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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운(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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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군인. 본관은 안악(安岳).
15대 국회의원이였던 이건개가 동생 이용문의 아들이고, 이용운의 조카가 된다.
2. 생애[편집]
평양 출생으로, 1934년 도쿄고등상선학교(東京高等商船学校)를 졸업 후, 요코스카 해군포술학교를 수료했다. 이후 연합함대 소속 전함 항해사, 소해정 항해장, 구잠정 정장, 특설운송선 산코마루(三江丸)[1] 선장 등을 맡았고, 소좌까지 진급했다.[2]
해방 후 1949년 대한민국 해군에 입대하여 중령으로 임명됐고, 1950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이후 해군사관학교 교장(1953년~1955년), 한국함대사령관(1956년~1959년)을 거쳐 정긍모에 이어 1959년에 중장으로 해군참모총장이 됐고, 1960년 부정축재 의혹으로 사임했다. 후임자는 이성호 제독이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당했다가 해외로 망명했다. 1973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 워싱턴에 망명해있던 당시에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를 창설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75년 1월 24일자 일본의 주간지 '아사히·저널'에 이용운 명의의 "박 대통령을 규탄하는 수기"(朴大統領を糾弾する手記)가 게재됐다.# 이후 1978년 6월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난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3. 기타[편집]
- 동생인 이용문(李龍文)은 대한민국 육군 소속으로 1948년에 육군의 첫 기갑연대장을 지냈다. 당시 한국의 특성상 기병부대가 필요하다여겨 대한학생마술연맹의 승마부원들을 설득해 1949년에 제2기병대대를 창설했다. 1952년에는 수도사단장(현재의 수도기계화보병사단)에 취임했고 남부지구경비사령관으로 재직하던 1953년에 37세로 순국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친분이 깊어 유족들을 박정희가 도와줬다고 한다.
이용문 장군은 일본 육사 출신으로 육본 정보국장 재임 시 남로당에 연루돼 군복을 벗은 박정희가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며 인연을 맺었다. 그 후 이용문이 작전교육국장을 할 때 박정희가 차장으로 보좌했으며 박이 존경한 유일한 선배군인이었다 한다. 그 인연 때문에 이용문 장군의 아들 이건개는 30대 젊은 나이로 서울지검장과 치안국장,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내는 등 파격적인 혜택을 받기도 했다. 그러니 박정희의 이용운에 대한 배신감은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출처