸다. 소식을 접한 최명길은 아픈 몸을 이끌고 인조를 만나
라고 했으나 조정의 뜻은 하나로 모아지지 못했다."오랑캐 사신이 곧장 돌아갔으니 맹약을 저버릴 것이 틀림없습니다. 전쟁의 단서를 확실히 볼 수 있으니, 청컨대 먼저 큰 계책을 정하여 미리 공격과 방어의 계책을 강구하소서."
1636년 5월 병조판서가 되었고 송준길, 송시열 등의 등용을 추천했다.링크, 그리고 다시 몸이 안좋아져 사직했다가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다. 6월에 차자를 올려 강화도로 조정을 옮기자고 청했으나 시행되지 않았다.링크 1636년 9월 다시 차자를 올려 청나라를 경계했으나 인조는 답조차 내리지 않았다.링크 언관들은 최명길이 화친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11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37] 청나라와의 사신 문제, 국방, 흉년에 대한 차자를 올렸다.링크
그리고 다음해 1월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2.5. 병자호란(1636. 12~1637. 1)[편집]
정묘호란 이후 후금이 청나라로 개칭하고, 홍타이지 한이 황제를 칭하면서 조선과의 외교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는데 조선 내부에서도 국왕부터 관료,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오랑캐와 한 번 붙어보자는 척화론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때도 최명길이 유일하게
라고 현실을 직시하는 상소를 올렸다.[38] 이로 인해 윤집, 오달제 등의 척화파 신하들에게 오랑캐와 내통하는 간신이라고 갖은 욕을 먹었으나 그의 말대로 병자년(인조 14년) 겨울 청나라는 12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조선을 침입했다.[39]"압록강이 얼면 큰 화가 닥칠 것이니 신은 매우 통탄스럽습니다"
빠른 기동 작전으로 청나라군이 불광동까지 몰려온 상황에서 최명길은 "자신이 저들의 요구 사항을 물어보겠다"고 사신을 자청해 청나라군을 찾아가 시간을 끌어서 그 덕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몽진할 시간을 벌었다. 그 후 남한산성이 청나라군에 포위된 상태에서 "항복을 하느냐?"와 "계속 전쟁을 하느냐?"를 놓고 김상헌으로 대표되는 척화파 대신들과 극렬하게 대립했다.[40]
그러나 당시 조선이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남한산성에는 전략 물자가 터무니없이 부족했고, 각지에서 올라온 근왕군은 지리멸렬하여 맥없이 무너졌으며 그나마 정예군이었던 북방군은 군 통수권을 쥐고 있었던 도원수 김자점이 눈치만 보고 전혀 움직이지 않아 유명무실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명길은 사대부의 욕을 정말 세차게 얻어먹으면서도 굴욕적인 항복 문서를 직접 작성했고, 죽음을 무릅쓰며 청나라군의 진영에 찾아가 협상을 주도했다. 급한 상황에서 대간들이 "이게 다 최명길 때문이다!"를 외치면서 딴지를 계속 걸자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는지 "잘났으면 니들이 청나라군 물리쳐보든가"라면서 상당히 까칠하게 나오기 시작한다.[41] 관료들이 "항서 내용이 굴욕적이니 지금 보내지 말자" 고 주장하자
라고 일갈(인조 15년 1월 18일 기사)하기도 했다. 척화파들이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인조의 국서에 스스로를 '臣'이라 일컫는 부분 등 항복 형식과 관련되어 열을 내는 사이 최명길은 최악의 상황에서 모든 오명과 비방을 무릅쓰고 청나라와의 협상을 조금이라도 조선에 유리하게 이끌어가기 위해서 오랑캐라 지칭하는 청나라 황제에게 인조가 무릎을 꿇더라도 최대한 비극적인 면모를 보이지 않게 동분서주했다. 최종적으로 인조의 항복이 결정되자 김상헌은 "오랑캐에 항복하는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자살을 시도했는데 최명길은 쌓인게 많았는지 "가족들이 다 보는데서 하면 죽을 수나 있겠느냐''면서 진실성을 크게 의심하기도 했다.[42]"일이 이 지경에 이른 건 그대들이 자그마한 곡절을 두고 이야기했기 때문이고 그대은 신(臣)이라는 글자의 가부만 논하면 되오! 글을 언제 보낼지는 내 책임이지 그대들 알 바가 아니란 말이오, 아시겠소이까?"
최명길의 주화론은 대명의리론을 부정하지 않았다. 호란 이후 명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명의리를 위해 조선을 희생하지도 않았다. 조선의 사직과 백성이 대명의리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현실주의자로 상황에 따라 대응을 달리할 수 있었다. 최명길은 《예기》를 해석한 후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해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하여 사직을 보존하도록 설득하고 위로할 수 있었다.[43][44]
2.6. 병자호란, 그 이후[편집]
병자호란의 치욕적인 패배(삼전도의 굴욕, 즉 정축하성) 이후 최명길은 우의정 및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는데, 이후 국정을 주도하며 전란 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호란 이후 태종 홍타이지가 고관의 자제를 심양에 인질로 보내도록 요구하자 솔선하여 아들 최후량이 심양에 가게 되었다. 다른 고관들의 참여도 독려했으나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45]
대청 외교를 전담하여 사은사로 청나라로 가서 조선인 포로들을 속환해 데려오고, 복잡한 외교적 문제를 처리했으며, 특히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환향녀들에 대해
고 적극적으로 반대했다.[46] 역시나 입만 살아있는 사대부들한테 "자결도 못하고 돌아온 더러워진 환향녀를 옹호한다"고 대차게 까였다.[47] 여기에 대해 《인조실록》의 사관은 "삼한(三韓)을 오랑캐(夷)로 만든 자는 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가 없도다" 라고 극딜했는데, 덕분에 오늘날 이 구절은 사대부들의 전쟁 책임에 대한 무책임과 뻔뻔함, 그 와중에 빛나는 최명길의 실리주의와 인간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가 되어주고 있다."정조(절개)를 잃은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고,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조정의 잘못이므로, 이혼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이 시기의 그는 자신이 친청파가 아니라 진정한 현실주의자임을 보여주었는데, 우선 청나라가 명나라를 치기 위한 병력을 요구하자 최명길은 영의정으로서 극렬히 반대했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버릴 수 없고, 나라가 피폐해졌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중요한 건 이걸 청나라로 찾아가서 숭덕제의 면전에 대고 말했다는 것이다.[48] 홍타이지는 처음에는 진노했으나 "최명길이 의리가 있다"면서 결국 풀어주었다.[49]
최명길은 임경업과 승려 독보(獨步)를 통해 명나라와도 비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한선(명나라 배)과 접촉해 외교 문서를 주고받고, 청나라에 항복한 조선의 상황을 해명했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군신 관계를 맺었지만 아직도 중원에는 명나라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고, 중원의 상황이 어찌될지는 당시만 하더라도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는 것은 의리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위험한 선택이 될 수 있었기에, 비공식적으로나마 외교 관계를 유지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명장 홍승주가 최후의 결전인 송금 대전에서 참패하고, 청나라에 항복하면서 조선과 내통한 것을 실토했고, 이어 명나라 상선과 거래하다가 청나라에 걸린 선천부사 이계가 자기 한 목숨 살기 위해 조선이 명나라와 비밀리에 연락한 것을 용골대에게 고자질해 버렸다. 이계는 "청나라의 신하가 되겠다"고 애걸했으나, 용골대는 그를 국가와 왕을 배반하는 자로 판단하며 "조선에서 알아서 처분하라"며 돌려보내 버렸다. 이계는 국경을 넘자마자 '나라와 정승을 팔아넘긴 놈!'이라며 분노한 백성들에게 두들겨 맞았고[50] 법을 집행하러 간 관료들이 백성들한테 사정하다시피 해서 죽기 직전의 이계를 간신히 인수받아 참수형에 처했는데, 청나라는 여기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51][52] 이것을 이른바 횡의 사건이라고 하는데 이 때문에 최명길은
라고 말하며 심양에 끌려가 고초를 겪게 되었다. 이때 청나라 관리들이 누구 소행이냐고 심문하자"나와 임경업이 벌인 일이다."
근데 우리 임금은 그런 거 싫어해서 내가 혼자 한거고 신하들도 모른다. 임경업도 내 말만 들은거다. 모든 책임은 내게 있으니 벌을 줄거면 내게만 달라."라고 말해서 청나라 사람들도 모두 그 기개에 감탄했다고 한다.[54]
최명길이 심양에 끌려갔을 때, 김상헌은 평안도 의주에 있다가 심양으로 다시 끌려왔다. 최명길이 병자호란 당시 항복 문서를 쓰고 김상헌이 그것을 찢었던 때로부터 6년이 지났을 때였고, 두 사람은 심양 감옥의 옆방에서 조우하게 되었다. 친청파라고 생각했던 최명길이 왜 끌려와있는지 의아해 했을 김상헌은 결국 최명길과 서로의 마음을 알고 화해하게 되었다. 김상헌은 최명길을 '대상공'이라며 우대했고, 최명길을 수발하던 최후량과도 친하게 지내며 많은 칭찬을 했다. 훗날 귀국 이후 헤어질 때도 김상헌은 최후량에게 시를 지어주었다.[55] 이 모습을 본 태종 홍타이지가 "청나라에도 없는 저런 충신이 조선같이 작은 나라에 있다는 것이 부럽다."고 하며 그들을 풀어줬다는 일화는 유명하다.[56] 훗날 김•최 두 가문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기 이전까지 가까운 관계로 지냈으나, 후손인 김창협, 김창흡과 최석정은 결별하게 되었다.
이후 1645년 청나라가 결국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인질들을 풀어주었다. 소현세자도 당시 귀국할 수 있었고 최명길도 돌아왔다. 이후에는 국가의 원로로서 정사에 참여했으나 이 시기는 인조가 급격히 막장화될 때였다. 인조가 맏아들 소현세자의 장례를 약식으로 치르려 하자 반대했으나 왕이 듣지 아니했고 며느리 강빈이 사사될 때도 목숨만은 살려줄 것을 간청했으나 역시 인조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1647년 5월,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61세였다. 당시 인조는 "최상(崔相)은 재주가 많고, 진심으로 국사(國事)를 보필했는데 불행하게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애석하다."고 탄식하며 특히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었다. 사관은 그의 졸기에서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여 미칠 사람이 없었으니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 하겠다"고 적고 있다.[57] 척화파가 칭송받으며 최명길이 비판받는 면이 있지만 그래도 김상헌이 굴복하지 않고 남문으로 나왔는데[58] 그것도 최명길이 열어준 문으로 나온거다는 등 칭찬하는 부분도 많다.
완성 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이 졸(卒)하였다.
명길은 사람됨이 기민(氣敏)하고 권모 술수가 많았는데, 자기의 재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일찍부터 세상일을 담당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광해 때에 배척을 받아 쓰이지 않다가 반정할 때에 대계(大計)를 협찬(協贊)하였는데 명길의 공이 많아 드디어 정사 원훈(靖社元勳)에 녹훈되었고, 몇 년이 안 되어 차서를 뛰어 넘어 경상(卿相)의 지위에 이르렀다. 그러나 추숭(追崇)과 화의론을 힘써 주장함으로써 청의(淸議)에 버림을 받았다. 남한 산성의 변란 때에는 척화(斥和)를 주장한 대신을 협박하여 보냄으로써 사감(私感)을 풀었고 환도한 뒤에는 그른 사람들을 등용하여 사류와 알력이 생겼는데 모두들 소인(小人)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여 미칠 사람이 없었으니,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 하겠다. 졸하자 상(上)이 조회에 나와 탄식하기를 "최 상(崔相)은 재주가 많고 진심으로 국사(國事)를 보필했는데 불행하게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애석하다."고 하였다.
사후에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여, 1651년 (효종 2년) 인조 배향 공신 논의에서도 제외되었으며, 1676년 (숙종 2년)에도 정태화와 함께 추배 대상으로 거론되었으나 남인의 반대로 탈락했다.[59] 시호도 늦게 받았는데 사후 34년이 지난 1681년(숙종 7년)에야 받았다. 대립했던 김상헌이 사후 바로 받은 것과 대비된다. 1691년 최석정의 주도하에 신도비 건립이 추진되었고, 글을 스승인 남구만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최명길의 행동에 대한 평가가 갈렸고, 최석정의 설명에도 수정해주지 않아 남구만의 글은 신도비명으로 사용되지 않았다.[60] 최석정은 박세당에게 부탁하여 1702년 신도비가 완성된다. 박세당은 최석정의
는 의견을 받아들였다. 또한 박세당은 최명길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현혹된 사람들이고, 남의 견해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라 언급하며, 최명길과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신념을 "사소한 의리"(溝瀆之諒)라고 했다. 박세당 또한 명분보다 실리를 중시하는 사람이었기에 이런 언급이 가능했다.박세당이 쓴 묘비명 훗날 최석정이 작성한 가장을 바탕으로 이민서가 최명길의 행장을 작성했다.링크[61]'최명길의 행동이 의리에 근거한 것이었으며 당당하고 떳떳한 충정의 행동이었다'
또한 송시열은 1671년에 지은 《삼학사전》(三學士傳)에서 최명길과 삼학사의 대립을 통해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결을 중점적으로 서술하면서, 최명길을 간교한 성품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공박했다. 그러나 1677년 남구만과 이민서의 사실 관계에 대한 지적을 받아들여[62] 일부 내용을 수정하기도 했으나, 부기를 남기며 기존의 내용도 후대에 전했다.[63]
3. 평가[편집]
최명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양면 화친(명나라와의 사대를 저버리는 일)을 명분 중 하나로 내세운 인조반정의 핵심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 주화파의 선두주자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터지자 의주성과 안주성 등의 핵심 요충지가 맥없이 함락되고, 인조가 강화도로 몽진한 상황에서 후금과의 강화(화친 교섭)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소장파들은 오랑캐와의 협상 자체를 반대하고 중신들은 협상에 나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는데[64] 최명길은 이귀 및 강홍립[65] 과 함께 인조에게 강화가 불가피하다고 역설하여 결국 후금과의 강화를 성사시켰다. 이로 인해 조선은 후금의 동생이 되었지만 그나마 피해를 줄이고 전쟁을 일단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강화를 주도하고 특히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칭신(稱臣)도 가능하다고 한 것 때문에 전후 척화파들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어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최명길은 호란을 어떻게든 수습하고 조선을 끝까지 지탱해낸 사람이었다. 왜란과 호란을 거치며 발생한 국가의 위기에 직면하여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한 정치론을 펴고 실행했으며, 그 바탕에는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학문이 있었다.[66] 현실주의자로서 국가를 보존하지 않으면 백성이 곤경에 처하게 되는 현실을 직시하고, 치자는 스스로의 수양에만 매몰되어 의리와 명분을 내세우는데 있지 않고 국가를 유지 및 보존하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67] 신분제와 지주제의 모순을 타파하고자 했고, 그에 반대하는 삼사의 공론정치[68] 를 비판하며 관제병통론을 주장하여 국왕의 권력을 강화하고 대신 책임정치를 외쳤다. 그러나 최명길의 그러한 사상과 실천은 주류 지배층인 사대부의 입장과는 달랐기에 당시에도 훗날에도 매도당하며 조선 왕조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물론 이시백[69] 과 박세당처럼 그의 공을 알아 본 사람들도 있었다.
청국이 점차 기세를 떨칠 때, 청국과 우리의 강약이 대등하지 않다는 것을 누군들 알지 못했겠는가. -중략- 공은 6척도 채 안 되는 몸으로 몇 안 되는 시종을 거느리고 적군으로 달려가 적의 예봉(銳鋒)을 늦추었다. 그리하여 임금의 수레가 그 틈을 타고 길을 돌려 남한산성으로 갈 수 있었으니, 이는 누구의 힘인가. 적의 노략질이 5도(道)를 휩쓸고 외로운 성의 포위가 풀리지 않았으며, 강도(江都 = 강화도)가 함락되자 중요한 곳이 먼저 무너졌는데, 이때 공은 군중(軍中)에 출입하며 이리저리 애써서 구설(口舌)로 칼날에 맞서고 유순함으로 강포함을 눌렀다. 그리하여 마침내 전복될 뻔한 사직을 온전히 하고 위태로웠던 생민을 안정시킬 수 있었으니, 이는 또 누구의 공인가. -중략- 동토(東土)의 사람들(=조선 사람)이 침석(枕席)을 편안히 하고 자손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공의 은택인데, 도리어 오늘날 말하는 자들이 그에게 힘입었으면서도 그를 헐뜯으니, 너무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박세당, 《지천집》[70]
서문[71]
"완성(完城=완성부원군 최명길)의 사업에서 큰 것이 8가지이다. 반정(反正)에 참여하여 나라를 바로잡아 부흥한 것이 첫째요, 예제(禮制)를 논하여 부자(父子)의 인륜을 밝힌 것이 둘째요, 단기로 적진에 나아가 그 예봉을 무디게 한 것이 셋째요, 비방을 무릅쓰고 화의를 주장하여 종사를 보존한 것이 넷째요, 군사의 징발을 극력 거부하면서 죽음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것이 다섯째요, 천조(天朝)에 글을 보내고 스스로 책임을 감당한 것이 여섯째요, 남의 골육을 잘 대한 것이 일곱째요, 붕당에 물들지 않은 것이 여덟째이다."
이시백의 말, 박세당, <영의정완성부원군최공신도비명>의 일부
며 사관이 논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사관들은 최명길을 깎아내리기도 했는데, 이는 주화파의 간판급 인물인데다가 포로로 잡혀갔던 여인들과 (환향녀라는 이유로) 이혼하는 것을 금하게 해달라고 청하는 등 주류 인물들의 생각과 매우 달라서였다. 그런 사관들도 최명길이 외교로 나라와 종사(宗社)을 구한 일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주화론을 호란 시작부터 끝까지 격렬하게 깎아내린 사관들이, 최명길의 졸기에서는 그의 자질과 행보를 칭찬해주며"문신으로서 외교에 미친 영향력이, 임진왜란 때 전시재상(戰時宰相)으로서 조선을 지탱했던 류성룡에 버금간다"
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니 더이상 설명이 필요가 없다. 최명길의 활약이 없었다면 조선이 진짜로 더욱 불리한 조건을 받아들여서 인조가 더 극악의 방법으로 고생해야 했을지도 모른다."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
"명길은 사람됨이 기민하고 권모술수가 많았는데, 자기의 재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일찍부터 세상 일을 담당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광해군 때에 배척을 받아 쓰이지 않다가 반정할 때에 대계(大計)를 협찬하였는데 명길의 공이 많아 드디어 정사 원훈(靖社元勳)에 녹훈되었고 몇 년이 안 되어 차서를 뛰어 넘어 경상(卿相)의 지위에 이르렀다. 그러나 추숭(追崇)과 화의론을 힘써 주장함으로써 청의(淸議)에 버림을 받았다. 남한산성의 변란 때에는 척화(斥和)를 주장한 대신을 협박하여 보냄으로써 사감(私感)을 풀었고 환도한 뒤에는 그른 사람들을 등용하여 사류와 알력이 생겼는데 모두들 소인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여 미칠 사람이 없었으니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 하겠다. 졸하자 상이 조회에 나와 탄식하기를 "최상(崔相)은 재주가 많고 진심으로 국사를 보필했는데 불행하게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애석하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25년 5월 17일 <완성부원군 최명길 졸기>
가히 고려의 서희, 원종[72] 과 함께 한국사 최고의 외교관 중 한 명이라 불릴 만한 인물이다.[73][74]
대내적으로 반정에서 출발하여 불안하기 짝이 없었던 인조 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아 이후 조선 왕조가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형성하고, 취약한 인조의 왕권을 확립하여 그 후손인 영조에 의해 <삼종혈맥론>이 제출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대외적으로 만주족의 성장으로 급변하는 동북아시아의 정세속에서 이들과의 화해를 통해 국가를 유지 및 보존하여 민을 보호하려고 했다.
참고 - 김용흠,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의 정치 활동과 유자(儒者)의 책임의식>
4. 가족관계[편집]
부친 최기남(崔起南, 1559~1619)은 성혼의 제자였으며 1585년 사마시에 입격하여 태학에 입학했다. 1600년 왕자의 사부로 당시 왕세자였던 광해군을 가르친 바 있었다. 1602년 문과에 급제했으며 성균관 전적, 형조, 예조, 병조 정랑을 거치고 1612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올라 영흥부사가 되었다가 인목대비 폐출 옥사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물러나 가평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사후 아들의 출세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최기남의 외조부는 남상질(南尙質)이었으며 조선의 첫 번째 양명학자라고 할 수 있는 남언경(南彦經)의 집안이었다.
최명길의 첫 번째 부인은 인동 장씨로 장만의 딸이었다. 인동 장씨와의 사이에서 자녀가 없어, 장자 최후량(崔後亮, 1616 ~ 1693)을 입양했다. 장씨 사후 재취하여 양천 허씨를 아내로 맞았다. 그 사이에서 최후상(崔後尙, 1631 ~ 1680)을 얻었다. 그럼에도 최후량을 파양하지 않고 변함없이 장자로 여기며 관계를 유지했고 가산도 상속시켰다.[75] 최후량 또한 부친에게 변치 않고 효도했으며 동생인 최후상과도 우애가 깊었다고 한다.[76]
장자 최후량은 아우 최혜길의 차남이었다. 3세에 친모인 이씨가 사망했고, 9세에 백부인 최명길의 양자로 들어갔다. 최명길, 최혜길에게 배운 것 외에도 장유와 이경석에게도 배웠다. 21세이던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양부인 최명길, 생부인 최혜길의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강화도에 들어갔다. 강화도 함락 이후 가족들과 지인을 보호하고 청나라 군영으로 찾아가 최명길의 아들임을 밝히며[77] 가족의 안위를 지켰다.[78] 청군도 가족들을 안전하게 한양으로 보내주었다. 이런 일이 있어 당시 사람들이 태종 홍타이지와 최명길이 내통한 것 아니냐고 의심한 사실도 있었다. 호란 이후 최후량은 심양에서 볼모 생활을 8년간 하게 되었다. 1642년 양부인 최명길도 심양에 잡혀왔는데 최후량이 이때 청나라의 관리를 세 차례나 찾아가 여진말로 최명길을 적극 변호하여 청나라에서는 최명길에 대한 처우를 경감했다. 또한 당시 몸이 좋지 않은 최명길을 수발하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양부의 정적이었던 김상헌과도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1645년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북경을 점령하자, 소현세자를 포함한 모든 포로들이 석방되어 귀국할 수 있었고 최후량도 최명길과 함께 귀국했다. 1651년 생원시에 합격했고, 공조좌랑 및 배천군수, 영천군수 등을 역임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정사공신인 최명길의 원훈이라 하여 당상관인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하여, 1681년 청풍 부사가 되었다. 1685년 70세에 아들들의 공으로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거쳐 한성부 좌윤이 되었으나 고령으로 사직했다. 문집으로 《정수재집》(靜修齋集)을 남겼다. 호란 당시나 볼모 생활 당시의 일화를 보면 기개가 있고, 최명길도 그의 식견을 높이 사며 정무 상의를 했던 등 빼어난 능력이 있었으나 과거 시기를 놓치며 입신양명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유전자는 어디 안가고 아들인 정승 형제 최석정과 최석항에게 이어졌다. 남구만이 묘갈명을 지었고,링크[79] 박세당이 묘지명을 지었다.링크 최석정의 아들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관료이자 당대의 문장가였던 최창대였다.
최명길의 친자였던 최후상은 1654년 진사시에 합격했고, 1664년 문과에 급제했다. 현종 시기 지평, 정언, 교리, 수찬, 사간원 정언, 홍문관 응교 등 청직을 역임했으나, 최명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이래저래 말이 많아 관운이 좋지 않았다. 실록에서도 허적과 정태화 등이 현종에게 이야기한 바도 있다.링크 훗날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친자가 없어 최후량의 차남인 최석정이 입양되어 뒤를 이었다. 최후상의 묘지(墓誌)가 국립청주박물관에 있다.
큰 형 최래길(崔來吉, 1583~1649),[80] 바로 아래 아우인 최혜길(崔惠吉, 1591~1662)[81] 도 문과 급제자였으며 함께 인조반정에 참여했다. 최래길은 3등 공신이었으며, 최혜길은 한 집안에 공신이 너무 많이 나올 수 없다고 하여 제외되었다. 두 사람 모두 최명길과 함께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했고 이후 최래길은 공조판서까지 올랐으며, 최혜길은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최혜길은 최명길과 최후량 부자가 심양에 인질로 있었을 때 동지사로 심양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최명길의 조카로서 최래길의 아들인 최후윤(崔後胤, 1611 ~ ?)은 1644년 정시 문과에 장원 급제한 후 병조좌랑, 사헌부 지평, 세자시강원 문학을 지냈으며, 최혜길의 장남은 최후정(崔後定)이었고, 차남은 최후량, 3남은 진사 최후원(崔後遠, 1627 ~ ?)이었다.
5. 기타[편집]
- 키가 작고 인물이 볼품없었던 데다가 몸이 약했으나[82][83] 집안 사람들도 그를 무서워해서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으며 영민해서 자기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높았다고 한다. "이귀는 큰 의논 내기를 좋아하지만 작은 일에는 엉성하고, 김류는 신중하지만 큰 식견은 없다. 밖의 사람들의 말로는 ‘성덕(聖德)은 지극한데 신하들이 제대로 받들어 행(行)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대체로 전하께서 보좌할 신하를 얻지 못한 까닭에 치도(治道)가 확립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고 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다.[84]
-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상당히 똑똑한 모습을 보여주고 생원시, 진사시, 문과를 단 1번에 모두 통과한 천재였지만 정작 최명길의 문집인 《지천유사》를 보면 의외로 엉뚱하고 4차원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조카가 당나귀를 타고 온 것을 보고 "네 말의 귀는 왜 그리 기냐?"라고 물었는데 조카가 어이가 없었는지 크게 웃으면서 "이거 말이 아니라 당나귀예요."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고, 호조판서 시절에는 관청에서 기와 500장을 주문했는데 "500장은 너무 많으니까 '한 우리'를 줄 것"이라고 결재를 냈다. 헌데 문제는 여기서 '한 우리'는 '기와 2,000장'을 뜻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최명길은 '한 우리'를 '기와 100장'으로 착각하고 결재를 잘못해서 망신을 당했다.[85]
- 명나라에서 송나라의 성리학을 비판하며 유행했던 왕양명의 양명학[86] 을 공부했던 인물이기도 하다.[87] 시기는 불분명하나 젊은 시절 장유와 함께 주자서 외에도 육왕서를 함께 공부했다.[88][89] 최명길의 연보에도 24세에 ‘아버지의 외가쪽 친척인 동강 남언경(東岡 南彦經)의 아들 남격(南格)에게서 계곡 장유와 함께 양명학을 배웠다.'는 기록도 있다.[90] 아마도 독자적으로 익히고 남격에게도 더 배웠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러나 50세 때인 1635년 장유에게 보낸 편지에서 ‘육왕학이 길을 잘못 들어섰음을 깨달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증손자인 최창대는 ‘지천이 어려서 육왕학을 공부했지만 중년에 이르러 양명학의 문제점을 깨닫고 초년의 견해를 수정하였다'는 기록도 남긴 바 있다.[91] 최명길은 저서로 《사문록》(思問錄)을 남겼는데 주자의 유학 경전 주석에 대한 의문과 함께 자신의 견해를 수록했다. 이 중 <맹자기의>(孟子記疑)는 최명길이 묻고, 조익이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사문록》은 훗날 주자학과 반하는 언사를 입에 올렸던 박세당이나 윤휴가 사문난적으로 몰리는 상황을 본 후손들이 외부로 유출하지 않았고, 문중에서 필사본으로만 전해내려 갔다고 한다.
- 군사 방면으로도 관심을 가졌는데 역적 이괄을 토벌한 무신 정충신과도 친분이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이항복의 제자였으며[92] 정충신이 이괄을 토벌하고 관직 생활을 할 당시, 한직에 붙잡혀서 서인들의 감시를 받는 최명길과 비슷한 입장에 섰다. 정충신은 대표적인 주화파 무신이었으며 최명길과의 군사 대담을 실은 《만운집》(萬雲集)은 당시 주화파들의 입장에서 조선군의 정세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사료이다. 두 사람은 각각 '문충공'과 '충무공'으로서 문신과 무신으로서 제각기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시호를 받았다.
- 최명길은 《주역》에 매우 능해서 인조반정의 거사일을 직접 점을 쳐서 정했다고 한다. 벼슬에서 물러났을 때와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도 《주역》을 공부하는데 매우 힘썼다고 한다.[93]
- 야사에는 최명길이 젊은 시절에 험난한 산길을 가야했는데 하룻밤 묵은 곳에서 어느 여자 원혼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최명길이 그녀를 도와 한풀이를 하고 사라지게 되었지만 이때 그녀는 고마워하며 앞으로 최명길이 높은 벼슬을 할 것이고, 청나라가 쳐들어와 어려운 고생을 할 것이라는 미래를 예언했다고 한다. 해당 이야기는 1980년대 <전설의 고향>에서 다룬 바 있다.
- 많은 사안에 관해 딱딱하고 감성이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기도 했으며, 청음 김상헌이 자살 미수를 벌이는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생쑈라고 의심했다든지[94] 인조의 부친 추숭 행위를 두고 그깟 왕위 따위 아무나 받으면 된다고 선비들의 불만을 무시했다든지,[95] 이괄이 역모에 연루되자 이귀만큼 추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여 바로 현실 대책부터 논의했던 점을 보면 최명길은 현실주의자 특유의 각박한 심리도 지니고 있었다. 물론 환향녀 문제와[96] 기득권 철폐[97] 등에서 보여준 약자 보호의 마음까지 본다면 최명길은 '패도'와 '정의'의 양립을 추구했던 인물[98] 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당대에 드물었던 진정한 의미의 현실주의자였다.
- 위에서 나오듯이 옥중에서 김상헌과 화해했다고 하는데, 주고받은 필담이 유명하다. 다음은 최명길의 필담 중 일부이다.[99]
고요한 곳에서 뭇 움직임을 볼 수 있어야
진정 마음대로 돌아갈 수 있나니
끓는 물도 얼음장도 다 같은 물이요,
털옷이나 삼베옷이나 옷 아닌 것 없네.
마음이야 어찌 정도를 벗어날까?
그대 능히 이 이치를 깨닫는다면
말함도 침묵함도 각기 천기로세.
- 충북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에 최명길의 묘가 있다. 손자 최석정, 증손자 최창대의 묘도 함께 있다. 그리고 아들 최후량과 최후상, 손자 최석항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호평동과 그 옆의 평내동에 위치한다.[100]
6. 대중매체[편집]
난세에 활약했던 것에 비해 대중매체에서 다뤄지는 비중은 상당히 적은 편이다. 아무래도 최명길의 활약상과 시대상을 영상화하기에는 전쟁씬에 들어가는 막대한 제작비가 걸리고, 또 임진왜란과 같이 적을 물리친 전쟁이 아니기에 스토리의 암울함이 발목을 잡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나마 영화 <남한산성>에서 그의 활약이 제대로 다뤄졌다.
6.1. 만화[편집]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최명길에 대해 "그는 동시대의 인물들보다 시대의 병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이것을 치유하려 애썼다"고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작 내에서 인조와 인조 정권 내 실세들, 사대부 전체 집단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박시백이 가장 싫어하는 왕들 중 하나가 인조라고 한다. 그래서 인조는 뭐 해보려고 했지만 제대로 못하고 하려고만 한 것뿐이고[101] 실세들은 대북과 그 밥에 그 나물에 제대로 대응도 못했다는 식으로 사대부 집단도 은근히 책임지지 못하는 절개나 지켰다고 비판했고 환향녀 문제에서도 대차게 비판했다.[102] 그런데 유일하게 비판을 안 하고 옹호한 인물이기도 하다.
- 《고우영 일지매》에서는 후반부에 조연으로 등장하는데 청렴하고 유능한 인물로 나온다. 청나라의 침략에 대비해 화약 개발을 하라는 밀지를 받고, 마침 이를 읽은 일지매의 도움으로 비밀 화약 제조장을 만들 수 있게 된다.
6.2. 드라마[편집]
- 2013년 JTBC 드라마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에서는 배우 김하균이 연기했다.
6.3. 영화[편집]
2017년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에서는 배우 이병헌이 연기했다.
홀로 오명과 모함이라는 짐을 짊어지면서도 임금, 백성, 나라의 생존과 미래를 위해 전쟁보다는 타협을 중시하고 절체절명의 조선을 구하는 충신으로 나온다.
병자호란으로 온 나라 전체가 위기에 빠지고 백성들의 시체와 피가 인산인해를 이루어도 관심조차 주지 않고 제 몸의 안위에만 혈안이 되어있던 사대부들은 형식적인 명예만 중히 여기며 오랑캐인 청나라에 무릎꿇는 것을 반대했다. 그런 와중에 현실적으로 조선이 청나라와 전쟁을 해서 이길 힘이 없다는 현실을 인지하고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은 그들로부터 따돌림과 비난를 받고 역적 취급까지 당했지만 결론적으로 나라, 임금, 백성을 구한 진정한 충신이다.
중간에 인조에게 자신의 목을 베어서 청나라에게 바치면서 화친을 요구하면 성사된다고 상소문을 올리는데 김류는 마냥 좋다고 빨리 그렇게 하자고 주장한다. 그러자 인조가 하는 말이 가관인데 "상소문에 영상(김류)의 목도 베라는 문구도 있었다"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